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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호와께 감사하라 (시 136: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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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우리 교회가 추수감사절로 지킵니다. 이 시간 우리 모두는 지금 까지 우리 가정과 우리의 일터와 우리 교회와 나라와 민족을 지켜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립니다.
그리고 오늘 이 예배에 참여하신 성도 여러분들과 여러분의 가정 위에 성삼위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교회사적으로 볼 때, 추수감사절은 1621년 11월부터 지켜 왔습니다. 1620년 12월 21일, 청교도들은 63일간의 긴 항해 끝에 아메리카 대륙에 상륙하였습니다.
그들은 신대륙에 도착하자마자 제일 먼저 예배당을 짖고, 학교와 병원을 세운 후, 마지막으로 자기들의 집을 지었습니다.

그후 25,000여 평의 땅을 개간하여 농사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가을, 눈물과 땀으로 이룬 농토에서 풍성한 열매와 곡식을 거두어 드렸습니다.
비록 102명의 동료와 식구들중 거의 절반이 풍토병과 인디언의 습격으로 생명을 잃었습니다. 그들의 슬픔과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남은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아니하고 감사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해 농사지은 것 중에 가장 좋은 곡식과 열매들을 하나님께 감사의 제물로 받혔고, 식구들과 동료들의 생명을 빼앗아 간 인디안 들을 초청하여 풍성한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첫 번째 수추 감사절이었습니다.

그후 미국의 와싱톤 대통령이 11월 26일을 감사절로 선포하여 온 국민이 지켜 온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실 감사절은 이미 구약 시대부터 지켜 온 것입니다.
민29:12-38절에 나타난 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킨 수장 절이 바로 추수감사절이었습니다. 그 절기는 유대 원력으로는 7월 15일 부터 일주일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추수감사절은 하나님께서 일찍이 제정하신 절기입니다.

오늘 봉독한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여호와께 감사하라’는 제목으로 다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시편에는 다섯 편의 감사 시가 있습니다. 그것은 105편,,107편,108편,135편, 그리고 136편입니다. 오늘 읽은 136편은 제일 마지막 편으로 보다 자세하게 감사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물론 이 감사의 시편들은 서로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만,136편은 감사의 조건 중에서도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는 말씀이 반복되고 있다는 점이 그 특징입니다.
그러면 이 시편 기자가 감사한 내용이 무엇인가를 살펴보면서 우리가 감사할 제목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감사해야 할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의 위대하심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감사는 권장 사항이 아니라 기독교의 본질에 속하는 것입니다.
스승의 은혜를 감사할 줄 안다면 좋은 제자입니다. 부모의 은혜를 감사할 줄 안다면 효자입니다. 사람이 사람의 은혜를 알고 감사하는 것은 인격적인 존재의 증거가 되며, 바로 여기서 윤리와 도덕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위대한 창조와 그의 위대한 존재를 감사할 줄 아는 것은 인간의 본분이요, 도리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 때문에 감사하고, 하나님의 위대하신 일 때문에 감사할 것입니다.
물론 사람과 사람끼리도 감사해야겠지만,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감사가 하나님 중심의 감사가 되어야 합니다.

본문 1절에 보면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은 소망이 없습니다. 죄악이 가득합니다. 불의와 불법과 악이 강성한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정말 선하시고, 인자하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그 자체가 우리의 소망이며, 기쁨입니다.

그리고 2절에는 “모든 신에 뛰어나신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고 시편 기자는 감격과 환희에 찬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누구이신 가에 대하여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사람들이 상상해서 만들어 낸 종교의 대상자가 아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세상의 잡된 신들 중에 하나가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은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인격적인 하나님이시며, 지금도 살아 역사 하시는 유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의 영광을 위해 만물을 만드시고, 소망 없는 우리에게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무한한 사랑을 쏟아 주셨습니다. 이 사실을 생각할 때에 우리는 어떤 환경에서든지 하나님께 감사드리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실 추수감사절이라고 하지만 서울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추수에 대한 실감도 없고 농사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더구나 농작물 재배의 불균형으로 인해서 그 동안 땀흘려 기른 많은 량의 배추를 폐기할 수밖에 없는 농부들의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뿐입니까 U. R협상과 미국의 쌀 및 농산물 시장 개방 압력으로 그 어느 때 보다 농민들이 추수에 대한 감사보다는 원망과 불평이 많은 때입니다.

사실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면 어떻게 감사가 나올까 생각이 됩니다. 그러니까 좋은 일 보다는 좋지 않은 일들이 더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이런 가운데 감사할 일 보다는 원망하고 불평할 일이 많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손익 계산서를 내놓고 이익이 있으면 감사하고, 이익이 없으면 감사하지 않는 식의 조건적인 감사가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합격하면 감사하고 떨어지면 낙심하고, 성공하면 감사하고 실패하면 원망하고, 무슨 일이 잘 되면 감사하고 그 일이 잘 안되면 불평하는 것은 조건적이고 타산적이며 인본주의적인 감정 표현에 불과한 것입니다. 여기에는 진정한 감사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감사는 하나님 중심의 감사입니다.

어린아이는 손에 빵이 들려지면 좋아하고 없어지면 투덜대며 울어댑니다. 성도라면 이런 식의 감사에 그쳐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유치하고 타산적인 감사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리고 비교해서 남보다 나아졌으니까 감사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병으로 고통을 당하는 환자를 보고 자신의 건강을 감사하며, 시험에 떨어져 눈물 흘리는 사람을 보고 합격을 축하며 감사한다면 얼마나 잔인한 일입니까 그러므로 성도의 진정한 감사는 타산적이고, 조건적이고, 비교적인 감사가 아니라, 하나님으로 인한 감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감사는 세상 모든 것을 잃는다고 할지라도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이제 지난 한해를 뒤돌아보면서 참으로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것은 추수의 손익과 관계없이, 다른 사람들과 환경에 관계없이 하나님은 선하시며, 하나님은 모든 신위에 뛰어나신 창조주이신 것을 믿고 살아온 그 자체가 감사한 일인 줄 믿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믿는 것은 온 우주를 소유한 것이나 다름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사울의 칼을 피하여 다니는 고달프고, 비참한 생활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감사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시23:1-6절 말씀이 바로 그러한 가운데서도 감사와 찬송을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었던 그의 신앙고백입니다. 그는 광야의 추위와 동굴 속에서의 불편한 자리에서도 ‘여호와는 나의 목자 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아니함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고 하였으며,‘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나의 목자로 믿는 자들에게는 늘 감사하고, 늘 풍족하고, 늘 만족함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내 처지를 보고 다른 사람을 볼 때 늘 불평하고 불만하기 쉬운 것입니다. 그것이 인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모든 소망을 거는 자에게는 언제나 감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2. 하나님께서 천지와 만물을 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4-9절에서 그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창조의 위대함 심을 찬송하며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감사의 조건을 항상 내 자신의 이해관계에서 찾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컨대 금년 한 해는 사업이 잘 되어서 감사하다든지, 진급을 해서 감사하다든지, 새 집을 마련해서 감사하다든지, 이번 시험에 합격해서 감사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축복을 깨닫고 구체적인 감사를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보다는 하나님의 창조와 그 만드신 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그 자체가 그렇게 좋고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제의 태양이 오늘 다시 떠오르는 것도 감사하거니와 봄이 오는 것도 감사하고, 겨울이 오는 것도 감사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것을 보면서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영원하신 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공중에 새가 나는 것도 감사거니와 바다에 고기가 노는 것도 감사할 뿐입니다. 산이 높은 것도 감사하거니와 골짜기가 깊은 것도 감사할 뿐입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절묘하신 창조의 능력을 증거하기 때문입니다.

이 우주와 땅덩어리가 우연히 생성되어 막연히 끌려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날마다 초조하고 날마다 불평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의 위대한 창조를 믿고 아는 사람은 언제나 감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사는 기독교 신앙의 척도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이야말로 진정으로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구원 때문에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10-22절에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의 포로에서 구속하여 가나안 복지로 인도한 사실에 대하여 감사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 출애굽 사건 보다 더 큰 사건은 없었습니다.
출애굽 당시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바로 왕을 항복케 하시고, 홍해를 가르사 쫓아오는 애굽 군사들을 홍해에 수장시켜 버리실 때의 일을 생각하면 통쾌하고, 감격스러워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해서 광야의 고난과 고통은 날이 가고 해가 가면 갈수록 더해 갔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와 하나님께 기회 있을 때마다 불평을 털어놓았습니다. 물이 없다느니, 고기가 먹고 싶어 죽겠다느니, 춥다, 덥다....어느 것 하나 불만 아닌 것이 없었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 사건을 회상시켜 주셨습니다.

물론 지금 생활이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그것은 벌써 구원받고 자유 함을 받은 후에 일로써 이제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복지를 향하는 희망이 넘치는 걸음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만일 이 복된 사실을 모른다면 광야의 생활이란 정말로 지겹고 고통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가는 길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복지로 가는 여정임을 믿는 자들에게는 고생이 고생이 아니라 오히려 즐거움과 감사의 길일 것입니다. 마치 정상을 오르는 등산 인과 같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의 권능으로 애굽에서 구속해 내신 사실을 생각해야 감사가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광야와 같습니다. 마치 구속함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광야 생활의 아픔이 있었듯이 우리도 구속함을 받기는 했지만 여전히 광야 생활에서 오는 피곤함과 슬픔도 있고, 질고와 고통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은 후에는 고통이 덜 할 줄 알았는데 더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명심해야 할 것은 저 영원한 가나안 복지인 천국을 향해서 가고 있는 여정임을 기억하고 좀 힘들고 어렵다고 불평하지 말고, 감사하며, 찬송하며, 기뻐하며 걸어가야 할 것입니다.

4.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을 감사해야 합니다.
23-26절을 보면 하나님은 우리의 창조주이시며, 구속 주이시지만 그는 옛날 옛적에 계시던 하나님, 그저 멀리서 우리를 보고 방관하시는 분이 아니라 지금도 우리 가운데 계셔서 우리를 간섭하시며, 섭리하시는 살아 역사 하시는 하나님이심을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보기에 적은 일이나 큰 일이나 모든 일에 있어서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본문 24-25절에 있는 말씀대로 우리를 우리의 대적과 위험에서 건져 주시며, 모든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시는 은혜와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신실하신 믿음의 대상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든 삶중에 우리와 함께 하시며 일용한 양식을 언제나 공급해 주시는 풍성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감사드려야 합니다.

(예).세상에는 참 무서운 병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암’이라고 하는 병은 지금 까지도 제일 무서운 병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것이 어디에 발병했느냐에 따라서 위험성이 더 커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어떤 교인 한 분이 뜻하지 아니하게 암에 걸렸는데, 하필이면 그것이 혓바닥 끝에 발병하였습니다. 혀에 이상을 느끼고 의사를 찾아갔는데 진단 결과는 혀를 잘라 내야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드디어 혀를 잘라야 하는 수술 날짜가 되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체념하고 수술실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수술을 하기 직전에 의사가 물었습니다.
‘당신은 이제 혀를 자르면 우리와 같이 정상적인 말을 못하는 벙어리가 되고 맙니다. 마지막으로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한 마디 하십시오’라고 했습니다. 무거운 침묵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그 환자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습니다. 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습니다. ‘주 예수여,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자! 이제 자르십시오!’ 그의 말은 꼭하고 생기가 넘치는 말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다 잃을 지라도 후일에 모든 것을 다 회복시켜 주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그는 오히려 감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질병의 충격 속에 놓일 때나, 죽음이 눈앞에 이르렀을 때에도 ‘주 예수여! 감사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복된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까지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베풀어주신 이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 것인가’하는 뜨거운 마음과 감격을 가지고 남은 여생을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리고 교회와 복음을 위해서 복되게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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