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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쾌락주의자들에게 주는 충고 (욜 0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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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회생활의 피곤함과, 사업의 현장에서 주어지는 긴장되고 복잡한 일 속에서도 견딜 수 있는 것은 나름대로의 보람과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는 이를 성취감 때문이라고도 하고, 어떤 이는 사명감이라고도 합니다.

모두가 나름대로 삶의 보람과 기쁨을 얻으려고 노력합니다만, 무엇보다 삶의 큰 기쁨의 샘은 가정인 줄로 믿습니다. 가정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행복의 샘이기 때문입니다. 직장이나 사회생활에서 주어지는 피곤하고 어려운 스트레스를 가정은 풀어줄 수 있기에 마치 모든 오폐수를 정화시켜주는 정화조 같은 곳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밤12시에라도 집에 들어가야 할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주신 최초의 사회인 가정은,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이 땅에서 유일하게 위로 받을 수 있는 안식처요 세상적 유혹과 도전속에서 견딜 수 있는 반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가정의 행복의 근원이기에 은혜의 샘물은 교회에서 퍼올리고 그 행복의 나눔은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 3학년 때는 회장을 했고,

1. 2학년 때는 임원을 지냈습니다. 그 당시 저는 얼마나 학생회가 모이는 토요일이 기다려지고 또 주일이 기다려지는 지 몰랐습니다. 제일 서운할 때가 언제였느냐 하면 바로 주일 저녁이었습니다. 서울 북아현동에 있는 인우학사라는 기숙사에서 3년 정도 생활하였는데 토요일 오후에 내려왔다가 주일 아침에 올라가기에 친구들이 기다려지고 그들을 만나는 주일을 더욱 사모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성도 여러분, 주일에 성도들을 만나는 기쁨으로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성가대원이나 교사들은 더욱 그리할줄로 믿습니다. 목사로서는 주일에 성도는 만나는 설래임으로, 성도로서는 주일에 목사를 만나는 기쁨으로 가득한 삶이라면 이러한 신앙생활이 바로 천국이겠지요.

교회 나오시라고 이웃들에게 전도를 하다보면 이렇게 얘기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재미가 없어서요..... 사실 그 분이 말하는 재미는 오락적인 요소를 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의미가 아닌 영적 예배와 성도의 교제라는 아름다운 의미의 재미가 꼭 있어야 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어떤 육체적인 소욕을 채워주는 그런 오락적인 재미가 아닌 영적인 즐거움말입니다.

시편 105편 3절에서 시인은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마음이 즐거울지니라 고 하였고, 43절에서는 그 백성으로 즐거이 나오게 하시되 노래하며 나오게 하셨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이 세상의 풍파와 사단의 도전 속에 살면서 때때로 상처를 가지고 나오지만, 결국 견디어내고 이겨낼 수 있는 것은 그 상처를 어루만지시고 위로해주시는 성령의 도우심이 계시기 때문인 줄 믿습니다.

예를 들면, 제2차 세계대전에서 결국 연합군이 승리하였지만, 곳곳의 전투에서는 연합군이 패배한 일도 많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패배한 사람들을 쓰다듬고 위로해 가면서 다시금 재무장하여 승리의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용기와 힘을 주는 것이 바로 후방의 사령부인것 처럼, 오늘날 영적 전쟁의 일선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이들의 위로와 치료의 손길이 예수의 공동체 곧 하나님의 교회이기에 교회는 참으로 귀한 것입니다. 우리 평안의교회가 그런 치유공동체가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제목을 ‘쾌락주의자들에게 주는 충고’ 이렇게 말씀 제목을 삼았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에게도 쾌락, 즐거움은 있습니다. 우선 5절에 보면 ‘무릇 취하는 자들아, 포도주를 마시는 자들아’ 술을 마시면 즐겁지요 즐거우니까 마시지 않겠습니까 괴로워서 마시는 사람도 있지요. 대부분은 술을 마시면 즐겁다고, 즐거울 것이라고 기대하고 술을 마십니다. 세상 속에 사는 많은 사람들 중에 상당히 많은 수가 이런 술 취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 본문 말씀은 정확하게 번역을 하면 ‘술애호가들아’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아, 바로 그런 말입니다.

요엘 선지자는 1장 2절부터 여러 대상을 향해서 이 말씀을 듣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늙은 자들아’, 장로들을 향해서 말하는 것이지요 5절 이하에 보면 ‘취하는 자들아’, 술을 좋아하는 자들아, 쾌락을 즐기는 자들아, 어떤 이는 이 말을 이렇게 번역을 했습니다. ‘소비자들아’ 무언가를 끊임없이 소비하는, 소비를 통해서 쾌락을 느끼는 사람들.

지난 며칠 전에 우리 딸 친구가 와서, 영국에서 함께 있던 친구가 와서 며칠동안 저희 집에 있었는데, 제 마음에 또 제 딸 친구가 왔는데, 경북대학교를 다닌다고 그래요. 방학동안이라 왔는데, 한끼는 좀 밥을 사 주어야지. 그래서 냉면과 고기를 좀 사주었어요. 바로 옆에가 현대백화점 있는 곳인데, 바로 그 날이 우연하게도 현대백화점이 오픈을 한 날이었다고 그래요. 그런데 그 식당에서 보니까 밖에 얼마나 줄을 서 있는지, 그 백화점 밖에 도로변에 얼마나 많은 줄을 섰는지 몰라요. 아이들이 저기 한 번 가보지요. 그래서 그럼 아이쇼핑 한 번 해 볼까 그리고 저력 8시에 그 앞을 갔는데, 8시면 눈을 닫을 시간인데, 언제 문을 닫습니까, 8시 30분까지 문을 연다고 그래요. 잠깐 들어가 보자. 얼마나 차가 많은지 지하 6층인데, 지하 6층을 가서도 자리 잡기가 쉽지 않았어요.

아침 10시부터 오픈을 했을텐데, 8시30분 마감하는 시간에도 지하6층까지 차가 꽉 차 있었어요. 대단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안에 넘쳐서 그 주변까지 사람이 장사진을 치고 있었어요. 무언가를 사면서, 그리고 오픈을 했으니까 무언가 선물 주는 것을 받으면서 사람들은 쾌락을 느끼고, 즐거움을 얻으려고 아마 그 곳에 모인 것 같습니다.

자,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어떤 곳이던지 그런 즐거움을 누려보려고 하는 몸부림을 여러 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교회생활에 왜 열심을 내지 못합니까 재미가 없어서요. 그럴 대 저는 2가지로 생각을 합니다. 하나는 이 분이 교회를 어떤 사회적인 오락을 통해서 주는 그런 인간의 소욕을 채워주는 곳으로 생각을 잘 못 해서 그런가 보다 라고 생각을 하기도 하고, 한 편으로는 우리가 그들에게 무언가 부족함이 있는가 보다.

교회 왔을 때 그들이 무언가 정말 이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방법에도 딱딱하고 어설픈 것 보다는 부드럽고 친절하고 편안해서 그 속에서 느끼는 영적인 즐거움을 그들이 누리지를 못해서 그런가 보다 하고 우리의 모습을 되돌아 볼 때도 있습니다.

소비자들, 또 백성들을 향해서 8절 이하는 말씀합니다. 11절에는 농부들에게 말씀합니다. 이 농부들을 가리켜서 ‘생산자들아’ 라고 번역한 분도 있습니다. 아까 소비자들아 한 것과 대비해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마지막 13절 이후에는 ‘제사장들아, 제단에서 하나님께 수종드는 자들아’ 지금 모든 늙은이로부터 시작해서 교회에서 주의 일을 하는 제사장에 이르기까지 지금 이 말씀을 듣고 귀를 기울여야 할 대상은 어느 계층에도 예외됨이 없어요.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예외라고 하는 것이 있지요. 예외가 많은 사회일수록 그 사회는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결속력이 떨어져요. 저는 제가 군에 있을 때 저희 부대를 지휘했던 사단장께서 굉장히 강력한 리더쉽을 발휘한 분인데, 무엇이 제 마음에 와 닿느냐 하면, 예외를 두지 않는 지휘 방침때문입니다.

소위 힘이 있는 부서, 빽이 있는 부서는 다 빠지지요. 누가 빠집니까 헌병부대가 일단 빠집니다. 제일 힘있는 부서지요. 그 다음 사단장을 가까이서 모시는 부서들이 다 빠집니다. 사단장 당번병, 운전병, 취사병, 관사병 등등, 주변에 그래도 힘깨나 쓰는 사람들은 이런 저런 이유로 다 빠집니다. 그러면 훈련장에 가 보면 힘없는 일반 보병들만 죽어라고 훈련 받는 거예요. 훈련 받으면서 뭐라고 그럽니까 우리는 힘없고 빽없어서 여기에 왔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여기에서 무슨 강력한 에너지가 나오겠습니까 열외가 많은 사회는 사회가 힘을 낼 수가 없습니다. 속된 말로 이 놈 저 놈 다 빠지고 나면 상실감이 남은 사람들이 사회에 중요한 일을 하게 되면 누가 힘을 낼 수 있냐는 말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어디 수련회 가고, 예배하면 우리 맹집사님 불러옵니다. 맹집사님 어디 갔어요 차에 있습니다. 불러오라고 그럽니다. 저 역시 한 명도 예외를 두고 싶은 마음이 없어요. 이런 저런 이유로 해서 빠지는 것 절대 원하지 않습니다. 예외가 있는 사회는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는 거예요.

오늘 요엘 선지자가 말합니다. 너희는 장로부터 시작해서 소비자인 모든 쾌락을 추구하는 자들, 농부인 생산자들, 그리고 당시에 종교지도자들까지 한 사람도 예외가 없습니다. 지방집회를 하면 참 죄송하고 부끄러운 일입니다만은, 우리 목회자들이 잘 참석을 못하지요. 해도 저 뒤에 그렇게 앉아 있습니다. 저는 그렇게 부끄러운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목사님은 연합집회 하면 맨앞자리에 그 지방의 목사님들을 다 앉혀요. 기분 나쁘지 않게 목사님들 다 앞에 나오시라고 해서 박수 한번 쳐드리고, 앞에 앉으시라고 하고, 성도들 앞에서 격려해 드립니다. 목사님들이 앞에 자리를 하니까 늦게 올수가 없지요 당신만 혼자 은혜 받으려고 올 수 없으니까 봉고차에 교인 한 명이라도 태워 가지고 오지요. 그런 연합집회는 은혜로운 연합집회가 됩니다.

내일부터 모레까지 우리 부천남지방 전도요원 세미나가 있고, 부천남지방 웨슬리전도대 발대식이 있는데, 우리 임원들이 모여서 지난 주에 회의를 하다가 우리 선교부 총무님이 그런 말씀을 합니다. 우리 지방 목사님들 다 앞자리에 앉혔으면 좋겠다. 그래서 그렇게 하시라고 했어요.

교회에서는 가장 중요한 사람이 목사라고 생각합니다. 목사가 솔선수범하고, 목사가 검소하고, 목사가 경건하고, 목사가 사람들에게 존경받을 수 있으면 그 교회는 살아있는 거예요. 사회에서 늙은 자들, 장로들이 존경을 받고, 모든 사람들에게 본을 받으면 그 사회는 건강한 것입니다.

요즘 시대처럼 목회자나 나이가 많은 사람들, 백성의 장로들처럼 그런 지도자에 있는 사람들이, 그런 지도력을 발휘해야 할 사람들이 정말 사람들에게 존경 받아야 할 그런 절박한 시대는 없는 것 같습니다.

요엘 선지자는 오늘 2절부터 14절까지 여러 계층의 사람들을 망라해서 그들에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귀를 기울일지어다’ 사실 5절에 술 취한 자들만 이 말씀을 들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모두가 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은 물론이고 늙은 자들, 백성의 지도자들부터 하나님의 거룩한 일을 위해서 섬기는 제사장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다 제 몫을 못하고 있다는 거예요.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5-6절에 보면 술 취하는 자들이 깨어 울어야 하고, 땅을 치며 통곡해야 할 이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술 취한 자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8절에 보면 모든 백성들에게도 애곡하라. 마치 처녀가 어렸을 때 잃어버린 남편을 위해서 베옷을 입는 것처럼 애곡해라.

11절 농부들에게도 너희는 부끄러워 해야 한다. 너희는 정말로 부끄러워 해야 한다. 13절에서 제사장들에게 말합니다. 너희는 굵은 베옷을 동이고, 슬피 울며 통곡해야 한다. 결국 모든 계층을 향해서 통곡해야 할 때라고 말씀하고 있는 거예요. 지금 우리가 사회를 향해서 여러 죄를 범하는 그런 범죄자들을 향해서 사회에 대한 문제를 뒤집어 씌우고, 저 것들 때문에, 저런 인간들 때문에 라고 말하기에는 지금 우리의 문제는 총체적인 문제라는 거예요. 거기에는 내가 빠질 수 없는 내가 포함된 문제라고 하는 거예요.

술 취하는 자들만 통곡해야 할 것이 아니라 제사장들도 통곡해야 하고, 백성의 지도자인 장로들도 통곡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7절을 보겠습니다. ‘그들이 내 포도나무를 멸하며 내 무화과나무를 긁어 말갛게 벗겨서 버리니 그 모든 가지가 하얗게 되었도다’나무는 뿌리에서 수분과 영양분을 섭취해서 수맥을 통해서 나무뿌리 안에 있는 그 줄기를 통해서 각가지의 끝까지 전달이 됩니다. 나뭇가지에 껍질을 벗겨내면 어느 일부분만 벗겨내면 아픔을 느끼면서도 나무는 견디어 가지만, 전체를 벗기어 내면 결국 그 내무는 죽어버리고 맙니다. 나무의 껍질을 벗겨내서 허옇게 말라 죽은 나무들을 많이 보실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의 상태가 하나님의 백성의 상징인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이스라엘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이스라엘을 상징한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가 껍질째 벗겨져서 허옇게 말라죽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누구의 책임이냐 술 취하는 자들만의 책임만은 아닙니다. 이것은 백성의 장로부터 농부들과 그리고 제사장들까지 모두가 통곡을 해야할 우리들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호세아서 4장 11절에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음행과 묵은 포도주와 새 포도주가 마음을 빼앗느니라’ 음행은 무엇입니까 육체의 쾌락이잖아요. 우리 사회는 요즘 육체의 쾌락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하는 사회가 되었어요. 요즘 탈렌트, 혹은 인기 있는 연예인들은 벌거벗는 것이 유행이 되었어요. 누드모델이 못 되어서 안달입니다. 한 번 누드모델이 되어서 모바일폰에 뜨는 거에 300원, 600원씩 받는 것이 수십만 수백만이 들어가서 한 해에 수십억씩 벌어들인다는 것입니다. 너도 벌었느냐 나도 벌어야지. 너도 벗었느냐 나도 벗어야지. 못 벗어서 안달입니다. 돈이 되는 거라면 이제는 못할 일이 없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모르겠어요. 우리 교인들 중에도 그런 사람이 계신지 모르겠어요. 요즘은 주부들도 돈이 되는 일이라면 안 가는 일이 없고, 못 가는 데가 없어요. 그런 사회가 되었어요. 편안하게 아름답게 잠든 아내의 얼굴을 보면서 우리 남편들은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자나깨나 아내조심, 자는 아내 다시 보자. 아내만 그렇나요 남편도 마찬가지입니다. 똑같습니다. 이제는 성적인 불균형이 없어요. 죄를 짓고 타락하는 데에 과거에는 바람 피면 남자, 이제는 아니지요 거의 똑같은 시대예요.

얼마 전에 텔레비전 드라마 중에 앞집여자란 타이틀에, 저는 그걸 신문 모니터에서 문제점이 있는 거 보았는데, 며칠 전에 낮시간에 이렇게 뉴스를 돌리다가 유선방송이니까 재방송 해 주는 것을 보았는데, 그것이 나왔어요. 이, 그게 그거구나! 그게 마지막회였어요. 세남자와 세여자가 서로 크로스해서 바람 피는 그런 드라마라고 아주 장안의 화제가 대단했어요. 바람을 펴도 너무 근사하게, 멋있게 펴서 모든 사람이 그걸 보면서 ‘바람 못 피는 나는 등신이지’ 이런 분위기를 만들어 주었어요. 그런데 더욱 가관인 것은 방송심의윤리위원회가 그것을 보고 나서 딱 마지막회가 끝났는데 하는 얘기가 이 방송을 앞으로 재방송할 때에는 19세 이상만 보도록 등급을 올립니다. 잠꼬대들 하고 앉아있잖아요. 제가 좀 심하게 미안한 이야기지만, 정신 나간 인간들이잖아요.

지금 우리 사회가 이런 수준입니다. 다 끝나고 나서 재방송 할 일 있으면 19세 이상 보라고 등급을 올린대요. 이제는 술 취하는 사람들의 문제가 아니라 지도자들의 문제가 큰 문제입니다. 그들의 양식, 그들의 의식이 더 문제예요.

음행이라고 하는 육체의 쾌락 때문에 온 사회가 돈을 벌고, 온 사회가 예뻐져야 하고, 온 사회가 시간적으로 바뻐요. 이런 사회 속에서 음행이 우리의 마음을 빼앗는다는 거예요. 묵은 포도주가 우리의 마음을 빼앗는다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전통, 우리의 명예, 이런 것들이 온통 우리의 마음을 빼앗아서 우리로 하여금 삶을 바쁘게 만듭니다. 새 포도주가 우리의 마음을 빼앗는다고 말씀합니다. 새로운 것, 바울사도가 아델에 가서 말씀을 증거할 때, 우리는 새 것이 아니면 듣지도 않고, 흥미도 없다고 말했는데, 요즘 사람들이 새로운 것이 아니면 흥미도 없고, 호기심도 없어요. 도대체 새 것이 뭐예요 음행과 묵은 포도주와 새 포도주가 마음을 빼앗는데, 누구의 마음을 빼앗느냐 그 말입니다. 우리 성도들의 마음을 빼앗구요. 우리 사명자들의 마음을 빼앗구요. 우리 목회자들 성직자들의 마음을 빼앗습니다. 메뚜기떼가 밀려오고, 사자 같이 강한 한 민족이 몰려와서 포도나무, 무화과나무를 말갛게 벗겨 버리고, 밭에 소산이 없어지게 만들고, 모든 나무를 시들게 만들고 나서야 ‘아이쿠,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그 때는 늦는다는 거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 시대를 바라보는 영적인 안목을 가지고, 세상을 분별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니이다.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는 세상에서 어떤 방향으로, 어떤 길을 가야하는 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의로운 자는 말씀을 듣는 자가 아니라 말씀을 깨닫는 자라고 말씀하는 것처럼 그 말씀을 듣고 깨달을 뿐 아니라 행하는 결단의 삶을 살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이러한 심각한 상태에 대책은 없을까 요엘서의 말씀에 소중함은 강력한 경고와 심판에 대한 예고 뿐만 아니라 영광과 소망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라고 했는데, 14절에 보면 거기에 소망의 대책이 나와 있습니다. 네 가지를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금식일을 정하라’ 하루 세끼 먹어야 되는데, 지금 상황은 하루 세끼 먹을 상황이 아니라는 거예요. 여러분, 여러분의 아내가 중병에 걸려서 병원에서 진단해 보니까 6개월 밖에는 살지를 못합니다. 이렇게 사망선고를 받았다면 그 남편이 버젓이 하루 세끼 먹을 수 있을까요 기도하는데, ‘주여 우리 아내 6개월 밖에 못 산다고 사망선고 받았는데, 주여!’ 하고 멀쩡하게 기도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의 자녀가 잘 못 되어서 곧 죽음에 이르는 상황에 이르렀는데, 하루 세끼 다 밥이 들어갑니까 멀쩡하게 우리의 눈에서 눈물 없이 기도할 수 있나요 아니지요. 식음을 전폐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는 내게 있어 먹고 마시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예요. 아내를 생각하고, 남편을 생각하고, 자식을 생각하면서 금식하며 하나님께 엎드릴 때 눈에서 눈물이 쏟아질 것입니다. 지금은 금식을 정해야 할 때라는 거예요. 무슨 얘기입니까 영적으로 비상사태라고 하는 것입니다. 깨어라. 깨어. 지금은 우는 사자가 삼킬 자를 찾고 있는데, 지금은 비상사태예요. 지금은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깨어야 할 때라고 베드로 사도는 우리에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성회를 선포하라고 말씀합니다. 주님 앞에 예배하는 일이 그동안에는 바쁜 거 때문에, 농사 짓느라고 바뻤지요. 사업하느라고 바쁘셨어요. 내 바쁜 거 우리 하나님도 이해해 주실 거라고 스스로 위로하면서 바뻤어요. 세상 쾌락 누리느라고, 술 취하느라고 바뻤습니다. 명예와 자신의 인기를 위해서 바뻤습니다. 심지어는 제사장들까지 바뻤습니다. 주님의 일로 바쁜 게 아니라, 세상일로 바뻤어요. 그래서 예배를 제대로 예배답게 드리지 못했어요. 예배가 한 시간인데, 한 시간에 10분만 늦어져도 왜 이렇게 설교가 길어지고 예배가 길어지나. 그 10분은 그렇게 짜증나고, 그렇게 길어 보이면서, 육체가 취하고, 마시고, 즐거운 일에는 하루 24시간도 아깝지가 않아요.

오늘 우리에게 주님께서 말씀합니다. 성회를 선포하라. 지금까지 세상일로 인해서 하나님 앞에 예배하던 삶을 멀리 하고, 바르게 예배하지 못 했던 너희의 예배를 회복해라. 그렇게 말씀하는 줄 믿습니다. 예배를 회복해야 살 줄 믿습니다. 예배가 죽으면 우리도 다 죽는 거예요. 예배는 우리의 은혜의 샘입니다. 저 강 위에서 수문을 막아 버리면 며칠은 물이 흐르지만 곧 하류는 바닥을 드러내는 거예요. 그 법칙을 왜 모릅니까 아직 물이 흐르고 있다고, 아직 헤엄칠 만 하다고, 아직 고기 잡을 만 하다고 그러지만 이미 그 위에 수문은 닫아버렸어요. 예배가 끊긴 인생은 이미 물의 공급이 끊긴 거와 같아요. 예배를 실패하면 인생을 실패한다고 여러분들이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무슨 말입니까 예배가 살아야 우리의 인생이 산다는 말입니다. 성회를 선포하라는 거예요. 예배를 회복시키라는 말입니다.

장로와 농부와 제사장들 모두를 몰수히 모아서 여호와의 성전으로 모아라. 여러분들 오늘 주님 전에 올 때 어떻게 오셨나요 갈까 말까 아유, 웬 비가 이렇게 와. 그저께 현대백화점 오픈할 때 세일로 산 이 원피스 입고 한 번 폼 좀 잡으려고 그랬더니 비가 와서 안 되겠네. 다음주에 가야지. 비가 와서 못 오고, 눈이 와서 미끄러져서 뇌진탕 걸리면 어떻하나 눈이 녹으면 가야지. 아유, 너무 추워서 안 되겠어. 너무 더워서 짜증나. 사계절 있는 우리나라가 그렇게 차 띠고 포 띠면 언제 예배는 드립니까 아이를 가져서 못 나옵니까 젖 먹이느라고 못 나옵니까 유치원이라 초등학교라 못 나옵니까 아이들 키워 보신 분 알지만 대학을 가고, 시집을 가도 그 일이 끊어지나요 시집을 가도 맨날 김치 담아 주느라고, 갖다가 아들 딸들이 혹을 갖다 붙여주면 꼼짝 못하고 또 키워주지요 사실은 자녀는 크면 클수록 일이 더 많아지는 거예요. 제일 행복할 때가 언제예요 아이가 누워서 젖 먹을 때가 가장 행복한 때예요. 가장 엄마가 행복한 때예요. 그 이후부터는 바빠지는 것입니다.

사람은 짐승과 비교해 보면 그 부분은 좀 떨어집니다. 짐승은 젖을 떼고 나면 독립하는 거예요. 우리는 결혼하고 나서도 독립을 못 하잖아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두가 성전으로 모이라고 합니다. 성전으로 모일 때에 주어지는 여러 가지 환경들, 그런 것 때문에 성전에 가기가 힘들어 져서 갈까 말까 힘들게 결정을 해서 오신 분은 안 계신가요 감사합니다. 하지만 좀 달라져야죠 천지가 개벽해도 예배는 내가 놓칠 수 없노라. 그런 분명한 예배에 대한 의식이 있어야지요.

뿐만 아니라 여러분들이 오실 때에 여러분 한 몸만 겨우겨우 챙겨서 오시는 그런 삶을 살지 말고, 함께 더불어서 성도들을 챙겨 나오셔야지요. 적어도 집사님, 권사님쯤 되면 자기 주변, 자기 아파트, 자기 속회, 자기 지역에 있는 분은 ‘내가 무슨 도속장이고, 내가 무슨 지역장이고’ 그런 타이틀이 없다고 해도 주변 사람들을 다 챙겨서 와야지요. 어느 분은 자가용을 사야 하는데, 주변에 있는 분들을 모시고 오고 싶은 마음에 승합차를 사서 성도들을 다 카풀을 해서 옵니다. 그 사람이라고 멋진 승용차 타고 싶은 마음 없겠습니까 그런데 성도들을 섬기는 일 때문에 승합차를 사서 그분들을 모시고 옵니다.

이제 우리는 모두가 몰수히 마음과 뜻을 다해서 강권하여 내 집을 채우라고 하는 주님의 그 말씀을 기억하면서 우리는 성전으로 모여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 날이 가까울수록 모이기를 힘쓰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금식일을 정하고, 성회를 선포하고, 성전에 몰수히 열외없이 모였을 때에 무엇을 해야 하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14절 마지막은 말씀합니다. 여호와께 부르짖을찌어다. 여호와 앞에 우리의 모든 삶을 다 내어놓고 하나님 잘 못 되었습니다. 제사장도 하나님께 나와서 하나님 잘못 되었습니다. 백성의 장로도 하나님 앞에 나와서 하나님 잘 못 됐습니다. 술 취한 자들도 나와서 하나님 잘 못 됐습니다. 농부들도 나와서 잘 못 됐습니다. 나태했었구요. 내가 쾌락만을 쫓았었구요. 육신의 명예와 자랑만을 쫓았었구요. 새로운 것 호기심 밖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용서해 주옵소서. 지도자들부터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나와서 눈 물로 회개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상징된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새로운 소생된 소망이 싹틀 줄로 믿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사랑하는 평안의 모든 성도들이 이방의 한 족이 들어와서 껍질까지 벗겨버려 하얗게 말라죽어가는 그 상황 속에서 다시금 이 한 뿌리에서 싹이 나고, 새로운 생명의 그 용기가 움돋는 것처럼 이 평안의 공동체를 통해서 이 사회를 살리고,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이루어가는 새로운 생명운동이 바로 우리들로부터 시작될 수 있도록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고마우신 하나님 우리의 허물임을 고백합니다. 우리의 나태함과 우리의 연약함을 고백합니다. 주님 앞에 온전히 서지 못했던 우리의 모든 계층마다 열외 없이 온전히 주님 앞에 서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요엘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들을 귀 있어 듣게 하시고, 듣는 자들만 아니라 깨닫고 행하는 사랑하는 성도들 되게 하옵소서. 새로운 생명운동이 여기에서부터 시작되기를 원하옵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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