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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새 희망을 가져다 준 부활절 (요 11:2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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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부활주일입니다.

부활절은 우리기독교에 있어서 성탄절, 추수감사절과 함께 3대 절기 가운데 작은 부활절이라 부르면서 주일을 지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므로 3대절기를 주요한 절기부터 우선순위를 메긴다고 하면, 단연 부활절을 제일 먼저 꼽아야 할 것입니다.

왜, 기독교에 있어서 그토록 부활절이 중요한 절기로써 지켜져 왔으며, 또한 지켜져 가고 있을까요 오늘은 이에 대해서 말씀을 드림으로 함께 부활절에 내리시는 은혜를 받으려고 합니다.

첫째 기독교는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의 역사성 위에서부터 출발되었기 때문입니다.

역사에 있어서 가정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만일 '예수그리스도께서 무덤에 장사지낸바 된 채 부활의 역사적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오늘의 기독교는 과연 존재할 수 있었겠는가' 이 질문은 기독교의 존재여하를 논함에 있어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아주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성으로 입성하기 그 이전부터 예수님께서 받으실 고난의 일에 대해서 들어오고 있었고, 또한 죽으면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이라는 부활에 관한 말씀도 익히 듣고 또 듣고 들어왔던 터였었습니다.

그런데도 대표적인 제자 베드로를 보십시다.

베드로:예수와 함께 죽겠다고 큰 소리를 쳤었으나 24시간도 지나지 않아서 예수를 세 번씩이나 부인했던 위인입니다.

실로 겁쟁이요, 뒤가 무른 비겁자입니다.

도마:그의 동료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다고 할 때에도 끝까지 예수님의 손의 못자욱과 허리에 창자욱을 만져 보아야 믿겠노라고 고집을 피우던 위인이었습니다.

엠마오의 두제자: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고향으로 내려가던 위인들이었습니다.

그러니 다른 제자들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만일, 예수께서 다시 사셔서 저들에게 되돌아 오시지 않았다면, 어떻게 저희들이 죽은 예수를 위하여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담보하고 예수를 위하여 죽기로 각오를 할 수 있었겠습니까 더욱이 예수를 십자가로 끌고간 무리들의 살기가 시퍼렇게 칼날을 휘두르고 있었던 때에 말입니다.

베드로는 예수 부활하신 이후 47일째 되는 날 솔로몬광장에서 대 설교를 하게 됩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죽게한 일단의 무리들을 향하여..... 그때,

5.000명이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렇게 베드로도, 도마도,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도 그리고 모든 제자들이 다시 모여들어서 십자가의 깃발을 높이 치켜 들게 된 것은 '부활'의 역사적 사실 외에는 설명할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둘째, 교회는 '부활'의 역사적 사실을 전하기 위해서 형성된 '선교의 공동체'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체험한 그의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 바로 그 자체를 전하기 위해서 허리띠를 바싹 조였던 것입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보았었기에, 그들에게는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로부터 자유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를 갖고 이 세상에 태어납니다. 어린아이들을 어두운 곳으로 데려 가면 기절을 하다시피 놀랍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베드로만 보아도 죽음의 위기 앞에서 세 번씩이나 예수를 부인했었는데 그것은 삶에 대한 본능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 베드로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자유해져 있었습니다. 사람이 죽음에 대해서 두려움이 없어지면 참으로 '자유'한 자가 됩니다.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은 죽음으로부터의 자유를 놀랍도록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 체험이 선교의 동기가 되어진 것입니다.

죽음으로부터의 자유, 그것은 창세 이래 모든 인생들의 궁극적 과제였었습니다. 바로 그 문제로부터의 해결을 받자 그 자유를 모든 이들과 함께 누리겠다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기 시작한 것이 선교의 출발점이 되어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웃에게 전도한다는 것, 또한 먼 곳이나 가까운 곳의 형제 자매들에게 선교한다는 것은 곧 죽음으로부터의 자유하는 길을 알려주는 일입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하리라' 가난합니다. ... 굶어 죽음에 대한 불안이 따라옵니다.

소외됩니다. ... 자기의 존재가 묻혀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기존재를 확인시키려 합니다. 본능입니다.

병들었습니다. ... 병으로 죽을 것이라는 두려움과 불안이 그 병을 더 깊어지게 만듭니다.

그러나 죽기를 각오하고 일해 보십시오. 가난을 넘어 설 수 있게 됩니다.

십자가 아래서, 그리고 복음 안에서의 참된 자신을 발견해 보세요.

일거리가 많아집니다. 일을 위해서라도 살아 남아야 합니다.

그래서 적극적인 사람으로 바뀌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지고 있는 병명이야 어떠하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확신해 보세요. 병으로부터의 불안을 극복하게 되어지고 마침내 치유의 기적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고 발견한 사람들이 이를 알리기 위해서 거리로 골목으로 뛰쳐 나갔습니다. 그것이 곧 전도요, 선교가 된다는 것입니다.

죽음의 공포로부터 자유할 수 있는 이 진리를 깨달은 바울이었기에, '이 후로는 십자가외에는 아무것도 자랑치 않키로 했노라' '과거의 자랑하던 모든 것들을 분토와 같이 버리노라' '이 진리를 전하지 아니하면, 내가 화를 받으리라' '이 복음을 위하여 나는 날마다 죽고 날마다 다시 산다' 라고 하였습니다.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소망입니다.

부활신앙을 가진 자의 특징중의 하나는 '산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영원한 하늘나라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기에 비록 이 세상의 삶이 제 아무리 어렵고 힘들다 할지라도 부활신앙으로 넉넉히 이기고 극복하고 승리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부활신앙을 가진 사람은 절대로 절망하거나 낙심하지 않습니다.

16-17세기를 살았던 가난한 작곡가인 Hendele은 몸까지 전신마비 불구자였습니다. 그는 팔리지 않는 작품들 때문에 빚더미 위에 앉아 있었고, 극기야는 채무 때문에 법정에 서야하는 절대절명의 위기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사람이었던 Hendele은 그 때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승리하신 예수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는 오선지에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를 그려가기 시작하였습니다.

극도로 암울했던 절망적인 상황하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남겨 놓은 그 작품이 저 유명한 불멸의 대작 'Messiah'가 되는 것입니다.

봄이 오고 있음을 아는 사람은 겨울이 제 아무리 춥고 외로워도 찬란하게 밝아 올 봄을 보면서 기다리고 참아 냅니다.

그리고 마침내 ' 내 영혼에 햇빛 비치니 주 영광 찬란해 이 세상 어떤 빛 보다 이 빛 더 빛나네' ' 내 영혼에 희락이 있고 큰 소망 넘치네 주 예수 복을 주시고 또 내려 주시네' ( 주의 영광 빛난 그 빛 내게 비춰 주시옵소서 ) ( 그 밝은 얼굴 뵈올 때 나의 영혼 기쁘다 ) 라고 찬양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치에 의해서 사형선고를 받고 형장으로 끌려가던 본회퍼 라는 독일의 유명한 목사님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 내 생명은 이제부터 시작이야 ' 그는 이렇게 죽음 앞에서도 초연하게 이런 말을 남길 수 있는 여유로움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곧 불완전한 삶을 마감하고, 온전하고도 영원한 삶으로 가고 있음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눈먼 소년이 친구들과 함께 방패연을 날리고 있었습니다.

그의 연은 하늘 높이 날고 있었습니다.

지나가던 사람이 묻기를, 애야! 네 연이 어디 있니 땅에 떨어졌는지, 하늘로 날아가 버렸는지 어떻게 알고 연을 날리는 거니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아이는 무슨 말씀입니까 저는 제 연이 지금 하늘 높이 나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한 그 사람이 다시 묻기를 넌 볼 수도 없는데 어떻게 네 연이 창공을 나는지를 아니 라고 묻자 그래요, 전 볼 수 없어요. 그러나 지금 제가 잡고 있는 이 줄이 팽팽하게 당겨지고 있는 것을 보아서 제 연이 하늘 높이 날고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있어요 라고 대답합니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줄을 잡아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눈으로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지 못했고, 더구나 우리 몸의 부활을 아직은 체험하지 못했다할 지라도 우리는 날마다의 삶을 통해서 부활을 믿을 수 있는 수 없는 증거들을 확보해 가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방패연이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소년의 희망을 하나 가득히 담고 저 푸른 하늘을 가르며 날고 있듯이 우리들의 소망의 연도 우리 영혼의 손끝으로 팽팽하게 느껴지도록 저 응답의 하늘을 가르며 끝없이 끝없이 비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금번, 부활절에는 여러분의 희망하는 바가 '소망의 연'이 되어 저 맑고 찬란한 오월의 하늘로 힘차게 나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부활의 기적이 여러분의 삶을 통하여 각가지 모양으로 나타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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