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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자녀교육은 인간교육이다 (사 3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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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아세례를 받는 귀여운 자녀들을 지켜보면서 어떤 생 각이 떠오르십니까 저의 마 음에는 비록 제가 키우는 자 녀들은 아니지만 사랑의교회 에 소속된 귀한 어린 생명들 이라 생각하니 '정말 잘 키워 야 하겠구나' 하는 다짐이 다 시 한번 일어나는 것을 숨길 수가 없습니다.
조금 지나친 말인지 모르 지만 제가 보기에는 이제 우 리의 자녀들을 안심하고 맡기 고 교육시킬만한 곳은 교회와 예수를 믿는 신앙의 가정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어디에다 우리 자녀들을 안심하고 맡기 겠습니까 3년이 멀다하고 이 랬다 저랬다 하는 교육 행정 부에다가 우리 자녀들을 안심 하고 맡기겠습니까 아니면 돈을 받아먹고 성적을 멋대로 조작하는 학교 당국에다 우리 의 자녀들을 맡기겠습니까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일 단 대학에 넣고 보자고 날뛰 는 돌아버린 세상과 부모들의 손에 이 귀한 후손들을 안심 하고 맡기겠습니까 그럴 수 없다고 믿습니다. 그래도 아 직 양심이 살아있고 무엇이 참된 자녀교육인가를 바로 알 고 있는 곳은 교회와 예수 믿 는 가정밖에 없는 것입니다.
인간을 창조하셔서 가정을 이루게 하신 후 자녀를 기업 으로 주신 하나님은 성경 말 씀을 통해 우리가 자녀를 어 떻게 키워야 할 것인지, 그 원리와 방법을 분명하게 가르 쳐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성 경 말씀을 진리로 바로 받는 부모는 그 말씀대로 자녀를 교육할 수밖에 없고,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믿 는 교회는 그 말씀대로 가르 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러므로 교회에서 배우고 가정 에서 말씀대로 자녀를 양육하 는 가정이야말로 오늘 이 시 대에 자녀를 맡을 수 있는 마 지막 보루요, 다음 세대를 책 임질 수 있는 유일한 소망이 라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그 런 의미에서 오늘 어린이 주 일을 맞으며 우리 모두가 부 모의 책임이 얼마나 막중한 것인지 다시 한번 마음속으로 깊이 다짐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다음 세대에 대한 책임의 식
우선 먼저 생각할 것은 올 바른 자녀교육은 부모가 후 세대에 다음 세대를 위해 투 철한 책임의식을 느낄 때에만 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다음 세대를 내가 책임지겠다. 주 님이 오시는 그 날까지 다음 세대를 내가 책임지겠다.' 하 는 투철한 책임의식이 있을 때 우리가 자녀교육을 바로 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히 스기야의 이야기를 살펴보는 것이 이 사실을 분명하게 깨 닫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유대나라 왕 중에서 그런 대로 선한 왕으 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열 왕기하 18장 3절을 보십시오.
히스기야가 그 조상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 보 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그는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 한 왕'이라고 평가받은 몇 안 되는 왕들 중 하나였습니다. 그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나라 안에 만연하고 있던 부정부패 와 우상숭배를 청소하는 일에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요즈 음 식으로 말하면 '신한국'이 아니라 '신유대' 나라 건설을 위해 불철주야로 애썼던 것입 니다. 그 결과 개혁작업에 있 어서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으 며, 하나님의 사랑도 끔찍하 게 받았습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히스기야 가 40대 초반 내지 중반쯤 된 때 갑자기 쓰러지고 말았습니 다. 종기가 난 것입니다(사 38:21). 이것은 단순한 종기가 아니었습니다. 치명적인 종기, 곧 요즘 식으로 표현하면 일 종의 암이었던 것 같습니다. 손으로 만지면 덩어리가 손에 잡힐 정도로 발전한 상태라서 이제는 어떠한 약을 써도 나 을 가망이 없었습니다. 그래 서 하나님은 이사야를 보내어 그로 죽음을 준비하게 하셨습 니다.
너는 네 집에 유언하 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 라(사38:1) 가정을 정리하고 유언할 모든 말을 생각하라는 마지막 통보를 한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하나님으로부 터의 날벼락과 같은 통보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자기 주변에 있는 신하 들을 다 물러가게 한 후 혼자 방에 남아 벽을 향해 등을 돌 리고는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 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 가 그래도 지금까지 하나님을 섬기는 왕으로서 이 나라를 새롭게 하고, 백성들로 우상 숭배의 악을 버리고 하나님만 섬기는 거룩한 백성으로 살게 하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써 왔 는 지 주님께서 잘 아시지 않 습니까 그런데 지금 저를 데 려가시면 저는 어떻게 합니 까
하고 매달렸습니다. 자 신이 고백한 것처럼 그는
제 비같이, 학같이 지저귀며, 비 둘기 같이 슬피 울면서
날이 새도록 하나님을 향해서 부르 짖었습니다.
하나님은 너무나 애절하게 매달리는 히스기야를 보시고 드디어 마음을 돌리셨습니다. 이사야를 다시 보내서
내가 네 눈물을 보고 네 기도를 들 었노라. 네 소원대로 건강을 주마. 그리고 네 생명을 15년 더 연장시켜 주마. 그 뿐 아 니다. 네가 두려워하는 적국 앗수르를 내가 막아서 네 생 전에 앗수르로 인해서 나라가 침공을 당하거나 망하게 되지 않도록 내가 철저히 막아주겠 다.
하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히스기 야는 다시금 건강을 회복하고 일어났습니다. 다 죽어가던 사람이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는 소문은 삽시간에 주변국들 로 퍼져갔습니다. 각국으로부 터 축하 사절이 몰려들었습니 다. 그 당시에 신흥 제국으로 서 주변국들로부터 각광을 받 고 있던 바벨론 나라의 왕도 히스기야 왕이 병에서 완쾌된 것을 축하하는 사절단을 보내 왔습니다. 히스기야는 바벨론 에서 온 사신들을 보고 요즈 음 우리 나라 지도자들이 미 국에서 누가 찾아 왔다하면 혼이 빠져 부산을 떠는 것과 마찬가지로 너무나 황송하기 도 하고 흥분하기도 해서 정 신을 잃어버렸던 것 같습니 다. 그래서 그는 사신들을 데 리고 여기저기 다니면서 구경 을 시키고 자랑을 했습니다. 유대 나라가 땅덩어리는 작지 만 그래도 경제력이 있는 나 라라는 사실을 은근히 자랑하 고 싶어서 창고 문을 활짝 열 고 얼마나 많은 보화들이 쌓 여 있는 지도 보여 주었습니 다. 유대나라의 군사력도 과 시하고 싶어서 무기고를 열어 모든 무기를 구경시키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지 극 정성으로 대접한 후 바벨 론으로 돌려보냈습니다.
그러나 그가 행한 이러한 일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슬프 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사야를 보내어 그를 책망하 시며 그에게 무서운 재앙을 선고했습니다. 본문 6절을 보 십시오.
보라. 날이 이르리니 네 집에 있는 모든 소유와 네 열조가 오늘까지 쌓아둔 것이 모두 바벨론으로 옮긴 바 되 고 남을 것이 없으리라.
네 가 지금까지 자랑하던 것, 네 열조가 오늘까지 쌓아둔 모든 보물을 이번에 온 바벨론 왕 의 사신이 보고간 그대로 바 벨론 왕이 와서 다 빼앗아 가 는 날이 올 것이라는 것입니 다. 그는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가져가 버릴 것입니다. 그 러나 재앙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또 네게서 날 자손 중에서 몇 이 사로잡혀 바벨론 왕궁의 환관이 되리라.
이 얼마나 무서운 저주입니까
사신들에게 구경시켜 준 것이 무슨 대단한 악이라고 하나님이 이토록 끔찍한 저주 를 퍼부으실까요 우리가 겉 으로 보아서는 그 이유를 알 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다시 한번 엄밀하게 보면 그 이유 를 알 수 있습니다. 히스기야 는 이제 덤으로 사는 사람입 니다. 하루살이같이 자기의 어떤 건강이나 젊음 때문에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부터 불쌍히 여김을 받아 덤 으로 사는 인생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의 회복을 축하하는 사신들이 왔을 때 그는 마땅히 하나님을 자랑했 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나 를 살리셨습니다.하고 하나 님의 이름을 높였어야 했습니 다. 그까짓 무기고나 보물 창 고를 구경시키면서 자기 과시 를 할 것이 아니라
우리 나 라를 지키시는 하나님께서 나 를 이렇게 살려 주셔서 내가 다시 하늘의 태양과 이 세상 의 모든 만물을 볼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하고 노래했 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이름은 일언반구 하 지 않고 자기 자랑만 늘어놓 았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근 본이 잘못된 사람이라 판단하 시고 그토록 엄청난 저주를 예언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께로부터 이런 끔찍한 저주를 들으면 두려움에 떨며 회개하는 심령 이 되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나 히스기야는 그렇게 반 응하지 않았습니다. 8절을 보 십시오.
히스기야가 이사야 에게 이르되 당신이 이른바 여호와의 말씀이 좋소이다.
현대 번역으로 보면 이런 말 입니다.
그대가 전하여 준 주의 말씀은 지당한 말씀이 요.
거기까지는 그래도 좋습 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누가 거역하겠습니까 좋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이 문제입니 다.
또 가르되 나의 생전에 는 평강과 견고함이 있으리로 다 하니라.
현대 번역을 보 면 보다 실감나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히스기야는 자기 가 살아있을 동안만이라도 평 화와 안전이 계속되면 다행이 라고 생각했다.
자손이야 포 로로 끌려가 환관이 되든 말 든, 나라가 나중에 망하든지 말든지 그게 자기에게 큰 문 제가 될 것이 있겠느냐는 것 입니다. 자기 생전에, 그저 앞 으로 남은 15년 동안만이라도 전쟁이나 기근이 없고 큰 어 려움을 당하지 않고 편안하게 살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히스기야의 말에서 극단적인 이기주의의 전형적 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녀를 하나님의 손에서 받아서 키우 는 왕으로서, 나라를 다스리 고 나라를 책임지는 왕으로 서, 어떻게 자기 당대만 편안 하면 된다는 무책임한 발상을 할 수 있는 지 이해가 안 됩 니다. 이런 발상이 도대체 어 디에서 나온 것입니까 자식 들에 대한 책임의식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는 망나니 같은 아버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아버지의 밑에서 어 떻게 선한 자식이 나올 수 있 겠습니까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가 이를 잘 증명해 주 고 있습니다. 므낫세가 누구 입니까 그는 아버지를 이어 서 50년 동안 왕위에 앉아 있 으면서 온 나라를 완전히 쑥 밭으로 만든 인간입니다. 그 후에 일어난 왕들이 나라를 바로잡아 보려고 몸부림을 쳤 지만 배가 이미 기울어져 물 이 펑펑 쏟아져 들어오는 것 을 막을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유대 나 라를 망하게 한 장본인이었습 니다. 무책임한 아버지 밑에 서는 그런 망나니 같은 자녀 가 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 다.
히스기야가 만일 자녀의 장래와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 을 책임질 줄 아는 사람이었 더라면 이사야를 통해 하나님 의 무서운 저주가 떨어졌을 때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이렇게 통곡을 했을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이 여, 나는 어떻게 돼도 좋사오 나 우리 후손들과 이 나라가 하나님의 복을 받지 못하게 되는 그런 일은 절대 있어서 는 안 됩니다. 제가 잘못했사 오니 저주를 거두어 주옵소 서. 이 죄를 사하여 주옵소 서.
그러나 그는 자기 몸에 난 병으로 인해서는, 살고 싶 다는 욕망에 벽을 향해 엎드 려 등잔이 들썩들썩할 정도로 통곡하고 기도했으면서도 자 기 자녀의 운명과 나라의 장 래를 놓고는 눈물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습니다. 이 얼마 나 무서운 이기주의자입니까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과연 어떤 부모입니 까 내가 범한 죄가 자손에게 미칠 영향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는 부모입니까 내가 하 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 음으로 인해 자녀에게 무서운 정신적, 영적 피해를 끼쳐 그 를 망칠 지 모른다는 두려움 에 날마다 하나님 앞에 두려 워 떨면서 기도하는 부모입니 까 아니면 '나는 나이고, 애 들은 애들이다'하는 생각으로 자녀를 키우는, 자기밖에 모 르는 무책임한 부모입니까 가정의 행복과 건강과 기쁨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 줄 모르고 마치 자기가 잘나서 그 모든 것을 다 이룬 것처럼 자랑하다가 자녀들의 정신상 태를 완전히 망쳐놓고 있지는 않습니까
자식을 낳았으면 마땅히 책임을 져야 합니다. 물론 아 무리 책임을 지려고 몸부림을 쳐도 책임질 수 없는 자녀가 태어날 수 있습니다. 자녀 양 육은 아무도 장담하지 못합니 다. 아무도 자신 있다고 감히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자녀교육이 어렵다고 해서 우 리가 책임을 면할 수는 없습 니다. 자식을 낳았으면 어쨌 든 책임을 져야합니다. 히스 기야와 같이 무책임한 부모,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자녀를 키우는 사람은 절대로 자녀교 육을 바로 하지 못합니다. 만 일 우리 가운데 히스기야의 그 독한 더러운 균으로 의식 이 오염된 사람이 있다면 이 시간 성령께서 깨끗하게 살균 해주시고 우리를 다시금 새롭 게 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책 임 있는 의식을 가지고 자녀 를 지켜보고 책임 지는 그런 부모가 되게 해 주시기를 원 합니다.
자녀교육은 인간교육이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자 녀교육은 곧 인간교육이라는 사실입니다. 자녀를 가르치는 것은 사람을 만드는 일이지 제품을 만드는 일이 아닙니 다. 자녀를 교육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바라는 인간을 만드 는 것이지, 어떤 상품을 제조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되라고 하는 교육이지, 세상 에서 성공하라고 하는 교육이 아닙니다.
성공 못해도 좋다. 하지만 사람 다와야 한다. 네 가 아무리 잘 된다 해도 인간 답지 못하면 네 인생은 실패 작일 뿐이다.하고 가르치는 것이 참 교육인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오늘날 그런 정신을 가지고 자녀를 키우는 부모들이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사람이 되라.가 아니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성공하라.고 자녀들을 몰아 붙이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 실인 것입니다. 요즈음에는 전문직에 종사하는 고급인력 일수록 자기 직업에 대해서 가지는 불만도가 더 높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기의 불만 족을 보상하는 수단으로 자녀 를 이용하는 경우가 점점 더 많아진다고 합니다. 교육 심 리학자들은 부모가 자기 만족 을 위해 자녀를 교육하는 경 향이 너무 지나치다 보면 자 녀 교육은 극단적인 이기주의 로 전락하고 말 것이라고 경 고합니다.
여러분, 오늘날 부모들이 왜 그렇게 되어 갈까요 그것 은 정신없이 변화되는 사회의 영향 때문입니다. 이 세상이 얼마나 무섭게 변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잘 잘 알지 않습 니까 그래서 은연중에 우리 는 '우리들을 위해 오래 남아 있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내일이면 또 달라진다.'는 생 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내가 아무리 전문적인 기능공 이라고 할 지라도, 또 뭔가 새로운 기술이 나오면 나는 금새 바보가 되어 또 다시 처 음부터 배워야 된다는 불안감 이 있습니다. 이삼십 년 동안 익혀서 그래도 자신 있게 생 각했던 그런 것들이 하루아침 에 휴지조각이 될 수도 있습 니다. 그러니 사람들의 불안 이 점점 더할 수밖에 없는 것 입니다. 그러다 보면 직장에 서든, 가정에서든 많은 스트 레스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스트레스는 거꾸로 마음의 불 안을 더 고조시킵니다. 이럴 수록 부모가 자녀교육을 자기 스트레스나 욕구불만을 푸는 수단으로 이용하게될 소지가 다분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심리학적으로 도 많은 연구가 진행되고 있 는 오늘날의 심각한 문제입니 다. 이와 같이 자기 욕구 불 만이나 자기의 스트레스를 푸 는, 자기의 어떤 꿈을 대신 이루어줄 수 있는 대타로 자 녀를 이용하는 경향을 일컬어 서 심리학적으로 '전 위'(displacement)라고 합니 다.
우리 나라 속담에도 '전위' 를 말해 주는 것이 있습니다. '평양감사와 강아지'라는 이야 기입니다. 뇌물이 많이 들어 올 줄 알고 잔뜩 기대를 했던 평양감사가 뇌물을 조사해 보 고는 도무지 양에 차지를 않 았습니다. 심기가 몹시 불편 해진 그는 원님을 불러놓고 어떻게 일을 했기에 이것밖에 안 들어왔냐고 마구 몰아 세 웠습니다. 그러자 원님은 '힘 을 다해서 해도 안 되는데 나 더러 어쩌란 말이냐' 하고 기 분이 좀 상했습니다. 그렇다 고 그 기분을 감사한테 풀 수 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그 래서 자기 밑에 있는 이방에 게 가서 한바탕 했습니다. 이 방은 이방 나름대로 '아닌 밤 중에 홍두깨' 같은 호통에 기 분이 상했습니다. 그렇다고 원님한테 풀 수는 없고, 그 대신 집에 돌아가서 여편네를 불러 놓고 한바탕 신경질을 부렸습니다. 여편네는 여편네 대로 생각할수록 원통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며느리를 불러다 놓고 잔소리 를 한참 퍼부었습니다. 며느 리 역시 기분이 상하긴 마찬 가지였습니다. 그렇다고 시어 머니한테 대드는 것은 생각도 못할 일이고 해서 투덜투덜 대며 부엌으로 들어갔는데, 강아지가 자기를 비웃기라도 하듯 넙죽하게 엎드러져 자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괜히 부화가 치밀어서 강아지 의 배를 냅다 걷어차면서
이 놈의 개새끼는 왜 맨날 여기 와서 자느냐며 호통을 쳤습 니다. 이것이 소위 '평양감사 와 강아지'라는 속담입니다. 감사의 욕구 불만이 전위에 전위를 거듭한 나머지 결국은 부엌에서 잠자고 있는 죄 없 는 강아지까지 손해를 본 것 입니다.
문제는 이와 같은 전위가 오늘날 우리 부모들이 자녀를 교육하는 데에도 그대로 나타 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많 은 부모들이 자기 과시에 대 한 욕구불만을 나이 어린 자 녀를 무대 위에 스타로 올려 놓음으로써, 혹은 학교에서 우등생으로 만들고, 일류 대 학에 들어가게 함으로써 풀어 보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라도 자기의 자격지심을 해소 해 보려는 보상의식이 부모들 의 마음속에 가득 차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경우 자녀는 부모가 불만스런 자아로부터 도피할 수 있는 피난처 구실 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부모는 일류대학에 들어가는 것만이 성공이요 행 복이라는 도식을 가지고 자녀 를 가르치기 때문에 자녀의 가치관을 왜곡시켜 버립니다. '훌륭한 사람은 곧 공부 잘하 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자녀 에게 주입시킵니다. 내신성적 1등급에 일류대학, 인기학과, 고속승진, 이런 것들이 인생 에 있어 가장 중요한 가치들 이며, 따라서 부모의 기대치 에 미치지 못하는 자식은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는 이미 끝난 인생이라는 생각을 품게 만드는 것입니다.
어떤 학자가 오늘날의 학 교교육을 일컬어 일렬로 서 있는 빈 병들이 힘없이 돌아 가고 있는 칠성사이다 공장의 생산라인에다 비유한 적이 있 습니다. 한번 그 공장을 상상 해 보십시오. 빈 병들이 생산 라인 위에 즐비하게 열을 이 루어 돌아가고 있습니다. 어 떤 곳에서는 병에 사이다를 가득 채우고, 그 다음 단계에 서는 마개를 막고, 또 그 다 음 단계에서는 그 다음 후속 작업을 합니다. 어느 병도 예 외가 없습니다. 똑같은 생산 라인을 따라서 똑같은 과정을 통해서 똑같은 상품이 되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간 혹 병이 흔들려서 사이다가 반쯤 채워진 병이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이러한 병들은 불량품으로 처리됩니다. 그런 불량품이 많아지면 위에서는 품질 관리를 잘하라고 불호령 을 내립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의 학교교육이 바로 이와 같은 모양으로 이루어지고 있 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은 각자 세상에 태어 날 때부터 개인차가 있게 마 련입니다. 하나님이 각자에게 주신 개성이 다 다르기 때문 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학 교 교육은 학생들을 똑같은 규격의 빈 병처럼 다룹니다. 개인차 따위는 아예 무시하고 공부 잘하는 것만 유일한 기 준으로 취급합니다. 오늘날 학교가 그런 식으로 교육을 시킨다는 말입니다. 만일 똑 같은 시간에 똑같은 내용을 가르치는데도 잘 못 따라오거 나 성적이 나쁘면 무조건 불 량품 취급을 당합니다.
이와 같은 공장식 학교교 육은 부모의 생각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성적 이 나쁘면 불량품 취급을 합 니다. 공부 못하는 자식은 부 모를 실망시키는 불효자요, 미래가 없는 인생으로 치부되 고 마는 것입니다. 자녀가 어 떤 인간이 되는가 하는 것은 뒷전으로 밀려나 버립니다. 부모들은 학교 성적과 대학 입학을 자녀의 인간 됨을 좌 우하는 절대 조건으로 받아들 이고 자녀들에게도 그러한 인 식을 강요합니다. 이렇게 될 때 자녀들은 하나의 상품은 될 수 있을지언정 인간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런 풍토 아래서 자라나 는 우리의 자녀들이 무슨 생 각을 하겠습니까 '사람이 되 는 것보다 점수를 올리는 것 이 더 중요하구나' 하고 생각 하지 않겠습니까 '부모님은 내가 사람답게 살기 보다 남 보다 앞서는 똑똑함을 과시하 기를 바라시는구나'하고 생각 하지 않겠습니까 '조금이라 도 자기 점수를 올려 주려고 선생님에게 돈 봉투를 전해주 는 우리 엄마, 참 고마운 분 이다'하고 생각하지 않겠습니 까 그리고 커닝을 해서라도 일단 점수를 올려놓고 보자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그들은 대학에 들어가는 것이 인생의 성패를 좌우하는 절대적인 조 건인 이상, 돈 가진 부모가 다른 학생을 떨어뜨리고 돈으 로 자기를 밀어 넣는 것도 나 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최근 우리 눈앞에 공개된 여러 가지 교육비리들을 기억 하실 것입니다. 이것은 어느 누구를 욕할 수 없는, 우리 모두의 수치요, 책임이라고 봅니다. 가장 비근한 예로, 어 느 의사 부부의 답안지 유출 사건이 우리에게 충격을 주었 습니다. 적어도 의사라고 하 면 그래도 모든 사람에게 추 앙을 받는 자리에 있는 사람 이 아닙니까 공부도 할만큼 했고, 사회에서 엘리트계층에 속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그 들이 자기 자식들을 대학에 넣겠다고 돈으로 성적 답안지 를 유출했습니다. 그리고 그 답안지를 자식에게 던져 주면 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자, 이것을 가지고 열심히 준비해라. 그러나 너무 잘 쳐 서 의심받지 않도록 알아서 잘 해라.
여러분, 한번 상상을 해보 십시오. 부모가 던져준 그 답 안지를 들고 열심히 외우고 있는 자식이 어떤 가치관을 가지게 될 지 한번 상상을 해 보시란 말입니다. 얼마나 비 참합니까 이렇게 교육받은 자녀 마음에 도덕이나 윤리, 양심, 인간다움이 설자리가 과연 어디 있겠습니까 아닌 게 아니라 그들의 자녀들은 나중에 사건이 터지고 난 후 학교에 가서 제발 퇴학만 시 키지 말아달라고 매달렸다고 합니다. 일말의 양심이라도 있다면 자기의 잘못을 부끄럽 게 느끼고, 누가 뭐라고 말하 기 이전에 조용히 물러났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들은 잘못을 인정하기는커녕 제발 퇴학만은 시키지 말아달 라고 매달렸습니다. 벌써 가 치관이 뒤집어진 것입니다.
지금 우리 주변에는 이런 풍토가 만연해 있습니다. 자 식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점 수로 보고, 좋은 대학으로 보 는 것입니다. 부모들이 자식 을 통해 자기 만족을 추구하 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식이 이웃집 아이보다 공부를 잘한 다는 것에 대해 은근히 희열 을 느끼려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식이 좋은 대학에 들 어가서 자신이 많은 사람 앞 에서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것을 행복이요 세상사는 기쁨 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 다. 우리의 의식구조가 우리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변질되 어 버렸습니다. 부모의 의식 구조가 이렇게 변질된 마당에 그 자녀들의 가치관이 성하게 남아있을 리 만무합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풍토는 자녀를 주신 하나님의 뜻을 정면으로 거역하는 도전 행위 입니다. 신명기 10장 12-13절 을 보십시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 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 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네가 오늘날 네 행복 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 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 이 아니냐
자녀를 사람되게 하라는 말씀이 아닙니까 인 간의 최고 가치는 창조자가 되시고 온 우주의 주가 되신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고, 순종하는데 있다는 것을 가르 치는 말씀이 아닙니까 그러 므로 우리는 이와 같은 말씀 을 받은 이상, 하나님을 경외 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 나님께 순종할 줄 아는 사람 으로 만들기 위해 자녀를 키 워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세상 돌아가는 대로 따 라 살다가 자녀를 인간이 아 니라 상품으로 만들고 있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말았습니 다. 우리는 이 일에 대해 그 대가를 톡톡하게 치르게 될 것입니다. 아니 벌써부터 우 리가 그 대가를 치르고 있다 고 저는 봅니다. 연로하신 부 모님들께는 말씀드리기 죄송 스럽습니다만 한번 자신을 돌 아보십시오. 늙어서 왜 그렇 게 고생을 많이 합니까 왜 자녀들이 그렇게 냉정하고, 부모를 꿔다 놓은 보리자루 마냥 홀대합니까 잘 생각해 보십시오. 자녀를 사람으로 바로 양육했더라면 절대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 다. 물론 아들은 잘 양육했는 데 며느리가 못돼서 그럴 수 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상황은 마찬가지입니다. 며느 리를 키운 부모가 잘못한 것 입니다. 좋은 학교에 들어가 는 것으로 그저 좋아서 춤을 추고, 성적 오르는 것이 너무 신기해서 원하는 대로 무엇이 든지 다 사 주면서 키우다 보 니 자랑스러운 상품은 되었는 지 모르지만 사람은 되지 못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대 가를 지금 늙어서 받고 있는 것입니다. 더욱이 우리가 치 러야 할 대가는 여기서 그치 지 않습니다. 다음 세대가 그 런 꼴이 되면 이 나라가 그 대가를 받게 되고, 이 세계가 그 대가를 받게 되고, 마지막 으로는 하나님이 그 피해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사회에는 이러한 교육 풍토를 향해
이 래서는 안 된다고 소리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내 자식 은 점수로 우열을 매기는 상 품으로 만들지 말라고 소리 치는 사람들이 사방에서 일어 나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 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하나 님의 거룩한 뜻을 위하여 순 종하는 사람을 만드는 것이 진정한 교육이라는 것을 분명 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거룩 한 백성들이 일어나야 합니 다. 예수 믿는 우리가 주먹을 불끈 쥐고 일어나 소리쳐야 합니다.
말씀 교육이 인간 교육이 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 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대 답은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해야 합니다. 잠언 22장 6절을 보십시오.
마땅 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 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 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나 님께서 가르쳐주신 마땅히 행 할 길은 무엇입니까 하나님 이 원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 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 외하고 순종하는 인간이 되도 록 가르치라는 말입니다. 그 럴 때 자녀가 성장하고 나중 에 늙어서도 마땅히 행할 그 길에서 떠나지 않을 것입니 다. 요즈음
평생 교육이라 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만 이 것만큼 확실한 평생교육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대로 가르치면 그 자녀가 늙어서도 부모로부터 받은 교 육을 평생 잊지 않고 하나님 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인격으 로 살아가는 귀한 자녀가 되 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을 가 지고 자녀를 가르친다는 것이 절대 쉬운 일은 아닙니다. 저 역시 세 자녀를 두고 있습니 다만 키우는 햇수가 많아질수 록 자신이 없어지는 게 바로 이 자녀교육입니다. 제가 평 소에 자녀교육에 대한 설교를 잘 하지 않는 것도 사실은 이 때문입니다. 자녀교육에 대해 자신 있다고 할 사람은 아무 도 없습니다. 신앙교육의 경 우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가끔 저는 주일 날 저녁에 가정예배 드리는 것으로 인해 서 어려움을 겪을 때가 있습 니다. 제가 좀 힘이 들어 그 렇기도 하지만 여러 가지 여 건이 잘 안 맞기 때문입니다. 한 7시쯤 되어
얘들아, 우리 가정예배 좀 드리자. 이리 오 너라.
하면 막내 놈이 투정 을 합니다.
아빠, 11시 반 3 부 예배 참석해서 예배드리고 대학부 들어가서 6시에 마치 고 이제 왔는데 또 예배예 요
맞는 말입니다. 하루종 일 교회에 가서 배우고 예배 드렸는데 또 무슨 예배냐는 것입니다. 또 큰놈은 큰놈대 로
우리는 토요일 저녁에 가 정예배를 드리는데요. 그리고 4부 예배 들어갔다가 성가대 하고 5시에 왔는데 또 예배를 드려요하고 말합니다. 그러 면 저도 할 말이 없어지는 것 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명색이 목 사 가정인데 어떻게 자식들의 핑계 앞에 질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루는 애들이
'예 배', '예배' 하지 말고 좀 자유 롭게 이야기도 하고 가족끼리 시간을 보내자고 하기에 제 가 막내 놈을 앞에 앉혀 놓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야, 나는 하나님 말씀대로 할거야.
뭐라고 했는데요
하나님 께서 내게 분명히 말씀하신 것이 있어. 신명기 6장 6절 말씀 기억나나니 한번 펴봐.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그 다음에 뭐라 고 말씀하셨니 '부지런히 가 르치며' 그 다음을 계속 읽어 봐. '집에 앉아있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하라.'고 했잖 니 그러니까 오후에 대학부 갔다와도 그게 핑계가 될 수 있는 게 아니야. 나는 하나님 말씀대로 너희들을 가르쳐야 되고 우리 가정은 예배를 드 려야 돼.
그래서 아이들을 이긴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는 것만 이 능사는 아닙니다. 자녀들 의 말에도 일리가 있기 때문 입니다. 그래서 자녀들의 형 편 생각해주고 또 여러 가지 를 고려해 주다 보면 자녀들 과 함께 말씀을 놓고 앉을 시 간이 일 주일에 몇 번은 고사 하고 한번도 없을 가능성이 목사 집안에도 있는 것입니 다. 그렇지만 우리가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하나님의 말 씀을 가르치는 일을 등한히 하면 큰 일 납니다. 우리가 자녀를 말씀으로 바로 가르치 기 위해서는 잔소리만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자신부터 모 범을 보여야 합니다. 하나님 의 말씀을 바로 배워서 사람 이 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는 것을 자녀들에게 심어주기 위해서는 부모 자신이 그것을 위해서 희생하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우리 교회 안에서 그래도 예 수 잘 믿는다고 소문도 나고 순장을 할 정도면 참 믿음이 좋은 분들이라 할 수 있을 것 입니다. 그런데 그런 분들 집 안에도 가끔 이상한 일이 일 어난다고 합니다. 자녀가 중 학교 3학년이 되거나 고등학 교 3학년이 되면 주일이 되어 도 교회를 잘 안나온다는 것 입니다. 그래서 주일학교 선 생님들이나 교역자가 한두 주 가 지나도 안나오니까 염려가 되어 전화를 해 본답니다.

집사님, 무슨 일이 있는지 모 르지만 애가 몇 주 째 안 나 왔어요. 다음 주에는 꼭 좀 보내 주세요. 아픈 것은 아니 죠하고 안부전화를 하면 그 부모가 당장 이렇게 말합니 다.
목사님, 지금 우리 애가 3학년이잖아요 금년에는 어 떻게 할 수 없어요. 공부해야 지요. 지금 성적이 너무 안 좋아요. 그러니까 주일 날 교 회 못나가도 올 한 해만 양해 해 주세요.
얼마나 답답하면 그렇게 했을까 하고 한편으로는 그 심정이 이해가 되기도 합니 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하면 자녀에게 한가지 심각한 문제 가 생깁니다. 자녀의 마음속 에 이런 생각이 자리잡게 됩 니다. '신앙생활보다 공부가 더 중요하다. 성적을 올리는 것이 주일 학교에 가는 것 보 다 더 중요하다.' 벌써 가치관 이 바뀌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치관을 가진 자녀가 자라서 나중에 어떻게 될 지 상상을 해 보십시오. 그러므로 부모 가 희생을 치르는 것을 보여 줘야 됩니다.
얘야, 오늘은 주일이야. 교회 가야 한다. 만 약 네가 교회 가서 예배드리 느라 성적이 떨어진다면 오히 려 내가 감사함으로 받을게. 너 성적 떨어져도 좋아. 너 어떻게 하다가 대학에 실패해 도 좋아. 주일날 교회에 가서 하나님을 섬겨라. 세상에서 그것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단 다.
사실 주일날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고 분반 모임을 하고 하다 보면 마음이 들떠 서 집에 돌아가서도 한참 동 안 공부가 안됩니다. 그러다 보면 주일은 공부를 못하고 그냥 보내기가 쉽습니다. 그 래서 나중에는 공부를 안 한 만큼 성적이 떨어질 수도 있 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 때 부모가 화를 내기는커녕 도리 어 이렇게 말한다고 해 보십 시오.
너 주일날 신앙생활 하느라고 영향을 좀 받았구 나. 그러나 나는 참 감사한다. 네가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 람이 되기 위해서 성적이 떨 어지는 것도 감수했으니 말이 다. 나는 네가 참 대견스럽 다.
자녀에게 그 부모가 어 떻게 비치겠습니까 '아. 정말 우리 부모님은 사람되는 것, 하나님 섬기는 것을 가장 중 요하게 여기시는구나.' 하는 인식이 깊이 새겨지는 것입니 다.
희생하는 것이 있어야 자 녀가 배우게 됩니다.
얘야, 예수는 평생 믿는 것 아니냐 하지만 공부는 일년 하는 거 야. 일년 해서 네 운명이 좌 우되는 거야. 이놈아.하고 악 을 쓰고 달려들면 자녀의 성 적이 조금 올라갈 수 있을 지 모릅니다. 그리고 아마 그렇 게 경쟁률이 치열하다는 특수 고등학교도 붙고, 좋은 대학 에 들어갈 수 있을 지도 모릅 니다. 그러나 자녀의 마음에 는 평생을 두고 지워지지 않 는 치명적인 상처가 남습니 다. '예수는 평생 믿을 거고 공부는 일년 하는 거야.' 그래 서 그 다음에 직장에 들어가 서도 '내가 과장되기 위해서 이렇게 애쓰는 것도 한 일 년 하면 되는 거지. 예수는 평생 믿을 거 아니냐'하고 정당화 하며 살아가기 쉽습니다. 어 릴 때부터 그런 식으로 세상 을 보기 시작한 자녀가 하나 님이 기뻐하는 인간으로서의 삶을 성공적으로 사는 것을 기대하기란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 참 아름다운 집사님 한 분이 있습니다. 그 는 대학에 못 다니신 분이고, 그의 아내 역시 공부를 제대 로 못했습니다. 그러니 어떤 면에서는 자식 공부시키는 것 이 그 집사님의 한이요, 평생 꿈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그의 아들 들은 공부에는 별로 취미가 없습니다. 기계를 가지고 뜯 었다가 다시 맞추고 하는 것 만 좋아합니다. 그것이 하나 님이 자녀들에게 주신 달란트 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집 사님 부부는 자식이 그런 것 을 흥미 있어 하는 것을 보고 대학에 보낼 생각을 일찌감치 포기했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자녀를 공업고등학교로 진학 시켰습니다.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와서 자기 좋아하 는 일을 하며 얼마나 신나게 사는 지 모릅니다. 그 자식들 이 얼마나 부모의 말을 잘 듣 고 아름답게 자라는지, 또 그 부모도 얼마나 떳떳하게 자식 들을 대하는지를 제가 볼 때 참 놀라운 사람이다 하는 생 각이 듭니다. 희생이란 거창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를 따라서 자식을 키우는 것이 바로 희생입니 다. 자녀가 내 욕심대로 되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희생인 것입니다.
저는 최근에 스위스에 사 는 어떤 분으로부터 이런 이 야기를 들었습니다. 스위스 에서는 초등학교 5학년만 되 면 대학 갈 아이와 평생 직업 을 가질 아이가 딱 갈라진다 고 합니다. 아예 학교에서 이 렇게 분리시킨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고등학교 시절의 마 지막 1년 동안만 서로 다른 교육을 시킨다는 것입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아이의 진 로를 결정하는 최고 결정자는 초등학교 담임 선생님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결정에 대 해서는 부모도 거역을 못한다 고 합니다. 저와 이야기를 나 누었던 분은 고급 직업을 가 진 이웃이 있는데, 그의 자녀 는 공부를 썩 잘하는 편이 아 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5학 년 때 담임 선생님은 이렇게 최종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 아이는 대학 가는 것을 포기 하셔야겠습니다. 직업전선으 로 가야 되겠습니다.
이에 대해 그 부모도 순순히 받아 들였습니다. 그리고 나서도 항상 얼굴이 평안이 넘치고, 자녀들을 변함없이 사랑하고 감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와 이야기를 나 누었던 분이 그 부모 되는 사 람에게 이렇게 물어보았다고 합니다.
자녀가 그렇게 마음 에 실망을 주어도 상처가 안 됩니까
그랬더니 그 부모는 오히려 그런 질문 자체가 이 상하다는 듯 이렇게 대답했다 고 합니다.
천만 에요. 자식 역시 하나님께 받은 대로 살 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내가 그걸 어떻게 어깁니까 내가 공부 많이 했다해서 꼭 공부 많이 시켜야 될 자식을 하나 님이 주신다고 보장하지 못하 지 않습니까
우리 나라 부 모들과는 얼마나 다른지 모르 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으이그 이 놈 아, 내가 너 만할 때 얼마나 머리가 좋았는지 아니 우등 상은 한번도 놓친 적이 없었 어. 그런데 어디서 너 같은 놈이 태어나 가지고 이렇게 마음에 상처를 주냐
하고 소리를 냅다 지르면 자녀가 설 곳이 없어져 버립니다. 그 로서는 태어난 것 자체가 한 이 되는 것입니다. '누가 날 낳으라고 그랬나'하고 반발 심만 생기는 것입니다. 따라 서 우리는 자녀를 그런 식으 로 키우면 안 됩니다. 설사 자녀가 공부를 잘 못한다 할 지라도
야, 너 공부 못한다 고 해서 기죽을 필요 없어. 다른 뜻이 있어 그런 거야. 하나님은 너에게 다른 좋은 점들을 많이 주셨지 않니 네 가 잘할 수 있는 방향으로 내 가 밀어줄께. 대학 못 가도 괜찮아. 걱정하지마.
하고 말 한다면 벌써 부모가 자녀 앞 에 희생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야, 우리 부모님은 사람이 되는 것을 정말 중요 시하시는구나.' 하고 부모님 을 신뢰하고 존경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자녀가 바 로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 로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쳐 주는 방법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 분, 얼마 전에 나온 <우리> 지에서 읽으셨을 줄 압니다 만, 어떤 집사님이 아이를 학 교에 보내 놓고 공부가 신통 하지 않았는지 몹시 고민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선생님 을 찾아가야 되나 찾아가지 말아야 하나' 고민 고민하다 가 결국은 찾아가지 않기로 결심을 했다고 합니다. 그리 고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세상의 방법으로 키우면 세상 아이가 될 것이요, 하나님의 방법으로 키우면 하나님의 아 들이 될 것이다!
세상의 방 법은 무엇입니까 훌륭한 제 품을 만드는 것입니다. 천지 의 주재되시는 하나님의 방법 은 무엇입니까 사람을 만드 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이 선택하셔야 할 차례입니다. 여러분은 자녀를 어떤 방법에 따라서 키우기를 원하십니까 사람의 방법입니까 하나님의 방법입니까 성령께서 여러분 각자에게 대답을 들려주시기 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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