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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비하시는 하나님 (고전 02: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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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봉독한 말씀은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마련해 주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역사를 섭리해 나아가실 때에 그의 사랑하는 택한 백성들을 중심으로 해서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더라도 모든 주변 국가의 흥망성쇠가 바로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해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바로 섬기며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 때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복을 주시되 주변 국가가 까지 동원하셔서 이스라엘 나라를 섬기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우상을 섬기며 악을 행하여 하나님 앞에 범죄할 때에는 하나님께서 주변 국가들을 흥왕케하여 몽둥이로 사용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다 앗수르, 바벨론, 메데, 파사와 같은 나라들을 강하게 만들어서 이스라엘을 침략케 하시고 그들이 하나님 보다 사랑하고 의지했던 모든 재물과 보화를 노략케 하였으며 그 땅을 황폐케 하였습니다.
이것이 우연한 일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회개하고 복된 삶을 바로 살수 있도록 하시기 위한 사랑의 징계임을 깨우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지금도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택한 백성들을 중심으로 해서 세상의 모든 역사를 주관하시며 이끌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예비하신 가운데 살아가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미래를 예비하시고 우리는 그 미래를 행하여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즐거운 여행을 준비해 가지고 떠나는 한 가정과 같습니다. 아버지는 여행을 위해서 완벽한 계획을 세웁니다. 어디에서 몇 일 머물고, 무엇을 구경할 것이며, 어디에서 유숙할 것인가를 철저하게 준비를 합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무엇을 먹고, 어떤 옷을 입어야 할 것인가를 다 계획하고 준비해 놓습니다. 그러니까 자녀들은 그저 아빠, 엄마만 따라가면 뭐 하나도 걱정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모르는 자녀가 있다면 항상 불안하고 그 마음속에는 기쁨도 없고, 평안도 없습니다. 참으로 불행한 사람입니다.
자신이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사는 사람은 탕자입니다. 집에 있든지, 밖에 있든지 지금 즐거운 여행을 하고 있든지 간에 그는 탕자가 아니면 방랑자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있다면 깨우쳐 주어야 합니다. 많은 사랑을 받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에 어느 자식이 부모의 사랑을 받고 있지 않는 자식이 있습니까 하나도 없습니다. 엄청난 사랑을 받고 있으면서도 정작 자식들은 그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무지요, 어리석음입니다. 그렇기에 불행한 것입니다. 슬퍼하고,탄식하고,고독해하고,절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얼마나 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런데 그 사실을 모르고 있는 한 계속 불행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혹 그런 사람이 있다면 깨우쳐 주어야 할 것입니다. ‘내가 사랑 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혜와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 고 있습니다. 그래서 중심에 감사와 감격과 기쁨이 넘칩니다. 뜨거운 찬송이 있습니다. 받은 사랑에 대한 응답과 바른 자세를 가지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지혜로운 사람이요, 행복한 사람이요, 인간다운 사람이요, 은혜를 아는 사람이요, 진정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이란 어떤 사람입니까 내가 하나님 안에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요, 내가 엄청나 하나님의 보유하심과 긍휼과 사랑 안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시간 시간 간증하며, 시간 시간 새롭게 깨닫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 사랑을 우리의 입으로, 우리의 헌신으로, 우리의 가진 것으로 확증하며 사는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하나님의 능력의 초월성을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지혜와 자비와 사랑의 높이와 깊이를 말해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우리는 불확실한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불확실함이란 없으십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모른 채 답답한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미리 아시고 우리를 인도하고 계십니다.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지난날의 일을 생각해 보십시오.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암담하게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돌아보니까 어쩌면 모든 일이 그렇게도 계획적인 것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나를 위하여 완벽한 작품을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예외적인 일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존재 그 자체와 성격, 그리고 운명을 다 아시고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1. 욥의 고백을 들어봅시다.
욥23:10절에 보면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엄청난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가족을 잃었고, 건강을 잃었고, 재산을 잃었고, 명예를 일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의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오직 하나님만이 내 운명을 아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진 고생을 다 겪고 단련한 후에 정금과 같이 되리라고 합니다. 욥은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약속된 미래를 그렇게 믿고 바라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난을 참고 견딜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예비하십니다. 그 예비하심이 인간의 차원에서 볼 때에는 미스터리입니다. 아주 신비로운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말씀합니다.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계획을 몰랐습니다.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계획이 있으셨습니다. 나는 미처 생각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뜻이 계셨습니다.

과거에도 그러하셨듯이, 현재와 미래에도 그러하십니다.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 없고, 우리의 귀에 들리는 것 없습니다만 믿음의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아시고 여러분들의 필요 적절한 길로 인도하시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늘 현재의 경험에 매여 삽니다. 우리의 나약성에 매입니다. 경험이라는 것이 소중합니다만 그 경험으로 인하여 고집이 생깁니다.
지식이라는 것이 소중합니다. 그러나 그 지식에 집착하게 되면 새로운 지식을 받아 드리는데 큰 어려움이 생깁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신비로운 세계를 받아들이는데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극복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2. 아브라함의 응답입니다.
창22:2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의 아들이 어떤 아들입니까 그가 백세에 얻은 소중한 아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그 아들을 통해서 하늘의 별과 바다의 모래와 같이 자손을 번성케 하시겠다는 약속의 아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어찌하여 느닷없이 이 아들을 바치라 하시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군말 없이 순종합니다. 이삭을 데리고 사흘 길을 걸어 모리아 산에 이릅니다. 제단에 이삭을 올려놓고 이삭을 칼로 찌르려고 합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말리십니다.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하나님의 음성이 들려 옵니다.

문득 아브라함이 뒤를 돌아다보니 그곳에 수양 한 마리가 수풀에 뿔이 걸려 버둥거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제물까지 준비해 두시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제야 아브라함은 진정으로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 뜻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예비하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예비해 놓으시고 나를 부르셨는데 나는 그것도 모르고 염려하며, 근심하며, 초조하게 지낼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아브라함이 그곳을 ‘여호와 이레’라고 명명한 것은 하나님의 예비하심을 새롭게 깨달으면서 너무도 감격하여 간증하는 고백입니다. 얼마나 감격스러운 시간입니까 이렇게 복되고 아름다운 시간이 우리들에게도 있기를 중심으로 바랍니다.

3. 요나의 깨달음입니다.
욘1:12에 보면 “그가 대답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닷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의 연고인 줄을 내가 아노라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요나는 니느웨로 가라고 명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탑니다.
그런데 도중에 풍랑을 만나게 됩니다. 요나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닷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하나님 앞에 진실을 찾는 순간입니다.

사람들은 요나의 말대로 그를 바다에 내버립니다. 그리고 큰 물고기가 그를 삼킵니다. 그러나 삼일 후에 다시 육지에 토해 버립니다. 그는 결국 니느웨 땅으로 직행하여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무어라고 말씀하십니까
욘1:17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 하사....”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컴퓨터를 사용하면서 그 기능에 대해서 깜짝 놀랄 때가 있습니다. 옛날 귀신이 본다면 놀랄 것입니다. 얼마나 재미있고, 얼마나 놀랍고, 얼마나 빠르게 작동하는지 모두들 무척이나 신비하고 신기해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신비하다 해도 그것은 사람이 프로그램을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인간이 만든 프로그램 그대로 기계가 작동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프로그램 속에 내가 있습니다. 내가 무엇을 굉장해하고,신비해하고,놀라워하고,때로는 절망도 해보고, 그리고 별소리를 다 해보아도 결국은 하나님의 프로그램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내가 이것을 모르는데 있는 것입니다.

4. 탕자의 소리를 들어봅시다.
탕자가 집을 나갑니다. 그러나 방탕하여 그 많던 재산을 다 허비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집에 돌아올 면목이 없어졌습니다. 집에 돌아오고 싶어도 못 돌아옵니다.
눅15:18-20절에 보면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 가니라..”고 마음먹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를 다 용서하시고 다시 아들로 영접하고 잔치를 베풉니다. 비록 염치도 없고 부끄럽고 민망스러웠지만 너무도 감격스러운 일이 안하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진작에 돌아왔을 것 아닙니까 많은 날들을 공연히 고생만 하였습니다.
‘여호와 이레’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것을 탕자는 몰랐던 것입니다. 문제는 그 예비하신 것을 몰랐었는데 있습니다. 이제는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사도 바울은 고후12:14절에서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어린아이가 부모를 위하여 재물을 저축하는 것이 아니오 이에 부모가 어린아이를 위하여 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부모는 자식을 압니다. 자식이 나날이 커 가는 것을 압니다. 그가 장차 어떻게 될 것이라고까지 짐작하고 있습니다. 그런고로 부모는 자식을 위하여 예비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고 계십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알고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그렇지만 종종 그 사실을 잊어버리고 괴로워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는 로마 감옥에 갑니다만 처음에는 왜 감옥에 가야 하는 지를 몰랐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깨닫고 고백합니다.
빌1:12절에서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바울에게는 육체의 가시가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너무도 괴로운 것이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에게는 무엇보다도 건강이 꼭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가시와 같은 질병이 떠날 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세 번씩이나 간절히 기도했지만 응답이 없었습니다. 항상 의사를 동반하게 하셨으면 서도 병은 그대로 남겨 두셨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분명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고후12:9절에 보면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 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가 내게는 가장 적합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이 병으로 인하여 약할 때에 더욱 강할 수 있고, 그로 인하여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더욱 성실할 수 있음을 그는 솔직히 고백합니다. 내게 주신 은혜가 족하다는 이 깨달음과 함께 그는 새로운 세계를 살아가게 됩니다.

본문 7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것을 ‘감취었던 것인데’라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모를 뿐이지 엄연한 사실입니다. 문제는 내가 이것을 얼마나 깨닫느냐, 얼마나 깨닫고 살아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10절에서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성령 안에서 이제 깨달은 것입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 하사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십자가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해 주셨습니다. 성령 안에서 이 사실을 깨닫게 되는 순간, 우리는 새로운 세계에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새로운 프로그램을 전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다시 한번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14:1-2에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만 아니라 저 내세에서까지 예비하시는 그리스도께서 오늘 우리를 부르시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 부름에 바로 응답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무슨 근심이 있습니까 그 두려움이 어디로부터 옵니까 나를 위해서 예비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예비하시는 하나님의 그 신비로운 역사와 그 능력과 지혜를 바로 깨닫고 바로 믿을 때에야, 참으로 평안할 수 있으며 새로운 용기를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땅에 씨를 뿌리는 것은 싹이 나는 것을 믿기 때문이요, 추수할 가을이 있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나를 위하여 가장 적절한 것을 예비해 두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주님의 거룩하신 약속을 바라보며 주님께 범사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확실한 믿음으로 주님의 인도하심에 즐거움으로 순종하여 하나님께서 우리 위해 예비하신 은혜를 바라보면서 확실하고, 용기 있는 생을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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