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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형통 이후를 조심하라 (창 39: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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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39장의 본문의 핵심은 무엇이지요 요셉이 유혹이 있을때 거절을 하고 또 유혹이 있는데 거절을 하고 하는 내용들이 나와있습니다. 39장 6절에 이렇게 나와있지요. 6절을 보시겠습니다. 주인이 그 소유를 다 요셉의 손에 위임하고 자기 식료 외에는 간섭하지 아니하였더라 요셉은 용모가 준수하고 아담하였더라. 애굽의 친위대장, 경위대장 보디발의 집에서 가정총무가 되었습니다. 노예가 이제 상승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올라갔습니다. 형통입니다. 더더구나 요셉을 향하여 뭐라고 하냐면 용모가 준수하고 아담하였더라. nsb성경을 보니까 joseph is hansome. 그랬습니다. 어! 특별히 히브리어를 보니까 체격이 좋고 뛰어났더라고 그럽니다. 얼굴인 관옥같습니다. 요즘말로 하면 장동건이. 몸매는 권상우 이상입니다. 웃는 분들은 다 수상한 분들입니다. 그리고 디카프리오같은 몸매를 가졌습니다. 참 아름다운 남자였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신학교에서 공부를 할때 외국사람들은 정말 의문이 하나있는데 이 중국사람하고 한국사람구별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것 어렵지 않다. 뭐가 어렵지 않나 중국사람과 한국사람과 일본사람 구별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어떻게 구별을 합니까 제가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중국사람들은 참 부유하게 보인다. 얼굴이 이렇게 둥그렇게 돈처럼 생겨가지고 돈이 있어 보이는게 중국사람이다. 일본사람은 안경도 많이 쓰고 공부많이 한 사람처럼 보인다. 지성인처럼 보인다. 한국 사람은 잘생긴 사람이 한국사람이다. 요셉이 잘생겼었습니다. 형통입니다. 오늘 우리가 첫 번째 깊이 생각할 것은 아름다움에는 유혹이 있습니다. 아름다움에는 위기가 있습니다. 오늘 제가 깊이 생각하겠습니다. 아름다움에는 유혹이 따르고 형통에는 위기가 따릅니다. 이것은 아름다움에 따르는 독특성입니다. 고대의 애굽이나 21c한국이나 할것없이 아름다운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특별할 기회의 문이 열려 있습니다. 이시대의 문화는 아름다움을 칭송하는 문화입니다. 요즘 젊은이들 이런 얘기하지요. 얼굴 못생긴것은 용서할수 있어도 못생긴 폭탄은 용서할수 없다. 젊은이들의 인식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성경의 역사를 보면, 세상의 역사를 보면 아름다운 사람이 얼마나 위험을 갖고 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신 것입니다. 아름다운 꽃과 아름다운 과일에 벌레가 제일 먼저 찾아드는 것입니다. 자만심의 벌레입니다. 하나님의 의지하지 않는 벌레입니다. 자기 아름다움만 의지하고 기도안하고, 자신의 육체만 신뢰하다 망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세상의 가장 아름다운 탑 모델. 탑 슈퍼모델 치고 행복한 자가 없습니다. 모두가 다 마약과 동성애에 찌들어 있습니다. 저는 늘 강조하듯이 우리 육체는 좀더 대우하면 대우할수록 점점 버릇이 없어지기 때문에 우리가 이 아름다움에 치명적인 위기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프란시스는 우리의 육체를 고집스러운 당나귀에 비유했습니다. 당나귀는 처음부터 버릇을 들여서 키우지 못하면 주인의 원하는 길이 아니라 당나귀가 원하는 길대로 간다는 것입니다. 당나귀같은 이 육신을 길을 들여서 유용하게 사용하느냐 아니면 이렇게 고집스럽고 당나귀같이 육신에게 끌려가느냐는 육신을 처음부터 어떻게 길을 들이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아름다움에는 치명적인 위험이 따릅니다. 요셉의 증조할아버지였던 아브라함이 기근을 당해서 애굽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때에 창세기 12:11-14절까지 보면 이 아브라함이 이 아내 사라에게 이렇게 말을 합니다. 자네는 아리따운 여자라. 주관적인 것이 아니라 진짜입니다. 아리따운 여자라 내가 당신 때문에 목숨이 부재하기 어려울지 모르니 애굽에서는 아내라고 하지 말고 누이라고 하자. 그래야 내가 목숨을 부재하리라. 여러분! 아름다움은 목숨을 왔다갔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애굽에 내려갔을 때 창12:14에 애굽의 모든 사람이 사라의 심히 아리따움을 보고 어떻게 했는가 그 여자를 보고 바로 황제 궁전에 바로 데리고 갔습니다. 세관검사도 안하고. 치명적인 위기입니다. 압살롬을 생각해 보십시오. 압살롬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흠을 찾을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치명적인 아름다움 이었습니다. 아름다움이 가져다 주는 독특함입니다. 만약에 요셉이 준수하지 않았더라면 요셉이 준수함이라는 매력이 없었더라면 이 스토리는 성경에 기록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자식이 잘생겼다면 너무좋아하지 말고, 아니! 자신이 아니라 자식입니다. 예수 잘 믿게 해야 합니다. 저는 우리교회를 보니까 선남선녀같은 자녀들이 많고 또 어른들 가운데도 그런 분들이 많은데요. 여러분! 잘생겼는데도 예수 안믿으면 이것은 치명적인 위기입니다. 감당을 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 이 예배에 예수 잘 믿는 것. 너무 많은 것을 감사를 합니다. 우리 아이들은 잘생긴 아이들. 육체가 하자고 하는것은 망한다는 것을 알고 가슴에 새겨 주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이 아름다움이 갖는 치명적인 위기를 좀더 살피겠습니다. 이 보디발의 아내가 이 요셉의 아름다움을 보고 가만두지 않았습니다. 그야말로 벌레가 되었습니다. 요셉을 갉아먹기를 마음에 원하고 요셉에게 다가가기 시작을 했습니다. 7절에 그 후에 그 주인의 처가 요셉에게 눈짓을 했습니다. 여러분 이 요셉을 유혹한 여자는 못생긴 여자겠습니까 잘생긴 여자겠습니까 못생긴 아줌마다 이런사람도 있지만 제가 보기에는 당시 애굽의 최고의 친위대장은 아무나 할 수가 없었지요. 나름대로 갖춘 여자가 아니면 안됩니다. 그리고 돈도 많았고 권력자의 아내였기 때문에 요즘말로 말하면 자기 몸매를 열심히 가꾸었을것입니다. 헬스클럽도 나가고. 얼굴관리도 하고 해서 아마 요염한 들릴라 같은 여자였을 것입니다. 친위대장이니까 얼마나 바뻤겠어요. 황제의 그림자 노릇을 하다보니까 밤낮없이 하다보니까 가정일에 소홀할 수밖에 없고 아내에 대해서는 시간을 못내어 주니까 아내는 가정을 소홀히 하는 남편앞에서 불만히 쌓이고 피는 뜨거워 졌고 불만이 가득하게 되어서 이렇게 요셉을 유혹하게 된 것입니다. 어떻게 유혹을합니까 여기에 7절에 주인의 처가 눈짓을 했다는 것을 히브리어 원어로 보니까 그녀는 그 눈을 요셉에게 계속 두었다. 이거에요. 이것은 계속 요셉을 향해서 깊은 곤심을 두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얼마나 끈질기고 지속적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10절 보세요. 이 여인이 날마다 청했습니다. 그래서 요셉이 가는 곳 마다 따라 다녔습니다. 요셉이 정문에 가 있으면 그 앞에 미리 가있어 가지고 헤에헤! 웃고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코너를 돌면 코너 앞에서 피시시 웃고 있는 것입니다. 날마다 끊임없이 요셉을 추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치명적이 유혹이었습니다. 오늘 한국사회가 어렵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정치를 욕하고 규탄하고 다 합니다만은 사실은 저는 이것보다 더 어려운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제가 지금 통계를 보니까 한국 크리스찬 1/4이 십계명을 범했습니다. 미국은 만 18세. 한국으로 말하면 우리나라 나이로 치면 대학교 1학년 정도 되는 크리스찬 가운데 7계명을 범했다고 합니다. 그 43% 7계명을 범한 아이들 가운데 90% 아이들이 구원의 확신이 있다고 말을 하는 아이들입니다. 이 시대가 우리를 쉽게 놓아주지 않는 시대입니다. 치명적인 유혹이 뒤따르는 시대입니다. 이것은 마치 코타르같아서 우리의 뇌를 끈적끈적하게 만들고 우리의 뇌를 치명적으로 유혹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혹을 했습니다. 끈질기고 지속적이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음녀에 대한 말씀을 생각나게 합니다. 잠7장 9절을 보니까 어떤 여자가 젊은이를 유혹을 하는데 뭐라고 하느냐면 내 남편은 멀리 떠나있으니까 너는 나하고 즐기자. 이렇게 해서 유혹을 합니다. 드디어 절호의 기회를 이 보디발의 아내가 찾았습니다. 11절. 그러할 때 요셉이 시무하러 그 집에 들어갔더니 그 집 사람은 거기에 하나도 없었더라. 여러분! 이것은 그 집에 우연히 하나도 없었던것이겠습니까 아니면 계획된것입니까 계획된것입니다. 그 큰집에 아무도 없을수가 없지요. 치밀하게 계획 된것입니다. 교활하고 야비하고 경렬한 시험이었습니다. 우리 젊은이들은 온갖 지뢰밭속에서 고통을 당합니다. 저는 오늘 젊은이들에게 이것을 철저하게 나중에 얘기하려고 합니다. 이 예배는 젊은이들보다 어른들이 더 많이 계시니까요. 여기서는 제가 조금 생략하고 이따 젊은이들 예배는 제가 상당히 심하게 다루려고 합니다. 여러분! 유감있습니까 오늘 여러분! 자식 안나온 사람있으면 이따 5,6부에 보내주세요. 제가 오늘 반-. 그다음에는 말 안하겠습니다. 오늘 아이들. 젊은이들 바로 제대로 되게 하는.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말씀을 하려고 합니다. 끈질기고, 치명적이고, 교활하고 야비합니다. 사랑의 교회 앞에만 가면요 별 간판들이 다 있어요. 미인있음. 나는 미국 사람인줄로 알았습니다. 당시의 이방여인은 음란과 부도덕성이 지배를 했습니다. 어떤 여인은 정부가 남편외에 정부가 몇몇씩있었습니다. 한남자에게만 충성하는 여자를 찾기가 그렇게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그당시 이런 자료가 있습니다. 어떤 한 바로가 한 남자에게만 충절을 지키는 남자가 없나 해서 찾아보았더니 천연기념물 수준이었습니다. 그래서 한명 찾았는데 너무 감사해서 그 유부녀를 자기 아내로 삼아 버렸습니다. 그 정도의 문화였습니다. 보통 사람같으면 이기기 힘든 유혹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요셉은 위치가 노예였습니다. 주인의 아내가 격렬하게 끈질기게 요구를 하는데 이겨내기가 참으로 힘이 들었을 것입니다. 노예는 그 당시가 애완동물 수준 아닙니까 그리고 이 주인의 아내의 말을 들어주었을 때에는 반사의 이익이 있었습니다. 신분이 보장되었을 것이고 출세의 길도 허락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도 요셉은 이겨내는데 그게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요셉은 아버지의 집에서 떠나와 홀로 있는 외로운 상황에 있었겠지요. 외로움은 유혹의 통로입니다. 그래서 지방에서 올라와 있는 홀로 있는 아이들. 위험한 아이들 많이 있습니다. 외로움 요셉. 동일하게 갖고 있었습니다. 그때가 20대 초반이었다고 하는데 20대 초반의 혈기 방자한 시기였습니다. 그리고 질풍노도의 시기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입니다. 요셉은 성경도 없었고 그당시 교회도 없었습니다. 요셉을 경건하게 인도해주는 지도자나 멘토도 없었습니다. 그런상황에서 어떻게 이렇게 치밀한 유혹을 이겨낼수 있었을까요 오늘 이것을 우리의 삶에 천천히 적용하기를 바랍니다. 9절을 보기 바랍니다. 이 집에는 나보다 큰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 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 뿐이니 당신은 자기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 형통 이후를 조심하려면 유혹을 이기는 거룩의 능력을 회복해야 하는데 이 유혹을 이기는 거룩의 능력을 위하여 첫 번째 원칙이 뭡니까 명확한 원칙을 세우는 것입니다. 금할것과 그렇지 않을것을 명확하게 소위 프린스플 원리화하는 것입니다. 요셉이 명확하게 원리화 한 것이 무엇이지요 당신은 주인의 아내이기에 되는 것과 안되는 것을 명확하게 구분을 했습니다. 그런데 되는 것과 안되는 것을 구분하는 게 뭐였습니까 하나님앞에서 내가 어떻게 사느냐가 기준이었습니다. 하나님앞에서 내가 어떻게 살겠는가 하나님을 먼저 생각했습니다. 오늘 이 요셉의 문제를 앞에 놓고 우리는 다윗을 놓고 생각을 하면 조금더 이해를 할수 있을 것입니다. 사무엘상을 보면 다윗은 밧세바를 놓고 동침하고 간음을 했습니다. 요셉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이었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시편 51편에 다윗이 범죄한 다음. 회개의 시를 써놓았는데 시편 51편을 보면 우리가 금하는 것과 하나님앞에서 원칙을 세운다는 것이 어떤 뜻인지를 확인 할 수 있습니다. 다윗이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해 주시옵소서! 이런 7계명. 이런 종류의 범죄는 다윗의 입장에서 볼때는 우슬초로 정결하게 해야 한다고 깨달았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다윗은 지금 황제입니다. 목욕을 하고 시녀과 완전히 옷을입혀 주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 비하면 정결한 몸을 갖출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범죄를 했을때는 다윗의 마음속에는 다윗은 그렇구나! 이런 범죄를 했을때는 내 몸이 더러워지는 것이 아니고 내 영혼이 더러워지는것이구나! 내 영혼이 더러워지는 것이구나! 온 몸이 아무리 육신적으로 깨끗해도 영혼이 더러워지는 것을 어쩔수가 없어서 하나님 아버지 내 영혼의 더러움을 방지할 수 있도록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이것이 다윗의 마음이었어요. 또 하나 다윗이 뭐라고 고백한 줄 아세요. 내가 주께만 범죄하였다고 했어요. 세상사람들이 볼 때는 범죄가 아니라고 할 지 모르지만 이런 범죄는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거에요.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을 깨달았어요. 오늘 저와 여러분은 금할것과 금하지 않아야 할 원칙을 세움에 있어서 이런 범죄가 내 몸이 아니라, 내 영혼을 더럽힌다!. 이런 종류의 범죄는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는 이 사실을 철저하게 확증하게 되면, 우리는 흔들림 없는 원칙을 세우는 삶을 살아 갈 수가 있습니다. 저는 청년부들을 가르치면서 세운 원칙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런 원칙을 세운게 있었습니다. 청년의 시기. 질풍노도의 시기. 그 유혹에 물들기 쉬운 그 시기에 저희들은 그 당시에 욥기 31:1-

2. 자주 우리 마음속에 되뇌이며 원칙을 삼았습니다. 욥기 31:1-2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욥이 이렇게 말을 합니다. 내가 내 눈과 언약을 세웠나니 어찌 처녀에게 주목하랴 그리하면 위에 계신 하나님의 내게 내리시는 분깃이 무엇이겠으며 높은 곳에서 전능자의 주시는 산업이 무엇이겠느냐 내가 결혼한 유부남으로서, 내가 내 몸과 마음의 언약을 언약이라는 것은 원칙입니다. 이 원칙을. 내가 어떻게 처녀에게 주목하랴 그럴때 하나님이 내게 내리시는 분깃이 무엇이며 하나님이 내리시는 여러분! 아멘 되기를 바랍니다. 저희에게는 그 당시 우리에게는 원칙이었습니다. 원칙을 지키는 것이 유혹이 이기기 위한 가장 중요한 첫걸음입니다. 수 십년동안 기독교를 연구한 조지갤럽은 기독교가 당면한 가장 큰 도전중에 하나가 원칙을 가르치지 않는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조지 갤럽이 말하는 이 말씀은 오늘날 성경에서 말하는 원칙을 어기고 세상의 유혹과 부패와 타협하는 비롯되었던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를 유혹에서 이기게 하는 것은 요령이 아니라 기본이면 테크닉이 아니라 원칙으로 돌아가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원칙입니다. 원칙을 하나님 앞에서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저도 이런 말씀을 나누지만 이게 쉬운게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이 원칙을 세우되 그 다음에 강력하게 대처해야 합니다. 원칙을 세우고 강력하게 대처를 합니다. 10절에 나와 있지요. 날마다 여인이 뭐지요. 날마다 청했어요. 날마다. 이 여인이 정말 할 일이 없었나봐요. 날마다 요청을 하는 것을 보면요. 욕망이 우리의 이성을 파괴하지 않도록 강하게 대처해야 합니다. 욕망이 우리의 신앙을 컨트롤하지 않도록 강한 대처가 필요합니다. 단호하게 대처해야 합니다. 요셉이 그 옷을 자기 손에 버려두고 도망할 정도로 강하게 대처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여인이 나를 붙자고 나와 동침하자. 꽉 잡아 챘습니다. 요셉이 자기 옷을 버려두고 도망을 쳤습니다. 정말 힘들었을 것입니다. 요셉은 바보가 아니잖아요. 그 옷을 버려두고 도망을 갔을 때 어떤일이 벌어질것이다. 어떻게 될 지 알았을텐데 옷을 벗어두고 도망을 갔습니다. 강력한 대처입니다. 요셉의 마음에는 차라리 내 성품을 잃어버리기 보다는 , 내 인격을 버려두기 보다는 옷을 잃어버리기 보는게 낫겠다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강력하게 대처를 했습니다. 강력하게 대처할수 있는 이유가 뭐냐 내면의 미끼에 현혹되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그 유혹이 자기 내면의 세계에서 먼저 일어나는 것을 미리 알았기 때문에 내면에서 일어나는 유혹을 거기에 현혹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야고보서 1장 14-5절을 보니까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내 마음속에 생긴 이 마음은 미끼걸린 낚시 바늘과 같습니다. 요셉은 미끼달린 그 유혹의 낚시 바늘을 덥썩 물지 않았습니다. 어미고기가 그 자식고기에게 거 있을때 낚시 바늘올 때 그것 물면 안된다. 그렇게 얘기를 해줘도 그 자식고기가 이것은 잔소리에 지나지 않아. 나이 많은 분들의 잔소리에 지나지 않아! 이렇게 생각을 하고 낚시바늘을 덥썩 무는 순간 어부의 저녁상에 회감이 되는 것입니다. 끝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정직하게 저와 여러분! 대답을 해보십시다!. 정말 피할길이 없기에 유혹에 굴복하고 말았습니까 아니면 잠시 죄악의 낙 때문에 그렇습니까 잠시 죄악의 낙이 있습니다. 잠시 즐거움이 있지요. 그래서 사람들이 타락하는 것 아니겠어요. 잠시 죄악의 즐기는 낙. 그것이 미끼입니다. 오늘 이 시간 마음속에 확인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우리외에는 망하게 할 자가 없습니다. 특히 거룩의 문제에 관해서는 우리 이외에는 우리 자신외에는 우리를 타락시킬 사람이 없습니다. 나 외에는 나를 망하게 할 자가 없습니다. 이 거룩의 문제에 관해서만은 지극히 상식적인 것입니다. 나 외에는 나를 망하게 할 자가 없습니다. 여러분! 동의하십니까 여러분! 따라해 보십시오. 나 외에는 나를 망하게 할 자가 없다. 우리 외에는 우리 자신을 무너뜨릴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 외에는 우리를 망하게 할 자가 없습니다. 자기 욕심에 끌려 유혹에 끌리면 안됩니다. 이것은 자기 선택입니다. 이것을 알고 요셉은 단호하게 도망을 갔습니다. 바울이 이 사건을 기록하면서 딤후2:22에서 자기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너가 청년의 정욕을 어떻게 해결하느냐 다른 길이 없다. 청년의 정욕을 이길길이 없다.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도망가고, 거룩함을 쫓는 무리들과 함께 마음을 같이 하라고 했습니다. 청년의 정욕은 피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유혹이라는 것에 대해서 100%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아마 무균실에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유혹자체를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이 세상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떤 면에서 유혹은 순기능도 있습니다. 우리가 유혹을 만날 때 우리가 한단계 올라갈 수 있는 있는 디딤돌과 성수가 될 수 있습니다. 유혹은 그 사람의 인격을 잘 드러나게 하는 도구가 되지요. 추운 겨울이 없으면 어떻게 소나무가 상록수인 줄 알겠습니까 유혹이 없으면 어떻게 순결한 요셉의 인격이 드러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유혹자체가 있는 것을 우리가 인정을 합니다. 하지만 오늘 원칙과 강력한 대처를 통하여 피함으로 말미암아. 쉬운일 아니지만. 이 겨울때에 모두 떨어져서 낙엽되지만 우리 온 교회의 성도들. 특별히 젊은이들 이 시대의 상록수가 되기를 바랍니다. 유혹 자체는 잘못은 아닙니다. 그것은 인정할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유혹 때문에 유혹에 시달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파멸로 이끄는 올무가 아니라 우리의 영적 성장의 디딤돌이 될수 있기를 온 성도들에게 허락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강남에 부부사이의 문제들. 왜 아내 외에 다른 여인과, 혹은 남편외에 다른 남성과 관계를 맺는 것이 악한일이 됩니까 무엇이 문제입니까 그것은 바로 언약을 깨뜨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신뢰를 무너뜨리는 배신이 때문에 그렇습니다. 언칙을 세우는 것입니다. 부부사이에는 이 신뢰가 원칙인 것입니다. 여러분! 결혼할 때 죽음이 올때까지 하나님이 우리를 죽음으로 우리의 사이를 갈라놓을 때까지 부부로서 남편의 의무로, 아내의 의무를 다하기로 하나님과 증인들 앞에서 서약을 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한걸음 더 나아가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아들로 언약을 맺었습니다. 저는 결혼식 주례할 때 성혼선포를 할때 나는 이렇게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종으로 오늘 신랑 신부가 성부 성자 성령안에서 부부가 된 것을 삼위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포하노라. 하나님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사람이 감히 가르지 못할 것이니라. 그렇게 제가 선포를 합니다. 부부사이에 지키지 못한다는 것은 언약과 신뢰를 깨뜨리고 배신하는 것이 더큰 문제입니다. 모든 사회는 신뢰와 헌신의 위에 세워집니다. 헌신과 신뢰가 무너진 사회는 더 이상 세워질 수 가 없습니다. 인간은 서로서로의 언약을 위하여 신뢰를 주고 서로서로의 헌신을 통하여 헌신을 주고 받는 것입니다. 배반을 당하면 깊은 상처를 받게 되고, 수치와 거절을 느끼게 됩니다. 원한과 좌절과 미움이 쌓이게 되고 이렇게 될 때 자동적으로 인간관계는 파괴가 됩니다. 이 독소가 점점 퍼져나가면 이 사회는 점점 붕괴가 됩니다. 오늘 이 나라의 어려운 형편에 의해서 여러가지 대책을 세움니다만은 솔직히 영적으로 볼 때 말해서 이 타락한 한국의 사회가 한국사회의 신뢰를 파괴하게 됩니다. 이 깨뜨러진 사회가 어렵게 하는 것입니다. 유혹에 빠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주관하심을 저버리는 것과 똑같습니다. 이 어려운 사회를 다른데서 찾기보다 우리의 거룩함이니 하나님의 뜻을 멀리 가서 찾으려고 하지 말고 우리의 거룩함의 회복을 통하여 한국사회의 무너져 가는 이 황폐한 현실을 원칙을 세워서 다시 세워 나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잘 아시는대로 이 문제를 해결함으로 말미암아 자기 자신만의 문제만 아니라 민족과 그리고 애굽사회와 전체를 다 살렸습니다. 교회사적으로 이 7가지를 잘 하는 사람이 세가지 공헌을 미칩니다. 첫째 깊은 영성이 있습니다. 학문적인 공헌을 합니다. 교회사에 길이 남을 역할을 합니다. 조나단 에드워즈 같은 집안을 보면 잘 알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이렇게 자랐으면 좋겠습니다. 이것을 잘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유혹을 잘 물리치고 살아도 당장 보상이 주어지지를 않습니다. 오히려 이 못되 먹은 여자 때문에 요셉이 얼마나 고생을 하는지 모릅니다. 14절을 보세요. 집 사람들을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보라 주인이 히브리 사람을 우리에게 데려다가 우리를 희롱하게 하도다 그가 나를 겁간코자 내게로 들어오기로 내가 크게 소리질렀더니 그리고 17절에 이 말로 그에게 고하여 가로되 당신이
우리에게 데려온 히브리 종이 나를 희롱코자 내게로 들어 왔기로. 아! 이 여자 못 되먹은 여자이지요. 오히려 남편도 배신하고, 남편도 조롱하고 요셉을 모함했습니다. 거룩하게 애쓰고 산다고 당장 효과가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결과는 모함당하는 것이고 감옥에 쳐 들어가지는 것입니다. 오늘 이런 상황을 알고 당장 우리의 삶에 거룩함에 신실한 대응이 주어지지 않는 할지라도 오늘 요셉을 통하여 원칙을 세우는데 어려움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한국교회의 회복을 위해서 어쩌면 가장 필요한 일이 거룩과 정결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재난과 역경, 고난과 비난, 유혹 앞에서 쉽게 포기해 버린 이름 모를 수많은 사람들로 온통 뒤덮여져 있습니다. 시편 78:9절을 보니까 이런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에브라임 자손은 병기를 갖추며 활을 가졌으나 전쟁의 날에는 막상 물러갔도다. 중요한 순간에 이런 원칙을 지키지 아니하고 바로 물러난 이런 사람들 때문에 인류는 어려움과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대신 오늘 이 자리에서 예배드리는 모든 우리 성도들은 남자답게, 강건하게 서서 물러서지 말고 우리의 범죄가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우리의 범죄가 우리의 영혼을 더럽힌다는 사실 앞에 다시한번 능력의 근원되시는 그리스도를 의존하여 다시한번 예수그리스도 통하여 저와 여러분 모두가 이 시대의 상록수의 역할을 감당하시는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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