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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비밀을 맡은 자의 긍지 (고전 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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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 한해를 보내며 새해를 바라보는 시점에 와 있습니다. 이러한 시점에 재직 헌신 예배를 드리는 것은 매우 의미가 깊은 줄로 압니다.
지난날의 교회를 위해서 수고하고, 봉사한 우리 자신을 돌이켜 보며, 앞으로의 우리의 자세를 다시 한번 가다듬을 수 있는 귀한 시간인 줄로 압니다.

우리는 언제나 재직의 직분을 소중히 여깁니다. 그것은 사람이 맡긴 직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직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를 성직이라고 말합니다. 거룩한 직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구별하셔서 교회를 위하여, 천국의 확장 사업을 위하여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오늘 봉독한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맡은 직분에 대하여 긍지를 가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봉사자에게 있어서 긍지라고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사람은 긍지를 가지고 일할 때에 보람을 얻을 수가 있고 즐거움과 기쁨이 넘치는 것입니다.
긍지에는 두 가지 요소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나는 개인적인 적성과 그 적성에 따른 일을 은사 적으로 받아 드리는 마음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 적성에 꼭 맞는 일이요,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께서 내게만 주신 소중한 은혜의 선물이라고 여겨질 때에 긍지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긍지란 개인적인 존재 가치를 말합니다. 남이야 뭐라고 하든지 나는 소중한 존재이다. 이 일을 위하여는 나는 소중하다. 저분에게 나는 소중하다.
꼭 필요하다. 그리고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다 소중하다.--이렇게 자신의 존재 가치를 높이 평가하게 되며, 자기 기능과 자기 역할을 소중하게 여길 때에 긍지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만족이 필요합니다. 내가 하는 일에 만족이 있어야 합니다. 자기 만족이 없는 사람이 누구를 도울 수 있겠습니까 내 얼굴이 썩어 있으면서 누구를 위로하겠습니까 내 마음이 울적한데 어떻게 봉사를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내가 먼저 기뻐해야 하고, 내가 먼저 충만해 있고, 내가 긍지가 넘쳐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만족이 있고야 남을 만족케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긍지가 넘치는 사람은 역경이 와도 잘 대처합니다. 모든 일에 창의력을 발동합니다. 이런 사람은 마음을 열고 삽니다. 이런 사람은 또한 다른 사람을 존경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작은 일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일에 부정적이 아니라, 긍정적입니다. 소극적이 아니라 적극적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긍지를 가지고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1. 그리스도의 일군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서신의 서두를 시작할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사도 바울’이라고 하였습니다. ‘종’은 노예를 말합니다. ‘사도’는 보냄을 받은 사람을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예수님의 노예임을 긍지로 삼았습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산다’ 이것이 그의 자랑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말하기를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여기다’는 말은 특수한 말로 ‘그렇게 알라, 그렇게 알아 다오, 그렇게 인정하라’는 명령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헬라어로 ‘휘페레다스’라는 말은 ‘일군’이란 말인데 그 의미는 ‘배 밑에서 노를 젓는다’라는 뜻입니다. 옛날에 배는 노를 저어야 움직일 수가 있었습니다. 커다란 배는 2단,3단까지 노를 저을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노예들이 배 밑에서 두 줄로 앉아서 노를 젓습니다. 열심히 노를 젓는 그 사람들의 입장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이 이 배가 어디로 가는지, 무엇 때문에 노를 젖는지 알지 못합니다. 선장만이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저어라’하면 젓고,‘멈추라’하면 멈출 뿐입니다. ‘왜 젓는 것입니까,어디로 가는 것입니까’라고 묻지 않습니다.

몰을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방향도,행선지도,목표도,목적도,의미도....전부 선장에게 달려 있습니다. 노예는 그대로 배 밑에서 노를 저어 순종할 뿐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일군입니다. 교회는 배와 같습니다.
그리고 어떤 면에 있어서는 키잡이와 같습니다. 예수님은 배의 항로를 지시하는 선장이고, 사도 바울은 키잡이로써 선정의 명을 받아 일하는 노예와 같은 것입니다.
노젓는 사람이나, 키 잡는 사람이나 다 선장이 아니라 그 배의 일군들입니다.

이처럼 교회 안에서도 노를 젓되 앞에서 젓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구석진 뒤에서 젓는 사람도 있고, 키를 잡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모든 재직들은 이 배의 선장이 되시는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종의 신분을 잊지 말고, 종의 자세로 겸손히, 그리고 섬기는 자세로 해야 할 것입니다.
벧전5:3절에 보면 “맡기올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2. 비밀을 맡은 자라고 하였습니다.
원문에 보면 ‘관리자’‘집사’‘청지기’라는 뜻이 있습니다. 아침에도 말했지만 청지기의 위에는 주인이 있고, 그 밑에는 노예가 있습니다. 그 중간에 있는 존재가 청지기입니다. 타율적 존재인가 하면 자율적 존재입니다. 그에게는 상당한 권한이 부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주인으로 착각하기가 쉬운 것입니다.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주인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런 점에 있어서 청지기는 주인이 정해 놓은 범위 안에서 긍지와 창의성을 가지고 주인에게 순종하는 자율적 존재인 것입니다.
여기서는 특히 가르치는 교사와 사도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사와 교사의 직분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완전히 자유를 주님께 바치고 능률적으로 순종해 나아가는 일군이 바로 비밀을 맡은 자들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나는 그리스도의 일군이다, 나는 그리스도의 노예다, 나는 그리스도의 청지기이다’라고 자신의 긍지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겸손은 자신이 종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이에 긍지를 가지는데 있습니다.

사람의 복은 검소하면 생깁니다. 사람의 덕은 겸양하면 생깁니다.
(예).이솝 우화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참새 무리 가운데 유달리 큰 참새가 한 마리 있었습니다. 깃털도 예쁘고, 소리도 크고, 노래도 잘 불렀습니다.
그 참새는 스스로 너무 잘났다는 생각에 다른 참새들을 무시했습니다. 시시해서 같이 놀 수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참새들 보다 좀더 큰 메추리한테 가서 같이 놀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메추리는 ‘웃기지 말라. 너는 메추리가 아니다. 그러니 참새들한테 가서 놀아라’하고 참새를 쫓아 버렸습니다.

할 수 없이 그는 돌아와서 다시 참새들 틈에 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참새들 역시 ‘우리를 무시하고 갔던 놈을 어떻게 다시 받아 주겠느냐’하며 그를 쫓아 버렸습니다.
결국 그 참새는 평생을 고독하게 살다 죽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고독한 사람이 있습니까 스스로 잘났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고독한 것입니다.
그러니 마음을 비우고 한번 나추어 보시오. 인구가 얼만데 고독합니까 천지에 널린 것이 사람입니다.
지혜가 어두워지면 교만에 빠지기 쉬운 것입니다. 근심은 애욕에서 생기고, 재앙은 물욕에서 생기고, 허물은 경망에서 생기고, 죄는 참지 못함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절망은 불 신앙에서 생깁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3.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 하였습니다.
모름지기 비밀을 맡은 자는 충성을 합니다. 세상에서 믿을 만한 사람은 충성스러운 사람입니다. 충성이란 자신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을 위해서 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충성에는 반드시 희생이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희생 없이 충성 없고, 충성 없이 희생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도록 충성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를 위해서, 주님을 위해서, 그리고 복음을 위해서 얼마나 희생하여 보았습니까 내가 먹을 것을 줄이고, 내가 입을 것을 줄이고, 내가 꼭 필요한 것을 쓰지 아니하고 주님을 위해서, 선교를 위해서 희생 제물을 드려 보았습니까
하나님은 희생 제물을 원하십니다. 우리가 쓰고 남는 것 가지고 드리는 것을 원치 아니하십니다. 희생이 있는 여기에 헌신이 있고 여기에 충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충성스러운 일군은 꾸준해야 합니다. 변함이 없어야 합니다. 그리고 진실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인에게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전에 주인에게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주인의 뜻을 우선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주님은 기뻐하시지만 백성들은 그렇지 않을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면박과 비판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맡은 일을 중단한다면 사람 때문에 일하고, 사람 때문에 그만두는 불충한 일군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3절에서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라고 하였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내가 충성함에 있어서, 내가 긍지를 가지고 주의 일을 함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이 잘한다,못한다,겸손하다,교만하다,성공했다,실패했다......무슨 소리를 하든지 내게 다른 사람의 판단은 작은 것이다, 개의치 않는다, 내 긍지가 그것들을 다 포용하고도 남는다는 말입니다. 중요한 말씀입니다.

갈1:10절에 보면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위해서 충성하기를 원한다면 사람들의 판단과 비난을 너무 의식해서는 안돼는 것입니다. 충성된 종은 사람의 마음에 맞는 종이 아니라 다윗과 같이 하나님이 마음에 맞는 종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판단하시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고 4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바르게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바리새인으로 경건하게 그리고 정결하게 살아왔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의롭다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만 옳고 그름을 판단하실 분은 오직 주님뿐이시라고 하였습니다.

이제 우리는 다 되었다고도 하지 말고, 안되었다고도 하지 맙시다. 누구 칭찬 좀 한다고 해서 성공한 것처럼 자만하지 말 것이요, 누가 좀 섭섭히 한다고 해서 또한 섭섭한 말을 들었다고 해서 실패한 것처럼 절망하지도 말 것입니다.
잘 됐는지, 못됐는지는 그리고 잘한 일인지, 못한 일인지는 그 날에 가서 판단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에 대해서나, 나에 대해서나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5절에 보면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모든 것을 주께 맡기고 다만 오늘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충성을 다 할 것입니다.

이 시간 교부 익나시우스의 기도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영원한 말씀이신 독생자 예수님, 우리에게 참된 관대함과 고결함을 가르쳐 주옵소서. 상처 입은 일에 구애됨이 없이 싸울 수 있는 용기를 주옵소서. 휴식을 구하지 않고 일하는 것을 가르쳐 주옵소서.
대가를 구하지 않고 싸우는 법을 가르쳐 주옵소서. 우리의 대가를 구하는 마음이 너무 앞서 있기에 그처럼 피곤에 지쳐 있는 것입니다. 주님, 대가를 구하는 마음이 없이 희생하는 법을 가르쳐 주옵소서-이것이 우리의 기도제목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재직, 그리고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서 구할 것은 다만 충성뿐입니다. 그저 주님만을 바라보고 묵묵히 충성, 봉사하는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군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고귀한 직분과 내 자신의 존재 가치를 알고,사도 바울 처럼 높은 긍지를 새롭게 느끼면서,오늘도 내일도 충성하고 승리하여,하나님 앞에 설 때에 칭찬받는 일군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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