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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의 세례 (행 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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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 바울은 북부지방을 순방하여 전도하고 에베소에 내려와 보니 거기에 몇몇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아마 이들은 바울이 여기 오기전에 아볼로로 부터 전도 받고 배운 사람들일 것입니다. 하여간 주안에서 성도들이 함께 만나고 자리를 같이 한다고 하는 것은 피차를 위해서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성도들 사이에 대화의 내용입니다. 무엇보다도 대화의 내용이 신앙적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자칫 잘못하면 개인적인 문제를 가지고 잘했느니 못했느니,남을 비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개인적으로나 교회적으로 유익을 주지 못합니다. 오히려 마귀로 틈타게 만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도로서 에베소에서 만난 형제들에게 ‘당신들이 예수 믿기 시작할 때 성령을 받았습니까’하고 우선 물어보았습니다. 이것은 신자에게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절차요 또 중요한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성도들을 지도할 지도자로서 반드시 점검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야 그들을 어떻게 말씀을 먹이며,어떻게 가르칠 것인가에 대한 방향을 잡을 수 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뜻밖의 대답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대답은 ‘우리는 성령이 계시다는 말조차 들어본적이 없다’는것이었습니다.
‘그러면 당신들은 무슨 세례를 받았습니까’라고 바울은 그들에게 물었습니다.
대체 무슨 세례를 받았기에 지금까지 성령이라는 말을 들어본 일이 없느냐는 것입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요한의 세례를 받았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주의 사자들로 부터 이러한 질문을 받게 될 터인데 우리는 어떻게 대할 것입니까 ‘예,성령을 받았습니다’라는 대답일까요,그렇지 않으면 ‘처음 듣는 말인데요’라는 대답일까요,여러분 어떤 대답입니까

1.‘성령의 세례를 받았는가’라는 질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요한의 세례로 끝나서는 않됩니다. 성령의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요한의 세례와 성령의 세례가 무엇인가 하는 것부터 알아야 합니다.
첫째,요한의 세례입니다.
요한의 세례는 물세례를 말합나다. 율법을 위반한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마음의 표명을 말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세례를 받은 표로 받는 것인데 그것은 목사로 부터 물로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죄씻음을 받았다는 표가 바로 요한의 세례입니다. 그러므로 셩령의 세례에 대하여 알지못하고 물세례를 받는다면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회는 일년에 두차례에 걸쳐서 학습과 세례문답을 거쳐서 합격한 자에게만 물세례를 베푼는 것입니다.
둘째,성령의 세례입니다.
성령의 세례는 성령으로 중생함을 받은 자가 성령의 감동감화로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내 마음속에 영접하고 나는 하나님앞에 전적으로 타락하고 부패한 존재임을 깊이 깨닫고 회개하는 순간 주님의 보혈로 죄씻음을 받고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쳐주심을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한가지 알아야 할 것은 성령의 세례를 받은 후에 성령의 충만한 경험을 하게되는데 자신이 죄인임을 가슴아파하며,통회하고,자복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사죄의 은총과 사랑에 감사 감격하며 주님을 위해 살고저하는 뜨꺼운 체험을 가지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시말해서 일반적으로 성령의 세례후에 얼마있다가 깊은 신앙생활을 하는 가운데 은혜체험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충만입니다. 그러나 어떤이들은 특별히 성령의 세례와 성령충만을 동시에 받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물세례가 먼저가 아니라 성령의 세례가 먼저임을 알아야 합니다. 단지 물세례는 성령의 세례를 받은 표로 받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에베소 교회성도들은 성령의 세례를 이미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의미를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일이 비단 에베소 교회의 성들의 문제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 교회에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말일 성령의 세례를 받지 못하고 물세례를 받는다면 그것은 하나의 형식적인 종교행사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세례를 받았음에도 물구하고 의미도 알지못하고 체험도 없다면 물세례는 그에게 은혜의 방편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물세례를 받을 때에는 반드시 성령의 세례를 분명히 알고 받아야 할 것입니다.

2.‘성령이 내주하고 계시는가’하는 질문입니다.
창세기로 부터 계시록까지 성령의 역사에 관해서 종종 나오고 있기 때문에 믿는 사람들이라면 아마 성령님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은 성령님에 대해서 금시초문이가 하는 점입니다. 그것은 간단합니다. 듣고 배우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듣고 배운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만일 성령의 체험은 있었느데 듣고 배우지 못했다면 그 은혜를 끝까지 지속해 나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신비주의나 이단 사설로 떨어지기도 쉬운 것입니다.
오늘날 잘못된 신비주의자들로 인하여 교회가 어지러운데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배우지 못하고 자기 쳄험을 우상화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에 대한 지식도 귀하고,체험도 귀하지만 말씀에 입각한 올바른 지식과 체험이 없이는 올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요14장으로 부터 16장까지 읽어보면 예수님께서 승천하신후 대신 보혜사가 오셔서 역사하실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후 행2장에서 그대로 이루진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보혜사라는 헬라어는 ‘파라클레토스’인데 ‘곁에’라는 말과 ‘부르심’이라는 말로된 합성어입니다. 즉 보혜사는 내 곁에 계시기 위해서 오셨고 내 곁에서 항상 함께 해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믿는 사람들 중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과 부활,승천을 알 뿐,지금도 내속에 내주하시고 역사하시는 성령님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이것은 정상적인 신앙의 상태라고 보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는 바로 내속에 계시는 성령님과의 관계로 연결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여러분속에 성령님이 내주하심을 믿고,그의 인도하심에 겸손히 순종하는 성도의 삶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럴때 성령님이 주시는 풍성한 은혜를 깨닫고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3.‘성령의 열매가 있는가’하는 질문입니다.
눅6:43-44절에 보면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과일나무는 반드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리고 열매를 보아서 그 나무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의 세례를 받고 성령님이 내주하시는 심령은 자연히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내주는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지만 성령의 열매는 눈에 보이는 것임으로 성령의 열매가 있느냐,없느냐에 따라서 성령의 내주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것입니다.
특히 성령의 열매는 아홉가지가 있는데 갈5:22-23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분류해보면 첫째,하나님에 대한것은 사랑과 희락과 화평이고,둘째 이웃에 대한 것은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이고,세째 나에 대한것은 충성 온유 절제입니다.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중 사랑을 첫째로 들고 절제를 마지막으로 꼽고 있다는 점을 특히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랑을 기초로하지 않는 한,모든 미덕은 울리는 꽹가리에 불과하므로 사랑을 첫째로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전개입니다. 물론 그 사랑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한 사랑입니다.
왜 사람은 자꾸 변합니까 그것은 인간적인 사랑에 기인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말하면 자신의 유익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성령의 열매가 아무리 아름다운 것일지라도 절제를 잃어버릴 경우에는 그 본래의 기능을 상실할 우려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지막에 절제의 열매가 뒷바침을 해주는 것입니다.
하여간 성령의 열매가 없이는 성령의 내주를 인정하기가 어렵고,성령의 내주가 없이는 성령의 세례를 인정하기가 또 어려우며,성령의 세례가 없이는 성령의 받았다고 보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 받은 그리스도인이라면 성령의 세례를 체험했고,성령의 세례를 체험했다면 성령의 내주가 있을 것이고,성령의 내주하신다면 반드시 성령의 열매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점에 있어서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성령의 받았느냐’라고 물어본 것은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우리는 무어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까 오늘날 한국교회 주변에는 장칭 성령을 받았다고 자랑하는 사람들은 많은데 성령의 열매를 맺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가 않습니다.
어떤 이들은 여러가지 성령의 열매는 있는데 절제의 열매가 없어서 허리띠 없는 옷처럼 제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고,또 어떤 이들은 성령의 열매가 있다고 하지만 그것이 성부,성자,성령에 근거한 경우가 아닌 경우도 허다합니다.

찔레 열매를 맺고 있는 한,아무리 우겨댄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사과나무로 인정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과나무라면 당연히 사과가 열릴 것입니다.
내가 성령을 받았다는 사실을 말로가 아니라 열매로 증거할 수 있을 때 가장 정확한 대답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의 세례를 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면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성령의 사람이라면 성령의 아름다운 열매를 맺어야 할 것입니다.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를 퉁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며,모든 사람들이 우리의 행실을 보고 은혜를 받고 힘을 얻으며 하나님께 영광을 들리는 복된 역사가 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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