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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안식일의 주인 (마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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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안식일 규정
(1) 네 이웃의 곡식 밭에 들어갈 때에 네가 손으로 그 이삭을 따도 가하니라 그러나 이웃의 곡식 밭에 낫을 대지 말지니라(신23:25)
(2) 너는 엿새동안 일하고 제 칠일에는 쉴지니 밭 갈 때에나 거둘 때에도 쉴지며(출34:21)
(3) 항상 매 안식일에 이 떡을 여호와 앞에 진설할지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한 것이요 영원한 언약이니라 이 떡은 아론과 그 자손에게 돌리고 그들은 그것을 거룩한 곳에서 먹을지니 이는 여호와의 화제 중 그에게 돌리는 것으로서 지극히 거룩함이니라 이는 영원한 규례니라(레24:8-9)
(4) 다윗의 규정 위반:제사장이 그 거룩한 떡을 주었으니 거기는 진설병 곧 여호와 앞에서 물려 낸 떡밖에 없음이라 이 떡은 더운 떡을 드리는 날에 물려낸 것이더라(3-4, 삼상21:6)
(5) 제자들의 죄:이삭을 딴 것은 괜찮으나(1) 안식일을 범한 것이 죄였다(2).

2. 안식일의 주인이신 이유
(1) 율법을 주신 분으로 율법보다 크신 자
(2) 제사장보다 큰 자(5)
(3) 제사 드리는 성전보다 크신 제사 받으실 분(6)
(4) 제사보다 자비가 하나님의 뜻(7)
(5)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안식일 제도보다 중요함(막2:27)

3. 사람을 살리는 것
(1) 안식일에 해도 되는 일:생명의 위협
(2) 가장 큰 제사:생명을 살리는 것
(3) 생명을 가장 잘 살리는 길:자비(7)
(4) 가장 귀한 자비: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않는 것(7)
(5)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제도:안식일과 가정
(6) 복음을 전하는 목적:영혼의 쉼(마11:28)과 세상의 변화
(7) 부활주일 아침에 율법의 정신과 목적을 부활시키자.
2부 / 하나님의 형상으로 부활하라 (마28:1-10)

1. 일그러진 하나님의 형상
(1) 오늘 부활의 아침에 부활의 기쁨을 함께 누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지난주간에 처음 시작한 아버지 학교에서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아버지는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그 모습 그대로 영향을 받아 자녀에게 그대로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말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집사님께서 이 말을 받아 말씀을 하셨는데 그 분의 이야기 속에서 제가 도전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우리를 지어주셨는데 하나님의 형상대로 자녀에게도 영향을 끼쳐야 하지만 그렇지 못하고 우리 자신의 일그러지고 왜곡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또 다시 왜곡된 하나님의 형상을 대물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3) 오늘은 부활주일입니다. 처음 예수님을 영접할 때 아마 대부분 이런 고민을 했을 것입니다. 도대체 2천년 전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오늘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하는 것이죠. 이 사실을 받아들인 사람들만이 잃어버린 행복을 되찾았을 것입니다. 여러분도 부활의 이 아침에 부활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 기록된 부활의 정황 속에서 우리의 부활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찾아봐야 하겠습니다.

2. 굴려낸 돌
(1) 오늘 거세게 부는 봄바람을 보면서 부활의 아침 주님의 무덤문을 막고 있던 돌을 굴려내기 위한 바람인가 했습니다.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자들은 돌로 무덤을 막고 인봉을 했습니다(27:66). 하나님의 말씀 안에 살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 말씀이 행여나 성취될까봐 몹시 두려웠습니다(27:63). 주님께서 살아계실 때 여러 차례 예언하셨던대로 혹시 시체를 도적질해 가지는 않을까 하는 의심 때문이었습니다(27:64). 그런데 이 돌이 부활의 아침에 굴려졌고 무덤 문이 열렸습니다.
(2) 우리의 심령도 똑같습니다. 무덤을 큰 돌로 막았던 것처럼 여러분 스스로 마음문을 닫아버리지는 않았습니까 살아가면서 배신 당하고 상처 받았던 것들이 쌓여서 문을 점점 닫게 된 것이죠. 이용당할 염려 때문에 자기 어려움을 드러낼 수 없을 때, 질병 때문에 잘 짜 놓은 계획이 소용없어졌을 때, 어떤 사건으로 마음이 어지러워질 때, 가혹한 현실이 여러분의 꿈을 무너뜨릴 때, 이럴 때 분노가 일어나고, 좌절감이 생기고, 복수심이 쌓이게 되는 것입니다.
(3) 오늘 하나님께서는 여러분 안에 있는 불신앙과 의심을 드러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직접 고난을 주시는 것은 아니지만 고난을 당하는 상황을 막지 않으시고 내버려두실 때가 있습니다. 이런 사건들을 통하여 시대에 뒤떨어진 생활 방식을 버리라고 촉구하는 하나님의 의도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원망할 이유가 없습니다. 고난을 통하여 가 본 적이 없는 새로운 경험의 영역을 열어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웬만한 일은 자신이 다 해결하려고 하지 하나님을 만나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하나님의 인도의 손길을 받지 않으면 안될 계기를 마련해 주시는 것입니다. 부활의 첫 번째 단계는 우리 마음속에 막힌 돌을 굴려내는 것입니다. 오늘 부활의 이 아침에 쌓인 분노, 좌절감, 복수심들을 굴려내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빈 무덤
(1) 무덤 속에는 주님의 시신과 주검(27:59)이 있었습니다. 그 시신은 세마포로 잘 싸여있었습니다(27:59).
(2) 내 의지로 가득 찬 것은 무덤이요 죽음입니다. 빈 곳이 없기에 그 어떤 것도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내 뜻과 내 야망으로 가득찬 상태는 죽음의 상태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죽는 것이 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2:20)
(3) 일례로 우리는 낯선 사람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합니다. 그래서 집에는 이중 삼중으로 자물쇠를 채웁니다. 모든 건물에는 경비요원을 세웁니다. 도시에는 무장한 경찰관들이 있습니다. 나라에는 군대가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과 언어가 다르고 피부색이 다르고 생활방식이 다른 사람들에 대해 거부감을 가집니다. 그러나 두려움은 그런 데만 있지 않습니다. 항상 내 곁에 있는 친한 학급의 친구, 같은 팀원, 같은 직장 동료들이라 할지라도 나의 안정에 위협을 주는 존재로 느껴질 때는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공동체의 목적을 잃어버리고 최선의 것을 드러내지 못하게 되는 것이죠.
(4) 우리는 비어있는 것에 대해 익숙하지 않습니다. 무엇인가에 정신을 빼앗기지 않으면 불안해집니다. 어딘가 몰입할 일이 있으면 축복이고, 할 일이 없으면 저주로 여깁니다. 여러분이 어딘가 초대받아 가서 앉았을 때 읽을 신문도, 쳐다볼 TV도, 맞이해 줄 사람이나 전화도 없을 때면 안절부절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지난 고난주간 특별새벽기도회 시간을 통해 그동안 해보지 않아 익숙하지 않은 기도를 훈련했습니다. 첫째날은 틀을 깨는 기도, 둘째날은 입장 바꾼 기도, 셋째날은 이름을 부르는 기도, 넷째날은 듣는 기도를 훈련했습니다. 그 날 참석했던 분들 가운데 10분동안 한 마디도 하지 않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보려고 기다릴 때 불안함을 느끼지는 않았습니까 아마도 대부분이 답답하고 불안한 마음을 느꼈을 것입니다. 우리는 풀리지 않는 문제를 풀리지 않은 채로 놔두지 못하고, 명확하지 않은 상황을 명확하지 않은 채로 놔두지 못하기 때문에 정확한 해결책이나 답이 있을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비슷한 해결책과 답 같으면 뭐든지 다 붙잡으려고 하지 않습니까 빈자리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무엇으로라도 채우려 하다가 걸려 넘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5) 부활의 두 번째 단계는 바로 창조적인 빈자리, 열려있는 수용의 자리로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신다는 사실입니다.

4. 하나님의 임재하심
(1) 주의 천사가 하늘로서 내려왔습니다(2). 그리고는 승리의 메시지를 전달했습니다.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6), “갈릴리로 먼저 가셨다”(7)는 것입니다. 부활은 승리의 메시지를 가지고 오신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만나고 체험하는 것입니다.
(2) 무덤을 찾았던 여인들은 부활하신 분을 만납니다(9). 그 순간 두려움에서 기쁨으로, 불안에서 평안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리고는 경배합니다. 경배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되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3) 십자가의 죽음이 아니라면 부활의 기쁨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지난주간에 PC 통신상으로 한 젊은이가 질문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셔서 인간을 만드셨다고 하지요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거기에 두셨죠 맞죠
그런데 왜 인간은 이 세상에서 고통스럽게 살아야 하지요
왜 세상은 불공평하고 착한 사람들이 고통받나요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신다면 차라리 이 힘든 세상에...
인간을 만들어서 고통 겪게 하지 않는 것이 옳지 않은가요
왜 하나님은 인간을 이 세상에 만들어 놓고
힘들게 살도록 하는 거지요 거기에 힘든 삶을 살기 싫어서
지쳐 쓰러지고 삶을 포기하는 사람들을 왜 정죄 하지요
오히려 그들이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는
약하고 상처 입은 사람들이 아닌가요
왜 약하고 상처 입은 사람들은 그 상처를 평생 감싸쥐고
살기 싫고 힘든 삶을 강요받아야 하나요
이 젊은이는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이 되려고 하는데 이런 질문이 풀리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따지는 모습과 기독교인이 되려고 하는 모습은 매우 이율배반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모습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 같은 경험 속에서 하나님을 경험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끈기있게 기다리면서 우리는 그 사람이 이미 우리의 삶을 참으로 가득 채웠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지 않습니까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은 아들이 멀리 떠나 있을 때 깊어지는 것입니다.
(4) 그러나 참을성 없는 우리의 문화 속에서는 기다림 속에 있는 이 구원을 발견하기가 힘듭니다. 당장 흥분하게 하고, 황홀경을 느끼게 하고, 강렬한 체험을 하게 하는 곳에는 사람이 몰려듭니다. 그래서 교회에서조차 이런 우상문화를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당장 응답 받아야만 하고 당장 황홀경을 체험해야 합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이런 문화를 즐기고 추구한다 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사람들이 꾸며낸 분은 아닙니다.
(5)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임재를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들을 수 있는 빈자리를 마련하시기 바랍니다. 영적으로 여러분을 인도하도록 붙여주신 양육자에게 마음을 여시기 바랍니다. 부활의 아침에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경험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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