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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 안에서의 삶 (갈 02: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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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성례주일로 지킵니다.
성례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세례이고, 둘째는 성찬입니다.
이 예식은 예수님께서 친히 세우시고 명하신 것이므로 이제 우리는 경건한 마음과 정성스러운 태도로 이 예식에 참여해야 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예식의 의미를 모르고 참여한다면 형식적이고 무의미한 행사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의미를 바로 알고 참여할 때에 이 예식을 통해서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을 깨닫고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세우신 성례는 성도들의 영적 진보를 위하여 주신 은혜의 방편입니다. 은혜의 방편은 말씀과 성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와 복을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인 생명의 말씀을 주셨고, 또 성례를 세워주신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일년에 두 번 성례주일로 지키지만, 이 성례를 소중히 여기고 또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체험적으로 받기 위해서 정성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세례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표요, 성령으로 거듭남과 새롭게됨과 주께 속한 것임을 인처 약속하는 표입니다. 그리고 성찬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기념하여 떡과 잔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과 성도들과 교제의 표가 곧 성찬입니다. 우리는 성찬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와 크신 사랑을 깊이 깨닫고 더욱더 주를 섬기기로 다짐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찬은 단순히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으신 결과로 내가 오늘 살게 되었고, 뿐만 아니라 새로운 삶을 체험케 하는 것입니다.

오늘 날 과학문명의 혜택으로 우리의 외부적인 환경은 놀라울 정도로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모든 것이 좋아지고, 깨끗하고, 아름답고, 편리해졌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겉뿐이고 속은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옛 사람 그대로입니다. 시대는 변하였지만 인간의 실생활은 옛날 그대로 입니다. 아니 오히려 옛날보다 더럽고 추악합니다. 욕심과 야심이 그대로 있고, 음란과 방탕이 그대로 있고, 교만과 시기가 그대로 있고, 편협함과 잔인함이 더해가고, 이기심과 인색함이 더해가고 있습니다. 겉은 변했지만 생활은 아직도 그대로 입니다. 그 이유는 아직도 그 속이 그대로 있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겉 사람이 아니라 속 사람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중생’이라고 합니다. 중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께서만이 우리를 위해서 대속의 피를 흘려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마다 주의 피로 우리의 모든 죄가 깨끗하여집니다. 새 사람이 됩니다. 이것이 중생입니다. 이 중생의 표가 바로 세례입니다.
사람이 세상에 올 때에는 출생을 통해서 옵니다. 이와 같이 사람이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중생’을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니고데모’라고 하는 바리새인 중에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열심히 있는 사람이요,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당시에 관헌이요, 공부도 많이 한 사람입니다. 그는 십일조를 정확하게 드렸고, 안식일도 꼭 지켰습니다. 또한 덕망이 높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찾아와 진리를 알고자 한 것을 보면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사람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거듭나서 새 사람이 된다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저 주일이면 의무적으로, 혹은 습관적으로 예배당에 가고, 찬송하고, 기도하고, 성경 배우고, 헌금하고 하는 이런 생활이 전부는 아닙니다. 중생은 근본적으로 새롭게 됨을 말합니다. 중생한 사람은 언젠가는 성품의 변화와 생활의 변화가 옵니다.

우리 모두 옛 것을 버립니다. 옛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을 때의 생활 습관들입니다. 또한 마음가짐이올시다. 육에 속한 생각들입니다. 가령 분한 생각, 남을 미워하는 생각, 이런 것들은 옛 것이요, 육에 속한 생각입니다. 이런 생각 오래 품고 있으면 내 자신이 손해를 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시기하는 생각, 이것도 육에 속한 생각입니다. 이것은 나보다 나은 사람을 싫어하는 감정인데, 이것은 사실 나 자신의 교만, 이기주의, 열등감 같은데서 나오는 감정입니다. 그런데 이런 감정을 오래 품고 있으면 결국 나 자신이 타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잘 나오고, 봉사에 열심이 있다고 할 찌라고 아직도 욕심 그대로 있고, 음란 그대로 있고, 거짓이 그대로 있고, 꼬부라진 마음 그대로 있다면 여전히 옛 사람 그대로 입니다. 사실 옛 사람을 벗어버린다고 하는 것은 나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본문 20절에 보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옛 사람 그대로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혀 죽어야 합니다.
옛 사람의 모습을 롬1:29-31절에서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딤후3:2절에 보면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옛 사람의 모습들입니다.

이 모든 것을 십자가에 못박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말했습니다. 내가 죽을 때에 내 속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셔서 나를 온전히 주장하여 새로운 삶으로 인도해주시는 것입니다. 새롭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옛날 썩어질 욕망이 변하여 거룩한 하늘의 소망으로 변합니다. 세상의 명예와 물질의 욕망이 신령한 것으로 변합니다.

이것은 오직 내가 죽고 내 속에 예수 그리스도가 사실 때에만이 가능합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본문 20절에 있는 말씀대로 ‘.....이제 내가 새로운 삶을 살게 되는 것은.....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믿고 세상을 의지하면 망하게 되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를 의지하며 사는 자는 새로운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받는 세례는 이제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주고, 주님과 함께 다시 살아났다는 표요, 성찬은 이제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녀로써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고, 성도들과 사랑의 교제를 통한 새로운 관계를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 안에서의 삶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고당 조만식 선생님, 그분은 평양에서 15살까지 한문을 전공하고 그 후부터는 부친을 돕기 위해서 장사를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되니까 자연히 부유층 자제들과 사귀게 되었고, 또 그들이 하는 대로, 사는 대로 술도 마시고 좀 방탕하게 놀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때는 구한국 말기였습니다. 나라의 운명은 실로 풍전등화였습니다. 한번은 어느 날 잘 믿는 청년이 그분에게 찾아가서 ‘지금 우리나라가 이런 위기에 당면하였는데, 당신도 이 사실을 알겠지만.....당신 같은 이가 이런 때에 이러한 생활만 하고 있다면 우리나라가 장차 어떻게 되겠는가 아주 망하지 않겠는가 정신차려야 된다고, 새 사람이 되어야 된다고...말하면서 그 길은 오직 예수를 믿고 새 사람이 되는 길 밖에는 없다’고 전도를 했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를 믿게 되었는데, 믿은 후에는 어느 날 저녁 자기의 옛 친구들을 어떤 음식점에 다 모아 놓고 잘 대접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가서 엄숙히 하는 말이 ‘자네들과 이렇게 노는 것은 오늘 저녁이 내게는 마지막일세, 나는 예수 믿기로 작정했네, 자네들이 내 친구가 되려면 자네들도 예수 함께 믿세’라고 전도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튿날 당시 평양의 기독교학교인 숭실 중학교에 나이 많은 노학생으로 입학을 했습니다.
이런 삶의 전환으로 오늘 우리가 존경하는 고당 조만식 선생님이 된 것입니다. 또한 장로로써 성도들의 모범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와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얼마나 큰 봉사와 희생을 하고 새로운 삶의 열매를 많이 맺었는지 모릅니다. 이렇게 삶의 온전한 전환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 안에서의 삶으로만이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뜻 깊은 성례를 통해서 나의 옛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온전히 죽고, 믿음 안에서 사랑과 허락과 화평의 새로운 삶이 시작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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