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감사할 일을 찾아 보자 (엡 05:15-21)

첨부 1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탄식하시는 말씀입니다. 이 시대를 무엇이라고 부를 수 있느냐고 물으면 사람들은 “배은망덕의 시대”라고 말하는 것을 서슴지 않을 것입니다. 자식이 배은망덕하니 어버이가 통곡하고, 제자가 배은망덕하니 스승이 머리를 깎입니다. 사람이 배은망덕하니 하나님께서 이사야의 입을 통해 말씀하시길 내 백성이 짐승만도 못하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사람된 본 모습은 감사하며 사는데 있습니다. 소는 느낌이 없어 감사할 수 없고, 개는 깨달음이 없어 감사할 리 없지만, 사람은 깨닫는 머리가 있고 느끼는 가슴이 있기에 감사하며 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어버이에게 감사하며 사는 것은 자식의 도리요, 스승에게 감사하며 사는 것은 학생의 본 모습이요, 창조주 하나님께 감사하며 사는 것은 사람의 사람된 도리요 참모습입니다

어떤 사람은 나는 감사할 일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기심 때문에 그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감사하며 사는 조건, 누구에게는 주었고 누구에게는 안주지 않았습니다. 성질은 다르고 정도는 다를지 몰라도 누구에게나 다 감사할 이유와 조건이 주어져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공평하게 대자연의 혜택(햇빛, 공기, 비...)을 받고 살 듯이 말입니다. 다만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고 알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고 오해하고 있기 때문에 감사를 못하고 있을 뿐이요 또한 그런 사람은 스스로 인생의 불행한 주인공이 되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와이에 가니 그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는 두 사람이 있었는데 한 사람은 하와이 세계의 섬을 통일한 왕이요 한 사람은 다미앙이라는 성자였습니다. 모로코의 성자 다미앙 문둥병 환자들의 수용소였던 저주의 섬 모로코에 복음을 가지고 들어갔던 선교사요, 종국에는 자신도 그 문둥병에 걸려 일생을 문둥병과 함께 하였던 근세기 최고의 성자입니다. 그는 문둥병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받고 단신으로 모로코 섬에 들어갑니다. 그러나 모든 사회와 국가와 종교와 사람들로부터 소외당하고 외면 당해 온 문둥 병자들은 철저하게 그를 외면하고 다미앙이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이지 아니합니다.
그의 헌신적인 선교로 그 저주의 섬에 이윽고 한 사람 두 사람의 신자가 생겨나게 되고 서서히 복음이 전해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대다수의 문둥병 자들은 복음을 믿으려 하지 아니하고 다미앙의 복음 사역을 거절하고 방해하였습니다. 다미앙은 왜 자신이 전하는 복음을 문둥병 자들이 왜 받아들이지 아니하는 지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에게도 저 사람들과 같은 문둥병을 내려 주옵소서...그래서 저도 그 천형의 고통을 함께 누리면서 복음을 전하게 하소서...”
모로코 섬에 들어간지 6년째 되는 어느 아침에 다미앙은 차를 마시기 위해서 물을 끓이게 되었고 그 뜨거운 물이 실수로 자신의 발등에 떨어지게 되는 데 이게 왠 일입니까 그 뜨거운 물이 발등에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뜨거움도 아픔도 감각도 느끼지 못하였습니다. 바로 다미앙에게도 그 문둥병이 덮쳐 왔던 것이었습니다. 순간 다미앙은 그 자리에 끓어 엎드려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제 나도 저 문둥병 자들에게 설교할 때에
여러분...이라고 하지 아니하고
우리는...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당신들 문둥병 자가 아니라
우리 문둥병 자들은...이라고 설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이 기쁨의 문둥병을 주시 오니 정말 감사합니다.”

다음 주일은 추수 감사 주일입니다. 농사짓지 아니하는 우리에게 무슨 감사절이냐고 반문하시는 분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래서 실감나지 않는 주일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중요한 의미는 지난 한해 동안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해 보고 감사할 일을 찾아보자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생활”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딸답게 사는 중요한 척도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냐 감사하며 살아라. 하나님의 딸이냐 감사하며 살아라”는 것입니다.

1. 감사는 구원받은 성도의 참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마지막에는 반드시 좋았더라 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만일 제가 좋았더라고 했으면 그것은 내 인격만큼만 좋은 것일 겁니다. 그러나 완전하신 하나님이 좋다고 하셨으니 그것은 더 이상이란 말이 필요 없을 정도로 완전히 좋은 것입니다. 산을 보시고, 들을 보시고, 바다를 보시고, 우주를 보시고...자연 삼라만상을 보시고 “좋았더라” “좋았더라”고 하셨습니다.

그 중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을 보시고도 좋았더라고 하셨습니다. 이 때의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은 아름다운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새의 노래 소리가 무색할 정도로, 꽃의 향기가 민망할 정도로 인간은 아름다웠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아름다웠던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그만 잘못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만 선악과로 인해 비극의 주인공이 되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렇게 좋던 하나님이 무서워 졌습니다. 음악 소리 보다 더 향기롭게 들렸던 하나님의 목소리가 천둥소리처럼 들립니다. 부러워했던 꽃이, 흠모했던 새들이 냄새난다고 다 도망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우리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 즉 하나님은 아버지 시고 우리는 그의 자녀가 되게 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첫 번째 감사의 조건입니다.

인간의 괴로움의 무거운 짐, 인생의 무거운 짐, 가정의 무거운 짐.....주안에서만 해결되어집니다. 그렇기에 주안에서밖에 감사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눈에 눈물 보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우리 입의 한숨 소리 듣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어느 부모가 자식의 눈에서 눈물 보길 원하며 자식의 입에서 한숨 소리 듣기를 원하겠습니까 하물며 우리 하나님은 더더욱 그리하십니다. 주안에서 행복을 되찾기 바랍니다. 감사와 웃음을 되찾기 바랍니다. 감사는 구원받은 성도의 참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날 구원하신 예수를 영원히 찬송하겠네, 저 죄인 어서 이리와 죄 사유하심 받아라,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얻을 것이라. 죄 중에 상한 영원을 주 온전하게 하시네
주 우리 죄를 인하여 피 흘려 죽으셨으니 주 박에 없는 사랑을 만 백성 알게 고하세, 주 예수 사랑 못 잊어 나 항상 눈물 흘리네 이 세상 어디 가든지 내 주만 생각 하도다.

우리가 무엇을 하나님에게 감사해야 할까요

첫째,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해야 합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의 모습이나 사는 조건에 감사하는 사람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자기 과대 망상증에 사로잡히고, 자기는 더 잘 났을 수 있는데 조물주가 이렇게 만들었다고 아무 근거도 없는 불평에 사로잡히고, 요세 티비 광고에 나오는 것처럼 나는 특별하고 내 아이는 특별하다는 특혜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불만을 합니다. 누가 그런 보장을 했습니까 아무도 인생을 특별하게 보장하고 확증해 주지도 않았는데 자기 혼자서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이런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이 가장 모습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입니다. 누구 덕분입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아닙니까 지난 시간에 자세히 말씀드렸기 때문에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겠습니다만 어쨌든 이러한 자세에서만이 진정한 감사가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고전15:10)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오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라고 말씀하신 바울의 말씀을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바울의 말을 그냥 들으면 안됩니다. 그는 병자입니다. 고치지 못한 고질적인 병에 평생 고생을 했어요. 집도 없고 가장도 없고 먹을 것도 없고 대접받은 일도 없고, 우리들이 바라는 것을 그는 거의 가지지 못했습니다. 오직 그에게 있는 것이라고는 하나님의 종이 된 것과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는 열정밖에 없었습니다. 정말 가질 것을 가진 사람은 불평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에게 늘 감사하고 사는 것입니다.

둘째, 언제나 감사를 해야 합니다.
세월을 아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때가 악하기 때문입니다. 악한 때에 우리가 방심을 하면 허송 세월을 보내게 됩니다. 아무 쓸데없이 술을 잔 듯 먹고 다음 날 아침에 쑥이 쓰려 꿀물을 먹어 가면서 만족해하는 사람이 어떻게 세월을 아끼는 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까 세월을 아낀다는 것은 생명을 아낀다는 뜻이요 인생을 값지게 산다는 말일 것입니다. 사람들은 돈을 아낄 줄 알고, 건강이 중한 줄을 알지만 세월이 아깝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인생의 마지막 길에 뒤를 돌아보면서 허무하게 살아 온 인생살이를 후회합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이 하는 짓입니다.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에게 감사하고 모든 사람에게 감사하고 언제나 감사해야 합니다. 세월을 아끼는 법입니다. 감사하여 말하고 감사하여 살고 감사하여 일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시 37:7)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말지어다.
(시 37:8)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라 불평하여 말라 행악에 치우칠 뿐이라.
심지어 (시 37:1) 행악 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지어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엡 5:20)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전 5:18)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셋째, 성령 안에서 감사해야 합니다.
성령 안에서 감사해야 합니다. 나쁜 짓을 하고서도 감사할 수 있는 것이고 죄를 짓고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요세 공직 사회에 뇌물이 큰 문제가 되여 있는데 뇌물을 주고받으면서 그들은 틀림없이 감사하다는 말을 했을 것입니다.
(헁 24:3) “빌릭스 각하여 우리가 당신을 힘입어 턔평을 누리고 도 이 민족이 당신의 선견을 인하여 여러 가지로 개량된 것을 우리가 어느 모양으로나 어느 곳에서나 감사 무지하옵나이다.” 이 감사는 사도들을 핍박하는 자들이 빌릭스 총독에게 아첨하는 감사의 말입니다. 이런 감사는 참된 감사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진실한 감사는 이런 감사가 아닙니다. 범죄자들의 감사는 독약과 같아서 그 사람을 죽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 성령 안에서 감사하는 것이 진실로 값있는 감사가 될 것입니다.

일본에 국민학교 4학년 때부터 이질로 뇌성마비를 얻어듣는 것과 보는 것과 눈까풀 움직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 사람, 우찌무라 겐죠가 있었습니다. 그의 몸은 머리만 크게 발달하고 나머지는 어린아이의 것 그대로인 채 흐느적거리는 그야말로 볼품없는 몰골이 였습니다. 그에게는 어머니 한 분밖에는 없었는데 어머니가 나가실 때 성경책을 머리맡에 펴 두고 머리를 받혀 놓고 나면 돌아오기까지 그 장만을 보아야 하데 이것 때문에 그는 은혜를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고린도 전서 12장을 읽어 내려가던 중이었습니다. 그는 주님이 바울에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하신 말씀을 자기에 대한 말씀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바울은 자기처럼 눈에 박힌 가시를 제해 주시기를 구했으나 하나님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진다”고 한 말씀입니다. 그 이후로 그는 어떤 사람을 찾아가도 천사와 같은 모습으로 변했다. 그는 눈까풀을 이용해서 글자판을 집어 갈 때 윙크하는 방식으로 복음적인 시를 지어 두 편을 발표하였다. 그는 뒤늦게 책과 방송을 통하여 완악한 일본인을 회개시키는 사도로 쓰시고자 하신 하나님의 선택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이렇게 변모되기까지 어머니의 극진한 사랑과 먼길을 마다 않고 자신을 회개시키려 찾아온 목사님 덕분이었다고 말했습니다. 다음은 그의 회고적인 시 “괴롭지 않았더라면”입니다.
만일 내가 외롭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을
만일 모든 형제 자매들도 괴롭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의 사랑은 전해지지 않았을 것을

만일 우리 주님이 괴롭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의 사랑은 나타나지 않았을 것을

감사할 조건이 있어서 감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죄인도 하는 것이다. 성도는 시험에 들지 않도록 하는 감사가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감사는 스스로 걸어갈 힘이 없을 때 우리를 도우실 끈이 된다. 이것이 바로 성령 안에서 감사하는 일입니다.

넷째, 감사는 표현되어야 합니다.
본문에는 (엡 5:20)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라는 말, 감사하는 찬송, 감사의 표시, 주고받는 감사를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에게 감사를 표시해야 합니다. 감사의 노래를 부릅시다. 감사의 인사를 합시다. 감사의 기도를 합시다. 감사를 정성과 마음을 다해 표시합시다. 우리들의 심장에 하나님이 주신 모든 은혜에 대한 감사의 느낌이 있어야 합니다. 마음이 뜨거워 져야 합니다. 감사는 느낌의 표현입니다. 단풍을 보면서도 감사, 스쳐 지나가는 바람결 속에서도 감사, 잠자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도 감사, 식탁을 대하면서도 감사, 냉수 한 그릇을 마시면서도 감사...감사 감사의 느낌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느낌이 거룩한 행동으로 표출되고 표현 되여야 할 것입니다.
다윗은 말합니다. (시33:2) 수금으로 여호와께 감사하고 열 줄 비파로 찬송할지어다.
(시92:1) 지존 자여 십 현금과 비파와 수금의 정숙한 소리로 여호와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나타내며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을 배품이 좋으니이다.
(시50:23)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시54:6) 내가 낙헌제로 주께 제사하리이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 주의 이름이 선하심이니이다.

다섯째, 확실한 소망이 지속적인 감사를 할 수 있게 합니다.
비록 오늘은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니지만 멀리 보는 사람은 내일 잔잔한 물가와 푸른 초장에 있는 자신을 발견할 것입니다. 밤에 앉아 아침을 보는 사람, 겨울에 앉아 봄을 보는 사람, 사망에 앉아 생명을 보는 사람, 그 생활 속에 감사가 메마르지 않을 것입니다.

욥도 그가 고난 중일지라도 고난 후를 바라보았을 때 감사가 있었습니다. 모세도 피곤한 광야 생활이지만 가나안 땅을 바라보았을 때 감사가 있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도 비록 가나안 원주민이 구척장신이었지만 그 땅을 정복한 후를 바라보았을 때 감사 보고서를 드릴 수가 있었습니다. 순교자들이 칼날과 굶주린 사자의 아귀에서 감사할 수가 있었던 것은 죽음 후의 영원한 본향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은혜, 잊으면 배은망덕한 자가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에게 받은 은혜를 감사한다고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갚은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상쇄나 보상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요, 우리들의 행복의 문제입니다.
즉 감사하는 사람은 더욱 행복할 것이요 불평하는 사람은 더욱 불행해 진다는 말입니다. 감사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깃들이고 불평에는 사단이 둥우리를 틀기 때문입니다.

(고후4:15) 모든 것을 너희를 위하여 하는 것은 은혜가 많은 사람의 감사함으로 말미암아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