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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탕자의 비유 (눅 15: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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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유명하고, 너무 아름다워서 오히려 오해되는 부분이 많은 비유이다. 언제나 그렇지만, 사람들은 모두 자기 입장에서 성경을 보고, 자기 입장에서 신앙 생활을 한다. 그것이 성경을 기록한 저자의 의도와 부합하는지 아니하는지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냥 내가 좋으면 그만이라는 식이다. 친구에게서 온 편지 내용은 절교 선언인데, 그걸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사랑을 고백하는 것으로 잘못 읽고 들떠 있다면, 누가 그를 말릴 수 있겠는가.

성경을 읽을 때 가장 중요한 점은, 나 자신이 성경이 말하는 그 인물이 되어서 그 사건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탕자라면 어떻게 했을 것인가. 또 내가 아버지의 입장이었다면 어떤 행동을 취했을 것인가. 집안에 있었던 큰 아들의 입장도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이들 각자는 자기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고, 삶이 있다. 이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설명하고자 하는, 삶의 세 가지 전형이다. 물론 아버지는 하나님의 심정과 삶을 상징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고, 두 아들은 그 아버지 아래서 함께 살아온 사람들이며, 따라서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을 상징한다.

큰 아들이라는 사람을, 하나님(아버지)을 안믿는 사람으로 설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명을 어김이 없는 생활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그 하나님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대명사가 큰 아들이다. 둘째 아들 역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재산으로 허랑방탕한 삶을 살다가, 굶어죽기 싫어서 아버지께로 돌아온 사람이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1차적으로 이 두 아들의 삶으로 대별된다.

우리는 이 두 아들의 생각은 물론이려니와 아버지의 생각도 정확히 읽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의 삶이 지향하는 바가 명확해진다. 우리는 큰 아들인가, 둘째 아들인가.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는 삶을 살고 있는가, 아니면 아버지의 재산을 허랑방탕하게 날려버리는 삶을 살고 있는가. 우리는 어느 쪽인가. 그들의 삶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그들과 하나될 필요가 있다. 지금부터 아버지와 두 아들의 입장이 되어 본문의 기록을 음미해 보기로 하자.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예수의 말씀은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로 시작한다.

둘째 아들은 왜 아버지에게 이러한 부탁을 했을까. 물론 여러가지 추측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날이면 날마다 들에 나가 품꾼들처럼 일하는 것이 힘들었을 수도 있을 것이고, 아버지나 형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하는 독립에의 의지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어느날 갑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형이 과연 유산을 공정하게 분배할까에 대한 의심도 작용했을 것이다. 누가복음 12장에,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는 사람이 나오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둘째 아들로서 형에 대한 의심은 충분히 있을 만한 것이다.

힘들여 일하지 않아도 먹고 살만한 재산이 충분한데 들에 나가 노동을 한다는 것은 인생을 낭비하는 것이나 다름 없다. 그것도 하루 이틀 쉬고 싶을 때, 제대로 쉴 수도 없는 이런 상황. 아버지께서 일하러 가시고, 형도 아버지의 명을 어김이 없는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나만 편하게 누워 있을 수 있는가. 하기 싫어도 할 수밖에 없는 이런 생활에서 벗어날 수는 없을까. 이렇게 고생하며 우리 집안의 재산을 늘린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얼마나 내 몫이 될런지도 불확실하다. 지금은 아버지께서 살아계시니 형의 발언권이 약하지만, 아버지께서 갑자기 돌아가시기라도 하시면 그땐 정말 형의 처분에 맡기는 도리밖에 별 수가 없지 않은가. 어떻게 할 것인가. 그냥 이대로 앉아서 하기 싫은 일 억지로 하며, 아버지 이후에 벌어질 형의 전횡에 마냥 속수무책이어야 하는가. 그럴 수는 없다. 차라리 깨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한번 부딪쳐 보는 거다. 아버지께 내 몫을 미리 달라고 하자. 그래서 그것으로 자유로운 인생을 개척하는 거다. 아버지의 경영철학과는 다른 새로운 세대의 새로운 감각으로 사업을 시작할 수도 있다. 어떻게 되더라도 지금 이렇게 앉아 있는 것 보다는 나을 것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그는 용기를 내어서 아버지를 찾았다.

아버지,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십시오.

일견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고, 서운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지만, 아버지는 아무런 말도 없이, 아무런 저항도 없이 너무나도 쉽게 둘째 아들의 원함을 들어 주었다.

둘째 아들의 생각이 얼마나 단편적이고 얼마나 한심한 것인가를 모르는 바 아니지만, 아버지는 무엇보다 사람의 생각이란 것이 어느 한 쪽으로 고정되어 있을 때에는, 외부로부터의 어떤 설득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스스로의 삶에 자신의 진리를 직접 부딪쳐 보기 전에는 자기 관념의 세계를 빠져 나오지 못한다. 그 누구도 다른 사람을 그 사람의 관념으로부터 끄집어 내지 못한다. 오직 스스로 나올 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스스로의 생각대로 열심히 살아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 생각에 헛점이 있음을 스스로 느껴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닌 문제는 자기 생각대로 열심히 사는 것은 고사하고, 자기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마저 없다는 점이다. 그저 예로부터 내려오는 관습이나 사회의 구성원들 사이에 널리 통용되는 보편적인 삶을 아무런 저항 없이 수용하여 답습하는 것이 최선이다.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일하고, 형이 하라는 대로 하면 되는 것이다. 설혹 거기에 불합리한 면이 있고, 내 생각에는 그게 아닌데 하는 점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걸 타파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일삼아 어렵게 살 필요야 없지 않는가. 그저 모나지 않게, 둥들둥글 살아가는 것이 좋다. 이 정도가 일반적이다. 물론 이런 삶에는 비난이 따르지는 않지만, 성장도 발전도 자람도 없는, 다시말하면 삶이 아니라, 죽음이다.

그러나 둘째 아들은 지금 천하에 둘도 없는 불효 자식이 되고, 세상에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형에 대한 우애가 없는 동생이 되려 한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를 책망하거나 설득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원대로 재산을 나누어 준다. 앞에서 얘기한 대로, 세상의 일반적인 가치관을 버리고, 비록 그 생각이 만인의 지탄을 받을만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둘째 아들 스스로가 생각하고 결정하였다는 점에 희망이 있는 것이다. 지금 보기에는 불효 같고, 우애가 없는 것 같지만, 이 단계를 넘어설 수만 있다면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의 의미와 형제를 사랑하라는 말의 뜻을 제대로 알 수 있을 것이다.

해야 하는 효도와 우애는 의미가 없다. 공경과 사랑이란 우러나는 것이어야 한다. 전자가 율법이라면 후자는 자유며 자율이다. 율법 아래서의 효도는 아버지의 재산과 아버지의 권위, 그리고 세상 사람들의 이목이 강제하는 성격이 대부분이다.

이것은 효도도 아니고 공경도 아니다. 오직 기브 앤드 테이크(give and take), 거래의 원리일 뿐이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마치 효도며 우애인 양 가면을 쓰고 있는 현실. 지금 둘째 아들은 그 동기가 어떻든 간에 이런 율법 아래서의 효도와 우애를 깨뜨리려고 하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이 둘째 아들이 자유와 자율에서 나오는 부모 공경과 형제 사랑의 삶으로 나아갈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지만,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이러한 율법 아래서의 삶에 대한 스스로의 깨뜨림이 없이는 우러나는 사랑으로의 이행은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둘째 아들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심정은, 앞으로 그에게 전개될 삶에 대한 안타까움과 그 삶의 치열함이 가져다 주는 쓰라림에 대한 안쓰러움은 있을지언정, 나무람이나 원통함은 아니다. 어차피 율법적인 삶에서의 초월이 없이는 아버지의 심정에 이를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이 아들은 지금 자기 앞에 어떤 삶이 어떻게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렇게 아버지를 떠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한걸음 나아간 것이 아닌가. 모쪼록 앞으로 전개될 삶에서 생각을 더욱 치열하게 다듬어 아버지의 심정, 부모를 공경한다는 말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는 날이 빨리 오기를 바랄 뿐이다.

그래서 이 둘째 아들은 자신의 소원대로 재산을 나누어 받는다. 앞날에 대한 희망과 무엇보다 자신의 뜻대로 인생을 살 수 있게 되었다는 뿌듯함에 잠시 도취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둘째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재산을 넘겨받았다고 하더라도 그 아버지의 면전에서 자기 마음대로 살 수는 없지 않겠는가. 매일같이 아버지를 가까이에서 봐야 한다는 것은 재산의 소유권만 자기에게 넘어왔을 뿐, 그걸 정말 자기 마음대로 쓰기에는 여러가지 께름직한 요인들이 많은 것이다. 아버지나 형이 강제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자기 마음이 편치 못한 거야 어떻게 하겠는가. 이미 동네 사람들로부터 불효의 딱지는 뒤집어 썼겠다, 아무래도 고향에서 무얼 하기에는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성경의 기록은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그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산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 먼 나라로 가지 아니하고는 살 수가 없다. 자기가 살아온 고향에서는, 아버지 살아 생전에 재산을 나누어 달라고 한 불효막심한 놈이라는 딱지를 견딜 수 없는 것이다.

먼 나라에 가면 누가 나의 과거사를 문제 삼겠는가. 세상에서는 오직 돈이 발언하는 것. 돈이면 친구도 있고, 사랑도 있다. 인격도 체면도 모두다 돈 위에 바탕하는 것.

아버지께 물려받은 재산 정도면 먼 나라에 가더라도 얼마든지 잘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아들은 그렇게 해서 고향과 아버지를 떠난다.

관념의 세계에서가 아니라 현실의 삶에서 이런 식으로 아버지와 고향을 등져본 사람이 아니면 다시 그 아버지께로 돌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모른다.

이건 인간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손톱만한 자존심이라도 있다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올 수는 없다. 이역만리 타향에서 고향을 그리며, 아버지께 대한 불효를 뉘우칠 수는 있겠지만, 그 아버지께로 발걸음을 돌린다는 것은 죽기보다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과연 이 둘째 아들처럼 고향과 아버지를 떠났는가.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너왔는가. 그렇지 못하다는 데 우리들 신앙의 맹점이 있다. 죄인이라고 말들은 하면서도 이 둘째 아들처럼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 강을 건너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걸핏하면 회개하고 심심하면 뉘우친다. 아버지께 대한 회개의 기도가 신앙생활의 무슨 중요한 핵심인 것처럼 행세한다. 그러나 이 둘째 아들처럼 아버지를 떠나온 사람은 그리 쉽게 회개할 수 없다. 아니 도대체 회개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다. 아버지의 전 삶이 담겨 있는 재산을, 아버지가 나누어 주기 전에 자기 입으로 나누어 달라고 해서 먼 나라로 도망간 사람이라면, 그래서 그 재산으로 무슨 괜찮은 사업을 이룬 것도 아니고 그저허랑방탕으로 그 재산을 허비한 사람이라면, 도대체 무슨 낯으로 아버지를 찾을 수 있겠는가. 빈대도 낯짝이 있는 법. 하물며 인간이 사흘돌이로 용서를 구하고 잘못을 빌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너무도 회개를 잘하고, 너무도 아버지의 용서를 잘 구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만큼 뻔뻔하거나, 아니면 둘째 아들같은 잘못은 범치 않았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그래서 성경이 말하는 둘째 아들은 관념 속에서만 수긍이 되고 현실의 삶에서는 있을 수 없다. 둘째 아들처럼 아버지의 재산을 뺏다시피 해서 먼 나라로 도망가 본 적이 없는데, 그래서 그 재산으로 허랑방탕한 삶을 살아본 적이 없는데, 무슨 회개며 무슨 용서인가. 기껏 잘못이래야 아버지께서 포도나무 가지치기를 하랬는데 열심히 하지 않고 적당히 농뗑이 친 것 정도이다. 이런 잘못은 얼마든지 회개할 수 있다. 그러나 둘째 아들은 회개하고 용서 받기에는 너무나 큰 잘못을 저질렀다.

언제나 하는 말이지만 성경은 오늘, 나의 얘기여야 한다. 나는 과연 아버지의 재산을 가지고 먼 나라로 도망가 허랑방탕하게 사는 둘째 아들인가, 아니면 아버지의 명을 어기지않으려고 노력하는 큰 아들인가. 아버지의 명을 어기지 않으려고 애를 쓴 적은 있어도 아버지를 떠난 적이 없다면, 그래서 허랑방탕한 삶을 산 적이 없다면 나는 오히려 큰 아들일 가능성이 더 크다. 이 큰 아들은 다음에 언급이 되겠지만 아버지와 같이 살면서도 아버지를 모르는 사람이며, 죄인 하나가 회개했을 때의 천국 잔치에 참가하기를 거부하는 사람이다. 아버지의 명을 지켜 어김이 없었을런지는 몰라도 아버지의 심정을 헤아리기에는 턱 없이 모자라는 사람일 뿐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여기서 말하는 허랑방탕한 삶을 인간 세상의 윤리 도덕을 어기는 깡패같은 삶으로 오해하면 안된다. 많은 사람들의 오해는 여기에도 있다. 아버지께 잘못을 범하고 고향을 떠나 먼 나라에서 허랑방탕하게 사는 것을, 인간 세상의 윤리를 어기고, 이 땅의 부모에게 효도하지 못한 삶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착각이다. 여기서 말하는 둘째 아들의 죄는, 아직 때가 되지도 않았는데 아버지의 재산을 받아 먼 나라로 갔다는 사실이지, 거기서 성실하게 살았느냐 허랑방탕하게 살았느냐는, 사실 아무 것도 아니다. 우리는 이 아들이 먼 나라에 가서 살더라도 그가 성실하게만 살았다면 괜찮은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아버지의 마음은 그 아들이 재산을 모아 먼 나라로 떠날 때부터 이미 상하고 찢겨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와 더불어 사는 것 이상의 효도가 어디 있겠는가. 아버지는 아들이 돈 잘 벌어오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같이 살기를 원한다. 그런데 그 아들이 아버지와 같이 사는 것을 마다하고 먼 나라로 도망갔다는 것. 그것으로 이미 아버지의 마음은 충분히 아프다.

아버지를 떠나 먼 나라로 간 이상, 아버지가 보시기에 괜찮은 삶은 애시당초 존재하지 않는다. 즉 먼 나라에서의 삶은 그것 자체로 이미 허랑방탕한 삶이란 말이다. 그러나 묘하게도 사람들은 이 비유에서도 둘째 아들이 아버지를 떠났다는 사실 보다는 그가 허랑방탕한 삶을 살았다는 데 더 주안점을 둔다. 그러다 보니 우리 삶의 지향도 하늘로의 귀향 보다는 이 땅 위에서의 성실한 삶으로 낙착되고.

둘째의 고향은 원래 하늘이었다. 하늘에서 아버지와 더불어 사는 것이 아버지의 꿈이며 의도였다. 그러나 둘째는 그게 싫었고, 아버지를 떠나고 싶었다. 아버지는 늘 자기를 규제하고 자기를 못살게 만드는 것이 삶의 의미인 것 같은 분이었다. 그 아버지 밑에서 아버지의 비위나 맞추며 명을 어기지 않으려고 애쓰는 형도 눈꼴사납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아버지의 재산을 받아 떠나온 먼 나라가 곧 이 땅인 셈이다.

물론 이 땅에서 성실한 삶을 사는 둘째들도 있을 것이다. 물론 이들은 성경에 나오는 둘째처럼 파산하지 않는다. 이 땅에 흉년이 들어도 먹고 사는 데 지장이 없고, 궁핍이 지나쳐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운다는 것은 더더욱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영영 아버지께로 돌아갈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이렇게 보면 먼 나라에서의 성실한 삶은 오히려 아버지께로의 귀향을 막는 요인이 되는 셈이다. 그렇다. 본문의 둘째 아들이 그나마 자신의 처지를 자각하고 도저히 뗄 수 없는 발걸음을 아버지께로 옮길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먼 나라에서 허랑방탕한 삶을 살았다는 데 주인(主因)이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둘째처럼 허랑방탕하게 살지 않는다. 아니, 그렇게 살지 못한다. 그러다보니 그 먼 나라도 꽤 괜찮은 나라가 되고 살만한 곳이 된다. 어차피 아버지는 떠난 것, 다시금 고향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것. 먼 나라에서라도 발 붙이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우선 성실해야 하고, 이 나라에서 통용되는 원리를 몸에 익혀야 한다. 학문을 익히고 기술을 배우며 이웃 사람들과 어울리는 법을 알아야 한다.

그래, 기왕지사 아버지를 떠나기는 했지만, 여기서라도 성실하게 살아야지.

그것이 결국은 아버지의 뜻일 수도 있어. 내게 있는 모든 재산이 원래 아버지의 것이었으므로 그 중에 일부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나누어 주자. 그것이 아버지의 재산을 탈취해 온 나의 과오를 조금이나마 씻는 것이리라.

이런 둘째는 일반적으로 먼 나라에서 명성을 떨치는 사람이 된다. 그리고 사람들의 환호와 칭찬에 덮여 자신이 돌아갈 아버지의 집에 대하여는 까마득히 망각하며 산다. 또한 아버지는 오늘도 당신 집 근처 동산에서 집 나간 아들 생각에 쓰린 가슴을 여미시는 줄도 모르고, 먼 나라 사람들의 칭찬과 선망에 세월이 어떻게 가는지 모르며 산다. 뿐만 아니라 이렇게 사람들 앞에 칭찬 받는 삶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 앞에 영광을 돌리는 것인 양 기염을 토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사태의 본질을 왜곡하는 것이다. 이 왜곡이 역사에 투영되어 나타난 것이 오늘의 기독교라면 지나친 억측이 되는가.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오늘날 기독교는 정말이지 허랑방탕한 삶을 살아야 한다. 그래서 아버지께로부터 받아 온 재산을 몽땅 날려보내고, 이 현실 세계(즉 성경에서 말하는 먼 나라)에 대하여 발언할 것이 없어져야 한다. 나아가 둘째 아들처럼 이 땅의 그 누구도 귀하게 보지 않는 인간, 그 누구도 한심하게 쳐다보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기독교는 이 땅 위의 삶에 대하여 하고 싶은 말이 너무나 많다.

대통령 만드는 일에도 간여하고 싶고, 민주화 운동에도 앞장서고 싶다. 불우 이웃 돕기에도 나서고 싶고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금식 기도 모임도 열고 싶다. 좋은 대학에 합격하고 싶고, 좋은 직장에 취직도 하고 싶다. 그러니 모두들 아버지께로 돌아갈 생각은 않고, 먼 나라에 앉아서 뻔뻔스럽게도 아버지의 도움을 구하고자 기도라는 이름의 에스오에스(SOS)를 보내고 있다. 아니, 그만큼 아버지의 재산(사실 우리가 먹고 입고 걸치는 모든 것, 심지어 우리의 몸까지도 아버지의 재산 아닌 것이 없다)을 갖다가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했으면 되었지, 어쩌자고 더 달라고 아우성인가. 얼마나 더 아버지의 가슴에 못을 박아야 이 어리석음의 행렬을 멈출 것인가. 본문을 보자.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 다 없이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사니 그가 저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저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꼭 이 만큼을 몸으로 살아보아야 한다. 가지고 온 재산은 다 날아 갔고, 그 재산으로 사귄 친구들이야 애저녁에 기대할 수도 없었던 것.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큰 흉년마저 드는 암담한 현실을 겪어보아야 한다. 어떻게 할 것인가.

자살이라도 해야겠는데 그것도 여의치 않다. 약을 살 돈도 없고, 목을 맬 끈도 없다. 물에 빠지자니 물이 너무 찰 것 같고, 혀를 깨물자니 너무 아플 것 같다.

모진 것이 목숨이라고, 그 좋던 시절을 그리면 무얼 할 것인가. 지금 당장 목구멍에 풀칠이 급한데.

그러나 오늘날도 이런 암담한 시절을 지내고 성공()한 사람들의 얘기를 가끔 듣는다. 특히 하나님의 일꾼임을 자처하는 사람들 중에서 더욱 많다. 오도 가도 못할 만큼 폭삭 망한 다음 죽을 수도 없어 불러본 이름, 하나님! 그 다음의 스토리는 거의 대동소이하다. 자신이 그렇게 세상에서 망한 것은, 자신이 그렇게 세상에서 세상적인 일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 그래서 하나님이 자신의 일을 사사건건 망하게 하시고 결국은 하나님의 일꾼으로 불러 주셨다는 것. 절망의 끝에서도 아직 자신에게는 건강한 몸과 하나님이라는 적극적 사고방식의 원천이 남아 있었다는 것. 그래서 지금까지의 삶을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신학교에 입학했다는 것. 아니나 다를까 하나님이 축복하셔서 지금은 이렇게 훌륭한 목회를 하게 되었다는 것.

하지만 누가복음 본문의 둘째 아들은 자신의 재산이 다 날아간 다음에도 신학교 따위를 갈 생각은 하지 않는다. 돼지 먹는 쥐엄 열매를 먹더라도 좋으니 배나 불렀으면 하는 게 그의 꿈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도 구할 수 없을 만큼 처절한 것이었다. 논리의 비약이라는 비판이 있을 수도 있으나, 우리는 여기서 이 둘째가 겪은 「궁핍」의 문제가 육신적인 양식만이 아니라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예수의 말씀은 언제나 비유 아닌 것이 없었고(막4:34), 비유는 그 실체를 나타내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므로, 비유에 등장하는 소도구들이 육신적인 것이라고 그 의미 역시 육신적인 것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또한 이 둘째 아들은 아버지와 더불어 아버지의 일을 거들며 살아온 지난 날의 삶이 있었다는 점을 잊으면 안된다. 어쩌면 지난 날 아버지의 일터에서 아버지의 명을 따라 열심히 일하던 시절이야말로 신학교를 졸업하고 교회를 개척하여 하나님의 일꾼으로 열심히 살았던 시절로 보아야 할 것이다. 오늘날에도 아버지의 명을 지켜 어김이 없는 삶을 잘 사는 목회자들 중에, 이런 삶에 대한 회의가 찾아와 갈등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들이 한 단계 높은 신앙으로 자라가지 못하는 이유는 본문의 둘째처럼 아버지의 집과 아버지의 일터를 과감하게 버리고 도망가지 못한다는 데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삶이, 하나님의 명을 어길 수 없어 하나님을 따르는 율법적인 삶인 줄을 알지 못한다. 그러니까 이런 사람들은 당장에 무슨 회의나 갈등이 생기지는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의 일을 함에 있어 회의하고 갈등하는 모습을 보이는 사람을 이상하게 생각하고 믿음이 얕은 연고로 치부한다.

그러나 가끔 열에 하나 정도는 자신의 삶이 율법적이라는 것을 깨닫고, 아버지를 사랑함이 없는 자기 삶에 대해 갈등한다. 그리고 또 그 중에 얼마간은 모든 것을 정리하고 아버지를 떠나는 결단을 보이기도 한다. 천국은 이런 사람들의 것이며, 아버지는 이런 아들들의 것이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와 더불어 살았던 지난 삶이 있었다는 것은 어찌되었든 이 아들의 양식이 아버지의 양식과 동일했었다는 의미도 된다. 아버지와 함께 식탁을 나눌 때에는 그 양식의 의미를 제대로 몰랐다고 하더라도 먼 나라에 가서 살면서 그 나라의 양식을 접하게 되면 아버지 집에서의 양식이 생각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챙겨온 아버지의 재산이 자기 수중에 남아 있을 동안에는 그것으로 아버지 집의 양식같은 식사를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이것저것 다 떨어진 다음 흉년마저 들고 보니, 그야말로 돼지 먹는 쥐엄 열매도 구할 수 없는 실정이 되고 말았다. 이 처절한 궁핍, 처절한 기근. 이것은 아버지가 집 나간 아들에게 보내는 사랑의 메시지이다. 이 궁핍과 기근이 없이는 둘째가 아버지께로 돌아올 가능성은 없다.

또 내가 너희 모든 성읍에서 너희 이(齒)를 한가하게 하며 너희 성읍에서 양식이 떨어지게 하였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암4:6)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에서 동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달려 왕래하되 얻지 못하리니 (암8:11-12) 배가 고프고 목이 갈해도 양식을 찾지 않고 물을 구하지 않는 사람이야 살아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으므로 논외로 치자. 그러나 아직 숨이 붙어 있고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라면 양식을 찾는 것이야말로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묘하게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게 먹을 것이 없고 마실 물이 없는데도 생명의 양식이며 마르지 않는 생수의 원천이신 여호와를 찾지 않는다. 오직 벧엘을 찾고 길갈을 찾으며, 브엘세바로 나아갈 뿐이다(암5:4). 하늘 양식을 구하러 신학교를 찾고 여의도 광장의 집회를 찾고, 잠실 운동장의 나라와 민족을 위한 구국 기도회에나 나갈 뿐이다. 이유는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철저하게 망해서 돼지 먹는 쥐엄 열매도 줄 수 없는 기독교여야 하는데 아직은 소 먹는 여물정도는 줄 수 있기 때문이거나, 원래부터 아버지 집의 양식이 어떤 것인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양식이 아닌 것, 배부르게 못할 것(사55:2)을 양식이라고 속여 팔아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둘째 아들은 살아 있는 사람이었고, 양식이 없이는 살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정말 돼지 먹는 쥐엄 열매라도 얻고자 하였지만 그것마저 주는 사람이 없는 암담한 현실을 만나고 보니 아버지 집이 생각난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기근과 궁핍은 집을 나간 탕자로 하여금 아버지께로 돌아가게 하는 양약이 된다. 성경에 나오는 대부분의 기근은 그것이 아무리 역사적인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메시지는, 항상 영적인 의미가 실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인자의 임하심을 말하면서, 처처에 기근이 있으리라(마24:7)고 하신 말씀을, 방글라데시나 소말리아 사태로 설명하면 불원간에 또 몇년 몇월 몇일에 예수께서 재림하신다고 들뜨게 된다.

아니다. 이 기근과 궁핍은 영적인 것이며, 느끼는 사람만이 느끼는 것이다.

그러기에 역사적이며 집단적인 사건이라기 보다는 내면적이며 개인적인 것이다. 이 기근을 느끼는 사람은 반드시 양식을 찾게 되어 있다. 체면이나 자존심을 생각하면 아직 배가 덜 고프다는 반증이며, 조직이 중요하고 외모가 중요하게 생각되는 사람도 아직 배고픔이 무엇인 줄 모르는 사람이다. 우리의 회개는 철저한 배고픔 위에 근거해야 한다. 인간적인 윤리 도덕을 생각한다면 도저히 아버지의 얼굴을 뵈올 수 없고, 형을 볼 면목도 없다. 또 동네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며, 집에서 일하는 하인들 보기도 여간 쑥스러운 게 아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것을 생각할 만큼 여유롭지 못하다. 우선 먹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아, 아버지 집에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그래, 이제는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다. 옛날 아버지의 아들은 이제 죽었다. 나는 그 아들일 수 없다. 그냥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일꾼일 뿐이다. 내가 무슨 낯으로 아버지의 아들이라 불리겠는가. 이제는 당연히 아버지, 아니 주인 마님이 시키는 대로 일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라도 주면 감사한 일이다.

아,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가. 나는 아버지의 손을 벗어나기만 하면 모든 것이 잘 될 줄 알았는데, 그리고 그때 아버지의 명령은 참으로 힘든 것이었는데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그건 얼마나 쉬운 일이었던가. 나의 죄는 정말 하늘과 아버지께 씻을 수 없는 것이었구나, 어쩌면 그렇게 아버지의 심정을 모르고 일하기를 싫어했던지. 아버지는 내게 양식의 소중함과 그것이 어떻게 나의 입으로 들어올 수 있는가를 가르치려 하셨던 것인데, 나는 그게 마냥 싫고 힘들기만 하였으니. 그런 과정을 통하여 내가 자라고 강해진다는 사실을 왜 몰랐던 것일까. 내게 돌아올 분깃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억지에 불과하지 않았는가. 그게 어떻게 내게 돌아올 분깃이란 말인가. 여기서처럼 내가 일해서 그 재산을 모으려면 아마 한 평생 아니라 두 평생을 꼬박 쓰지 않고 모아도 불가능할 것이다. 아, 왜 이런 사실을 이제야 알게 되었는가. 재산을 모두 날려버리기 전에는 이런 깨달음을 얻을 수 없었단 말인가. 분명히 나에게 돌아올, 그래서 나의 재산인 줄 알았던 그것이 전혀 나의 것이 아니라는 것. 그건 영원히 아버지의 것인데…, 아, 이 죄를 어쩌면 좋단 말인가.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신학교로 가서 아버지의 명을 지키려 하지 않는다. 이 사람에게 있어 아버지는 더 이상 자신의 아버지가 아니다. 진정으로 자기 죄를 회개하는 사람은 입으로 용서를 구하지 않고, 말로 뉘우치지 않으며, 죄 지은 벌로 하나님의 일에 충성하지도 않는다. 마지막 남은 자신의 몸(이것도 아버지의 것이다)이라도 잘 추스려 굶겨 죽이지 않는다면 그것이 아버지께 대하여 할 수 있는 마지막 효도가 되리라. 그러므로 이런 사람은 온갖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자존심과 체면을 팽개치고, 양식을 찾아 나선다. 이제 아버지는 더 이상 나의 아버지가 아니다. 오직 나에게 일거리를 주고 그 대가로 양식을 주는 은혜로운 주인 마님일 뿐이다.

하나님은 더 이상 나의 하나님이 아니며, 아버지는 더 이상 나의 아버지가 아니라는 선언이, 성경이 말하는 죄인의 회개이다. 이런 마음이 없는 회개는 모두 다 장삿속에 지나지 않으며, 회개라는 행위를 함으로 얻어질 잿밥에만 관심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작금의 기독교는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기가 막힌 논리로, 죄인 하나가 예수를 영접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꼼짝 없이 그를 구원해 주어야 하는 것으로 가르친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요1:12)고 하셨으므로, 예수를 영접한다고 하라고 강요한다. 그래서 얼떨결에 그런다고 말하면 그때부터는 하나님의 자녀란다. 물론 이렇게까지 희화적으로 말할거야 없을지 모르지만, 아무리 진지하고 엄숙한 영접이라고 하더라도, 죄인 쪽에서 영접하였으므로 당당하게 되는 하나님의 자녀라면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알아야 한다. 내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결과를 알고 하는 회개는 모두다 이런 류에 지나지 않는다. 진정한 회개는 오히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자리를 내어놓음이며,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호칭을 감당할 수 없다는 부르짖음이다.

회개에 떳떳함이 손톱만큼이라도 있으면 그것은 이미 회개가 아니다. 회개는 돌에 맞아 죽어도 아무 할 말이 없는 자기 상태에 대한 직시이며, 자신을 향한 아버지의 뜻을 몰랐던 지난 날에 대한 가슴 저미는 아픔이다. 그러므로 회개는 반드시 아버지의 심정에 대한 깨달음을 동반하며, 아버지의 심정을 깨닫지 못하는 회개는 회개라고 할 수 없다. 이 둘째 아들은 자신의 양식이 떨어지고, 그 먼 나라에서는 어느 곳에서도 자신의 양식을 구할 수 없다는 사실에 직면해서야 이런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동안 날린 재산이야 무에 그리 대수이랴. 그리고 애시당초 자신의 고향이 아니었던 그 먼 나라야 흉년이 들건 말건 그것 또한 별 문제가 아니다. 그 나라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단물만 다 빨아먹고, 그게 떨어지자 언제 보았던 거렁뱅이냐고 내팽개친 나라가 아니던가. 그게 그렇다. 그 먼 나라에서 살려면 항상 단물을 조금은 남겨 두어야 한다. 그래야 버림 받지 않는다.

그러나 그 먼 나라에서 버림 받는 영혼, 더 이상 먹고 살 희망이 없는 영혼에게 아버지 집으로의 귀향이 예비되어 있으니, 어찌 세상 일에만 새옹지마(塞翁之馬)던가. 우리가 어떻게 아버지의 뜻을 아버지 만큼 알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만큼이라도 아버지를 알았다는 것은 우리가 그만큼 자랐다는 뜻이리라.

아버지, 전 꿈을 꿉니다.

알이 변하여 병아리 되고, 병아리 자라 어미 닭되는 그런 꿈을.

제가 아무 생각 없이 당신을 떠날 때에 당신은 꿈으로 제게 스며들었습니다.

사람들은 오고 가고, 저마다의 아름다움으로 제게 다가올 때, 전 그것이 저에 대한 그들의 사랑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저녁이 오고 사람들이 떠나자, 제게 남은 사랑은 당신을 떠나올 때, 당신이 챙겨주신 꿈 한자락 뿐이었습니다.

아, 아버지, 배고프고 어두운 이 삶의 나락에서 전 꿈을 꿉니다.

아버지 안에 아버지와 하나되어 언젠가 아버지를 아버지 만큼 알게 되리란 꿈을.

이호식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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