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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최후 심판의 드라마 (계 2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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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왕국에 대한 견해는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들의 관점에 따라서 조금씩 다를 것입니다. 그러나 천 년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든 상징적으로 이해하든 간에 천년왕국이라는 주제에 접근하는 모든 학자들이 일치를 보이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천년왕국을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죽으면 천당에 갈 줄 믿습니다라고 고백할 때의 그 천국과 동일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천년왕국은 천국의 가장 가까운 형태이기는 하지만 천년왕국 자체가 영원한 기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일정한 기간입니다. 천년왕국은 천국의 서곡에 해당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사단을 다시 풀어 주시는 이유
요한계시록 20장을연구하는 사람들을 가장 당황케 하는 구절은 7절 말씀입니다.천 년이 차매 사단이 그 옥에서 놓여.
성경의 순서를 따르자면 사단으로 말미암은 마지막 혼란이 있고 그 다음에 최후의 심판이 있고 마지막으로 영원한 나라가 전개됩니다. 그런데 왜 천 년 후에 하나님은 사단을다시 풀어 주시는 것일까요? 여기에는 두 가지 대답이 가능합니다.
이 두 가지다 하나님이 무엇인가 중요한 것을 계시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첫째로, 죄라는 것이 얼마나 무섭고 뿌리 깊은 것인지 그 죄악의 철저한 절망성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 일것입니다.죄악의 철저한 절망성에 대해 다시 두 가지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습니다.
우선 사단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천 년의 결박 끝에 풀려 나온 사단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나와서 땅의 사방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 모아 싸움을 붙이리니 그 수가 바다 모래 같으리라(8절).
여기에서 중요한 단어는 미혹하다입니다. 그러니까 사단은 천년 동안 혼나고도 아직도 달라진 게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그리고 열국을 미혹케 하는 일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사단이 가지고 있는 그 죄악이 얼마나 절망적인지 볼 수 있습니다. 달라지지 않은 사단의 사단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사람 편에서 좀 생각해 봅시다. 사단이 열방들과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혹을 당한 것은 역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미혹을 당했다는 점에서 인간은 그 책임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요즈음 예수 이름으로 귀신(악령)들을 꾸짖고 추방하는 운동들이 일고 있습니다. 그 자체로는 아무런 비난의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성경적이고 또한 타당한 것입니다. 그러나 조심해야 할 것이 있는데, 이러한 현상들을 자주 대하다 보면 사람에게는 책임이 없는 것처럼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육체적인 질병도 사단이 가져다 준 것이고 정신 이상도 사단이 가져다 준 것이니까 사단만 쫓아내면, 귀신들만 쫓아내면 문제는 저절로 해결된다는 것입니다
. 마치 마약 중독자들이 나는 어쩔 수가 없었다고 하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사단이 우리를 포로로 삼으려고 할 때, 악령이 우리에게 영향을 끼치려고 할 때 거기에 호응을 한 것은 사실 우리 자신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 1차적 책임에서 결코 면제되지 않습니다.
먼저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서 삶을 고치는 결단 없이 귀신을 쫓아내는 것으로만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면 나중에 가서 인격이 파괴되고 맙니다. 귀신 쫓아내는 운동에 깊이 관련된 사람들을 보면 나중에는 도덕성을 잃습니다. 자기 잘못에 대해 책임을 지고 회개하려는 가장 중요한 성경적 결단이 없어집니다. 물론 만국을 미혹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미혹하는 것은 사단의 역사입니다. 그러
나 미혹을 당하는 것은 여전히 우리의 책임입니다. 회개가 먼저 강조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후에 주님의 이름으로 악령들을 책망하고 꾸짖어야 합니다. 이 순서가 뒤바뀌어서는 안 됩니다.
본문에서 마지막 때에 다시 미혹을 받고 있는 인간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천 년간의 놀라운 주님의 통치를 경험하고 나서도 여전히 부화뇌동하여 마귀를 따라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에서 인간의 그 철저한 부패성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을 저는 죄악의 절망성이라고 부릅니다. 죄라는 것이 이토록 철저하게 절망적이라는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바로 마지막에 사단이 잠깐 놓인 기간을 통해서 하나님은 인간 안에 뿌리 박힌 죄라는 것이 얼마나 철저하게 무서운것인지, 죄악의 그 절망성, 죄악의 심연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둘째로, 심판의 당위성을 계시하시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죄악의 절망성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은 불가피합니다. 심판의 당위성은 바로 죄악의 절망성 때문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이 마지막 심판은 징계가 아닙니다. 징계라는 것은 고쳐질 가능성을 믿고서 행하는 것이며 언제나 일시적인 것입니다. 징계는 회복을 겨냥합니다.
그러나 이 마지막 사건은 문자 그대로 심판(judgement)입니다. 회개가 불가능한 사단에게 얽매여 사단을 추종하며 회개를 끝까지 거부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 그것이 본문의 사건입니다.
최후 심판의 광경
심판자
아마도 심판자는 요한계시록의 주인공이고 심판을 진행하시는 성자 하나님, 곧 예수 그리스도이실 것입니다.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11절).
주께서 흰 보좌에 앉아 심판하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왜 그분이 앉으신 심판의 보좌를 흰 보좌라고 했을까요? 흰색을 보면 깨끗함과 순결을 연상하게 됩니다. 바야흐로 인간의 철저한 죄성을 마지막으로 심판하는 장면에 등장한 주님의 보좌가 흰 보좌라는 사실은 아마 이 검은 죄악을 심판하실 주님의 거룩함에 대한 상징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흰 보좌 위에 앉으신 그리스
도야말로 인류를 심판하기에 홀로 자격 있는 분이십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는 인류 속에서 그들과 완전히 구별되는 오직한 분, 참으로 거룩하시고 공의로우신 그분만이 홀로 심판의 주님이십니다.
심판의 대상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12절).
죽은 자들이 부활하여 마지막으로 심판의 보좌 앞에 서 있는 모습입니다. 죽은 자들은 모두 심판의 대상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큰 사람, 작은 사람을 나누며 사람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일생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크다고 생각하는사람도, 가장 작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심판의 보좌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역사속에 살았던 모든 사람들이 예외없이 이 심판의 보좌 앞에 반드시 서야 합니다.
한 번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바로 그 순간이 찾아온 것입니다.
심판의 원리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다른 책이 펴졌으니 또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12절).
심판의 기준은 언제나 행위입니다. 행위대로라면 구원받을 자가 아무도 없지만 심판은 행위대로입니다. 13절에서 한 번 더 강조됩니다.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 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 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각 사람은 행한 낱낱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심판의 결과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14절).
자기 행위대로 심판을 받은 모든 사람들은 불못에 던지움을 받을 것입니다. 이것이 심판의 마지막 결과입니다. 그런데 이 불못에 먼저 던지움을 받은 자가 있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먼저 마귀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지움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 심판받은 거짓 선지자와 짐승도 던지움을 받으며 그 다음에는
행위를 따라 심판받은 모든 자들이 던지움을 받습니다. 그들은 사단의 지배 아래서 사단을 추종했던 자들입니다.
지옥은 원래 마귀를 위해 예비된 곳입니다.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마 25:41).
지옥은 본래 사람을 위하여 예비된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도 지옥에 보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시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마귀를 따르기로 선택했기 때문에 지옥에 가는 것입니다.
10년 전쯤에 매우 인상적인 전도지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전도지 겉장에는 당신은 지옥에가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말만 씌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뒷장을 넘기니까 아무 할 일이 없다라는 재미있는 대답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깊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누구나 저절로 지옥에 가게 되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무엇인가 중대한 결단 없이는, 방향의 전환 없이는 누구나 다 파멸의 운명에 처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죄인이고 죄값을 치를 수가 없고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가 없어서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 곧 우리가 흔히 말하는 지옥에 던져지게 됩니다.
그런데 14절을 보십시오.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물론 이것은 하나의 시적인 표현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말씀에서 알 수 있는 사실은 사망과 음부도 마지막 결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죽음이 끝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우리가 보통 말하는 죽음은 정말 두려워해야 할 대상이 아닙니다. 그 죽음 다음에 오는 죽음을 우리는 훨씬 더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것을 성경은 둘째 사망이라고 부릅니다.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더라.
이 둘째 사망에 대한 표현이 요한계시록 21장 8절에도 나옵니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
우리가 흔히 말하는 지옥의 형벌이 바로 둘째 사망입니다.
우리의 행위를 따라 심판을 받아 그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형벌의 장소인 불못이 죽음 건너편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망이 마지막이 아닙니다. 사망 다음에는 불못이 있습니다. 음부도 마지막이 아닙니다. 물론 이 음부라는 단어에 대해 성경학자들이 여러 의견들을 제시하고 있지만, 우리가 성경에서 음부라는 단어를 연구할 때 꼭 도달하게 되는 결론이 있습니다. 그것은 음부란
마지막 상태가 아니라 기다리고 있는 상태의 장소라는 것입니다. 음부는 질적인 면에서 지옥과 같은 장소이지만 여전히 기다림의 장소입니다. 그곳에서 기다리다가 마지막으로 불못에 던지움을 받습니다. 심판의 결국은 불못입니다. 사실 전인류 가운데 이 불못을 피할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절망적인 이야기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죄를 범했기 때문입니다. 죄값은 사망이고, 사망 다음에는 죄값을 따라 우리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아야 하는 불못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면 희망은 없을까요
아닙니다.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본문은 아주 좁은 문의 희망을 우리에게 남겨두고 있습니다.
마지막 희망
최후의 심판 가운데 우리가 붙잡을 수 있는 구원의 마지막 희망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15
절).
이 구절 자체는 절망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한 종류의 사람들은 심판에서 예외적일 것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곧,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입니다. 최후의 심판의 정경 앞에서 인류에게 주어지는 가장 엄숙한 질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는가?라는 사실입니다. 본문을 자세히 보면 사실 두 종류의 책이 구별되고 있습니다,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12절).
여기에는 두 종류의 책들이 나옵니다.
책들이 펴 있고.
이것은 복수입니다.
또다른 책.
이것은 단수입니다. 이 다른 책이 바로 생명책입니다. 그러면 반대로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에 나오는 책들에 이름을 붙인다면 죽음의 책들, 심판의 책들일 것입니다. 그것이 복수로 된 데에서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얻기를 간절히 원하시지만 사람들이 강퍅하여 좁은 문보다는 넓은 길을 훨씬 더 많이 찾음으로써 멸망하는 자들
이 구원받는 자보다 더 많을 것이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이 두 가지 종류의 책, 곧 생명책과 죽음의 책에 대한 증언이 창세기부터 계속 나옵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 5장에는 아담의 족보가 나옵니다. 아담 자손의 계보가 이러하니라…아담이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라는 족보를 죽 읽다 보면 그들이 참으로 오래 살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그들이 얼마나 오래 살았든지 간에 아주 간단
한 단어로 그들 생애의 마지막이 정리됩니다.죽었더라.
그러니까 아무리 오래 살아도 별거 아닌 것 같습니다. 40년을 살든 70년을 살든 말입니다. 생각해 보면 사람이 몇 년을 살든 뭘 했든 마지막에 가서는 죽었더라는 이 한 줄로 정리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의 족보책과 대단히 대조적인 또 하나의 족보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입니다. 이 족보의 특성은 낳고라는 단어가 강조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 형제를 낳고.
창세기 5장과 아주 대조적입니다. 이 사람들도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죽음을 극복했던 것입니다. 창세기 5장을 사망의 족보라고 한다면 마태복음 1장은 생명의 족보라 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5장의 그 죽음은 아담으로 말미암아 시작 되었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에 나타난 그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성경은 이 두 사람을 날카롭게 대조시켜서 사망과 생명의 증언을 우리에게 하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마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여기에서 한 사람이란 아담입니다. 그러나 로마서 5장은 이 아담과 대조적인 또 한 사람을 등장시킵니다.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17절).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고 사망이 인류를 지배하게 되어 그 지배를 벗어날 자가 없지만 또다른 한 분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사망의 지배에서 벗어나 생명의 지배를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한 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라고 약속하신 그분. 내가
온 것은 내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라고 약속하신 바로 그분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 15:21,22).
아담은 우리에게 사망을 가져왔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가져왔습니다. 그분은 죽음 저 건너편에 부활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살 때 영적인 생명을 보유하고 살 수 있도록 보증해 주신, 부활이요 생명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생명 안에서 영원한 삶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망의 책, 생명의 책 모두에 끊임없이 이름이 씌어지고 있습니다. 아담의 후손들은 죽음에 매인 자로 태어나 죄 짓고 살다가 죽음으로 돌아가고 심판을 향해서 걸어갑니다. 끊임없이 그들의 이름이 사망의 책에 기록됩니다. 그런가 하면 생명의 책에도 끊임없이 이름이 더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요한계시록 13장 8절을 보십시오.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당신의 이름은 사망의 책에 있든가 생명의 책에 있든가 둘 중에 하나입니다.
우리는 본래 사망의 책에 이름이 기록된, 사망에 매인 자로 태어나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죽음과 심판을 피할 수 없었던, 사망의 족보에 기록된 내 이름에 갑자기 빨간 줄이 그어지고 다른 책인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책에 내 이름이 새롭게 녹명되는 그 기적을 한번 상상해 보기 바랍니다. 그 기적은 어떻게 가능합니까? 바로 복음에 의해서 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순간, 그분을 나의 구세주와 주님으로 신뢰하는 그 순간, 우리는 죄 사함을 받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집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신앙 생활을 오래 하면 영생의 감격에 둔해집니다. 습관적인 신앙 생활을 하던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재확인시켜 주셨던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0장을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을 전도하러 내보내셨습니다. 전도하다가 부딪히는 모든 일들 가운데서 승리를 거둘 수 있도록 능력을 주어서 말입니다. 병자 만나서 기도하면 병자가 고침을 받고, 귀신들린 자들을 향해서 주님의 이름으로
꾸짖으면 그들이 자유를 얻었습니다. 사실 그런 일들을 보고 사람들은 참 신기해 합니다. 제자들도 그랬던 모양입니다. 그때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20절).
우리들 자신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보다 더 위대한 기적, 그보다 더 위대한 영광은 없습니다. 우리의 이름이 하나님의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보다 더 놀라운 사실은 없습니다. 또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이 하늘 나라에 기록되어 있음을 알 때 그것은 얼마나 놀라운 사실이
겠습니까? 여러 이적들이 복음 전파에 따르겠지만 그것을 너무 강조하다 보면 복음의 균형을 상실하고 가장 중요한 것을 놓쳐 버리게 됩니다. 자신의 이름이 하늘 나라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음을 확신합니까? 주께서도 이것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강조하셨습니다.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 한 자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부녀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빌4:3).
바울은 자신의 이름은 물론 자기 동역자들의 이름이 생명책에 이미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들은 영원한 하늘 나라의 기업을 함께 나눌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이름 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자녀들의 이름과 남편의 이름과 친구들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다고 확신할 수 있습니까? 없다면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들의 삶에 일어
나야 할 가장 중요한 사건은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는 일입니다. 다가오는 마지막 심판을 바라보며 사랑하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우리 모두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음을 아는 행복을 선사하십시오. 최후 심판의 무대를 바라보면서 거기서 일어날 사건, 곧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다 불못에 던져진다는 사실을 깨달으십시오. 그렇다
면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으리라고 외치던 바울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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