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감사와 기도 (엡 01:15-23)

첨부 1


앞에서 말씀드린 것을 요약하면 첫째는 성부,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선택의 축복과 두 번째로 성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속과 셋째로 성령 안에서의 받은 확실한 천국의 기업에 대하여 삼위일체 하나님을 찬양하여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에 근거한 구원 역사를 생각할 때마다 감사와 찬양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인생들은 영원히 멸망할 소망 없는 비참한 존재들입니다. 짐승보다도 불행한 인생들입니다. 이 사실을 진정으로 깨닫기 전에는 감사도 있을 수 없고 힘있는 찬양도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저주받을 인생들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흘려 우리를 구속하여 주셨으니 그 은혜와 그 사랑을 어쩌다 감사하며 찬양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더욱 더 감사한 것은 구원이 우리의 노력이나 공로로 되었다면 인간의 연약함과 부족함으로 인해서 언젠가는 잃어버릴 위험성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구원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로 되었기 때문에 우리의 부족이나 인간의 연약함도 문제가 되지 않는 다는 사실에 더욱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롬5:5-11절을 보면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요약하면 우리의 부족과 연약이 결코 하나님의 사랑을 막을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신학적인 용어로 이것을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총’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오히려 불쌍히 여기시고 은혜를 더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결정체인 그리스도의 보혈은 만인간의 죄를 탕감하고도 남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총적 구원은 절대적으로 취소되는 법도 없고 무너질 수고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구원의 확실성을 성령으로 인처 보증하여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 장에서는 다른 어떤 곳에서보다도 ‘그리스도 안에서의 모든 신령한 복이 하늘로부터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오게 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인간은 항상 비참한 절망에 그대로 빠질 수밖에 없으며 그리스도와 신령한 교제가 없이는 풍성한 삶을 살 수 없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진정한 의미에서 교회의 영원한 기초가 되며 모든 생명과 복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고전3:11절에 보면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 사도 바울이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만이 완전한 구원의 기초가 되므로 성도들의 모든 영적 축복을 받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받을 수 있고, 그의 몸된 교회를 통해서 오늘의 역사 속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사도 바울이 에베소 사람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드린 감사와 기도의 취지를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15절에 보면 “이를 인하여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이를 인하여’라고 한 것은 13절,14절에서 말한 대로 ‘에베소 교인들이 복음을 듣고 믿게 된 것을 인하여’란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 교인들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를 들었지만 다 좋은 소식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 교인들이 경고와 책망을 받아야할 중대한 잘못이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점을 고치고자 이 말씀을 기록한 것이나 처음부터 책망하지 아니하고 4:17-6:9절에 이르기까지 모든 책망을 보류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사랑하는 성도들을 가르칠 때에 책망보다는 먼저 칭찬하기를 기뻐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마음이요, 사랑의 자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벌주시기보다는 상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신명기에 보면 하나님의 진노는 천대에 이른다면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복은 수천 대까지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도 사도 바울과 같이 사람을 대할 때에 단점보다는 장점 보기를 좋아하고, 원망보다는 감사한 일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로 용서함을 받고 사랑을 입은 자들의 특징입니다.

사도 바울이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옥중 생활을 할 때에도 감사와 기도를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현재의 고통보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위로와 주신 축복을 먼저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먼저 무엇을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삶의 자세가 완전히 달라지는 것입니다. 똑같은 입장인데 어떤 이는 지옥을 살고, 어떤 이는 천국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친구 둘이서 넓고 시원한 초원을 거닐고 있습니다. 앞에는 강이 흐르고, 강 건너 편에는 병풍과 같이 아름다운 산이 전개되어 있습니다.
금방 천사라도 내려올 것 같은 절경이었습니다. 한 친구는 널리 펼쳐진 초원과 금빛 반짝이는 시냇물과 천사라도 금방 내려올 듯한 아름다움에 도취하여 감탄사를 연발합니다. 그런데 다른 한 친구는 앞에 있는 아름다운 경치보다는 자기 옆에 조금 떨어져있는 소똥을 보고 이맛살을 찌푸리며 투덜댑니다.
이 두 친구는 똑같은 형편, 똑같은 처지에 있습니다. 하나도 다른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 상태는 전혀 다릅니다. 마음의 자세에 따라서 하나는 천국을 거닐고 있고, 다른 하나는 지옥을 거닐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항상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와 찬란한 천국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사는 성도는 어떤 환경에서든지 감사하며, 기뻐하며, 찬송하며, 복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감사와 평안과 기쁨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팔에 안긴 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복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죗값을 지불하시고 우리를 구속하신 주님께 경배하며, 감사하므로 순종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복입니다.

사도 바울은 많은 소식 중에 좋은 소식만을 듣고 감사하며, 기도하였습니다.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라는 내용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 가운데 몇몇 성도들의 믿음과 사랑에 대해서 듣고 감사한 것입니다.

참된 신앙생활이란 믿음과 사랑을 겸한 것입니다. 특히 믿음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이고, 사랑은 성도들과의 올바른 관계입니다. 그래서 고전13:1절 이하에 보면 사랑이 없이는 모든 신앙생활이 헛되다고 한 것입니다. 요일4:21절에도 보면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신앙의 꽃봉오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만이 만개 될 수 있습니다. 활짝 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갈5:6절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 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 하는 믿음뿐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에베소 교인들에게 잘 못된 점도 많지만 그래도 서로를 향한 따뜻한 사랑과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16절에서 계속해서 말하시기를 “너희를 인하여 감사하기를 마지아니하고 내가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하노라”고 하였습니다.

누구나 마찬가지이지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기도할 때에 기도의 힘이 있고 그러한 기도를 또한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홀이라도 원망이나 불평하는 마음을 가지고 기도하면 기도의 힘을 잃을 뿐이니라 그러한 기도는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십니다. 이런 기도는 마귀가 듣고 응답합니다. 그래서 그로 하여금 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감사는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그 첫째는 다른 사람의 일로 감사하였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신의 일이 잘 될 때 감사합니다. 그러나 남이 잘되는 일로 감사하는 일은 별로 없습니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아파하는 것이 부패한 인생들의 심보입니다. 우리가 내 이웃이 잘되는 일로 인하여 감사한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며, 이런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평안의 복을 주십니다.

두 번째는 자기가 받은 모든 은혜를 감사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받은 은혜는 잘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좀 섭섭한 일을 당하면 그것은 좀처럼 잊어버리지 않고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이거야말로 불행한 일입니다. 이런 사람은 잘될 수 있는 일도 안 되는 것입니다. 사실되는 일이 없습니다. 마음에 평안 없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병들고 육신의 병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섭섭한 것은 곧 잊어버리고 받은 은혜를 잊지 않고 늘 감사하는 심령은 언제나 평안합니다. 그러니 만사가 복이 되는 것입니다. 사실 안될 일도 잘됩니다. 이런 사람은 심령도 윤택하여지고 육신도 건강해지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런 자를 기뻐하시고 복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은 남을 위하여 자기 일처럼 기도를 쉬지를 않았습니다. 롬1:9절에 보면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라고 하였고. 빌1:4절에는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이라고 하였으며, 골1:9절에 보면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나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하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사도 바울은 자신이 받은 은혜 보다 성도들이 받은 은혜를 인하여 더 감사하였고 자신을 위한 기도 보다 성도들을 위한 기도가 더 많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아름답고 복스러운 모습이요, 은혜 우에 은혜와 복위에 복을 풍성히 받을 성도의 그릇입니다. 이러한 그릇이 없이는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내려 주시는 은혜와 복과는 상관없게 되는 것입니다. 조금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한 사도 바울의 기도의 내용은 17절 이하에서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에베소 교인들이
(1). 그들이 부름을 받은 소망이 무엇이며,
(2). 그들이 기다리고 있는 기업이 무엇이며,
(3). 그 소망을 실현시키고 그 기업이 그들의 영원한 소유가 되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무엇인가를 바로 알 수 있기를 원해서 기도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사도 바울과 같은 감사와 기도의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가운데 영 육이 강건하여지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가운데 만사가 주안에서 복되고 형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