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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롬 06: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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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추수 감사 주일 예배로 드립니다.
일년 동안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와 가정과 이 민족 위에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드리는 예배입니다. 이 세상을 둘러보면 가난하고, 병들고 큰 슬픔과 고통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사랑의 빚을 많이 지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데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많은 빚을 지고 사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사랑의 빚을 지고 사는 것을 깨달은 사람’ 그 사람이 진실로 세상을 감사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런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피차에 감사하는 일은 너무도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말할 수 없는 은혜와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처럼, 다윗처럼 중심의 감사와 찬송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고후9:15절에 보면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시116:12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라고 했습니다.

1. 투쟁으로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변증법적 유물론과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 매인 체제에서는 모든 것이 싸움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상적 배경이 없어도 우리들의 생활은 모두 비슷한 투쟁과 싸움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생존 경쟁, 약육강식, 적자생존....모든 것을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무엇 하나 싸움 아닌 것이 없습니다. 북한 사람들 보세요. 모내기를 해도 ‘모내기 투쟁’, 벼를 벨 때에도 ‘벼 베기 작전’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들도 어느 사이에 ‘쓰레기와의 전쟁’ ‘승리를 위한 선거 전략’ ‘취업 전쟁’ ‘임금 투쟁’ ‘쟁취’라는 말들에 익숙해져 버렸습니다.
투쟁하고, 쟁취해서 얼마의 이득을 얻었다고 해봅시다. 거기에 어떤 만족이 있습니까 점점 마음은 황폐해집니다. 쟁취해서 얻은 일에는 행복도, 감사도 없습니다. 또 다시 불평입니다. 또 다시 원망으로 이어집니다. 이로 인해 인간성에 입은 손해는 엄청난 것입니다.
싸움과 혁명과 파업과 쟁취...이런 것들을 통해서 얻어진 일에는 감사가 없습니다. 잠시 자기 성취감에 도취되어 기뻐하지만 곧 이어 쓴잔을 마시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어디에 행복이 있습니까 감사하는 심령 속에 있습니다. 감사가 행복을 낳는 것입니다. 감사가 있어야 행복한 것입니다.

영국의 윌리암 로우라고 하는 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족과 행복을 가장 빨리 찾는 비결은 범사에 감사하는데 있다’라고 했습니다.
결국 감사함으로만 행복한 것입니다. 많이 가졌다, 적게 가졌다,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2. 물질로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잠30:8절에 보면 “곧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9절에 보면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물질이 인간에게 만족과 행복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에게나 일용한 양식이면 족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님께서도 주기도문을 가르치면서 ‘일용한 양식을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3. 감사하므로 행복해 집니다.
사람은 누구나 감사의 마음을 가지는 그만큼만 행복한 것입니다. 그 때만 은혜가 은혜 되고, 행복이 행복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감사가 어디서 옵니까
가. 깨달음에서 오는 것입니다.
전쟁터에서 팔 하나를 잃어버리고 병원에 누워 있는 아들에게 어머니가 간호하기 위해 왔습니다. 어머니는 누워 있는 아들에게 성경을 읽어 주려고 했습니다. 아들은 어머니가 들고 있는 성경을 빼앗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 필요 없어요. 하나님이 있다면 내 팔이 이렇게 잘려지도록 내버려 둘 리가 있겠어요” 어머니는 아들의 오른 손을 잡으며 “네게는 아직도 오른 손이 남아 있지 않니 하나님은 네 왼팔을 가져가신 것이 아니라 오른 팔을 남겨 주신 것이란다. 이 엄마는 그것만으로도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단다.” 그 후로 아들은 한 쪽 팔만 가지고 열심히 공부해서 훌륭한 학자가 되었습니다.
“어리석은 백성아, 이 미련한 민족아, 너희는 어찌하여 주께 이처럼 갚느냐 그는 너희를 지으신 아버지가 아니시냐 너희를 만드시고 일으키신 분이 아니시냐” (신명기 32:6)

내가 나 된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깨달음이 없으면 멸망할 짐승과 같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전15:10절에서 고백하기를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오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다”고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았고, 자신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았습니다. 여기에 진정한 감사와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과 겸손, 그것을 가진 사람만이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깨달음이 없을 때 사람은 누구나 교만해집니다. 교만한 사람은 어떤 형편에서도 감사가 없고, 감사가 없기에 끝까지 불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감사는 조건적인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것입니다.
세상의 이것 때문에, 저것 때문에...이렇게 저렇게 감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달으면 무조건 감사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감사의 체질, 감사의 성품, 감사의 인격이 되어야 진정한 감사가 있는 것입니다.

(예). 1946년 6월 공산주의자들은 일제 때 순교하신 주기철 목사님의 아들 주영진 전도사를 잡아갔습니다. 이때 주기철 목사님의 부인되시는 오정모 집사 님은 다음과 같은 감사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목사님을 제물로 받으시더니 또 그 아들까지 받으시려 합니까... 한없는 영광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어린 종에게 담대한 마음 주시사 시험에 들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라는 것이었다.

나. 세상 적이 아니라 영원한 것을 주심을 감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감사는 세상 적이고, 조건적인 것보다는 구속의 은총을 받았기에 무조건적인 감사로 승화되는 것입니다.
아프리카로 부터 끌려와 대를 이어 종살이를 하는 노예들의 생애를 생각하면 얼마나 불행한가를 상상할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자유가 없고 고통만 있습니다. 물건처럼 팔려 갑니다. 짐승을 길들이는 식으로 가죽 채찍과 쇠몽둥이로 닥치는 대로 두들겨 팹니다. 이건 사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주인 마음대로 죽일 수도 있고, 버릴 수도 있습니다. 평생을 종이 되어 주인이 하라는 대로 노동만 하다가 죽는 것이 바로 노예입니다. 어떤 면에서 짐승보다 불행한 것이 노예입니다. 죽지 못해서 사는 것이 노예입니다.
그런데 그런 가운데서도 예수 믿는 그들은....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그들은 그 가운데서도 감사하며 하나님께 찬송을 하였습니다. 그들의 찬송은 감사와 희열이 넘쳤습니다. 그 노래를 ‘니그로 스피리쳘’이라고 부릅니다. 영감이 넘치는 찬송이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감사 찬송을 부를 수 있습니까
그들은 세상이 알지 못하는 하늘의 비밀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육신의 자유보다 더 큰 진리 안에서 자유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천국의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일찍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진리가 너희를 자유께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들은 영원히 마귀와 죄의 종으로 비참하게 살수밖에 없는 소망 없는 불쌍한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자유께 하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죄의 값을 다 치르시고 피 흘려주심으로 우리에게 ‘참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영생 복락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 놀라운 은혜를 깨닫고 감격하며, 감사하는 심령 속에 진정한 자유가 있고 또한 그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은혜 받은 성도들을 행해서 하나님의 구속의 은총을 감사하며 찬송하라고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 순종해야 합니다.
오늘 봉독한 말씀 중 17절에 보면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죄의 종이였는데 지에서 해방되어 의의 종이 되였음으로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 은혜를 깨달아야 합니다. 이 은혜를 깨닫지 못하면 이 은혜를 받았다고 해도 감사를 할 수가 없습니다. 감사를 하지 못하면 죄에서 해방되어 의의 종이 된 기쁨을 알지 못하고 감사를 할 수 없습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깨달을 수가 있는 것입니까 순종해야 합니다. 어떻게 순종합니까 성경은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라고 하십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도록 본을 보이신 분은 바로 주님이십니다. 주님처럼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감사를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해야 진실로 주신 은혜에 대한 감사와 기쁨이 있을 것입니다.

라. 감사해야 영생의 열매를 맺습니다.
21절에 보면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라고 했습니다. ‘불순종의 열매는 사망이요, 순종의 열매는 영생이라’고 한 것을 보면 믿음과 감사와 순종은 불가 분리의 관계임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순종의 열매가 되는 영생은 단순한 기쁨이나 보람이 아닙니다.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하여 ‘사람들에게 말할 수 없는 말’이라고 했습니다.

눅17:15에 10명의 문둥 병자 가운데 감사한 한 사람만이 영생을 얻었습니다. 문둥 병자들이 병 고침을 받은 것은 너무나 큰 은혜입니다. 그러나 영생을 얻는 것은 병고침의 은혜와는 비교되지 않는 또 다른 은혜입니다. 건강해진 9명의 사람들은 유감스럽게도 영생의 축복을 얻지 못하게 되였습니다. 받은 바 은혜에 대한 감사를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감사 주일은 ‘제발 무엇을 좀 주세요.’라는 말은 좀 보류합시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려야 합니다.

마. 땅에서의 축복도 받습니다.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고 새로운 헌법을 만들기 위해 여러 대표들이 모였을 때 독립의 공로자인 프랭클린은 대표들에게 이런 제안을 하였다.
“우리가 영국과의 독립 전쟁 중에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얻고자 날마다 이 방에서 간구하였습니다. 우리의 간절한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셔서 우리는 감격스러운 독립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여기 모여 이 나라의 미래의 기초를 세우려 할 때 어찌 그 하나님의 은혜에 먼저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 어떻게 한 나라가 일어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이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그 도우심을 얻기 위하여 아침마다 업무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예배를 드릴 것을 제안합니다.” 미국의 헌법에는 바로 이러한 감사의 신앙이 배어 있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미국을 부러워하기 전에 그들의 감사 정신을 본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이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구속의 은총을 받은 그의 자녀들입니다. 이제 우리는 진정으로 가슴 뜨겁게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그러한 감사가 여러분의 마음속에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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