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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새 시대를 여는 설교 (행 02:3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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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 설교의 가장 큰 핵심은 두 가지 사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주 되심이다. 그런 의미에서 설득과 논쟁이 없다. 이 부분에 있어서 ‘사실’이라는 것은 신앙에 어떤 역할을 하는가
베드로가 사도들과 신자들을 대표해서 그들의 신앙을 고백하는 것은 그 신앙의 근거가 ‘사실’이라는 것으로 힘을 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사실’이라는 것을 제시여 증명이 되면 누구나 회심하게 되는가
우리는 모두 분명히 ‘사실’ 위에 신앙을 가지고 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 ‘창조주 하나님이 계신다’ ‘영원한 나라가 있어 죽고 나면 끝이 아니고 죽음 뒤에 부활 생명이 있고 부활하여 영원히 사는 것과 영원히 형벌받는 일이 있다’는 사실이 우리 신앙의 가장 중요한 근거이고 기초이다.
그러나 이 부분이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 한 사람을 회심시키는 방법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아직도 기독교 신앙을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 베드로 설교의 중심 내용이 될 수도 있다. 말하자면 베드로가 그의 설교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증명하는 것이 그 설교를 듣는 사람들을 회심시키려는 목적으로 이 설교를 했느냐 하는 질문이 야기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삼천 명이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다.
우리는 여기서 너무나 쉽게 몇 가지를 엮어 버린다. 그 베드로가 성령충만 하더니 삼천 명이나 휘어 잡았다, 주님이 말씀하신 것 같이 고기를 낚던 어부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었다. 그러나 꼭 그렇게만 보이지는 않는다.
초대교회는 분명히 믿음의 산물이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베드로의 설교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한 물리적인 증거를 제시하는 데가 없다. 성경은 사실을 제시해서 회심을 의도하려는 그런 방법을 동원하고 있지 않다. 우리는 이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것을 오해하고 있기 때문에 많은 신자들이 불신자와 만나서 신앙적인 토론을 할 때 기독교 진리의 사실성과 객관성을 증명하려고 논쟁을 벌이다가 상처를 받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논쟁을 벌려서 이익을 본 일이 있는가 어떤 사람의 말처럼 지면 바보가 되고 이기면 원한만 산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살피려고 하는 것은 하나의 사실과 그 사실이 갖는 내용이 한 사람의 신앙고백이 되는 데에 커다란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즉 사실이라는 것과 그 사실이 갖는 내용이 신앙고백으로 나오는 것 사이에는 굉장한 차이가 있다.
사실을 인정해도 그 인정하는 사실이 얼마든지 신앙으로 이어지지 않을 수 있다.
만일 사실을 제시함으로 한 사람을 신앙적으로 항복시킬 수 있다면 성경은 복음서에서 끝나야 한다. 복음서의 내용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한 인간이 아닌 것이 분명해진다. 예수님은 많은 기적들을 통해서 분명히 사람 수준 이상이라는 것을 증명해 보이셨다. 그러나 그것을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인간이 누군가를 지적하고 자신의 하나님 되심을 증거하자 그를 붙잡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지 회심하지 않았다.
사도행전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스스로 오셔서 할 수 없었던 일들을 제자들에게 맡기신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하는 것에 대해 일차적인 오해를 벗어날 수 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우리는 늘 이렇게 생각한다. 닭 울기 전에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베드로가 성령충만을 받자 얼마나 담대해졌는가. 어떻게 능력이 있었으며 많은 열매를 맺는 사람이 됐는가 그러나 그렇게 따지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중풍병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신 것으로 얼마나 많은 영혼을 구하셨는가라고 되물어야 한다.
그러면 너희가 권능을 받는다는 것이 사실을 증명하는 일에 어떤 새로운 묘약이었는가 하는 질문이다. 우리가 성령충만을 받음으로 밀마암아 우리가 증거하는 일, 우리가 믿고 있는 신앙을 상대방에게 제시하는 데 어떤 작용을 했는가 하는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공생애 중에 일어났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런 차원에서 베드로의 설교를 다시 한번 보아야 한다.
베드로 설교의 특징은 회심과 구원을 얻게 하는 일의 결과에 대한 설득은 없다. 그러면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어떤 사실에 대하여 집중되고 있는 것인가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행 5:42)”
전도를 쉬지 않았다는 말을 하면서 그 이전에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를 쉬자 않았다고 나온다. ‘예수는 그리스도다’ 예수는 이름이고 그리스도는 직함, 직책이다. 그리스도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
이스라엘 민족에 있어서 기름부음을 받는 3대 직분은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이다. 기름부음을 받는 가장 큰 이유는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을 맡은 종’이라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메시야는 많다. 사무엘, 다윗, 엘리야가 다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런데 우리가 보통 메시야라 할 때 예수를 생각하는 것은 정관사를 붙인 ‘그 종’이다.
이스라엘 역사상에 나타나는 왕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이스라엘 민족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이루실 일을 위하여 보내진 그 시대의 일꾼들이라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이루실 전 인류의 구원을 맡을 종이다. 그래서 구약에서부터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계속 하나님께서 그 사람, 그 종을 보낸다는 예언을 계속하고 계신 것이다.
그리고 이 종은 우리를 구원할 뿐만 아니라 마지막 나팔 소리와 함께 재림하셔서 이 세상 역사를 끝내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여실 것이며 우리를 그곳으로 인도해 내실 것이다. 그 종은 다른 메시야들과 구분해서 정관사를 붙여 늘 사용한다. 그래서 다른 메시야는 희미해져서 이제는 예수로 됐고 신약에서는 붙여서 ‘예수 그리스도’로, ‘예수 기름부음 받은 자’라고 한다.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말 속에 들어 있는 뜻은 그 분을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라는 얘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하신 구원을 드디어 실천하셨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갖고 계셨던 그 계획과 뜻을 실천하여 이루셨다는 선포인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의 설교를 보면 ‘그랬으니 믿어라’는 말이 아직 등장하고 있지 않다. 하나님이 예수를 보내셨다. 그 동안 계속 예언하셨고 약속하셨던 메시야를 보냈다. 우리에게 약속한 구원을 이루셨다는 것이 그의 설교의 촛점이다.
오늘날 이 메세지는 교회에서 상당히 중요한 것인데 변질되어 꼭 세일하는 것과 같다. 구원은 우리가 반응해야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불쌍한 우리들, 죽어가는 우리들, 형벌 속에 있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이 찾아 오셨고 구원을 이루셨고 은혜와 긍휼과 자비 속에 우리를 초대하셨다. 드디어 이루셨다는 선포이다.
그래서 믿거나 말거나 구원은 성취되었다는 것이 베드로의 설교이다. 그런 의미에서 전도하느라고 싸울 필요가 없다. 왜 마치 우리가 노력하고 애쓰고 상대방이 반응해야만 천국도 생기고 하나님이 생기는 것같이 그렇게 하는가
베드로의 설교는 전혀 그런 식이 아니다. 그 반응에 대해서는 전혀 기대가 없다. 그것으로 인해 돌을 맞을지도 모르고 회개가 결실될지도 모른다. 그것은 하나님 쪽에서 일하시는 것이다.
베드로의 설교에는 삼천 명의 사람이 회개하고, 동일한 설교인 스데반의 설교에서는 그 결과가 돌로 맞는 것으로 나온다. 설교로 상대방이 납득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해방됐다 하는 식으로 ‘구원을 이루셨다. 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건지셨다. 이제는 부활 생명에 우리가 초대받았다’ 여기까지가 베드로 설교의 강조점이다.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그 다음이 우리인 것이다.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주시지 않았는데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물론 믿어야 되는 것은 심각한 것이지만 여기서 실패해서는 안되는 문제이다.
우리를 구원해 그의 자녀로 삼기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고 찾아오시고 우리의 구원을 이루셨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그 사실과 함께 하나님의 사랑에 찬 집념이 선언되고 있는 것이다. 그 집념이 오늘 우리의 실패를 뛰어넘는 강력한 사랑으로 우리를 붙들고 있는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성령강림은 해석되어져야 한다. 고린도전서에 성령강림의 가장 중요한 이유가 잘 설명되어 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의 없어질 관원의 지혜도 아니요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고전 2:1-16)”
성령이 오게 된 것은 이 사실을 우리의 신앙고백이 되게 하시는 것이다. 사실에 대한 증명이 부족해서 그 말을 받는 사람이 항복을 안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하여 반대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사실이라도 싫다.
그 마음을 변화시켜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하는 역할을 성령께서 하신다. 그러므로 성령의 오심은 그것이 사실을 사실되게 하는 지혜와 능력과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을 받아들이게 하는 영의 변화요 죽은 심령을 깨우치는 일이요, 그 마음을 주님 앞에 열게 하는 것으로서 그의 사역이 맡겨지는 것이다. 이것마저도 하나님의 은혜라고 베드로는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셨으며 그를 죽음 가운데서 부활시키셨다. 이것을 우리가 알도록 하기 위해서 성령까지 보내셨다”
앞의 이야기가 확정되지 않고 뒷 말을 하면 기독교는 값싼 물건이 되고 만다. 은혜가 없어지고 각자가 잘나서 구원받았다고 큰소리를 치게 된다. 기독교가 서슬이 퍼래서 기다리지 않고 은혜를 구하는 마음이 없어지면 기독교는 망하는 것이다. 우리가 가진 것 중에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은 것이 없고 우리가 깨달은 것 중에 우리의 실력으로 깨달은 것이 없다.
이 점을 인식하고 있는 바로 이 시점에서 한 영혼을 향하여 우리가 실력으로 도전하는 일은 없어져야 한다. 내 실력으로 한 사람을 항복시켜 내가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한 방법을 그에게 적용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사람을 향하여 가능성을 가진다. 그가 아무리 극렬하게 반대를 해도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여시면, 그 마음에 빛을 비추시면, 그 영혼에 은총을 허락하시면 누구나 돌이킨다. 그 산 증인이 사도 바울이다.
스데반을 죽이고 살기가 등등하여 다메섹으로 가다가 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것이다. 그러자 그는 그의 전 생애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가장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바뀐 것이다. 그러니 어떤 조건도 이유도 붙일 것이 없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며 은혜를 베푸신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며 그가 우리를 구원해 내신다는 것은 사실 성경이 증명하고 싶은 최대의 메세지이다.
여러분 주위에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를 못 믿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그들을 위한 안타까움이 있는가 가서 싸움하지 말고 기도하라. 그리고 예수 믿는 여러분이 잘나서 믿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말미암아 믿는 것임을 증명해 보여라. 잘나서 믿는 것 같은 얼굴을 지우지 않는 한 아무도 예수를 믿지 않는다.
왠가 여러분이 잘나서 믿는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으니까 믿으면 그 사람에게 지는 것 같아서 믿기 싫다는 것이다. 자존심 상한다는 것이다. 여러분의 실력으로 믿은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러분이 남달라서 하나님이 선택했다는 것이 베드로 설교의 핵심이 아니다. 베드로가 지금 사람들 앞에서 자기는 다른 사람이라고 재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구원하셨다. 그래서 예수를 보내셨고 성령을 보내셨다. 여러분이 하고 싶은 일, 여러분의 욕심을 위해 능력을 달라고 하지 말라. 어떤 한 영혼이 불쌍히 여겨질 때 여러분이 가서 그 사람을 꼭 잡아올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의 심령을 깨우소서. 성령님이여. 그의 마음에도 침투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사도 베드로의 첫 번째 설교였다.
이것이 새 시대를 여는 설교로서 성경에 기록된 대단한 내용이다. 하나님이 이 일을 시작하셨고 이루셨고 이루고 계신다. 우리가 사는 인생 동안에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문을 여셨고, 이 역사를 지속시키는 동안 세상이 우리에게 못 할 짓을 하겠지만 그러나 결국은 그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해 내시는 일을 중단하시지 않을 것이다.
베드로가 부름받고 스데반이 부름받듯이, 사도 바울이 부름받고 또 누가 누가 해서 우리까지 오지 않았는가. 앞으로도 주께서 구원의 문을 열어 놓고 계시는 동안에 또 누가 누가 구원을 얻을 것이다.
우리가 어느 자리에 들어와 있는 것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구원이 무엇인가, 그 사랑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늘 마음 속에 간직해서 감사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승리를 놓치지 말자. 그리고 겸손을 놓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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