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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절망의 원인 (왕상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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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의 병 중 가장 크고 근원적인 병이라면 마음의 병입니다. 그리 고 마음의 병을 주도하고 있는 것은 바로 절망입니다. 키엘케골이 '절 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규정한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그 만큼 절망은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보브 나르기는 ' 절망은 불행을 더욱 악화시킬 뿐더러 허약을 조장한다고 말했으며 대 지의 저자인 펄벅은 '희망이 없이 빵을 먹는 것은 천천히 굶어 죽는 것'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이상에서의 여러 사람들의 말은 절망은 인 간에게 좌절을 가져오며, 좌절은 인간을 죽음의 자리로 부르는 것입니 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엘리야의 절망을 통해 사람이 절망에 빠지게 되 면 삶에 어떠한 결과가 나타나는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행하고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 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나이다. 하고고(4절) 저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히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 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10절).

이상의 본문 말씀은 우리에게 세가지 중요한 문제점을 제시하여 줍니 다.

첫째로, 위대한 사람도 절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열왕기상 17-19 장을 보면 각기 다른 엘리야의 모습이 나옵니다. 17장에서는 아합의 칼날을 피하며 고난을 극복해 나가는 승리하는 모습을, 18장에서는 갈 멜산 상에서 팔백오십 명의 바알, 아세라 선지자와 대결하여 승리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19장에서는 이러한 엘리야가 절망의 늪에 빠진 모습 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본문 말씀은 위대한 사람도 절망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둘째로, 절망은 계속적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한 번만 절 망한 것이 아닙니다. 아합과 이세벧에게 쫓기던 엘리야는 브엘세바 광 야의 로뎀나무 아래애서 쓰러져 절망했습니다. 천사가 먹여주는 떡과 물을 먹고 하나님의 호렙산에 이르렀지만 호렙산의 동굴 속에서 또다 시 절망했습니다. 이렇게 절망은 한번만이 아니라 여러분 지속적으로 맛볼 수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절망은 인간에게 삶의 문제를 제기해 줍니다. 스스로 광야 로 들어가 하룻길쯤 행하고 한 로뎀 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4절), 엘리야는 그곳 굴에 들어가 거기 유하더니(9절) 로뎀 나무 아래애서 절망하던 엘리야는 죽기를 원했고, 호렙산 동굴에서 절 망하던 엘리야는 비겁하게 숨어서 살겠다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엘리 야의 절망이 그로 하여금 죽음을 생각하게 하고. 비겁하게 세상을 사 는 비겁한 삶을 살게 한 것입니다.

그러면 왜 절망이 우리를 찾아오는 것일까요 절망의 동기에 대해 생 각해 봅시다.

첫째로, 절망은 무엇을 보느냐의 산물입니다.

저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그 생명을 위하여 도망하여(3절) 엘리 야가 당면했던 상황은 이세벧에게 쫓기던 형편이었습니다. 그의 생명 이 위험한 형편이었던 것입니다.

본문 1절과 2절을 보면 아합왕은 엘리야의 제단에 불이 내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팔백오십 명의 이방 선지자를 칼로 죽이는 엘리야 의 모습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자기의 아내 이세벧에게 고하였 습니다. 이세벧은 사람을 엘리야에게 보내 말합니다. '내가 내일 당신 을 죽이지 않으면 신들이 나에게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수백의 군 사를 풀어 엘리야를 잡아 죽이려고 전국 방방곡곡에 명령을 합니다.

엘리야는 이런 곤고한 가운데 브엘세바까지 도망하였던 것입니다. 엘 리야는 브엘세바 광야로 도망을 쳤고 방황을 하다가 로뎀나무 아래에 서 절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절망은 형편을 살펴보고 찾아오 는 정신적인 질병입니다. 엘리야가 자기의 불리한 형편을 볼때 절망 하게 되는 것입니다.

에밀 카미엘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축복하시고자 할 때 언제나 사탄의 강력한 종인 절망의 악마가 먼저 찾아와 온갖 종류의 비참하고 절망적인 생각을 불어 넣어주려고 애쓴다. 절망은 언제나 아래로부터 오는 것을 명시마라 이에 반하여 격려는 언제나 위로부터 온다는 말 을 했습니다. 위는 하늘나라를 말하고 아래는 세상을 말한다면 절망은 세상 형편을 살펴 볼 때에 온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절망하 는 이유는 모두 현실적인 생활여건을 바라보는데서 생기는 것입니다.

둘째로, 절망은 무엇을 느끼는가의 산물입니다.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행하고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 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나이다 하고(4절) 위의 말씀은 엘리야가 자신의 무능력과 무기력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음을 말씀합니다. 그는 자기의 열조인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이 가졌던 영적인 힘과 능력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기는 도저히 아합과 이세벧을 대 항해서 싸울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니다.

삼년 반 동안 비가 오지 않던 대지 위에 단비를 내린 것도 하나님의 능력이요, 엘리야의 제단에 불을 내린 것도 하나님의 능력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엘리야는 하나님의 능력만 의지하면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엘리야는 하나님의 능력보다 자신의 연약성을 더 의식하다가 절망의 늪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신약을 보면 엘리야의 기사에 대해 많은 기록에 있는데 특히 야고보 서 5장 17절과 18절을 보면 엘리야의 기사를 이렇게 강조하고 있습니 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오지 않기를 간 절히 기도한 즉 삼년 육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오고,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이 말씀은 하늘에서 불을 내린 것도, 하나님의 능력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엘리 야는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을 생각했어야만 했습 니다. 그런데 그는 과거에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축복과 사랑은 잊어 버린채 자기의 연약함만을 생각했으니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 니다.

전도서 7장 14절에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는 말슴은 무슨 뜻입니까 바로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생각하라는 말 씀입니다. 성도가 과거에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잊을 때, 약해지기 마 련입니다. 그리고 절망하게 마련입니다. 받은 은혜를 잊어 버리게 될 때 현재의 자신의 연약함을 느끼고 절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누에가 뽕잎을 먹고 살고, 식물이 이슬을 먹고 살듯이 우리 그리스도 인은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10절에서 '나의 나된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진실한 믿음을 가진 성도라면 자기의 연약함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독수리를 보십시오. 독수리는 새끼를 훈련시킬 때 날지 못하는 새끼 를 하늘 높이 올라가서 떨어뜨립니다. 그리고 땅에 떨어지려 하면 몸 도 강하고 날래도 강한 어미가 새끼를 채가지고 올라갑니다. 그리고는 다시 떨어뜨리고 다시 채올라가로, 어미 독수리가 강하기만 하면 새끼 독수리는 떨어져 죽지 않습니다. 여러분, 약한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 시오. 강하신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지켜주십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그 것을 잊어버렸습니다. 지난날 하나님의 은혜로 하늘에서 불이 내리고 비가 쏟아진 그 은혜, 사르밧 과부의 집에서 자기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준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로뎀나무 아래에 쓰러져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는 낙심하고 절망했던 것입니다.

셋째로, 절망은 무엇에 얽매어 사는가의 산물이니다.

10절과 14절의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 는 말씀을 보면 엘리야는 고독과 공포의 감정에 얽매어 있 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이 외롭다는 감정에 얽매이면 쉽게 절 망하게 됩니다. 10절과 14절의 오직 나만 남았거늘 이라는 말은 외 로움을 뜻하는 말입니다. 이말은 엘리야가 고독의 감정에 휩싸여 있었 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또 공포의 감정에 얽매일 때 사람들은 절망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회학자들은 현대 인간들을 원자화된 모래알 같은 존재라고 말합니 다. 큰 바위가 부딪치고 물에 쓸리지 않으면 모래알이 되지 않습니다.

이와같이 고독과 공포라는 것은 인간이 부딪쳐서 자신이 조그맣고 외 롭다고 느껴지는 것입니다. 고독과 공포는 거대한 산처럼 커 보입니 다. 그리고 그 앞에 서 있는 자신은 모래알같이 작은 존재로 생각될때 사람들은 절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이 절망을 극복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쾌락과 물질, 명예를 추구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인간이 맛보는 절망을 물리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절망에 빠지게 되면 죽음을 생각 하게 되고, 비굴해지기 마련입니다. 바로 그때 우리는 하나님을 찾아 야 하는것입니다. 절망하는 엘리야의 모습을 보신 하나님은 엘리야를 죽음에서 건져내시고, 그에게 소망과 새 새명을 주셨습니다.천사가 (5절),여호와의 사자가(7절),여호와의 말씀이(9절) 이 말씀들은 모두 같은 말로 구약시대에 역사하신 하나님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하나님께서 엘리야가 절망의 자리에 있을 때면 어디서 나 구원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엘리야가 절망과 좌절에 빠져 로뎀나 무 아래에 있을 때에도, 호렙산 동굴에서 절망할 때에도 나타나 셨습니다.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7절) 그리고 한 번만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역사하셨습니다. 우리가 낙심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가오 십니다. 우리가 문제에 직면하면 다시 찾아 오십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장 절망할 때에 하나님은 바로 내 앞에 계시다는 사실을 알고 따라 야만 합니다.

엘리야가 거기서 떠나(19절) 여기에의 엘리야는 어떠한 모습입니 까 우리는 여기서 절망의 자리에서 일어나 새출발하는 엘리야를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절망의 자리가 인생의 끝이 아님을, 하 나닝믈 만나면 다시 시작할 수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책에는 인생의 끝이 하나님의 시작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나는 절 망하고 좌절하여 인생의 끝으로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거기에서부터 다 시 시작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왜 절망의 순간에서 하나님을 찾아야만 합니까 하나님께 인 생의 모든 절망을 해결하는 해답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게서 소망이 있게 하십니다. 절망하지 마십시오. 주님만 의지하면 여러분의 삶에 변화의 역사가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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