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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의 향기 (행 18: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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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체취를 풍기고 있습니다. 더우기 인종따라서 그 독특한 냄새가 있는 것입니다. 미국 사람은 빠다 냄새, 노랑내가 나고 한국 사람은 김치 냄새가 납니다. 한번은 비행기를 타고 미국에 갈 때 일입니다.

그리고 사람에 따라 인격적인 냄새가 따로 있습니다. 잔인한 사람은 잔인한 냄새를, 인자한 사람은 인자한 냄새를 풍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직업에 따라 풍기는 냄새가 또 다른 것입니다. 기름 장사는 기름 냄새가 나고, 생선 장사는 생선 냄새가 나고 직장인은 직장인 님새가 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에 따라 여러가지 냄새가 나지만 압축하면 세가지 냄새가 있습니다. 첫째는 덤덤한 냄새요, 둘째는 역겨운 냄새요, 세째는 지극히 고상한 냄새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세 사람의 체취를 알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1. 갈리오라는 사람입니다.
세네카는 스토아파에 속하는 철인으로 학문이 높고 품성이 선량하며 많은 저서를 남긴 사람일 뿐만 아니라 네로 황제의 선생이기도 하였습니다. 그에게 동생이 있었는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가야의 총독 갈리오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갈리오는 자기 형 세네카를 닮아 영특하고, 처사가 슬기로웠다고 전해오고 있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이야기는 그가 아가야 총독으로 재임 시절에 되어진 사건입니다. 아가야는 희랍 지방을 말하며, 아가야 총독이란 로마 정부에서 임명한 희랍 지방 총독을 가리키는 것인데 고린도도 그의 관할에 속하여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고린도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이 고린도에서 전도하고 있는 바울을 끌고 갈리오에게 재판 받으러 왔던 것입니다.
갈리오는 이사건을 처리함에 있어서 잘한 것도 있고 잘못한 것도 있습니다. 잘한 것이란 그가 월권하지 아니하고 자기 분수를 지켰다는 것입니다. 무릇 재판이란 피의자의 법률위반 사실 여부를 심리하여 흑백을 가려주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바울을 걸어 송사한 것은 로마의 국법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순전히 유대인 자기들의 종교상의 문제였습니다. 그러므로 갈리오 총독은 이것을 자기의 권한 밖의 사건이란 이유로 이 송사를 기각했던 것입니다. 즉 자기는 월권 행동을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사실 집권자가 전지전능 자나 되는 것처럼 종교 문제까지 함부로 손대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 아닐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 있어서 갈리오의 처사는 현명했다고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게 과실이 있었는데, 그것은 군중의 폭행을 방치했다는 사실입니다. 17절에 보면 “모든 사람이 회당장 소스데네를 잡아 재판 자리 앞에서 때리되 갈리오가 이 일을 상관치 아니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폭행의 이유가 무엇인지 분명치 않으나 이유야 어쨌던 간에 폭행이 미덕이 될 수는 없으므로 무리가 회당장 ‘소스데네’를 구타하는 행위는 마땅히 제지되야 옳은 것입니다. 그런데 갈리오는 그것을 방관했다고 하니 이는 직무유기가 아닐 수가 없는 것입니다. 종교문제는 법관이 함부로 손대기 어려운 일이지만, 폭력 행위는 법관이 마땅이 다스려야 할 성질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여간 ‘갈리오’는 권리를 남용하지 않으려고 조심한 나머지 정당히 행사했어야 할 권리마저 포기하는 실수를 범한 셈이 되고 말았습니다. 무슨 일을 잘 해보려다가 잘못 저지른 예가 되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갈리오는 그리스도의 교회에 큰 공헌한 것도 없지마는 크게 해독을 끼친 일도 없는 무해무독한 사람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대다수의 사람들이 ‘갈리오’의 후예와 같은 분들이 많이 있는 것을 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과오를 범하지 않으려는 지나친 조심 때문에 공의를 제대로 세우지도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덤덤한 인간으로 자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을 가리켜서 있으나 마나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꼭 존재하여야 할 필요도 없는 사람이지만 굳이 제거되어야 할 이유도 없는 사람입니다. 즉 크게 향기로울 것도 없지만 크게 역겨울 것도 없는 덤덤한 사람입니다.

2. 유대인들입니다.
이방인 ‘갈리오’는 있느나 마나한 사람이었지만 여기에 나타난 유대인들은 과오를 저지른 있어서는 않될 존재들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1). 자기 동족을 이방인에게 끌고 와서 고소하였습니다.
옛말에 소 한 마리 가지고 이웃끼리 다뚜지 말라는 우리나라 속담이 있습니다. 웬만한 일이면 이웃끼리 송사해서 안된다는 뜻입니다. 고전6:1-7절에 보면 성도들은 성도들끼리의 문제를 이방인 재판장에게 고소하지 말라는 바울의 경고가 있습니다. 이것은 성도로서 마땅한 일입니다.
그런데 고린도에 있는 유대인들은 객지에서 만난 동족인 바울을 이방인 재판장에게 끌고 가서 고소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결코 잘한 일이 아닙니다. 동족에게 악을 행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민족도 별다를 것이 없습니다. 나쁜 점에 있어서는 꼭 유대인들을 닮은 것이 많이 있는데 바로 이러한 점입니다.
외국에서 사는 교포들이라면 서로 돕고 서로 위로하며 살아야 말 것 압니까 유독 우리 나라 사람들은 같이 장사를 하다가도 누가 잘 되면 배가 아파서 어쩔줄 모르다가 상대방이 잘못한 일이 생기면 기다렸다는 듯이 그 일을 세무소에 고발해가지고 망하게 해야 직성이 풀리는 심보들입니다. 꼭 당나귀 뒷방통과 같은 민족입니다.
그래서 미국 세무소에서는 한국 사람들 가게는 세무 조사 할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저희들끼리 고발하니까 기다리기만 하면 고발 자료가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 모릅니다. 외로운 객지 생활을 하는 것도 슬프고 고생스러운 일인데 동족끼리 물고 뜻고 싸우니 참 한심한 일입니다.

2). 신앙문제를 가지고 세상 재판관에게 고소했습니다.
한자로 ‘宗敎’란 모든 가르침의 으뜸이 되는 가르침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종교는 정치위에서 정치를 지도해야 마땅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 지도자들이라는 자들이 종교의 교리와 신조의 문제에 대한 판정을 세상 재판에 호소한다면 이것이 얼마나 어리석인 짓인가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이일을 서슴없이 감행한 것입니다. 이는 스스로 종교를 모득하는 행위로써 어느 시대나 칭찬받을 수 없는 만행입니다.

과거에 이런 부끄러운 일들이 교회 안에 얼마나 많이 있었는지 말로다 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이므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3). 폭력 행위를 저질렀습니다.
17절에 보면 모든 사람이 회당장 ‘소스데네’를 잡아 재판정에서 구타했다고 했는데 여기서 ‘모든 사람’이란 유대인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즉 바울을 고소한 것이 기각당하자 소송에 신중성이 결여된 책임을 회당장에게 물어 유대인들이 ‘소스데네’를 때렸다는 것입니다.

무릇 폭행이란 성령 하나님을 위한다는 명분가지고 할 찌라도 절대로 정당화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소위 해방의 신학이 주장하는 폭력의 가능성의 시사는 비성경적이무로 반드시 배격해야 합니다.
악당들이 예수님을 잡으려고 할 때에 베드로는 예수님을 보호한다는 미명아래 칼을 휘들러 말고의 귀를 잘라버렸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말고의 귀를 붙여주시면서 베드로를 향하여 말씀하시기를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고 폭력행위를 금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의 미명아래서 비신앙적인 행동을 감행하지 않도록 언제나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기에 등장하는 유대인들처럼 종교의 깃발 아래 도리어 구역질나는 악취를 풍겨 사회를 위하기는 커녕 사회에 종교공해를 끼치게 될 뿐입니다.

3. 바울입니다.
‘갈리오’가 바울의 피소사건을 처리함에 있어서 바울에게 무슨 부정이나 잘못한 행위가 있었으면 모르지만 전혀 잘못이 없었기 때문에 바울이 자신의 태도를 천명했을 때 어느 누구 한 사람도 바울에게 부정이 있다고 고발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법정에 서야할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기지를 명심해야 합니다.1). 그리스도인은 이 사회에서 신앙으로 인하여 받는 비난이나 핍박외에는 비난 받을 짓을 해서는 않된다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인은 우리가 받은 비난이 자기의 과오 때문이 아니라 순수히 신앙 때문에 받는 핍박이라면 절대로 여기에 굴하지 말고 전진해야 된다는 교훈입니다.
바울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바울은 전에도 그러했고 후에도 그러했습니다. 그가 환난이나 핍박을 당한 것은 그가 잘못하므로서 당한 것이 아니라 그것은 오직 바울의 독실한 신앙과 열열한 전도활동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유대인들의 모함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여기에서 풀려나옵니다. 우리는 여기서 바울 통하여 풍겨나오는 그리스도의 향기를 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마음과 정신과 사상과 교훈과 생애가 바울의 생활현장을 통해서 쏟아져 나오는 현상입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가득차 있느냐 함에 따라서 그에게서 풍기는 냄새가 다른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예수로만 충만해 있음을 증거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어디를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언제나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긴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갈리오와 같이 덤덤한 냄새가 되어서는 않될 것입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처럼 역겨운 냄새를 풍기는 자들이 되어서는 않될 것입니다. 그들은 악행만 했을 뿐, 미덕이란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불신자 보다 낫기는 커녕 도덕적인 면에서 못해서는 절대로 않될 것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은 바울처럼 항상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산해야 합니다. 더욱이 사회속에 그리스도인은 가시밭의 백합화처럼 주위로 부터 수난을 당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찟길수록 더 강한 향기를 풍기는 백합화와 같이 그리스도인은 고난을 당할수록 더 고상하고 순결하고 우아함을 나타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바울처럼 그리스도로 더욱 충만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능력있는 말씀과 그의 사랑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어디를 가든지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향기를 드러낼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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