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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시련은 살아있다는 증거 (고후 12: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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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우리의 땅과 민족을 소중히 생각하고 사랑하신다는 증거를 다시 한번 보여 주셨습니다. 기상대마저 미쳐 분석을 하지 못했던 태풍 브랜든 호를 만드시어 이 땅에서 목이 타고 있는 현장들에 단비를 뿌려주는 기적 같은 역사가 지난주간에 있었습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에게 임하셨던 자비의 손길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급 땅을 탈출하여 홍해를 건너 신광야를 지나 시내산에 이르기 전에 있는 르비딤이라는 곳에 진을 쳤습니다. 모두가 사막지대인지라 언제나 물이 그들에게는 소중했습니다. 드디어 마실 물도 없고 생업으로 끌고 다니는 모든 목축도 목이 말라죽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때 그 백성은 모세를 원망합니다. 그가 자신들을 애급으로부터 끌고 왔기에 오늘 이 처절한 환경을 접하게 되었다고 하면서, 돌을 들어 그를 쳐 죽일 자세를 취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모세의 기도는 절박하였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모세로 하여금 바위를 치게 하였고 거기서 마실 물이 터져나와 모두가 환호성을 지른 바 있습니다.
바로 지난주간의 하나님의 손길은 이스라엘 백성의 르비딤에서 경험했던 순간의 역사처럼 느껴지게 되었습니다. 오직 이 순간 우리의 할 말은 하나님 앞에 무릎 꿇어 그 섭리와 사랑에 감사를 드리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사랑하고 계심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만에 하나라도 이 백성이 하나님의 은총을 저버리고 자만에 빠진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이 필요한 현장

이제는 가뭄의 문제도 더위의 문제도 해결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한 인간으로서 갖고 있는 고뇌의 갈등을 생각해 보십시다. 밝은 세상이 온 듯한데 우리의 주변은 늘 평탄하지를 못합니다. 나의 의식주의 삶은 여유가 생기는데 우리의 속사람은 더 커져만 가는 범민과 고뇌의 물결에 휩싸이면서 마음의 평안을 누리지 못합니다.
분명 우리의 삶의 형편은 옛날과 달리 여유가 있는데 부부사이의 정다움도 옛날과 같이 않고, 자식과 부모 사이에 흐르는 정도 옛날과 같지 않다는 푸념이 일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개인 개인의 가슴에 남모르는 고통스러운 사연들이 숨겨있습니다. 남 앞에 설 때는 아무런 고통이 없이 가장 행복한 사람의 모습을 갖추고 있으나 사실 남에 알릴 수 없는 아픈 사연들이 있습니다.
어떤 이는 가정적으로 아픈 사연들 때문에 하나님 앞에 엎드릴 때마다 눈물이 솟구침을 금하지 못합니다. 어떤 이는 육체적으로 남모르는 병을 가지고 그 고통의 경험을 홀로 겪으면서 하나님의 자비의 손길을 기다립니다. 어떤 이는 못된 습관의 종이 되어 거기서 벗어 나오지 못한 채 오늘도 정신적인 깊은 고통을 경험합니다. 자신이 사탄의 종이 되어있는 것만 같아서 몹시도 몸부림을 칩니다. 어떤 이는 입시의 문전에서 실패를 하고 깊은 상처를 안고 있습니다. 지난주에는 “야타족”이라는 젊은이들의 탈선이 심하여 딸들을 가진 부모의 가슴은 편안하지를 못하는 또 하나의 괴로운 사연이 발생되었습니다.
사실 생각하면 어느 한사람이라도 아무런 애로사항이나 아픈 사연을 안고 있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가 깊이 생각하면 남모르는 아픈 사연을 안고 오늘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영국의 시인 Mattew Prior(1660-1721)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긴 적이 있습니다. “ 숨을 쉬는 자는 고통이 있고, 생각하는 자는 비통이 있고, 오직 태어나지 아니한 자만이 눈물이 없다.”
사실 우리는 지난 몇 주간의 가뭄과 갈증과 무더위 속에서 실로 고통스럽다는 표현을 많이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고통의 함성은 바로 우리가 살아있다는 증거였습니다. 생명이 없는 자는 고통이 무엇인지 기쁨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습니다.
연말연시가 되면 입시전쟁 속에서 수많은 어린 자식들이 고통을 겪고 그 부모 역시 애를 태우면서 살아야 하는 모습을 이 땅의 국민은 모두 경험합니다. 그러나 그 고뇌의 느낌 자체가 자신의 생명이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생명이 있기에 고통스러움을 알고 그 고통 때문에 삶의 장은 움직이게 됩니다.

본문접근

오늘 하나님은 귀한 말씀을 사도 바울의 고백을 통하여 오늘 우리에게 들려주십니다. 신약성경에서의 바울은 하나님의 많은 사도들 가운데서 지대한 공적을 남긴 도구로 사용된바 있는 인물입니다. 누가 보아도 영화와 부귀의 복을 누릴 수 있는 인물입니다. 특별히 바울은 그의 좋은 가문과 훌륭한 학벌과 지식을 통하여 원하는 지위를 얻을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맨 나중된 사도로서 그의 일생을 보내는 데는 너무나 견딜 수 없는 고뇌와 아픔이 그를 떠나지 아니했습니다. 인간관계에서도 어려움이 그 앞에 몰려왔었습니다. 거기에 더하여 그의 이 육체적인 고통은 정신적인 아픔을 수반하게 하였습니다.
사도바울에게 있었던 육체의 가시 곧 자신의 몸을 가시로 찌른 것 같은 병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그의 활동에 대단한 고통을 주었습니다. 그 몸의 병이 무엇이었는지 정확히 알 길이 없습니다. 성서주석가들 마다 그 병에 대한 추측이 틀립니다. 어떤 이는 그에게 간질병이 있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어떤 이는 두통이 계속되었을 것이라고 하고, 어떤 이는 귓병이나 또는 몸의 비정상적인 기능일 것이라고 합니다. 어떤 이는 다메섹 도상에서 밝은 광채에 상처를 입은 눈의 질병일 것이라고 합니다. 그의 육체의 질병이 어떤 종류였든지 그는 분명히 이 질병으로 인하여 심각한 고통스러움을 겪고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특별히 그가 갈라디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는 자신의 육체에 나타난 병 때문에 자신이 버림을 당하고 업신여김을 당하여도 마땅한데 오히려 자신을 천사처럼 주님처럼 영접해 주어서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표현을 통하여 그의 육신 적인 고통은 보통 이상의 것이었음은 사실입니다.

본문의 재경청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 아픔을 통하여 새로운 진리의 세계를 발견하고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가 갖는 육체의 아픔을 통하여 많은 것을 깨닫게 하면서 다음과 같은 그의 신앙을 우리에게 들려주십니다.

내가 굉장한 계시를 받았다 해서 잔뜩 교만해질까 봐 하나님께서 내 몸에 가시로 찌르는 것 같은 병을 하나 주셨습니다. 그것은 사탄의 하수인으로서 나를 줄곧 괴롭혀 왔습니다. 그래서 나는 교만에 빠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의 육체를 괴롭히는 질병은 그의 정신건강에 까지 몹시 괴롭히고 있었습니다. 그도 인간이기에 육체의 질병을 벗어나고 싶어서 하나님 앞에 세 번이나 간절한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질병의 치료를 위한 하나님의 손길이 아니라 전혀 다른 차원의 말씀이 그에게 들려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참으로 의미심장한 다음과 같은 말씀이었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이 주님의 음성이 들려지자 그는 그 때부터 자신의 육체에서 그 질병으로 인한 고통이 발생될 때마다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고 있었습니다.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하면서 새로운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무르게 하시는 길이다”

주제접근

하나님은 그 때부터 바울로 하여금 오히려 이 아픔을 더 이기면서 자신의 아픈 약점을 숨김없이 내 보이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때부터 그의 인생이 새로운 경지에서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이어가도록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후부터 그의 육체의 고통스러운 병약함도, 그가 당하는 어떠한 수모도, 굶주림의 궁핍도, 견디기 힘든 박해도, 그 왜 어떤 곤란도 그리스도 안에서 기쁨을 갖도록 하셨습니다. 여기서 한 인간에게 주어진 시련이란 표면적인 아픔보다는 그 배후에 숨어있는 뜻이 더욱 깊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뜻은 사도 바울에 의하여 바로 깨닫게 되었고 그 깨달음은 바로 우리의 것으로서 이 시간 주어지고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은 바울로 하여금 자신이 당한 육체의 시련을 통하여 새로운 진리를 발견하게 하시었습니다.

(말씀과 해설)

오늘의 본문의 말씀이 있기 직전의 말씀은 참으로 바울만이 경험하게 되는 아주 귀한 신앙의 경지였습니다. 어떤 사도들도 경험하지 못하였던 환상과 계시 가운데서 셋째 하늘에 이끌려간 경험을 갖게 했습니다. 그는 그가 경험한 바를 사람이 말로 표현할 수 없고 사람이 말해서도 안 되는 말씀을 듣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화려한 환상과 계시를 바울 자신만의 것으로 감추게 그 마음을 정리 시켜 주십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모든 사람에게 발표했을 때 그것은 곳 바울의 자랑이 되고 “사람들이 바울에게서 보고들은 것 이상으로 바울을 평가하지 않게 해야 한다”는 입장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그리고 “이 엄청난 계시 때문에 사람들이 바울을 과대평가하게 되는 결과를 원치 아니하시었습니다.
바울에게는 잠시 동안의 영광은 자신만의 마음에 심어두게 되고 바로 육체의 시련으로 그 관심이 이어집니다. 하나님은 여기서 화려한 영광만을 안고서 이어지는 인생이 아니라 한 인간이 흔히들 갖게 되는 육체의 질병과 정신적인 고통을 통하여 주어진 인간 고뇌가 무엇인지 그리고 왜 그것이 필요한 것인지를 생각해 보도록 하십시다.
그러한 결과로 바울로 하여금 육체의 시련에 대하여 고민한 모습을 고백하게 만들고 그것을 어떻게 극복하는지에 대하여 말씀을 증거 하게 하십니다.
그가 겪은 육체의 고통이 매우 견딜 수 없도록 심했다는 사실은 다음의 말씀에서 입증이 됩니다. “내 육체에 가시를 주셨습니다. 사탄의 사자를 주셨습니다.” “ 이것을 떠나게 해 달라고 세 번이나 주님께 간구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아니합니다. 그리고 그의 일생동안 이 육체의 시련을 함께 하도록 하시었습니다.

(적용)

한 생명이 주어진 생을 좀더 값있게 보내려고 할 때 거기는 반듯이 더 많은 어려움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남 보다 더 많은 활동과 진취적인 삶을 추구하려할 때 거기에는 더욱더 심각한 고통스러운 장벽이 자신을 괴롭히게 됩니다. 때로는 실패 속에 따르는 시련이 있는가 하면 때로는 계속된 성공 속에 함께 하는 시련도 적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바울의 시련을 통하여 보여주신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 사는 사람의 인간고뇌는 보다 나은 내일을 위한 훈련입니다. 고통을 모르는 가운데 성장한 인생은 그 뿌리가 깊지 못합니다. 마치 온상에서 자란 식물이 따가운 볕에 나아 올 때 말라죽은 것처럼 오늘의 시련을 모르는 사람은 내일의 발전을 가져올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광야의 40년이란 시련의 역사는 오늘의 이스라엘을 이룩시키는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교만하고 안일하기 쉬운 그 민족에게 오늘도 수 없는 시련을 계속 주시는 것은 다져진 하나님의 민족으로 출발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한국교회의 자랑스러운 발전 역시 지난날의 숱한 순교와 핍박의 역사 속에서 다져진 터전이 있기 때문입니다. 영국의 여류시인 Anne Bradstreet (1612-1672)는 “철은 철저하게 가열되기 전에는 세공될 수 없다”는 말을 남긴 적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은 쓸모 있는 도구로 쓰일 수 있다고 할 때 때로는 그 인간을 용광로 속으로 내 던지고 그리고 나서 그가 만들고 싶은 형태로 두들겨 소중히 오래도록 쓰십니다. 이러한 사례는 너무나 우리의 주변에 많이 있습니다.
교육학에서 말하는대로 인간 교육에 가장 큰 부분은 자극이라는 것입니다. 충격이 클 때 결심은 더욱 굳어지기 때문입니다. 그 지점에서 동기가 발생되고 그 결단은 좀처럼 변하지 아니합니다.
우리들은 흔히들 패자전을 통하여 올라온 선수들이 결승에 오를 때 그들에게 더 뜨거운 박수를 보내고 그들이 승리했을 때 각별한 치하를 해 줍니다. 그 이유는 시련이라는 험준한 벽을 뚫고 오늘의 승리를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사람마다 자신이 받은 실패의 현장이나 위험한 병상에서 결단했던 그대로 자신의 길을 헤쳐 나아갈 수 만 있다면 거기는 반드시 성공이 옵니다. 그러나 그 충격과 그 결단이 나에게서 희미해지고 말 때는 아무런 변화를 가져오지 못한 체 실패의 길을 걷게 됩니다.
하나님이 다윗의 젊은 시절에 경험하게 했던 연속적인 고뇌의 생활은 후일 이스라엘의 역사적인 왕이 되는 데 큰 결실을 맺게 했습니다.
하나님이 오늘의 본문에서 보여주신 바울의 시련은 보다 깊은 진리 속에 하나님의 종이 되는 길을 걷게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에게 남모르는 눈물이 가득한 시련이 있으십니까
내일의 보다 큰 것에, 보다 아름다운 것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십시다. 하나님은 그 시련을 극복하는 사람에게, 그 고뇌의 관문을 통과하는 사람에게 보다 알찬 내일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통하여 고린도 전서에서 말씀하십니다. (고전 10:13)

사람이 감당할 시련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신실하시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련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련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도 마련하여 주셔서 너희가 그 시련을 견디어 낼 수 있게 하시느니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어려운 시련을 만났을 때 우리는 내가 어떻게 이 시련을 극복하고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하면서 나는 죽게 될 거라고 먼저 겁을 먹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어깨에 맞는 짐을 지어 주십니다. 그러기에 견딜 수 있습니다. 또 견디어 내서 유종의 미를 거두게 됩니다. 그럴 때 밝고 알찬 더 큰 내일이 주어집니다. 한 인간이 겪은 고통과 슬픔과 아픔의 고뇌는 모두가 그 생명이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신 시련을 통하여 겸손의 덕을 쌓게 하십니다.

(말씀과 해설)

하나님은 오늘의 본문을 통하여 바울이 깨달은 깊은 진리를 보여 주십니다. 바울은 남다른 계시를 받고 정말 교만해 질 수밖에 없는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육체의 가시인 질병의 괴로움 때문에 오히려 겸손 할 수밖에 없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남이 보기에 업신여기고 천하게 여길 수밖에 없는 육신의 병이 자신을 겸손하게 만들었다고 고백합니다.
자신의 자랑스러운 가문과 우월한 학문으로 인하여 교만해 질 수밖에 없는 자신을 하나님의 도구로 쓰시기 위한 뜻임을 알고 그 때부터 그는 겸손의 발길을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부터 그의 언어와 태도와 사역은 겸손의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적용)

사실 한 인간이 승승 장군으로 이어질 때 그는 교만합니다. 내 힘으로 내 마음대로 인생길이 열린 인생은 자칫 교만합니다. 그 교만한 인생 앞에는 하나님
이 필요 없습니다. 대학에서도 재수의 아픔을 겪고 들어온 학생은 감사의 의미나 실패의 아픔을 아는 모습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수한 머리로 거침없이 자기 계획대로 뜻을 이룩한 학생들은 감사의 눈길이나 상처의 의미를 좀처럼 모릅니다.
하나님을 붙드는 겸손의 손길과 마음은 언제나 실패의 현장에서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시련의 광장에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겸손한 함성이 솟아납니다. 이 시련의 현장에서 어떤 이는 ‘케세라 세라’ ‘될 대로 대라’는 자포자기의 패배자로 몰락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고 섬기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기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깨닫고 겸손한 자세로 자신의 출발을 새롭게 닦아 갑니다.

(예화 1)

잘 아는 어떤 분이 있습니다.
그분은 얼마나 두뇌가 명석한지 실패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주위의 사람들이 그를 따라오지 못하고 언제나 앞을 서서 이끌어가는 사람이었습니다. 몸도 아주 건강하였습니다. 건강할 때 건강을 더 살펴야 한다고 하면서 헬스를 다니고 수영을 하면서 건강을 다져갔습니다. 그의 머리에는 언제나 드높은 이상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너무 뜻밖의 병으로 인하여 입원을 하고 수술을 받고 그 육체는 전과 달리 어려움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 그의 자만의 모습은 사라지고 하나님과 인간을 향한 겸손의 자세가 너무나 돋보이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시련은 하나님을 바르게 바라볼 수 있는 눈을 열어 줍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새롭게 옷깃을 여미게 됩니다. 교만했던 과거의 자신을 돌이켜 보면서 새롭게 겸손의 의미를 살펴봅니다. 그리고 그 겸손으로 인간의 바른 자세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바른 자세를 가다듬게 됩니다.

(예화 2)

요나가 하나님의 눈을 피하여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을 때는 자기만족과 도취에 젖어 있었습니다. 자기 이상대로 향하는 자신의 발길에 자만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하나님이 일으킨 폭풍으로 인하여 바다에 던져 고기밥이 되어 큰 고기의 내장에 머무를 때 하나님을 부르짖는 함성은 너무나 절실했습니다. 그 시련의 현장은 견딜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최대의 겸손히 그에게서 발생되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구원의 손길을 그에게 주셔서 새로운 선교의 역사의 장을 펼치게 했습니다.
시련을 당한 성도들이 계십니까 지금도 남모르는 시련 속에서 헤 매는 성도들이 있으십니까 겸손 합시다.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겸손의 무릎을 그 분 앞에 꿇읍시다. 하나님은 반드시 그 시련의 함정에서 나올 수 있도록 그 길을 인도하십니다.

셋째로, 하나님은 이 시련의 장에서 우리들이 새로운 세계를 보고 그 세계를 향하여 쉼 없이 걷기를 원하십니다.

(말씀과 해설)

하나님은 바울로 하여금 그 자신에게 수치스럽고 견딜 수 없는 아픔이 다가 왔지만 그 시련의 장을 통하여 오히려 하나님을 더욱 가까이 모시고 그의 사역을 감당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바울은 자신의 질병을 고쳐달라는 기도에 건강을 회복시켜주시는 치료의 응답을 받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이라.”는 말씀 외에는 아무 응답을 받지 못한 채 일생을 그 험한 질병의 시련을 그 몸에 지니고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하나님의 음성 한마디만을 가지고 만족하였습니다.
이 주님의 음성이 들려지자 그는 그 때부터 자신의 육체에서 그 질병으로 인한 고통이 발생될 때마다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고 있었습니다.
“아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무르게 하시는 길이다”
오히려 감사하고 그것으로 인하여 새로운 세계를 향한 용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의 절대적인 도구로 그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적용)

우리의 언어 가운데 언제나 포기라는 말보다는 도전이라는 말이 더욱 큰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내일을 쟁취하고야 말겠다는 고집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것도 자신이 겪은 시련의 장을 이기고 일어서서 새로운 세계를 향하여 도전의 발길을 내딛는다는 것은 실로 소중한 것입니다. 그 세계가 바른 길이었을 때 이러한 도전은 반드시 하나님의 도움을 받게 됩니다.

(예화)

맨발의 마라톤 왕으로 두 번의 금메달을 쟁취하여 세계의 마라톤 왕으로 환호를 받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아프리카 출신 아베베라고 합니다. 그 영광의 월계관을 쓴지 4년 후에 그는 심한 교통사고를 당하여 척추를 상하게 되어 휠체어를 탄 신체장애자가 됩니다. 그러나 그는 새로운 세계를 향한 새로운 집념을 세웁니다. 드디어 런던에서 있었던 척추장애자 올림픽에 출전하여 또 하나의 금메달을 획득하여 시련을 극복하고 일어선 장한 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바 있습니다.
미국의 나성 근방에 교회를 개척하여 숱한 시행착오와 시련을 딛고 일어서서 세계적인 교회로 발전시킨 바 있는 로버트 슐러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긴바 있습니다.
“산이 내 앞에 가로막힌다 해도 나는 단념하지 않으리라
나는 계속 도전하리라 나는 기어이 산에 오르리라
아니면 산 밑에 터널을 파로 통과하리라. 아니면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그대로 그 산을 변화 시켜 금광으로 만들리라.“
그렇습니다. 나를 위하여 준비되어 있는 새로운 이상의 세계를 향하여 가는 사람들에게는 오늘의 고통이라는 험한 산이 가로놓입니다. 나를 삼키려는 듯이 사나운 파도가 밀려옵니다. 그러나 그 산을 넘고 그 바다를 건너지 아니하면 나의 이상적인 내일을 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도바울이 가야할 새로운 사명의 길을 오늘의 육체적인 질병이라는 고통을 그 가슴에 안고 가도록 하시었습니다. 자신의 육체적인 고통을 벗어버리지 않고 그것을 극복하면서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했다는 하나님의 말씀은 지극히 편한 지름길만을 찾는 우리에게 소중한 메시지로 찾아오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육체와 정신을 아프게 하는 신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기도를 해도 고침을 받을 수 있다는 응답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오히려 그 병을 몸에 안고 그 평생을 살면서 그것을 은혜로 알고 살아 갈 것을 명령받습니다.
사도바울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내 능력은 약한 데에서 완전하게 된다.”는 말씀 한마디로 만족합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그 시련을 안고 그의 삶의 철학과 방법을 변화시켰다는 사실에 우리의 시선을 집중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의 육체와 정신의 아픔과 슬픔을 승화시켜 기쁨과 감격의 발길을 걷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이 자신의 연약한 사연 때문에 주님을 쉼 없이 쳐다보는 기쁨을 간직하게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오늘의 성경말씀을 통하여 한 인간이 자신에게 주어진 육체나 정신의 세계를 감싸고 있는 고뇌를 어떻게 극복해야 하고, 그 방법과 결과는 어떤 것인지를 너무나 선명하게 보여주고 계십니다.

결론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고뇌는 소중한 것입니다.
욥이 견딜 수 없는 수난의 험산준령을 넘었습니다. 가졌던 재물이 일시에 없어졌습니다. 소중한 자식들을 모두 잃었습니다. 자신의 육체가 질병으로 만신창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험한 가시밭길을 벗어났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더 많은 재물과 재산과 아름다운 건강을 주셨습니다.

(예화)

캘리포니아에서는 한 때 온 땅을 휩쓴 홍수가 있었습니다. 어느 성도는 자신의 천직으로 알고 살아왔던 방앗간을 홍수에 모두 빼앗기고 빈손이 되었습니다. 빈터만 남은 그 위에서 그는 하나님께 원망이 섞인 기도를 합니다. 평생 동안 깨끗하게 살면서 당신을 섬기려고 몸부림 친 나에게 너무나 가혹한 벌이라고 그 이유를 묻는 원망의 기도를 했습니다. 빚을 내서 새롭게 방앗간을 튼튼히 세우려고 지하를 팠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아주 좋은 금광맥이 바로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는 다시 무릎을 꿇어 원망으로 가득 찼던 조금 전의 자신의 기도에 대한 용서를 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들이 당하는 수난을 단순한 고통으로 끝맺게 하시지 아니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로마서를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그러하기에 하나님은 갈라디아서를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루매 거두리라.(갈6:9)

여러분은 숨을 쉬는 살아있는 생명체이기에 오늘의 고뇌를 경험하게 됩니다. 죽어있는 생명은 아픔도 슬픔도 기쁨도 아무것도 느끼거나 경험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보다 큰 것을 줄 수 있는 그릇이기에 오늘의 시련의 장에 서게 하십니다. 교회도 호흡을 하기에 고통을 경험 할 때가 있습니다. 가정도 살아있기에 아픔도 수난도 경험합니다.
이제 오늘의 시련에 낙심하지 맙시다. 우리의 육체가 숨을 쉬고 있는 한 하나님은 희망찬 내일을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는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욥도 바울도 모두 승리의 월계관을 쓰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렸습니다. 우리 한국의 수많은 신앙의 선배들도 수난의 길을 통과하여 승리의 월계관을 받았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능력은 오히려 약한 곳에서 더 크게 발생하여 더 큰 힘을 발휘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다시 말씀하십니다. 나의 능력은 약한데서 온전하여 진다.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여 함이라.(벧전 1:6-7)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2. 본 설교가 있기까지

설교의 영상(靈想)을 위한 노트

한국인의 종교심성은 유별나다. 자신이 어느 종교를 영접했을 때 그 기대 심리는 가시적인 복이 주어지기를 기대한다. 한국의 그리스도인들 역시 자신이 받은 거대한 복인 구원에 대한 감사와 그 응답의 삶보다는 육적인 삶에 하나님의 응답이 있어서 삶이 윤택해 지는지에 깊은 관심을 갖는다. 그러다가 기대 밖의 어려운 시련이 닥칠 때 자신이 선택한 종교에 대한 회의를 느낀다. 인간이란 자신이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의 현장을 만났을 때에 그 고비를 벗어나려는 몸부림을 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래서 자신의 힘보다는 더 강한 신앙의 힘으로 탈출을 시도한다. 그러나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 섬기는 신앙의 대상에 대한 능력까지 평가절하를 하는 무서운 오류를 범한다.
이러한 신앙은 결코 성숙되지 못한 신앙의 현상일 뿐이다. 기독교 신앙은 결코 나의 육적인 안일과 번영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다. 진정한 기독교 신앙의 참 뜻은 나를 죽음으로부터 구원하여 주신 분의 뜻을 따라 살면서 그분으로부터 입은 은혜를 보답하는 삶을 의미한다. 내 자신이 직면한 시련도 그 분의 뜻이라면 그대로 순응하면서 오늘을 새롭게 그리고 힘차게 이어가는 삶의 모습이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다.

본 설교가 있기까지의 정황과 사연

본 설교가 행하여지던 시간은 1994년 여름 가뭄과 더위가 계속되던 때였다. 새로운 문민정부가 들어선 후에 계속적으로 이어진 사건과 자연현상의 이변을 두고 우리의 민족이 매우 착잡한 심정을 안고 있던 때였다. 이곳저곳에서 이 민족에게 내려진 시련을 거두어 달라는 기도가 계속되던 때였다.
특별히 극심한 가뭄에 하나님의 도움을 간청하던 기도는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의 기도의 제목이 되었고 예배 시마다 드리는 기도의 중요한 제목이 되기도 하였다. 뜻밖에도 하나님은 참으로 희귀한 태풍인 브랜던호를 이 땅에 보내주었다. 무서운 폭풍이 없이 오직 비만을 싣고 온 태풍이 되어서 ‘효자 태풍’이라는 기상대가 주는 칭호까지 있었다. 그때 뜻이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 죄악이 관영 하지만 아직도 하나님이 이 땅을 아직도 버리시지 아니했다는 증거라고 즐거워하였다.
그때 본 설교자는 국가적인 차원보다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시련이라는 것의 의미를 찾기 위하여 무릎을 꿇기 시작하였다. 거기서 얻은 대답은 시련이란 인간을 피곤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발전을 가져오는 매개라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때로는 하나님은 인간이 직면한 시련을 통하여 교훈을 주신 후에 거두어 주시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 시련을 한 인간에게 남겨주어 그 시련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더욱 깊고 넓게 헤아리게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언제인가 하나님을 위한 유용한 도구로서 헌신하게 하신다는 사실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시련의 고통을 느낄 수 있다는 자체가 그 생명이 아직도 숨을 쉬고 살아있다는 증거임을 다시 확인하게 되었다. 살아 있는 생명이 아니라면 아픔도 기쁨도 느끼지 못하는 식물인간에 해당된다는 것 또한 중요한 사실로 인식하게 되었다. 이러한 깨달음이 바로 본 설교를 구성하게 되었고 거기에 해당된 말씀을 회중들에게 운반하게 되었다.

본문과 주제가 확정되기까지

본 설교의 본문과 주제는 조용한 명상 가운데서 주어진 것이 아니다. 민족이 직면하고 있는 시련의 현장에서 함께 괴로워하고 기도하는 가운데서 오늘의 설교 주제는 형성되었다. 한 인간으로서 견디기 힘든 시련의 장에서 깨달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되었고 그 생각은 바로 기도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 때의 기도의 내용은 복잡한 것이 아니었다. 오늘 우리의 민족이 그토록 간구하던 단비를 내리시어 갈증을 가시게 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먼저 감사하면서 한 인간이 직면한 시련을 어떻게 소화해야 하고, 거기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는 어떻게 이어져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담은 단순한 형식의 기도였다. 그리고 성경에서 하나님의 사람들이 어떤 어려움에 봉착하였으며 그 어려움을 어떻게 풀어 나갔는지를 찾는 작업을 펼치기 시작하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물이 없어 험악한 저항을 했을 때 모세가 어떻게 행하였으며 그 때 하나님은 어떻게 응답하였는지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욥이 인간으로서 견딜 수 없는 시련을 당했을 때에 취하였던 신앙인의 자세는 어떠했는지를 보았다. 뿐만 아니라 불순종의 대가로 가장 처절한 인간으로 고기 뱃속에서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감수하였던 요나의 태도와 그 후의 활동도 다시 보게 되었다. 최종적으로 오늘의 본문을 통하여 보여주신 사도 바울과 그가 육체적으로 안고 있는 시련의 문제를 어떻게 받아드렸고 또 신앙적으로 어떻게 해결했는지를 상세하게 관찰하게 되었다.
이상과 같은 기록들을 읽은 다음에 하나님이 사도 바울을 통하여 보여주신 인간의 시련과 거기에 대한 자세가 가장 적절하다는 생각이 주어졌다. 그래서 주제는 시련의 숨은 뜻이라고 정하였고 그 본문은 사도 바울을 통하여 들려준 말씀을 운반하기로 하였다.

본문과의 대화와 적용

언제나 서술해 온 것처럼 본문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않고서는 설교는 한 발자국도 나아가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다시 반복하였다. 먼저 인간이 당하는 고통과 울부짖음, 그리고 하나님에 의하여 해결되어지는 사건을 찾아보았다. 바로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목마름과 원망의 장에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역사였다. 그리고 자신의 잘못을 철저히 깨닫고 3주야의 물고기 내장 안에서 신음하는 요나와 하나님의 용서를 찾아 볼 수 있었다.
그 다음으로 오늘 바울이 안고 있는 육적인 질병의 원인은 무엇 때문이었는지를 찾았으나 그 원인은 정확한 대답을 찾기가 힘들었다. 오직 그 질병이 무엇이었는지를 주석가들 마다 다른 해석을 하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바울이 이 육체의 가시를 안고 살면서 때로는 몹시 수취 감을 느끼기 기도하였고 때로는 견디기에 힘이든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 특히 갈라디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는 자신의 질병 때문에 인간들로부터 버림을 당하고 업신여김을 당하기에 마땅하다는 표현을 보면서 그 병의 실태가 심각하였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게 되었다.
이러한 질병을 안고 있는 인간 바울의 모습과 그가 그 병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하여 애타게 매달려 기도하였던 모습을 다시 연상하면서 말씀의 깊은 뜻을 헤아리기 시작하였다.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으로부터 고침을 받은 응답이 아니라 그 상태 가운데서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그대로 사명을 수행할 것을 명령받았을 때 한 마디의 이견도 내어놓지 못한 채 “아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무르게 하시는 길이다”는 결론을 얻고 다시는 자신이 당한 시련으로부터의 해방을 위한 기도가 없이 소명에 매진한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이 육적인 시련을 통하여 겸손을 배우고 새로운 진리와 세계를 추구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여기서 하나님은 바울의 이러한 모습을 통하여 오늘의 우리에게도 동일한 의미의 메시지를 주시고 계신다는 것을 새삼 확인하면서 말씀의 운반을 위한 정리를 시작하였다.

설교의 목적과 그 전개 형태

본 설교는 교훈적인 설교의 형태를 취하면서도 실상은 목양설교(Therapeutic Preaching)를 시도하였다. 그 이유는 이 설교가 행하여질 당시 극심한 가뭄과 사회적 불안이 계속되었던 상태이기 때문이었다. 기독교의 장로가 대통령이 되었는데 어느 때보다도 사건이 많이 발생하고 천재지변까지 겹칠 때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에는 적지 않은 불안과 상처가 일기 시작하였다. 특히 어느 종교로부터 청와대의 뜰에 불상을 치워버린 행위에 대한 진노라는 시중의 루머까지 겹치던 때였다. 이 루머가 얼마나 심각했기에 청와대는 국영 TV를 통하여 불상이 그대로 있음을 화면으로 보여주는 촌극까지 연출하였다.
이러한 정황에 놓여있던 그리스도인들이 애써서 기도하던 가운데 너무나 뜻밖의 흡족한 비를 맞이하면서 하나님을 향하여 감사를 돌리던 때이기에 당연히 하나님이 살아 계셔서 우리를 시련가운데서도 보호하신다는 목양의 설교가 있어야 했다.
설교의 목적이란 설교자의 필요에 따라 수시로 확정되는 것보다는 회중들이 직면한 상황에 따라 융통성을 갖출 필요가 있다. 그럴 때 하나님의 말씀은 절절한 시간과 환경을 위에 효과적으로 운반될 수 있다.
본 설교의 형태는 오늘의 한국교회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많이 익숙해 있는 대지설교를 취하였다. 순수하게 본문의 메시지를 그대로 운반하기 위하여 설교의 형태를 단순화하고 그 이해를 신속하게 가져와야 한다는 판단과 함께 이 형태를 사용하게 되었다.

3. 본 설교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들

본 설교를 하는 동안 교인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그리고 회중들이 어느 때보다도 민족과 자신들이 당한 어려운 시련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하게 되었다. 분명히 말씀과 만남이 이룩되었다는 확신도 이 설교자는 가져보았다.
그러나 설교자의 마음 한 구석에는 여전히 아쉽고 모자란 준비성을 느끼면서 스스로 질타를 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보다 더 진지한 최선을 기울였다면 회중들의 뜨거운 반응보다는 하나님의 칭찬을 받을 수 있을 것인데 하는 생각과 함께 또 한 번 ‘설교의 겸손’을 체험하였다.
무엇보다도 먼저 본 설교는 다른 설교에서 볼 수 없었던 서론의 형태이다.
서론과 본문 접근 사이에 말씀이 필요한 현장을 새롭게 신설하여 말씀의 운반을 시도하였다. 여기서 자칫 말씀보다 현장이 돋보이는 오류를 발생시킬 가능성이 많은 위험한 시도를 하였다고 본다.
둘째는, 사도 바울처럼 오늘의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도 심각한 육체의 병을 고치지 못한 채 주님의 일을 희생적으로 감수한 사례가 많이 있는데 그러한 생생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예화로 들어 적용시키지 못한 면이 지적을 받게 된다.
셋째는, 가뭄을 통하여 시련을 주시고 비를 주시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는 환경에서 개인의 시련과 주님의 응답, 그리고 새로운 진리의 발견이라는 주제가 시원스럽게 연결을 맺는데 약간의 무리가 있음을 보게 된다.
넷째는, 현대의 젊은 세대들에게는 가뭄과 효자 태풍이 몰고 온 기상의 관계를 하나님의 섭리로 보는 시각이 거의 없을 텐데 그것을 좀더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장중에 있음을 설명하는 부분이 빈약함을 본다.
다섯째는, 본 설교자는 설교의 이론을 가르치면서 설교의 결론은 가급적이면 언제나 간결하게 만들어야 효과적임을 강조한바 있다. 그러나 본 설교의 결론은 아주 특이한 형태를 취하여 설명과 예화를 사용하여 결론을 장황하게 만들고 있다. 이러한 시도는 설교의 초점을 추려주는 데 실패를 가져올 가능성이 많다는 사실 또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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