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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의 몸 (엡 04: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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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설명하기 위하여 몸으로 비유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많은 피조물가운데 인간의 몸이 가장 복잡하고 신비롭다고 합니다.
시 139:14에 보면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하심이라 주의 행사가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시편기자는 하나님의 창조의 오묘하신 능력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그저 사람들만이 모인 단체가 아닙니다. 모래알처럼 모였다가 바람이 불면 흩어 저버리는 사람무더기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기계와 같은 조직도 아닙니다. 기계를 보면 정미한 부분품들이 서로 연결하여 하나의 기계를 이룹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자유와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몸처럼 교회를 비유하기에 적합한 것은 없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고전12:12-31절에서도 교회를 인체에 비유하면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와 그 지체가 되는 성도의 관계, 그리고 지체인 성도들의 상호관계를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우리 성도들은 그 몸의 지체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1.몸은 자라야합니다.
정교한 조직을 갖춘 기계라도 몸이 될 수 없는 것은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생명이 없는 존재는 자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생명이 있는 존재는 반드시 자라납니다.
만일 생명이 있는 몸일지라도 자라지 못한다면 그것은 병들었거나 죽었거나 둘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생명체는 반드시 자랍니다. 교회는 생명이 넘치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 이유는 죄로 죽었던 우리들이 성령의 능력으로 그리스도안에서 새 생명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요 5:24에 보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하였습니다. 믿는 자는 이미 생명을 얻었습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이미 옮겨졌습니다. 그리고 고후5:17절 말씀과 같이 이미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입니다. 믿는 성도는 신령한 면에 있어서 생명적 존재이므로 반드시 자라야 합니다.
오늘 본문 15절에 보면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라고 하였습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키가 점점 자람에 따라 지식도 자라고 지혜도 자라야합니다. 그런데 나이는 하나하나 먹는데 지력이 자라지 못하고 5,6세 그대로 있다면 그 이 아이를 가리켜 백치라고 합니다. 그리고 나이 먹고 몸도 자라고 지식도 자라지만 지혜가 자라지 못한다면 장차 커서 위험존재, 아니면 쓸모 없는 사람이 되기 쉬운 것입니다.
고전3장1절 이하에 있는 말씀을 보면 사도바울은 고린도 교회성도들을 가리켜 어린아이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고린도교회 신자들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어린아이와 같았습니다. 사도바울은 신앙적 면에서 성도를 두 가지로 분류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신령한 자라고 했고 다른 하나는 육신에 속한 자라고 했습니다.
육신에 속한 어린아이와 같은 신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 말씀이 부담이 된다고 했습니다. 깊은 말씀 듣는 것이 힘이 듭니다. 그저 웃기고 울리는 쇼맨쉽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성숙한 성도는 모든 하나님의 말씀을 꿀송이 같이 달게 받습니다. 어린아이 신자는 하나님의 명령이 부담이 됩니다. 예배가 부담이 됩니다. 헌금이 부담이 됩니다. 전도와 봉사가 힘이 듭니다. 그러나 성숙한 성도는 이 모든 것을 즐거움으로 감당합니다. 이외에도 어린아이의 특징이 많이 있지만 그 중에 몇 가지를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자립성이 없습니다.
심방 가고 찾아가야 겨우 나오는 신자입니다. 다시 말해서 끌려 다니는 신자입니다. 그래서 항상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2).연약합니다.
조그만 어려움이나 시험을 당하면 넘어지고 자빠집니다. 그래서 항상 위로해주고 격려해주고 붙들어 주어야합니다.
(3).달라고만 합니다.
먹을 것 달라, 입을 것 달라,..그저 달라고만 합니다. 기도를 해도 달고만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항상 보채기만 합니다.
(4).일을 하지 못합니다.
그저 먹기는 잘 퍼먹습니다. 그러나 일을 하지 못합니다. 그저 일거리만 만들어 놓습니다. 먹는 대로 내놓기만 합니다. 좀 걷는다고 내버려두면 돌아 다니면서 산통만 깨뜨립니다.
(5).판단력이 없습니다.
무엇이 위험한지 모릅니다. 닥치는 대로 집어삼킵니다.
내버려두면 시궁창 물을 퍼마시지를 안나, 미안한 말이지만 똥을 집어먹지를 안나 가만두면 큰일납니다. 어떤 아이는 동전을 집어삼키다가 그만 목에 걸려 죽은 아이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교회 저 교회, 이 기도원 저 기도원 아무데나 다니면서 닥치는 대로 집어삼킵니다. 결국은 독초를 먹고 그 심령이 죽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린아이는 이런 특징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린애는 반드시 성장해야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도 자라지 못하면 꼭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2.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야 합니다.
어린아이는 부모님의 품을 떠나서는 자랄 수 없습니다. 죽게되던지,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람의 손에서 잘못자라 성품이 삐뚤어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어쨌든 어린아이는 부모님 품에서 자랄 때에 올바로 자랄 수 가 있는 것입니다.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할 때 올바른 신자가 될 수 있고 교회의 기둥 같은 일군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말씀 밖으로 벗어나서는 인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고전4:6절 중반 절에서 “기록한 말씀을 넘어가지 말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좌우로 치우쳐서는 안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두 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1). 사랑 안에서 자라나야 합니다.
어린아이가 부모님의 품에서 자란다고 하는 것 중에 가장 귀한 것이 바로 부모님의 사랑입니다. 부모에게서 사랑을 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모든 만물은 태양 빛을 받아야만 자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어린아이는 부모님의 사랑을 받아야만 올바로 자랄 수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신자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받아야만 올바르고 건전한 성도로 성장할 수 가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 사랑의 말씀을 읽고 잘 들어야합니다. 그럴 때에 그리스도의 사랑가운데서 강건하게 성장하는 것입니다.
본문16절 마지막부분을 보면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딤후2:1절에 보면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네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하고”라고 하였습니다. 어린아이는 사랑을 먹고 자립니다. 마찬가지로 성도는 하나님의 사랑의 말씀을, 은혜의 말씀을 먹어야 강건하게 자랍니다.

(2). 참된 신자의 생활에 힘써야합니다.
본문에 보면 “참된 것을 하여”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신자로써 마땅히 해야할 일을 말합니다. 어린아이가 먹기 만하고 운동하지 않으면 건강하게 자랄 수 가없는 것입니다. 운동을 열심히 해야합니다. 마찬가지로 신자가 잘 자라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열심히 해야합니다. 교회에 그저 왔다 갔다만 해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일을 해야합니다.
중요한 것은 신령한 일입니다. 즉 기도생활에 힘써야 합니다. 전도생활에 힘써야합니다. 그리고 다음에는 봉사의 생활을 해야합니다. 교회 안에서 우리의 몸으로, 우리의 물질로 봉사할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주일이면 성도들을 대접하는 것도 봉사입니다. 교회를 깨끗하게 청소하며, 아름답게 단장하는 것도 귀한 봉사입니다. 그리고 선한 일에 힘써야합니다. 즉 구제생활, 어려운 형제를 돌보며 위로하는 것도 아름다운 일입니다.
이런 생활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되고 더 많은 것을 배우게되고 깨닫게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은 날로 날로 성장해 가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어린아이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있는 불구자들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 가운데서 성장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3. 몸은 하나가되어야 합니다.
바울이 예수 믿기 전에 기독교를 앞장서서 핍박하던 사람이었습니다. 한번은 성도들을 몽땅 잡아 죽이기 위해서 다메섹으로 가던 도중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되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바울에게 말씀하시기를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라고 하셨습니다. 그는 부활하신 주님 앞에 그의 무릎을 꿇고 말았습니다.
그는 거기서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사도가 되어 복음을 전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기록하게 된 것입니다. 그는 성도와 교회를 핍박하는 것이 곧 예수님을 핍박하는 것임을 알게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의 위대한 교회론 입니다.
우린 여기서 왜 교회가 소중한가, 왜 교회를 존중해야 하는가, 왜 교회를 사랑해야 하는가, 왜 교회를 핍박하면 안 되는가를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날 교회 관이 분명치 못한 사람들은 “예수만 믿으면 되지 꼭 교회에 나가야만 하느냐”라고 하면서 교회를 비판하고 헐뜯거나 파괴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무 교회 주의나 반 교회적 태도나 집단은 경계해야합니다. 그 이유는 교회와 예수님은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주님을 머리로 하고 성도를 지체로 하여 한 몸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지체입니다. 다시 말해서 저나 여러분은 손과 발과 위장과 간장오장육부 사지백체입니다.
이제 우리 모두는 교회 와서 지체노릇 잘해야지 머리노릇 해서는 안됩니다. 사회에서 어른이라고 해서 교회에서도 어른노릇 하려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리고 교회에서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지도자를 따라야합니다. 일단 내가 교화의 한식구가 되면 교회의 제도권 안으로 들어와야 하고 지도를 받아야 합니다. 특히 교회의 직분을 맡은 사람들은 교회의 지도를 벗어나면 안됩니다.
그런데 요새 교회 밖의 선교활동으로 인해서 교회의 제도나 지도를 따르지 아니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이것은 선교나 성경공부 혹은 주의 일을 빙자해서 자기의 취미나 사욕을 채워보려는 활동에 불과한 것입니다. 더 문제가 되는 사람은 자기네 교회는 관심이 없고 그런데 빠져서 그들의 주장이 절대적인 진리가 되는 것처럼 믿고 떠드는 사람들입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을 거역하면 교인이 아닙니다.
성도인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교회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지체로서의 자기의 바른 위치를 지키는 일입니다.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주님을 올바로 따르는 자가 그의 자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조류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공중에 나는 새는 그 어떤 종류를 막론하고 두개의 둥지를 틀지 않는다고 합니다. 여우도 두개의 굴을 파지 않는다고 합니다.
“내 교회가 제일이다”라는 긍지와 자부심이 있을 때 교회 생활이 편안하고 은혜스럽다는 사실을 기억해야합니다.
그런데 교회는 다 똑같지 아니하고 교회마다 다 특징이 있고 장점이 있고 단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한 부모의 자녀라 할지라도 모습과 성격이 다 다른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한 부모의 자녀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이와 같이 교회가 다 다르지만 진리 안에 거하는 이상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교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교인은 자기 교회의 틀에 맞추려고 노력해야합니다.

부부 싸움이 잦은 부부가 있었습니다. 결혼 초부터 남편이 걸핏하면 전에 교제하던 여자친구 이야기를 꺼내는가하면, 그녀 사진을 앨범에 넣어두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때때로 그녀의 장점이며, 용모며, 그녀의 부모나 형제들 칭찬을 늘어놓는 것이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아내가 정성껏 해주는 음식상을 앞에 놓고 먹으면서도 투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어제 점심에 사먹은 설렁탕이 일품이라느니, 같은 부서의 아무개 부인이 끊인 김치찌개는 기가막히다느니.....

여러분! 이런 부부는 절대로 행복할 수 가 없는 것입니다.
다행이 남편이 그 버릇을 고치고 아내를 사랑하기 시작하므로 해결을 보았다고 합니다만, 그런 정신이 계속되었다면 그들은 헤어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4. 각 지체는 서로 돕고 서로 연락해야합니다.
16절에 보면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 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지체는 각기 기능과 역랑이 다르지만 긴밀한 연락관계와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음식 먹는 과정을 살펴봅시다.
머리는 무엇을 먹을까 판단해서 손에 지시하면 손은 지시가 떨어지자마자 음식을 집어 배달하는데, 입이 벌리면 음식을 신속히 넣어줍니다. 그러면 혀는 음식을 굴려서 이에다 밀어 넣어줍니다. 이는 열심히 맷돌질을 합니다. 침샘은 침을 분비시켜 적당하게 반죽해줍니다. 목구멍은 흡입력을 발휘해서 반죽된 음식을 위 속으로 운반합니다. 위는 수축작용을 반복해서 소화를 시킵니다. 그리고 소장으로 내려보냅니다. 소장은 영양분을 섭취하여 열랑은 골고루 배급합니다. 그리고 찌꺼기를 대장으로 보냅니다. 그러면 대장은 아무소리 안하고 밖에서 처리하기 좋도록 수분을 적당히 흡수한 후에 적당한 시간에 적당한 장소에서 배설합니다. 이것은 모든 기관과 지체가 연결되어 있으며 멋지게 돕고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교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도 많고 기관도 많습니다. 그러나 한 몸입니다. 그러므로 서로 돕고 서로 연합하여 연락해야합니다. 혼자 잘한다고 잘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단점은 혼자서는 잘 합니다. 그러나 함께 하는 일은 서툴다는 것입니다.
서로 돕는 교회, 함께 일하는 교회가 되기 위하여 힘쓰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5. 교회의 궁극적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15절에 보면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고 했습니다.
우리교회가 이곳에 서고 오늘날까지 우리가 섬기고 받드는 이유는 이 교회를 통하여 주님을 닮고 주님을 섬기고 주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데 있습니다.

충청도 일대에 “고니”서식처가 있다고 합니다.
고니가 새끼를 키우고 훈련 시는 과정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소나기가 억수로 쏟아지는 날이면 어미가 그 비를 다 맞으면서 새끼를 품어 보호해줍니다. 독사가 새끼를 공격할 때이면 어미 고니는 필사적으로 독사와 싸워 새끼를 지켜줍니다. 고니 새끼가 어느 정도 자라서 나는 훈련을 시킬 때이면 먹이를 주지 않고 굶깁니다. 그 이유는 살이 빠져야 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미고니가 새끼줄먹이를 찾으러 둥지를 떠난 사이 둥지에서 저 혼자 굴러 떨어진 새끼는 어미가 돌아온 후에도 내버려둡니다. 아마 그 이유는 그동안도 못 참아 방정떨다 떨어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 새끼는 죽어도 내버려둡니다.
어느 소년이 둥지에서 떨어진 새끼를 주어다가 닭과 함께 키웠습니다. 그러나 그 고니는 끝내 날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죽고 말았습니다.

저는 여기서 그리스도와 성도와의 관계를 생각해보았습니다. 어미 고니는 그 새끼는 우리 성도들, 그리고 둥지는 교회로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철저하게 보호하시고 먹여주십니다. 때로는 굶기시고 굴리시고 연단 하십니다. 그것은 신령한 창공을 날게 하시려는 거룩한 훈련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품, 그 둥지를 제 스스로 떠나거나 굴러 떨어지면 버리십니다. 둥지 떠난 고니가 되지 맙시다.
먹이 찾으러 간 사이를 못 참고 방정떨고 둥지를 떠나면 버림받기 쉬운 것입니다.
출32장에 보면 모세가 시내 산에 하나님이 주시는 율법을 받으러 올라간 사이 그 40일을 참지 못해 아론의 주도 하에 금송아지를 만들고 춤추며 우상을 섬긴 사건이 있습니다. 그때 그 패역한 죄에 가담했던 사람들은 모두가 벌을 받았고 버림을 받았습니다.
둥지 떠난 고니는 죽고 맙니다. 고니는 고니와 함께 자라야 날기도 하고 죽지 않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야합니다. 그래야 주님을 닮고 강건하게 성장하여 의의 병기로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주님 떠나면 못삽니다. 교회를 떠나면 위험합니다. 거기서 탈락하면 안됩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주님을 닮는 것입니다. 우리교회의 가장 큰 소망도 주님을 닮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주님을 섬기는 성도로써 하나님중심, 말씀중심, 교회중심의 성도가 되어 그에게까지 자라며 주님의 성품을 닮아 교회의 복된 일군으로 크게 쓰임 받고 크게 상급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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