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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늘의 예루살렘 (히 12: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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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주일 예배에 참석하면서 우리가 간혹가다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옛날 어느 나라 사람이든지 무엇인가를 열심히 하는 것보다 그것을 앉아서 관중을 하는 사람들이 더 행복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옛날 희랍 사람들도 그랬고 사실 우리나라 어른들도 그런 생각들을 했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들이 테니스를 한다면 땀을 흘리면서 뭐 하느냐 하인들을 시키지 하면서 그걸 구경한단 말이죠. 이게 사람들의 공통적인 심리 같습니다. 그런데 요즘 우리가 교회를 공부하고 있는데 만일 교회라고 하는 것이 지금 우리가 공부하고, 강조하는 상황에 따르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모두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합니다. 교회는 독립적으로 있고 그 교회와 관련해서 내가 서는 것이 아니고 내가 그 일원으로 서 있는 것이 교회라고 합니다. 따라서 이 교회 안에서는 어떤 사람이라도 관중, 보는 자, 구경꾼으로 있어서는 교회의 의미가 아닙니다. 교회의 몇몇 사람들은 일을 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다 이렇게 팔짱을 끼고 본다. 그렇게 하면 안된다는 말입니다. 주일학교 때 많이 익숙해진 용어 중 하나가 “ 예배를 본다.” 그러니까 예배의식이 진행되어지는데 우리는 거기를 지켜보는 것이죠. 옛날 로마 카톨릭에서는 그게 가능했습니다. 신부님이 제사장으로서 제사를 지냅니다. 로마 카톨릭에서는 지금도 매번 예배때마다 제사를 지낸다고 하죠. 그리고 사람들이 이것을 지켜보는 거예요. 그러나 참된 의미에서는 예배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배는 우리가 다 같이 참여하는 것이고 그러한 의미가 교회 전체에서 드러나는 것이어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서 저의 고민이 뭐냐하면 내 역할이 무엇인가 하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제가 지난 주에도 말씀드렸지만 성경이 제시해 주고 있는 그 원리를 우리가 같이 나누는 그게 제 역할인 것 같습니다. 그게 너무 어려운 것 같은데요. 어렵다고 하는 게 말이 어렵다는게 아니고 실천하기가 어렵다는 것이죠. 그 놀라운 원리를 가지고 우리 각자가 삶 가운데서 교회로써 드러내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입니까 그랬을때 간혹가다가 설교하는 사람들한테 유혹이 듭니다. 아! 이것을 낮춰가지고 사람들한테 좀 현실성 있게 만들 수는 없을까 또 그렇게 하면 잘 되기도 합니다. 그렇게 해서 그것이 더욱더 유혹이 되죠. 또 하나의 유혹은 어떤 것이냐 하면 사람들이 이런 내용이 우리와 구체적으로 무슨 관련이 있을까 교회가 그렇다고 하는 것과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 걸까 사람들은 대개 그렇게 생각하는 습관이 있어거 매번 이렇게 해나가도 계속해서 그래나갈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것을 깨지 않는 한 오늘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들이 아무런 의미도 없는 시간이 될 것이고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를 하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법을 두고 법문용례를 한다고 이야기되고 말겠죠.
그러나 오늘 본문에 보면 우리의 상황과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의 상황들을 아주 면밀하게 대조해서 이야기해주는 본문입니다. 여기서 이 본문의 배경이 되는 상황은 어떤 상황이였냐 하면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이 출애굽해서 나왔던 상황입니다. 출애굽해서 나와 모세가 율법을 받게 되는 시내산에 이르럽니다. 시내산에 이르러 가지고 모세가 율법을 받으러 올라가는 사이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되 “ 너희는 삼일 동안 몸을 정결케 하고서 너희를 깨끗케 하라. 그리고 이 산 주변에 올라오지 마라. 내가 돌격하여 너희를 칠까 하노라.” 죄인인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은 그렇게 무서운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안타까워서 너희는 이 산에 올라오지 말아라. 올라오면나의 의로움이 자연스럽게 발생하여서 너희들을 그대로 죽여버릴까 한다. 만일에 사람뿐만 아니라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소나 양이라도 지금 이 산에 오르게 되면 내가 그렇게 하리라. 이렇게 말씀하신 것을 봅니다. 이것은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이상한 타부가 되는 어떤 지역을 신성시하는 그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산이 독특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 가면 사람이 죽게되기 때문이 아니고 특별히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죄인된 사람들이 죄인된 모습을 그대로 가지고 접근할 때 저희가 죽임을 당케 되리라 하는 것을 말하고 있단 말이죠. 그러나 오늘의 본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너희가 이르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너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또는 손으로 만질수 있는 어떤 붐이 나타나고 흑암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이 시내산 앞에 섰을 때는 그러한 일이 일어났다는 말이죠. 하늘에서 무슴 소리가 나니까 사람들이 그것을 도무지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모세한테 말하기를 “ 하나님이 직접 우리한테 말씀하지 말게 해 주십시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왜냐하면 하도 무서워서. 그 다음부터는 모세를 통해서 이야기를 듣습니다. 이 이야기는 조금 후에 더 하겠습니다. 모세를 통해서 이야기를 듣는 상황가운데 이르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에 대해서 말하시기를 우리가 이런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그 옛날에 이스라엘 사람들, 출애굽을 직접 경험한 사람들보다 더 굉장한 위치로 여러분이 와 있다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뛰어나서가 아니고 우리가 신약시대에 살고 있는 성도들이라고 하는 것 때문에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른 것은 어디야 할때 “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산이다.” 그 다음에 하는 말이 “ 하나님이 계신 도성,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이다.” 라고 하는 이야기를 해 줍니다. 이것이 오늘 말씀의 주제입니다. 여러분들이 어디에 이르렀습니까 하늘의 예루살렘에 이르렀다고 이르렀다고 이야기해 줍니다. 하늘의 예루살렘 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예루살렘에 뭐가 있었습니까 성전이 있었죠. 우리는 요 몇주일 동안 교회는 성전이다 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러니까 성전이 교회이니까 우리가 하늘의 예루살렘, 이 지상에 있는 예루살렘에 가도 거기에 성전이 없으니까 주님께서 말씀하신 참다운 의미의 성전이 없으니까 이것의 진상인, 실체인 하늘의 예루살렘이 있어야 되는데 그 하늘의 예루살렘에 너희가 이르렀다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하늘의 예루살렘 이라고 하는 것은 저 하늘의 예루살렘이 아닌 것입니다. 이 하늘의 예루살렘 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본문을 쭉 살펴보면 교회와 천만천사와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 또는 그의 자녀들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모아놓은 것 그것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알게끔 하기 위해서 교회와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여기 교회와 관한 또 하나의 그림이 등장합니다. 우리를 가르쳐서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 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늘의 예루살렘 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포함되어져서 있는 우리가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러한 모습을 우리 가운데서 드러내야 됩니다. 우리가 하늘의 예루살렘다운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서 얼마나 애를 써야 할 것인가 라고 하는 것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우리를 그러 방향으로 가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두려우신 모습을 우리한테 아주 격렬하게 제시해 줍니다. 오늘 본문의 맨 마지막 절에 보면 우리의 하나님을 가르쳐서 “하나님은 소멸하시는 불이십니다.” 하나님을 부로 그려 보신적이 있으세요. 그것도 그냥 불이 아니고 태워 다 죽이는 불이시다. 그래서 어떤 상황에 그러느냐 하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우리의 죄인된 모습을 그대로 가지고 있을 때 나타나는 상황입니다. 그것은 무서운 일입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소멸하시는 불이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인된 모습을 그내고 가지고 나아가면 그 소멸하는 불 속에서 우리가 소멸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다른 곳에서 보면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죄인들에 대해서 얼마나 무섭게 묘사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대로 죽고 마는 겁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에게 그것을 강조합니다. 만약에 우리가 하늘의 그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죄인의 모습이면 너희가 어떻게 하겠느냐 이게 아무 말 아닌 것 같지만 어떤 사람들은 듣고서는 아! 하나님의 손 안에 빠져 들어가는 죄인의 모습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생각하고 저희들이 어렸을 때부터 지은 죄를 전부 다 회개했다는 역사적인 기록이 있습니다. 이것이 소위 미국에서 일어났던 대각성 운동의 주요한, 죠나단 에드워드라는 목사님께서 이렇게 읽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듣고서 하나님의 손 안에 빠져 들어가는 모습은 얼마나 안타까울 것인가 그래서 그저 있을 수 없는 것이죠. 한편에는 우리의 마음속에 내가 만일에 나의 죄인된 모습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있어서는 안된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은 우리에게 또 한가지 이야기해 주기를 너희가 이룬 것은 그렇게 무서워하는 것, 너희가 두려워 떨고 모세가 말한 바 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 그런 것이 아니다고 이야기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 우리가 하늘의 예루살렘에 벌써 이르렀습니까 왜 우리가 시온에 벌써 이르렀다고 말합니까
그것을 설명하는 맨 마지막에 보면 “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 너희가 어떻게 해서 이곳에 이르렀는가. 우리가 주님의 보혈을 찬송하는 찬양을 드렸는데 그것입니다. 우리의 죄인된 모습을 그대로 놔두면 우리가 죽을수 밖에 없지만 아벨의 피, 순결한 피, 하나님께 제대로 경배를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을 잘 섬겼기 때문에 자기의 형에 의해서 죽어갔던 그 사람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이 지상에 뿌려진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 우리가 그곳에 이르럴 수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이것이 이른 다음에, 교회의 일원이 된 다음에, 하나님으 백서이 된 다음에 우리는 잘난척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잘나가지고 여기에 포함되어 있는게 아니거든요. 주님의 피로써 우리가 여기에 와 있으니까 그 다음에는 아! 그러면 주님 앞에서 내가 어떻게 할 것인가 그것이 나타나야 되죠. 그래서 한편에는 주님에 대해서 주님이 소멸하는 불이시다 라는 인상을 가지면서 우리에게도 두려움과 떨림 그것이 있어야 합니다. 공포와 전율이 우리에게도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만 있어서 우리가 어떻게 될 것인가. 이제 난 파멸되거 말 것인가 하는 그런 생각만에 빠져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우리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해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 땅위에 살게 해주셨다는 그 벅찬 감격, 그 놀라운 감사에 가득찬 마음을 가지고 이제 우리의 삶을 살아나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실질적으로 여러분이 이 교회의 일원이 되어가지고는 구체적으로 여러분이 여기에 모일 때가 아니고 여러분이 이곳을 빠져나가서 이제부터 일주일 동안 살아나가면서 내가 그러한 사람으로서 살아나가는가 하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때 여러분들의 마음 가운데 우리가 하늘의 예루살렘이고 하늘에 있는 한 일원이 되었다라고 하는 인상을 강력하게 가지고 살아나가야 합니다. 이 일에 대해서 누구도 구경꾼이어서는 안됩니다. 교회에 열심인 사람들, 열심히 하십시요.우리가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 지켭보겠습니다. 이래서는 안됩니다. 나는 교회에 나온지 얼마 안되니까 나는 얼마동안 앞으로 이렇게 하고 있겠습니다 라고 해서는 안됩니다. 사실 그렇게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여러분한테 주어지는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주는 이런 교회인 것입니다.
하늘의 예루살렘이라는 생각을 할때 우리에게 도전이 되어지는 구약의 성도들의 예루살렘을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것을 알기 위해서 우리가 시편에 있는 한 구절을 읽겠습니다. 시편 137 편에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기들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떠나서 저 먼 곳으로 바베론으로 포로가 되어 갔을때 저드링 그 상황 가운데 하나님께 부르짖는 기도가 나옵니다. 시편 137 편입니다. 이 사람들의 모습은 아주 비참한 상황이었습니다. 저들이 예루살렘과 멀리 떨어진 바벨론에서 생각을 해야되니 얼마나 안타까운 상황이었겠습니까 저들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 우리가 바벨론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시온, 시온산에 예루살렘이 있죠. 시온을 생각하며 예루살렘이 있는 그곳을 생각하며 울었도다. 이것은 그저 한 민족이 자기들의 국가와 민족을 생각하는 애국적인 시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얼마나 시온을, 예루살렘을 사모해야 하는가, 얼마나 교회를 중심으로 자기들의 삶을 정리해 나가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이렇게 안하고 살 수도 있었습니다. 바벨론에 가서 편안하게 아주 편안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 중에 높은 지위에 이르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나중에 이스라엘 사람들을 다시 예루살렘에 돌아오게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사람들. 에스라, 느헤미와 같은 사람들은 바벨론에서 아주 편안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저희들이 아주 편안하게 좋은 집 짓고, 잘 살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사람들이 이와 동일한 심령으로 예루살렘을 그리워하며 웁니다. 그래서 시나 때나 어서 예루살렘에 가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우리가 얼마나 우리에게 있어서 교회를 중심으로 우리의 삶을 생각하고 있는가 이 말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여러분들이 이 예배당을 중심으로 생각해야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라고 하는 곳,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우신 그곳, 내가 교회의 한 일원이라고 하는 것을 중심으로 내 삶을 정리해 나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때 이렇게 살고 있는 사람들한테 이 사람들이 무슨 노래를 하라고 합니까 이 사람들이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들이 그 중에 버드나무에 올라가서 우리가 수금을 걸었나니 , 왜! 이 수금을 가지고 우리가 노래할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그런데 이때는 우릴ㄹ 사로잡은 바벨론 사람들이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케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의 노래중의 하나를 노래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그 노래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 예루살렘에서 멀리 와 있기 때문에 우리가 어찌 우리의 기쁨을 찾으면서 저 사람들한테 이 노래를 불러줄 것인가. 이 사람들이 얼마나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있는가. 그 다음에 더 뚜렷이 나타납니다. 우리가 이방에 있어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꼬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데 예루살렘아, 성전아,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교회야, 내가 그 일원이 되어있는 교회야, 내가 너를 잊을진데 내 오른손이 그 재주를 잊을지어다. 우리 성경에 지금 옛날의 말을 사용하여 “ 재조를 ” 그랬어요. “ 그 재주를 잊을지어다.”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지 아니하거나 내가 너를 나의 제일 즐거워 하는 것보다 지나치게 아니할진데 내 혀가 내 입 천장에 붙을지어다. 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말입니까. 여럽분은 이렇게 말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내 혀가 입천장에 붙어버리면 여러분은 다시 말을 못하신단 말입니까. 그런데 왜 이렇게 이야기합니까. 이 사람들이 미친 사람들입니까. 이 사람들은 우리보다 더 말하는 것에 대해서 아주 심각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고대 사람들은 자기들이 말을 하면 그것이 그대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현대 사람들에게 있어서보다 고애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예를 들어서 누구를 저주하는 말이 아주 심각한 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면 그대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재 오른손이 수금을 잘 타던 사람들이 그것을 전혀 탈수 없게끔 되어진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요. 그런데 그것을 전혀 할수 없게끔 된다고 해 보십시요. 참 삶의 의미가 없어진다는 이야기가 되지요.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길인데 내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나의 삶을 생각하지 않을진데 우리는 그 지상에 있는 예루살렘보다 더 위대한 하늘의 예루살렘에 속해 있다고 했는데 그리고 우리가 그러한 자들이라도 했는데 내가 그 고한 없이 그저 나를 방관자로서 이렇게 되어지는 것을 바라보겠다 하면 우리는 이보다도 더 답답한 상황에 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직접 만나지 못했던 예수 그리스도를 멀리서 바라보면서 즐거워하던 이들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져다 주시는 구원과 그가 세우시는 교회에 대해서 이렇게 심각한 의식을 가졌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떠합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주시고 우리를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삼아 주시고 우리를 새로운 예루살렘, 위에 있는 예루살렘,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에 한 사람, 한 사람으로 삼아주셨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성경은 구구절절 옳은 이야기지만 나하고는 상관없습니다. 그러고 말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말씀이 구체적으로 우리한테 무엇을 도전해야 합니까. 여러분이 이야기를 들으시면서 마음속에 생각을 하셔야 합니다. 자 그렇다면, 그렇게 중요한 것이라면 나의 모든 삶이 교회와 관련하여서 이렇게 편성되어야 하는 것이라면 이것이 어떻게 나타나야 할 것인가. 그것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제가 맨 처음 말씀드릴때 이게 어려운 이야기 라고 했습니다. 다른 것이 어려운게 아니라 말은 쉽고 그러나 여러분이 으렇게 살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이 교회와 관련해서 내 삶을 산다면 재미없는 삶이 아닌가, 내 젊은 청춘이 다 없어지지 않을까. 그렇게 살 수 있겠는가. 내 삶도 바쁜데 언제 교회와 관련해서 내 삶을 살 것인가. 그런 생각들이 우리에게 꼭 들어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들의 모든 것을 다 앗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교회는 그렇게 요구해도 안될 것입니다. 교회는 여러분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대로 풍성한 삶이 되어질 수 있도록 여러분을 유도해 나가려고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일을 누가 하느냐, 우리가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를 교회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우리 모두가 그 일원으로 서 있는 이 교회안에 있으면서 우리가 이 교회를 그렇게 만들어 나가느냐, 아니면 우리가 요식행위를 하는 장소로 만들어 나가느냐, 그 선택은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하기를 우리를 이 굉장한 예루살렘보다 더 위대한 장소로 우리를 세우시고, 그 새 예루살렘의 일원으로서 우리가 어떻게 할것인가를 도전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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