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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대를 찾고 있는데 (사 06:1-13, 눅 05:1-11)

첨부 1


가난과 전쟁과 질병이 이 땅에 가득한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우리의 국민 소득이 1만 달러에 진입하고 삶의 형태와 내용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길거리의 젊은 세대의 모습이 달라지고 밤하늘을 장식한 서울의 네온사인의 간판들도 시대의 변화를 실감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참으로 많이 달라졌습니다. 전자문화는 성난 파도처럼 이 땅에 엄습하여 인간의 두뇌작용을 대신하면서 인간의 정신이 어지러워지고 있습니다.
이제는 모두가 눈앞에 보이는 것만을 추구하고 인생의 깊은 생의 문제나 신앙인으로서의 깊은 세계의 추구 따위는 어느 옛날의 이야기처럼 외면 당하는 시대의 무대 위에 우리가 서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은 철학자들의 말대로 생각하는 동물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우리의 인간들을 만드시되 생각하고 행동하는 구별된 생명체로 만들어주셨습니다. 이 사고의 틀은 과거를 돌이켜 보고, 오늘을 섬세하게 점검하고, 내일을 깊이 생각하도록 되어있습니다. 인간만이 소유한 이 사고의 틀을 벗어나면 인류는 타락하고 멸망의 늪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인간이 생각하는 생명체이기에 인간이 가진 눈과 귀는 단순한 동물들의 수준에 머물지 아니합니다.
우리가 높은 사고력을 가진 생명체로서 자신을 돌이켜 보면 인생이란 누구나 단 한번밖에 없는 목숨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눈을 뜨고 귀를 열어 이 목숨을 누구를 위하여 바치며 무엇을 위하여 바칠 것인가 내가 무엇을 위하여 이 땅에 태어났고 무엇을 위하여 부름을 받았는가 를 물어보면서 그 대답을 찾아 헤매이는 눈과 귀를 소유한 사람은 자신의 생명을 차원 높게 이끌고 갈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진정 성숙한 인간대열에 진입하였음을 스스로 확인하는 순간에 서 있는 실존입니다.

본문접근

오늘 우리에게 주신 본문은 주전 8세기의 유대 왕족에 속했던 이사야라는 사람이 하나님을 뵙고 그 하나님과 나눈 장엄한 대화를 그대로 보여준 말씀입니다.
오늘의 말씀가운데 나타난 사람은 우리가 잘 아는 이사야라는 선지자입니다. 그 이름의 뜻 은 ‘주님이 구원이시다’입니다. 그는 두 아들과 더불어 예루살렘에 살면서 험한 베옷을 입고 주전 759년부터 60년동안 유대나라의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왕조에 걸쳐서 활동을 했던 유명한 선지자입니다. 이 선지자가 더욱 유명한 것은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야로서 오실 것과 그 대속의 죽음을 너무나 뚜렷하게 예언했다는 점이 유명합니다. 더욱이 우리 예수님께서 이사야 선지서를 가장 많이 애용했다는 점에서 그 이름은 우리에게 아주 익숙해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을 좀더 상세하게 관찰하면서 경청하십시다.

본문의 재 경청

이사야는 어느 날 생각지도 못했던 사건에 접하게 됩니다. 높은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뵙게 됩니다. 그 하나님을 모시는 천사들이 그 앞을 내려다보면서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여호와 그의 영광이 온 땅에 가득하시다.'는 말을 서로 계속합니다. 그때 이 외침의 소리에 문설주들이 흔들렸고 연기가 자욱하였습니다. 그때 이사야는 너무나 거룩한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신의 죄인 된 모습을 숨김없이 느끼면서 말을 합니다. '큰일났구나. 나는 이제 죽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 입술이 더러운 사람들 틈에 끼어 살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뵙다니....' 그때 하나님은 천사로 하여금 제단의 숯불을 불집게로 집어 가지고 다시 이사야의 입에 대면서 말을 합니다.
보아라. 이제 너의 입술에 제단의 숯불이 닿았으니 너의 악은 가시고 너의 죄는 사라졌다.
하나님은 이러한 용서를 주시고 하나님의 심부름을 할 수 있는 인물을 찾으시는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누구를 보낼 것인가 누가 우리를 대신하여 갈 것인가"
이때 이사야는 지체없이 대답을 드립니다. 머뭇거림이나 주저함이 없이 다음과 같이 대답을 합니다. "여기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소서"
그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가서 이 백성에게 너희가 듣기는 늘 들어라 그러나 깨닫지는 못한다.너희가 보기는 늘 보아라. 그러나 알지는 못한다." 하고 일러라
“너는 이 백성의 마음을 오히려 둔하게 하여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들을 수 없고 마음으로 깨닫지 못하게 하여 내게로 돌이켜서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라.”
그 때 이사야는 하나님께 여쭙게 됩니다
“주님 언제까지 그렇게 이 백성을 버리시렵니까” 그 때 하나님은 말씀을 하십니다. “성읍들이 황페하여 주민이 없어질 때까지,사람이 없어서 집마다 빈집이 될 때까지,이 백성은 먼 나라로 다 흩어지고 이 땅이 다 버려질 때까지 그렇게 하겠다. 그러나 거룩한 씨는 남아서 이 땅의 그루터기가 되도록 할 것이다“

주제의 부상

이상과 같은 순간은 참으로 보기 드문 극적인 장면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부르시고 인간이 지체없이 응답을 하는 실로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허물을 용서하여 주시면서 할 일이 많은 인간세계에 그의 사신으로 갈 사람을 찾고 있었습니다. 필요한 인간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인간에게 보여주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이 지상에 펼치시는데 필요한 인간도구를 찾고 계시었습니다. 이 땅에서 길지 않은 생명으로 사는 동안 이러한 부르심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의 최대의 영광이며 즐거움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그리스도의 사람들을 필요한곳에서 쓰시기 위하여 부르시고 계십니다. 그 부르심의 현장이 이사야뿐만 아니라 오늘의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도 발생되고 있습니다.

주제의 정의

인간 세계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를 우리는 수 없이 들을 수 있습니다. 나를 부르는 소리와 내용은 실로 다양합니다. 그런데 그 부름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따르기에 심히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나를 부르고 있는 그 내용의 옳고 그름을 비롯하여 좋고 나쁨, 그리고 크고 작음을 헤아리기가 심히 어려운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부르심은 어떤 것이고 그 내용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여기서의 부르심은 한 인간이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도록 화려하고 행운으로 가득한 육적인 삶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의 부르심이란 평소에 자신이 열심히 찾고 헤매이던 목적을 향하여 도움을 주는 그러한 부르심은 더욱더 아닙니다. 또는 한 인간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불가능의 사역을 감당하라는 그러한 부르심도 아닙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하나님이 보여주신 부르심이란 아주 간단한 것입니다. 오직 그분의 뜻을 그대로 전하는 것입니다. 치유의 방법이나 권능을 부여받은 것도 없이 그저 순수한 심부름만을 하게 되는 부르심이었습니다. 부름 받은 선지자의 생각이나 판단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무서운 심판을 유대 민족에게 내리신다는 사실 그 자체만을 전하기 위한 것이 그 부르심의 내용과 형태였습니다.

주제의 필요성

시골 교회의 유년 주일 학교에서 저를 가르치던 어느 분의 이야기입니다. 그 분은 우리 시골 교회를 순회한 선교사의 눈에 뜨일 만큼 아주 영특한 분이었습니다. 그는 그 선교사에 의하여 도시의 학교에 진학을 하게 되었고 그를 목사로서 양성하기 위하여 그 선교사는 최선을 다 기울였습니다.
그는 시골 출신으로서 도시 생활을 즐기다가 군인을 가게 되면서 그의 순수성은 서서히 퇴색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주님 앞에 뜨겁게 기도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고 모두가 부러워했던 그였는데, 혼탁한 도시의 삶에 눈을 뜨면서 서서히 오염이 되기 시작하였습니다.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종으로 부름을 받았다는 자신의 증언을 스스로 허물어버리고 육적인 욕구와 즐거움만을 추구한 삶으로 발길을 옮기게 되었습니다. 진정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고 드디어는 완전한 탈선을 거듭하였습니다. 돈을 벌어서 외형적인 삶의 모습을 바꾸겠다고 몸부림을 쳤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30을 체 이 땅에서 다 넘기지 못하고 실패자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외면한 한 젊은 분의 이야기입니다.

주제의 실천

한 인간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다는 것은 그리 쉬운 것이 아닙니다. 인위적으로 엮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아 나서기까지는 근본적인 단계가 있습니다. 그러한 단계를 하나님은 오늘의 말씀을 통하여 분명하게 오늘 우리에게 보여 주십니다.

먼저는, 오늘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필요한 인간을 찾고 계심을 알려 주십니다.

(말씀)
오늘의 본문에서는 하나님이 높이 들린 보좌에 앉아 하나님을 섬기는 천사들의 모습이 가득합니다. 인간을 찾아 성소에 나타난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주님! 온 땅에 그의 영광이 가득하시다”

(해석)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이 인간의 곁을 찾아오신 너무나 선명한 현장입니다. 하나님은 실로 인간을 사랑하시고 그 인간의 곁을 떠나시지 아니한 분이십니다.
66권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가운데 인간이 하나님을 찾아 나선 기록은 별로 없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찾아주시는 장면들이 너무나 감동적으로 여러 곳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는 말씀을 하셨던 에덴 동산에서부터 아브라함의 제단이나 호렙산 모세의 앞에까지 인간을 찾아주신 하나님을 우리는 잘 알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를 복중에서부터 선택하고 찾아 불러 주신 하나님은 신약에서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직접 죄가 많은 인간들을 찾아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토록 찾아주신 주님을 깨닫고 감격해 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지나쳐 버리는 불행을 맛보게 됩니다. 다메섹 도상의 바울처럼 자신을 찾아주신 주님을 발견하고 영접하고 그 말씀을 마음속 깊이 간직한 채 결단을 내린 사람은 살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모두 죽음의 계곡을 향하여 나아갔습니다.

(적용)
하나님은 수 천년 전에만 인간을 이상과 같이 찾아주신다고 생각해서는 아니됩니다. 지금도 계속 문을 두드리는 하나님은 지금도 성령을 통하여 오늘 이 지상에서의 수많은 인간의 가슴을 두드리면서 문을 열고 주님을 영접하고 새로운 차원의 삶을 살 것을 권고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예배를 드리는 가운에 하나님의 말씀의 증언을 통하여 죄인 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말씀 속에서 깊은 충격을 받은 것이나 기도 속에 새로운 용기와 감격을 찾는 것, 모두가 하나님이 성령님의 역사를 통하여 우리 모두 앞에 나타났다는 증거입니다.
오늘도 성령께서는 거룩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 뵙도록 역사 하시는 일이 적지 아니합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나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3:20)
그렇습니다. 오늘도 우리주님은 찾아오셔서 우리 문을 두드리면서 수없이 문을 열라고 말씀하십니다. 죄악으로 닫힌 문을 열라고 명령하십니다. 교만과 허탈한 소망가운데 닫혀진 문을 열라고 명령을 하십니다. 어떤 사람은 우리 주님의 음성을 듣고 서슴없이 문을 열고 우리 주님을 영접하는데 어떤 사람은 오늘도 고집과 죄의 근성을 못 버린 채, 그 문을 열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수임 없이 우리 앞에 나타나 계십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오늘의 본문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을 뵈올 때 나타나야할 인간의 기본적인 반응이 어떠해야 함을 보여 주십니다.

(말씀)
오늘의 말씀에서 보여진 이사야의 모습은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이사야는 거룩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나타나심 앞에 섰을 때 자신이 왕족의 한 사람으로 지금껏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리고 자신의 죄악이 얼마나 컸는지를 다시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 고 말을 합니다. '킅일 났구나 이제 나는 죽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입니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속에 살아온 죄인입니다. 이토록 부정한 내가 어찌 만군의 여호와 되시고, 가장 거룩하신 하나님을 어지 나의 눈으로 뵈일 수 있을까“ 하면서 죄인 된 자신의 모습을 먼저 거룩한 하나님 앞에 내어놓습니다.

(해석)
이러한 현장은 바로 누가복음 5장에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와 베드로의 사이에서도 발생된바 있습니다.
그물을 씻고 있던 베드로가 알지도 못했던 예수를 뵙고 명령대로 그물을 던져 고기를 받은 새로운 기적을 몸소 경험한 후에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 하는 고백을 한 바 있습니다.
사람이 깨끗한 거울 앞에 자신을 비쳐 볼 때만이 자신의 모습이 뚜렷이 보이게 됩니다. 얼굴 어디에 흠집이 있고 내가 잘못 손질하여 그 미모가 상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똑같은 현상은 여기에도 있습니다. 죄인이 죄인 앞에 아무리 나타나도 자신의 죄는 나타나지 아니합니다. 오히려 자신의 죄악된 모습이 더 멍들어 갑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선 이사야나 주님 앞에 선 베드로 이들 모두는 죄인 된 자신을 숨기지 못하고 적나라하게 자신의 죄인 된 모습을 인정하고 실토하고 있습니다.

(적용)
하나님이 지극히 사랑하는 여러분 !
지금 이 순간도 여러분 앞에 나타나 계신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어떻게 고백하고 계십니까 십자가 위에 그 처절한 죽음으로 우리의 죄값을 대신해 주신 우리 주님의 모습이 너무나도 뚜렷이 우리 앞에 나타나는데도 아직도 교만한 죄인의 모습을 계속하고 계십니까 너무나 거룩하시고 흠이 없으신 하나님 앞에 솔직해야 합니다. 십자가를 쳐다볼 때 양심의 가책과 함께 깊은 뉘우침이 있어야 합니다.
이사야는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입니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살면서 여호와이신 왕을 뵈옵다니 하면서 죄인 된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눅 5:베드로는 주님을 뵙고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 하면서 감히 섬길 수 없는 존재 앞에서 떨고 있었습니다.
주님을 뵙게된 세리 삭개오는 눅19:"주님. 저는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렵니다. 그리고 제가 남을 속여먹은 것이 있다면 그 네갑절을 갚아 주겠습니다. "하면서 행동적인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행9: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는 예수의 장엄한 음성을 통하여 '주여, 누구십니까 내가 당신을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면서 바울은 예수 믿는 자만을 골라 죽이는 일을 찾아 나선 살인마인 자신의 죄를 실토하면서 거의 질식 상태에 빠졌습니다.
오늘 우리 앞에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나타난 주님 앞에 우리의 반응은 어떠합니까 우리들의 고백은 무엇입니까 적나라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숨김없이 자신의 허물을 실토하고 그 손에 나의 모두를 던져 맡겨버릴 생각은 없으십니까

셋째로, 하나님은 자신의 허물과 죄를 실토한 사람에게 용서의 손길을 주십니다.

(말씀)
하나님은 그토록 죄인 된 자신을 깨달은 이사야에게 침묵이나 외면을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더러워진 부분을 정결케 하십니다. 하나님을 모시는 천사들을 시켜 먼저 제단의 숯불을 집어 그 입에 대도록 하고 말을 합니다.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 하여 졌느니라"

(해석)
하나님이 이사야 스스로 인정하고 고백한 죄를 용서해주시는 장엄한 한 순간입니다. 자신의 죄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는 몸임을 고백한 하나님의 사람에게 하나님은 우선적으로 그 죄를 용서하시고 그 생명을 건져 새롭게 하여 주십니다.
여기서 주신 말씀의 깊은 뜻은 죄의 용서는 인간의 손에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노력으로 죄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주도적인 은총의 손길 안에서 용서가 이룩된다는 사실입니다.

(적용을 위한 예화)
어떤 분의 고백입니다.
그 분은 어느 날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실수를 저지르고 기도원을 찾았습니다. 큰 소리로 기도를 합니다. 손으로 바위를 치면서 피를 흘리고 몸부림을 칩니다. 그때까지 전혀 용서함 받은 확신이 그에게는 없었습니다. 산이 떠나라고 주님을 부르고 목이 쉬도록 자신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하였으나 그는 용서함 받은 확신을 그때까지 갖지 못하였습니다. 인위적인 어떤 노력도 뜻을 거두지 못하였습니다. 결국 자신은 지치고 쓰러지면서 용서가 나의 의지대로 받아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때야 깨닫고 두려운 마음으로 성령님이 자신을 사로잡아 뜻대로 처리하여 달라는 새로운 기도를 그는 드렸습니다. 자신의 의지를 꺾어버리고 완전히 그 거룩하시고 인자하신 주님 앞에 자신을 맡겨버리었습니다. 그때 눈물은 쏟아지고 용서함 받은 감격을 안고 돌아왔다는 간증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의 죄를 고백하고 무릎을 꿇은 사람을 외면치 않습니다. 하나님은 고집을 꺾고 전체를 하나님께 맡겨버린 사람에게 분명히 용서의 손길을 주사 깨끗케 하십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부르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키우리라. (사 1:58)

우리 예수님은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필요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마 9:13)

넷째로, 하나님은 용서함 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지체 없이 응답하기를 원하십니다.

(말씀)
오늘의 본문에서는 하나님이 이사야 스스로 인정한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누구를 보낼 것인가 누가 우리를 대신하여 갈 것인가 제가 여기 있지 아니합니까 저를 보내주십시오.

(해석)
그렇습니다. 죄인이 용서를 받고 난 다음 반드시 하나님은 그 새롭게 탄생한 사람에게 새로운 사명을 부여합니다. 사명을 주시되 부름을 받은 자를 중심한 사명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그 원대하신 뜻을 따르는 사명일 뿐입니다. 낡은 사람을 새 사람으로 만드신 하나님의 섭리는 그가 새 사람이란 이름만으로 그 여생을 마치는 것을 원치 아니합니다.

(적용)
오늘도 우리의 하나님은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 것인가"라는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들려오는 응답의 소리는 이사야의 것과는 너무나 차이가 큽니다. ”잠깐 생각해 보고요, 제 일을 마저 끝내고요.“와 같은 응답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잡다한 사연 때문에 부르심을 연기했던 사람들은 아무도 예수의 제자가 되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이사야처럼 서슴없이 "나를 보내소서. 내가 여기 있나이다.“ 즉각적인 응답을 원하십니다.“
깨끗한 부름 앞에는, 시원스러운 우리의 응답이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사람들의 즉각적인 응답을 어떤 것보다 더 기뻐하십니다. 오늘도 할일 많은 이 땅위에 하나님은 일꾼을 부르십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이리 뛰고 저리 뛸 수 있는 사람을 부르십니다. 오늘도 말씀을 듣고 내 일터에서 예수의 증인으로 살 수 있는 사람을 부르십니다. 남은 인생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겠다는 결심을 하는 무리를 찾고 부르십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정체성을 누가복음 4장에서 밝히신 데로 가난한 자에게, 알지 못하는 이웃에게 복음을 전할 사람을 찾습니다.죄악에 포로된 자에게, 진리로 자유케 해줄 사람을 찾습니다.하나님을 보는 눈이 어두운 자에게 다시 보게 해 줄 사람을 찾습니다.
갖은 권력과 부와, 죄악에 억눌린 사람을 해방시켜줄 사람을 찾습니다.
하나님의 심부름을 누가 하겠느냐. 이 아침도 부르십니다.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라 우리를 위하여 갈꼬!" 여기에 대답이 "나를 보내소서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고서 응답해야 합니다.
학교나 회사의 적은 심부름을 하는 사람을 소사라고 하고, 나라의 큰 심부름을 하는 사람을 대사라고 하며, 특별한 심부름을 하는 사람을 특사라고 하며, 중요한 비밀을 심부름하는 사람을 밀사라고 하며, 하나님의 곁에 머물면서 그의 심부름을 하는 존재를 천사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선택과 부름을 받은 사람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여러분은 하나님을 위한 심부름꾼으로 소사가 되던지, 특사가 되던지, 밀사가 되던지, 천사가 되던지, 어느 것 하나라도 맡으려고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라고 응답해야 합니다.

주제를 실천한 결과

부르심에 성실히 응답한 사명 자에게는 어떤 결과가 주어집니까
이사야에게 주어진 사명의 내용은 실로 암담한 것이었습니다.
너는 가서 이 백성에게 너희가 듣기는 늘 들어라 그러나 깨닫지는 못한다.
너희가 보기는 늘 보아라. 그러나 알지는 못한다....... 하고 일러라
너는 이 백성의 마음을 오히려 둔하게 하여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들을 수 없고 마음으로 깨닫지 못하게 하여 내게로 돌이켜서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라. 자기 민족에게 구원의 소식은 복된 소식은 금하고 오직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의한 멸망의 소식만은 전하도록 하는 실로 가슴 앞은 사명을 받게 됩니다.
그 때 이사야는 하나님께 여쭙게 됩니다
“주님 언제까지 그렇게 이 백성을 버리시렵니까” 그 때 하나님은 말씀을 하십니다. 성읍들이 황폐하여 주민이 없어질 때까지,사람이 없어서 집마다 빈집이 될 때까지 이 백성은 먼 나라로 다 흩어지고 이 땅이 다 버려질 때까지 그렇게 하겠다. 그러나 거룩한 씨는 남아서 이 땅의 그루터기가 되도록 할 것이다. 겨우 거룩한 씨앗만을 남겨두고 완전한 패망을 내리신다는 소식만을 전해야 하는 사명을 받게 됩니다. 이사야는 자신을 불러 사용해달라는 청원을 드린 몸으로서 그 사명이 자신에 좋던 싫던 무조건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사야는 비록 어렵고 험준한 사명자의 길이요 자신이 원하지 않은 사명의 길이지만 그는 새롭게 살아갑니다. 그 사명의 수행에 전 생애를 던지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사명은 한 인간을 새롭게 개조시킵니다. 인간성이 달라집니다. 마음속에 사명감이 확실해 질 때 그는 생각하는 것이 달라지고 말하는 것이 달라지고 행동하는 것이 달라집니다. 비록 그 주어진 사명이 나의 생각과 다르고 나의 감정과 다르더라도 그것이 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사명이라면 그대로 받아 실천하는 길 외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그럴 때 사명자의 모습은 달라집니다.
그래서 '잠 못 이루는 밤을 위하여'라는 명작을 써서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진 칼 힐티(Karl Hilthy)는 '자신의 사명을 깨닫게 되는 날이 인간 생애의 최고의 날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만약 우리가 어느 인간의 심부름을 하는 존재라면 우리의 생명이 그렇게 달라질 수 없습니다. 그렇게 최고의 날이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목사의 심부름하면서 또는 친구의 심부름을 하면서 그렇게 감격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심부름꾼이 되기에 그토록 차원 높은 사명감속에서 기쁘게 살아갑니다. 주일학교 반사도 성가대원도 각 부서의 봉사위원들도 그것이 하나님의 심부름이기에 그렇게 큰 기쁨 속에 살아갈 수 있습니다.
유명한 아프리카 성자라고 불리는 리빙스턴은 "사명을 찾는 자는 그것을 실현할 때까지는 결코 죽지 않는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사명을 깨달은 사람은 집념이 있게 됩니다. 그 사명을 다하고야 말겠다는 강한 의지와 신념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 강한 사명을 이루기 전까지는 죽을 수 없다는 결론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부름을 하는 사명자의 가는 길을 결코 순탄한 길만을 아닙니다. 참으로 참기 어려운 고통이 따릅니다. 주위로부터 갖은 중상 모략도 따릅니다. 시기와 질투도 따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부름꾼이 탈선할 수 없습니다. 죄를 범할 수 없습니다. 게으를 수 없습니다. 인색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사랑의 미소 속에 즐겁게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를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는 일들만을 찾아 나서는 심부름꾼으로서의 아름다운 미래의 주역이 됩니다.

결론

사명(使命)이란 한문은 아주 깊은 뜻을 줍니다. 사(使) 자는 ‘시키다’ ‘좇다’의 뜻이고 명(命)’자는 ‘목숨’ ‘명령’의 뜻입니다. 그래서 이 사명이란 말은 시키는 명령을 좇아 살아가는 실존을 말합니다. 그러기에 자기의 사명을 깨달은 사변적 존재는 그때부터 그 인간을 위대하게 만듭니다. 성실하게 만듭니다. 용감하게 만듭니다.
현대의 사명자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너무 안일주의에 빠져있습니다. 너무 약삭빠릅니다. 어떻게 하면 쉽고 편하게 예수를 믿느냐는 데 너무 민감합니다. 성전을 건축한다는 광고가 나가면 교회의 머리수가 줄어들고 성전의 봉헌이 끝났다면 갑작스럽게 교인들이 모여든 이 비정한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오늘 하나님과 이사야 사이에서 발생된 사건의 내용과 거기에서 주고받은 말씀을 경청해야 하겠습니다. 이사야를 앞에 놓고 말씀하신 하나님이 오늘 우리 00 교회 성도들을 앞에 놓고 묻습니다.
보라. 네 악이 제하여 졌고 네 죄가 사하여 졌느니라
이제 할 일이 가득한 이 땅에 내가 누구를 보낼까
나의 사명을 받고 나서는 자, 그 길이 험한데, 고생되는데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해 갈꼬.........
대답이 있으십니까, 없으십니까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는 대답이 이 아 침 여기에 있으십니까, 없으십니까 지금 대답할 자를 찾으십니다. 이 찾으심은 언제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대로 찾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대를 부르실 때 응답을 하십시오.

2. 본 설교가 있기까지

설교노트를 위한 명상-나를 찾는 음성 앞에서

인간이 이 땅에서 사는 동안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 없다면 그것은 가장 큰 슬픔이 될 것이다. 인간이란 동물은 서로가 필요로 하는데서 그 소중한 가치를 알게 될 것이다. 내가 상대를 필요로 하고 상대가 나를 필요로 하는 곳에서 인간의 삶에 대한 의미가 발견되어진다. 그러나 나를 필요로 하여 찾아주는 상대의 신분이 어떤 존재인가에 따라 그 가치성은 달라진다. 죄악의 소굴에서 사는 집단들이 나를 찾는다고 할 때 그 부름은 나를 죄악으로 인도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그 부름에 응할 때 나의 생명은 죄의 종으로 그 종지부를 찍게 된다. 그러나 정치의 세계를 지망한 사람에게 높은 권력을 소유한 사람이 찾는 다는 전갈을 받는다면 그 부름은 실로 반갑고 막대한 기대를 가질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부름도 모두가 한시적인 것으로 한 순간을 매울 뿐 우리의 인생 전체를 맡아주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인간이 무엇을 바라기에, 어떤 분의 부르심을 그렇게 찾고 있기에 낙망하고 불안해하면서 오늘을 초조히 살아가는 것인지..... 이 설교자에게 생각을 거듭하게 한다.
죄악으로 얼룩진 인간을 하나님이 찾아 주시고 그 허물과 죄를 용서해 주시면서 나를 불러 주실 수 있을까 이것은 분명 기적 같은 사건의 발생일 것이다. 이러한 만남과 부르심이 진정 가능한 것인가 이러한 일이 가능하다면 이 땅위에 무엇을 더 바랄 수 있을 것인가 이럴 때마다 다음의 성구가 마음에 자리 잡는다.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본 설교에 얽힌 이야기

본 설교는 설교자가 학위 과정을 모두 끝내고 이민의 땅에서 목회를 시작하고 있을 때의 일이었다. 이민목회란 모두가 느끼는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교인들이 거의가 달라진 문화와 언어 속에서 받은 긴장을 교회, 특히 목사를 통하여 완화시키고 그곳에서 위로를 받고자 하는 공통된 마음들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1970년대 후반의 이민 목회에서 가장 두르러진 현상들이었다.
이러한 형상은 한국에서처럼 교인들이 자발적으로 나서서 주님의 몸된 교회를 나의 일처럼 받들고 거기서 기쁨을 찾는 일은 참으로 보기 어려운 일이었다. 모두가 달라진 환경에서 좋은 직장을 찾는데 관심을 두고 몸이 부셔질 때까지 직장 외의 일까지 해가면서 저축을 하고 안정된 이민생활을 하려는 것이 대다수의 교인들의 생활상태였다. 특히 여가를 즐기도록 만들어진 미국의 생활공간은 교회의 봉사를 위한 시간을 할애하기를 꺼리는 조건이기도 하였다.
이들에게는 인간적인 도움이 가장 많이 필요하였다. 운전을 가르쳐 주고 아파트를 주선해주고 통역을 해주고 직장을 찾아 주는 일들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의 도움이 끝나서 안정이 되면 목회자에게 빚진 자로 그 교회에 남기를 싫어한다. 그래서 무슨 구실을 찾아서라도 이유를 남기고 교회를 떠나는 것이 너무나 흔한 현상이었다. 이러한 목회의 장에서 이 설교자는 방향을 완전히 수정하였다.
그것은 설교자와의 만남보다는 하나님과의 만남이요 설교자의 말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바로 오늘의 말씀도 이러한 방향의 수정에서 찾아진 메시지이다. 하나님이 그들을 찾아 왔고 부르시고 사명을 주시고 있다는 사실을 말씀에서 찾아 그들에게 운반해주는 설교자의 본분을 감당하는 설교이다.

본문과 주제

재물이나 권력을 손에 쥔 인간의 찾음과 부름을 원하는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찾아오심과 그 부르심, 그리고 새로운 사명을 부여한 메시지를 설교자는 찾아 나섰다. 물론 필수적인 과정으로서의 조용한 명상과 기도를 계속하고 있었다.
“하나님!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오늘을 배불리 먹는 빵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 육신을 즐기는 것이 아닙니다. 남의 땅에서 필요한 것은 돈을 모으는 것이 아닙니다. 이들을 찾고 계신 하나님과의 만남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용서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사명을 깨닫게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제 하나님으로부터 받기만 한 어린아이의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보답하려는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나의 교인들에게 무슨 말씀을 주시어서 오는 주일에 변화를 일으켜 주시렵니까 말씀하소서. 종이 여기 두릅을 꿇고 귀를 기울이고 있나이다.”
이러한 기도가 계속되는 동안 성경의 여러 장면이 연상되고 있었다.
하나님이 사무엘을 부르시면서 찾아 주시는 장면을 비롯하여 모세를 만나주시는 장면이나, 요나의 생명을 위협해 가시면서 찾아주시고 사명의 본거지로 이끌어 가시는 장면들이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이 종이 찾고 있던 정확한 메시지는 하나님이 찾아 주시고, 용서해 주시고, 고단한 사명을 주시었던 이사야와의 만남이 가장 정확하다는 확신이 있게 되었다. 이러한 결과는 본문의 선정과 부르심이라는 주제의 선정에 어느 설교보다도 쉽게 도달할 수 있었다.

본문과의 대화

주어진 말씀을 앞에 놓고 또 다시 정직한 말씀의 운반자가 되어야 함을 다짐하였다. 표상 적으로 이해되어진 말씀이라고 그대로 손쉽게 옮기었다가 말씀의 원래의 뜻이 전해진 메시지와 내용을 달리한다면 그것은 설교자가 돌이킬 수 없는 죄악이다. 이 때마다 설교학 과정을 이수하는 학생들에게 시간마다 외우게 하는 다음의 말씀이 나의 가슴에서 움틀 거리고 있다.
“나는 그들에게 명하지도 않았고, 그들에게 말하지도 않았다. 그들이 이 백성에게 예언하는 것은, 거짓된 환상과 허황된 점괘와 그들의 마음에서 꾸며낸 거짓말이다.”(렘14:14)
하나님의 이러한 책망과 외면을 받지 않기 위하여서 설교자는 각각 달리 번역된 여러 권의 성경을 펼치고 각종 사전과 주석을 펴고서 내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말씀의 진의를 파악하기 위하여 몸부림을 쳐야 해다.
여기서 발견되어진 말씀은 평소에 이해하였던 메시지와 큰 차이가 난 부분은 없었다. 단지 이사야가 받은 사명의 내용이 하나님의 자비와 구원의 메시지가 아니라 구원보다는 파멸을 예언해야 하는 심히 괴로운 사명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설교의 목적과 그 전개형태

이민의 땅에서 주일 예배를 위하여 오는 교인들은 대부분이 위로와 즐거움을 안겨주는 메시지를 찾는다. 실질적으로 그러한 메시지가 그들에게 필요하다. 그러나 자식의 건강을 섬세하게 생각하는 부모는 자식이 좋아하는 음식만을 계속 공급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는다. 편식을 시켜 병을 안겨주는 부모는 거의 없다. 설교자도 그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하기에 비록 그들의 귀에 거슬리고 거부 반응이 있을 지라도 때로는 예언적이 메시지를 던져야 한다. 그래서 본 설교는 교인들의 부담스러워한 인상을 그리면서 주어진 사명이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니더라도 수행할 것을 독촉하는 메시지가 되었다.
그 전개 형태는 앞에서 이미 소개한 바 있는 분석설교로 하였다. 여기서는 설교자스스로가 메시지의 내용의 전개를 더욱 쉽게 하기 위하여 주제의 실천 방안의 부분을 구분하는데 노력하였다. 즉, 주제의 실천과정과 방안을 본문에서 유출하면서 거기에 해당된 본문의 말씀과 그 말씀의 해석, 그리고 회중들의 삶의 장과 직결된 적용을 구분하였다. 설교자는 자신의 언어가 중복되고 메시지가 간결하게 엮어나가지 못한 이유를 언제나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그 대부분의 이유는 말씀의 제시와 그 해석의 과정을 적용과 뚜렷하게 분류하여 주는 연습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 실례로서 예화는 적용을 극대화시키기 위한 도구로서 활용되어야 하는데 설교자가 언제 어디서나 생각나는 데로 사용하는 경우들은 진리의 선명한 운반에 오히려 혼돈을 일으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러한 설교현상을 막기 위하여 설교자는 자신의 설교를 분명하게 분류하여 작성을 해야 하고, 그 작성된 원고는 자연스럽게 전달되어지는 설교자의 수고와 지혜를 찾아야 할 것이다.

3. 본 설교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

본 설교를 설교학의 이론으로 조명해 볼 때 결코 완벽한 설교가 되지 못한다. 세상에는 어떤 설교도 완벽한 설교가 없다는 설교신학자들의 말을 그대로 수용하면 위로를 받을 수 있을 지 모르나 다음과 같은 부분들은 하나의 문제점으로 평가를 필요로 한다고 본다.

먼저는, 본 설교가 순수한 메시지만을 전하겠다는 고집을 부린 결과 너무 분석적이고 진부한 감을 갖게 한다. 해당된 본문의 전반적인 제시와 그 말씀의 해석 등을 이어 나가는데 흥미의 상실이 우려될 수 있다.

둘째는, 이러한 본문의 풀어 가는 설교에는 그 지루함의 공간을 채울 수 있는 시 원스러운 예화들이 활용되어야 하는데 본 설교에서 사용된 예화는 그러한 효과를 가져오기에는 미흡하다는 지적을 받게 된다.

셋째는, 회중들이 설교자를 쳐다보고 그의 입을 통하여 나오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 는 이유 중의 하나는 회중 자신들이 미쳐 생각하지 못했던 수준에서 설교자가 말씀을 해석해주는 부분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설교자는 본문의 석의를 너무 학구적인 것은 피하면서도 회중들이 알지 못하였던 깊이 있는 해석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본 설교에서 보여준 해석의 부분들은 회중들의 수준을 능가하지 못하였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다고 본다.

넷째는, 본 설교와 같이 그 내용의 전개가 매우 서술적인 경우는 그 표현이 문학 적이고 부드러운 언어감각이 풍부해야 한다. 그러나 본 설교에서는 그러한 문학성을 내포한 어휘나 문장의 전개에 그러한 고려를 하지 못하였다는 지 적을 받을 수 있다고 본다.

다섯째는, 본 설교가 취한 분석설교의 형태에 있어서 필수적인 것은 주제 실천의 결과가 누구나 즐거워하고 추구하고 싶은 긍정적인 사례를 들어주어야 한다. 그러나 본 설교의 결과의 부분에서는 또다시 진부하게 본문의 제시와 설교 가 이어지고 있다. 다시 한 번 사명을 강조하고 싶은 설교자의 심정은 충분히 보여질 수 있다. 그러나 설교는 하나의 공식적인 틀을 지켜 나갈 때 바르게 그리고 성공적으로 메시지가 운반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이 부분을 그대로 수정 없이 내 보내면서 설교학 교수로서 정립한 이론을 내 자신의 설교에서 얼마나 실천되고 있는지를 보면서 때로는 떳떳함을 때로는 부끄러움을 느껴본다.

끝으로, 본 설교의 결론이 너무 회중들에게 강압적인 접근이 된 인상을 주고 있다. 좀더 격려적이고 암시적인 표현을 빌리면 친금감 속에 메시지를 가슴에 안 고 갈 텐데 오히려 거부감을 주지는 않을지 염려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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