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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허다한 무리와 예수 (눅 14:2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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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지금까지 누가복음 14장을 통하여 예수의 의도를 정확하게 읽었다면 예수는 율법적이지도 않은 인간이며, 인간 세상이 환영하는 부와 명예를 두루 갖춘 괜찮은 인간도 아니었다. 뿐만아니라 예수는 인간의, 인간이기 때문에 당할 수 밖에 없는 아픔들에 대하여 무섭도록 냉정한 일면을 보여 주었다. 예수가 인간적인 아픔을 조금만이라도 가지고 있었더라면, 자신이 장가 들었기 때문에 남의 잔치에 참석 못한 사람더러 그처럼 냉혹하게 대할 수는 없는 법이다. 예수가 정말 하나님의 심정으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 인간 세상에 오셨다면 왜 그들을 좀더 관용하지 못하고 좀더 그들의 입장에서 그들을 생각할 수 없었을까 우리가 그 현장에서 예수의 말씀을 들은 사람이라면 과연 그 예수를 뒤따라 갈 수 있었을까 예수의 얘기를 들으면 우리는 누구나 독선적이고 참람한 그의 모습을 느낄 수 있다.

여기서 내가 우리라는 표현을 쓴 것은 육신이 부활하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는 그런 예수를 만나는 사람들을 일컬음은 아니다. 이 우리는 어디까지나 말씀이 육신이 된, 하여튼 육신인 예수, 설흔살 남짓된 한 시골 사람의 모습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을 일컬음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저 기라성 같은 예루살렘의 신학자와 목사들의 견해에 아랑곳 없이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예수를 객관적인 눈으로, 기독교라는 안경을 벗어던진 눈으로 바라볼 수 있다.

이렇게 있는 그대로의 예수 앞에서, 있는 그대로의 예수를 거부하지 않고 수용할 수 있겠는가 때로는 지나치게 논리적이고 때로는 얼음물 같이 차디찬, 인간적인 따뜻함이나 연민 같은 것은 보이지 않는 예수를 정말 찬송하며 따라 갈 수 있을 것인가 그럴 수 없어야 정상이다. 오늘날 예수를 믿고 있는 사람들도 예수의 이런 면을 제대로 이해하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다만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니까 그럴 수 있었다고 쉽게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처럼 그렇게 냉정해서도 안되며, 예수처럼 그렇게 천방지축 안하무인이어서도 안된다고 생각한다.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삶은 대체로 이런 수준이었다. 스스로 하나님을 잘 믿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겐 책망과 냉소로 나타났고 오직 하나님 앞에 자신을 바칠 수 없었던 죄인들에게만 부드럽고 따뜻한 긍휼로 나타났다. 그래서 누가복음 14장의 부르심에서도 예수의 주된 관심은 너희가 과연 가난한 자들이며 소경, 혹은 병신들이냐에 있었다. 가난한 자들이 아니다보니까 밭을 사야할 필요가 있었으며, 밭을 사느라고 결국은 하나님의 청하심을 거절하는 인간들의 모습이 바로 너희들이라는 책망이 14장 전편에 흐르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책망이 있은 다음에 우리는 어떻게 하는 것이 예수의 심정을 바로 헤아리고 그의 뜻에 맞는 삶을 사는 것이 되겠는가 단지 예수를 환호작약하는 것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인가 당신이야말로 하나님의 뜻으로 온 사람이라고 예수를 칭찬하고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을 비난하기만 하면 문제는 저절로 해결되는가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 우리는 다시 예수 당시로 돌아가야 한다. 예수께 이런 저런 말씀을 들었던 당시 사람들은 예수에 대하여 어떻게 반응했는가 구태여 타산지석(他山之石)을 들먹일 필요도 없이 그 당시 사람들의 반응을 이해하는 것이 우리의 삶을 바로놓는 첩경이 된다.

허다한 무리가 함께 갈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Suneporeuvonto de; aujtw' o[cloi polloiv, kai; strafei;ei]pen pro;aujtouv) 여기 de;(데)라는 접속사는 일반적으로 그러나의 개념이 강한 단어이다. 번역 성경들은 대부분 이 de;(데)를 생략하고 있으나, 내 생각으로는 이 한단어가 그 당시 예수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의 심리 상태를 잘 묘사하고 있다고 본다.

누가복음의 저자가 이 de;(데)를 사용하는 것은 단순히 문맥을 매끄럽게 하고자 함이 아니다. 그러면 무엇을 말함인가 예수는 지금 우리가 하나님의 잔치에 나아가기 위해서는 우리의 가장 소중한 밭이나 소는 말할 것도 없고, 아내나 남편까지도 포기해야만 한다는 인간 실존의 엄숙한 결단을 요구하고 나섰다. 그리고 사실 이런 요구 앞에서 순순히 그 요구대로 따라 산다는 것은 보통 인간으로서는 엄청나게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 당시 예수께 말씀을 들었던 허다한 무리들은 예수를 따라갔다. 정말 인간들이 이만큼 순수하고 이만큼 하나님에 대하여 목말라 할 수 있을까 누가복음 저자가 말하는 이 de;(데)는 이들이 예수를 따라간 그 동기의 순수성을 의심하고 있는 것이다. 도저히 예수를 따를 수 없는 상황에서 그러나 그들은 예수를 따라갔다. 그것도 한 두 사람이 아니라 허다한 무리가 되어 예수를 따랐다.

그러나, 허다한 무리가 예수를 따라 갔습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사람들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

예수를 따라가고 있는 유대인들이 본 것은 단지 병을 고치는 예수의 신기한 능력이요, 들은 것은 그동안 자기들 위에 군림하던 바리새인, 서기관, 그리고 대제사장들을 꼼짝 못하게 하는 예수의 논리와 언변을 들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를 통하여 하늘을 날으는 수퍼맨이 되었으며, 또한 예수를 통하여 깨달음이라는 지식의 허영을 구경했을 뿐이다. 소경이요 병신이 자신의 얘기가 아니었으며, 밭을 버리고 소를 버려야하는 것이 자기 삶이 아니었다. 예수를 따르는 것이 이렇게 엄청난 실존적 결단을 요구한다는 사실은 덮어두고, 그저 병 고치는 그의 능력이 좋고 율법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그의 진리가 좋았을 뿐이다.

이럴 경우 예수의 병고침은 무당의 푸닥거리와 다름이 없고,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는 개판치는 삶과 다름이 없다.

누가가 de;(데)라는 접속사를 쓰는 뜻은 그들이 예수의 참모습을 놓쳤다는 뜻이다.

그래서 예수를 따라 갈 수 있었다는 뜻이다. 그랬기 때문에 예수의 그 다음 행동이 등장한다.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허다한 무리가 예수의 참 모습을 놓치고 껍데기에 미혹되어 자신을 따라오고 있음을 아신 예수께서 가던 걸음을 멈추고 그들을 향하여 돌이키신 장면이다. 그들이 정말 예수의 마음을 이해하고 예수께서 가고자 하는 길을 바로 보았더라면 무엇 때문에 예수가 가던 걸음을 멈추고 그들을 향하여 돌아 섰겠는가 인간세상에서는 그저 아무나 많이만 오면 좋다. 다다익선(多多益善)은 괜한 말이 아니다. 허다한 무리가 줄을 지어 자신을 따라오고 있다면 얼마나 기분이 좋을 것인가 사람들은 무리를 모으지 못해서 안달이지, 자원하여 모이는 무리를 쫓아 버리지는 않는다. 유대인들은 지금 예수의 능력과 말씀에 놀라, 자원하여 그에게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누가 이런 유대인들을 향하여 예수를 믿지 않은 사람들이라고 깎아 내릴 것이며, 누가 이들만큼 열렬히 예수를 환영했다고 자부할 수 있겠는가 여기서 한번쯤 베드로를 비롯한 예수의 제자들의 심정을 생각해 보자. 사실 베드로만 해도 상상을 초월할 만큼 대단한 결단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예수를 언제 보았다고, 어느날 고기 잡다 만난 그 예수가 나를 따라 오너라고 말한 그 한마디에 배도 그물도 다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간 위인이 베드로였다. 베드로는 과연 무슨 심정으로 예수를 따라 나섰을까 누가복음 14장의 본문에 나오는 유대인들의 동기와 본질적으로 같았을까 아니면 좀 달랐을까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잡는 것을 업으로 일생을 살아온 베드로가 밤을 꼬박 새면서도 고기 한마리 잡지 못해 헤매고 있을 때, 예수를 만난다. 어디서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는 모르지만 그가 말하는 대로 장난삼아 아니면 시험삼아 그물을 던져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뒤에 벌어진 일은 우리 모두 아는 얘기이다. 그렇다면 베드로가 배와 그물을 몽땅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 가게된 배경에 예수의 이러한 능력이 깔려 있지는 않았을까 아무도 그렇지 않다고 단언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베드로는 배와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 간것이 아니다. 베드로는 배와 그물을 버린 대신 예수를 얻은 것이다. 다시말하면 베드로는 그동안 자기 생계를 지탱해오던 어부라는 직업을 버리고 새로운 직업인 예수의 제자가 된 것이다.

시쳇말로 하면 매일같이 하한가나 기록하는 수산업 주(株)를 팔고 새롭게 상장되어 연신 상한가를 기록하는 예수 주식회사의 주(株)를 다른 사람들 보다 조금 일찍 샀을 뿐이다.

그런데 이런 베드로 앞에 예수를 따르는 사람이 인산인해로 늘어나는 것이다. 이는 다시말하면 자기가 산 그 주식을 사고자 늘어선 사람이 허다하다는 뜻이다.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그야말로 표정관리를 해야 할 만큼 기분이 좋았을 것이다.

암, 잘했지. 잘했고 말고. 사람은 자고로 내일을 내다 볼 줄 알아야 하는 법.

사양산업인 고기잡이에 매달려 있었다고 해보지. 오늘의 이런 위치가 보장 되었을까 어림 없는 일이다. 비록 배와 그물을 다 버리는데 일말의 망설임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와서 생각하면 잘한 일이지. 내가 다른건 잘 몰라도 사람 하나는 잘 본다는 말씀이야. 이제 이렇게 많이 따르는 무리를 잘 조직하고 이들을 잘 이용하여 로마 군대를 물리치고 헤롯 임금도 쫓아내고 예수께서 임금이 되실 일만 남았다. 그러면 설마 영의정 자리가 어디로 가겠는가 제자들은 하나같이 요따위 생각들만 하고 있었다. 세배대의 두 아들(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 얘기를 통해서 제자들의 이러한 생각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그때에 세배대의 아들의 어미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엇을 원하느뇨 가로되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마20:20-24) 누가 먼저, 어떻게 예수로부터 점수를 따서 영의정이 되고 우의정이 될까 하는 것이 베드로나 요한, 야고보 같은 제자들의 심정이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제자들로서야 예수를 따르는 무리가 많아지는 것은 쌍수로 환영할 일이었지 그들의 마음을 잃을 일을 한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제자들로서는, 예수가 너무 지나치게 백성들을 책망하거나 신앙의 허위를 지적하는 것은, 그들의 실상이 그렇다고 하더라도, 복음을 땅 끝까지 전파하고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앞당겨야 하는 자기들의 입장에서 볼 때 전술적인 잘못이 아닐 수 없었다. 될 수 있으면 모나지 않게, 될 수 있으면 따뜻하게 민중을 대하여 그들의 마음을 잃지 않는 것이 현명한 처사라고 믿었다. 그러므로 예수를 잘 따르고 있는 민중들을 향하여 돌이키는 예수의 모습은 제자들의 가슴을 많이 아프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유대인들의 그러한 추종을 단호히 꾸짖었다. 너희들이 왜 나를 따라 오느냐 나를 따라 오려거든 밭도 소도 남편도 아내도 버리고 와야 되는 것임을 왜 모르느냐 그러나 너희들은 지금 밭을 얻고 소를 얻고 나아가서는 천국을 얻고 목숨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고 있다. 돌이키라. 돌이켜야 한다.

이런 예수의 마음이 자기를 따르는 허다한 무리를 향하여 몸을 돌이키게 했다.

그리고 입을 열게 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다른 글에서도 많이 언급된 내용이지만 우리가 예수를 믿고 예수를 따른다는 말의 의미는 이런 것이다. 즉 자기 부모를 미워하는 것이 예수를 믿음이요, 자기 목숨을 버리고 자신의 십자가를 지는 것이 예수를 따름이다. 그러나 세상에서는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 제일가는 윤리 아니던가 어디 세상만인가 십계명에도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되어 있지 않는가 그렇다면 십계명의 네 부모를 공경하라와 자기 부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이라고 말하는 예수의 말씀은 어떻게 조화될 수 있는가 즉 성경 말씀과 부모님 말씀이 서로 상충될 때 우리는 어느편 말을 들어야 하는가 부모님 말씀이 성경적이 아닐 때에는, 부모님 말씀을 버리고 성경 말씀을 따르면 되는가 그럴 경우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십계명을 어긴 것이 되지 않는가 고르반(막7:11)이란 다른 것이 아니다. 부모님 말씀과 성경 말씀이 서로 다를 때에는 우리가 부모님 말씀을 어기더라도 십계명을 범한 것이 아니라고 가르치는 그 가르침이 곧 고르반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란 말인가 그렇다고 성경말씀을 버릴 수도 없지 않은가 신앙이란 육신의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 아니다. 신앙이란 육신의 부모는 더 이상 내 부모가 아니라는 선언이다. 그렇다고 육신의 부모를 무시하거나 내다 버리라는 얘기는 아니다. 비슷한 시대에 태어나 서로 돕고 살다 가는 동반자요, 아픔을 나누는 형제일 뿐이다. 그래서 예수도 다음과 같이 천하의 불효자식 같은 발언을 했다.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 (마23:9) 누가 내 모친이며 형제들이냐 하시고,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가라사대 나의 모친과 나의 형제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마12:48-50) 이 말씀은 기존의 아버지나 어머니, 형제, 자매 등의 관계가 깨어짐을 의미한다. 이 관계의 깨어짐이 곧 부모를 버림이요, 형제 자매를 버림이다. 예수와의 관계는 기존의 관계로부터 벗어난 자리에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라 이름하는 곳에서 예수의 말씀을 빙자하여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 자매간 우애있게 사는 것이 신앙의 기본이라고 설명하고 있으니 딱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예수는 지금 허다한 무리를 이루어 당신을 따르고 있는 우리에게 돌이키사 이 말씀을 하신다. 부모를 버리고 처자를 버리고 형제 자매를버리고, 그리고 자신의 목숨까지 버릴 것을 요구한다. 이러면서까지 우리가 예수의 제자가 되어야 하는가 도대체 무엇을 하자고 예수를 따르며, 내 목숨을 버리고서 얻는 구원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우리는 그저 아무 생각도 없이 희희낙락 예수를 따라만 갈 일이 아니다.

예수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삶을 살 수 없으면 예수를 따른다고 했던 모든 일이 물거품이 되고 만다. 복음서 초반에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랐던 베드로가 복음서가 다 끝나고 부록같이 붙어 있는 요한복음 21장에서, 예수로부터 다시금 나를 따르라(요21:19)는 말씀을 듣게 된 원인이 무엇인가 그야말로 이런 일은 말세를 만난 우리에게 거울이 되고 경계가 된다. 우리의 삶은 그러나 예수를 따르는 허다한 무리인가 아니면 그들을 향하여 돌이키는 예수인가 부모를 버렸는가 꿈같은 얘기이다. 그러니까 오늘날 기독교는 허다한 무리 신드롬을 벗어나지 못하고 몇천명 모이는 교회, 몇만명 모이는 교회 운운하며 허다한 무리를 자랑하고 있다. 예수가 주님이 아닌, 민중이 주님인 교회. 그러면서도 인내천(人乃天) 같은 얘기엔 발끈하는 교회. 어쩌자고 이렇게 자가당착인가 오늘도 예수는 어디서 이 추운 밤을 지내실까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거처가 있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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