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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한 아기가 태어날 때 (마 0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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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지자 이사야는 B. C 700년경에 크게 외쳤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 7:14)."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낳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비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을 기묘자로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 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고 말입니다(사9:2).

이 예언이 이루어져 지금으로부터 1983년 전, 아니 디오니시우스 에크시구우(로마의 수도사)의 연구에 의하면 1986년 전,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한 아기가 태어났습니다. 정말 그 아기에는 지혜와 총명의 신과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강림하셨고 공의와 정직과 성실로 일생을 살아갈 아기, 예수 그리스도 그였습니다. 그럼에도 아기 예수는 여느 아이들과 똑같이 영아로 태어나서 어머니의 품에 안겼습니다. 이 사실은 징조와 소문으로 인하여 여러 사람들에게 전파되고 알려졌습니다. 그런데 이 소식이 알려지자 그것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과 느낌은 너무도 상이하여 그 아기가 범상한 인물이 아님을 보여주었습니다.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세주다운 품성은 그 출생 사실에서부터 잘 나타났습니다.

예수가 나셨다는 소문을 들은 사람들 중에서는 생과 사의 암투가 벌어지는가 하면 지성을 담은 예물을 곁들인 경배와 영광의 찬송이 울려 퍼졌습니다.

우리는 아기 예수 태어나신 그 밤의 정성을 생각하며 축하하는 우리의 신앙과 생활에 또 다른 교훈을 얻어야 되겠습니다.

1. 동방박사들의 내방과 경배하는 모습
동방박사들은 아마도 파사 지방의 점성 학자들인데 그들은 유대인들의 경전, 민수기 24장 17절에 예언된 유대인의 왕을 기다렸을 것입니다.

그들은 별들을 연구하고 관찰하다가 지금까지 발견할 수 없었던 한 이상한 별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자연계의 한 기현상 이기에는 너무나 신비롭고 자기들을 유인하는 힘을 발휘하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과학자가 과학자답지 못하게 유혹되고 말았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박사들의 이름은 가스팔(Caspar), 메키올 (Mechior), 발다살(Barthasar)이였다고 합니다. 그들 세 박사들은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준비함으로써 왕에게 나아가는 사람들로서의 법칙을 갖추어 낙타에 안장을 씌워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별을 따라 수천리 여행길에 올랐습니다.

유대 땅까지 도착한 박사들은 헤롯 궁예 들어가 예수를 찾았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장관도, 시온 산의 풍경과 헤롯 궁의 화려함도 가관이었으나 그들이 보고 싶었던 예수가 계시지 않기에 그곳을 떠나 다시 별이 인도하는 대로 한 촌 베들레헴으로 가서 짐승의 우리에서 아기 예수를 발견하고 큰 기쁨에 넘쳐 보배 합을 열어 예물을 바치며 만족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경배를 드렸습니다.

자기의 입장도, 신분도, 국적도 잊은 채 한 아기 앞에 경건한 예배를 드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별들의 징조까지 동원될 수 있는 우주적인 맥락의 사건이었는데, 참된 지식인, 지혜 있는 사람은 자연계의 현상들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고 창조주 앞에 고개 숙이게 됩니다.

그들은 별의 과학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별의 철학을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별의 출현과 움직임과 그 방향을 별의 세계에서만 보려 하지 않고 항상 인간의 세계와 그 운명과 관련을 맺고 생각하는 철학자들이었고, 나아가서는 자기들의 철학을 믿고 있었던 신앙 인들이었습니다.

독일의 석학 라이브 닛츠는 "하나님은 세계를 창조함에 있어 예정 조화 속에 있게 하였으며 자연의 성립은 하나님의 은총에 의한 것"이란 자연 철학을 확립시켰습니다.

데칼트는 인간 사고의 명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이라는 것은, 우리를 기만하는 일없는 성실한 신의 존재가 확신될 때만 가능하다고 하면서 신의 존재를 증명하였습니다.

칸트는 "하늘에는 어두움을 밝히는 별이 있고 인간에게는 인간의 길을 알려주는 도덕률과 양심이 있다"고 술회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종교 없는 과학은 소경"이라고 과학의 근본 태도를 천명하였습니다. 또한 최초의 우주인들도 지구 궤도를 선회하면서 창세기를 펼쳐 읽으며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였던 것입니다.

유한한 인간의 지식도, 경험도 그러기에 지혜 자는 "여호와를 아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 말씀하였습니다. 창조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써 인간의 참된 지혜가 시작되는 것은 그 아기에게 지혜와 총명이 신이 함께 하셨고,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강림하셨기 때문입니다.

2. 집권자의 음모와 백성의 소동
동방박사들이 예루살렘에 들러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게시뇨" 라는 질문을 함으로 왕이 났다는 사실을 들은 당시의 권좌에 있던 헤롯은 극심한 공포에 쌓였고, 예루살렘 거민은 소동하였습니다. 이때 헤롯의 나이는 이미 70이었고 이보다 조금 앞서 그의 일가가 왕위를 잃게 된다는 바리새인의 예언이 있었기에 의구심이 많은 헤롯을 아내와 아들들까지 죽인 잔인한 폭군이라고 역사가 요세푸스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동방박사들의 그 질문은 헤롯에게 결정적인 공포감을 주었고, 한편 메시아를 기다리지 않고 성경의 진리의 말씀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지도 않고 방종하게 살던 예루살렘 거민들은 왕조가 교체될 때 따라오는 전쟁과 혼란의 공포 때문에 소동하였던 것입니다.

잔인한 살인자 헤롯은 금방 계략을 꾸며 태어난 아기를 죽이려고 칙령을 내려 베들레헴과 그 지경 안에 있는 2세 이하의 모든 사내아이를 학살케 하였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종교인들인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이 잔인한 비인도적이며 반종교적인 거사에 동참하여 그 당시 타락한 종교계의 상태를 보여주고 말았던 것입니다.

한 아기의 출생을 전해들은 정치. 종교계의 집권자들은 공포에 떨고, 신앙 없는 대중심리의 민중이 소동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 또 다른 의미가 있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 아기 예수는 로마의 세력이 온 천하에 뻗쳤을 때 즉 절정에 이르렀을 때 탄생하신 것입니다. 어느 의미로 보면 로마의 세력권을 과시하고 재정비하기 위한 국세 조사가 한창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로마의 권력 팽창을 저지하며 그 절정을 하향 선으로 돌려놓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셨을 것입니다. 분명히 예수는 불의한 권력의 도전자요 저항자요 또한 파괴자로서 살아가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케 하려 함이로라(눅 12:51)"라는 그 자신의 냉담한 천명을 미루어 보아서도 이 점을 알 수가 있습니다.

불의와 부정적인 나태와 타협하는 권력, 낮은 자와 가난한 자를 외면하고 일부 부유층을 위하는 권력은 정의와 공의를 허리띠로 삼는 예수의 탄생에 두려워할 수밖에 없고 스스로 붕괴와 멸망을 상상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거짓 왕으로서의 헤롯에 빗대어 참 유대인의 왕이요, 만국의 왕이 되시는 분입니다. 그는 시금석으로서 그에게 부딪쳐 보면 진부가 밝혀지고 적부가 판정됩니다.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난 의롭고 정결하신 예수가 불의하며 권리를 남용하는 집권자들과 공존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예수가 탄생하신 소식을 들은 모든 권세 가들은 뉘우침과 시정의 계기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크리스마스가 임마누엘로서 우리의 곁을 떠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 해방, 평화의 통치권이 수립되어 영원히 계속되는 기점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3.천사들은 영광과 평화를 노래하였습니다.
아기 예수의 흡인력에 끌려 입장과 신분을 버리고 그에게 경배하는 상류 지성인들이 있었고, 그의 탄생을 듣고 하나님의 뜻을 좇지 않던 집권자와 민중의 암살 계략과 소동이 있었음에도 주님 탄생하신 그 밤의 공기는 찬양과 영광의 비췸으로 가득하였습니다. 하늘로서 천사들이 내려와 양을 치는 목자들 곁에 서더니 "온 백성에게 미칠 기쁨의 좋은 소식, 곧 너희를 위하여 목자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는 장중한 선언을 하고 홀연히 천군 천사들이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라고 하나님을 찬양하였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성탄의 깊은 의미를 찾게 됩니다. 일찍이 중세의 유명한 신학자 에라스므스(Anselmus)는 “왜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느냐”(Cur Deus Home)]라는 유명한 책에서 그의 속죄론을 폄으로써 기독교 신학이 생긴 이래로 최초의 체계 정연한 속죄론을 전개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범죄한 인류를 놓고 자기의 사랑과 공의의 속성들을 충족시키기 위해 인간적으로 말해서 고뇌를 겪었습니다. 공의를 발동하여서 멸망을 선언하기도, 사랑을 발동하여서 무조건 용서도 다 어려운 것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늘 회의에서는 구원의 계획은 수립되었고, 그 계획은 착실히 진행되어 성자가 성육신 함으로 인간 구원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그는 말구유에 나셔서 십자가에 죽고, 다시 부활하심으로 구원에 대업을 완수하셨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이일의 본격적인 시행이요 이 일을 통해서 인류는 죄악의 길을 벗어날 수 있게 되었고 하나님은 영광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에 빛을 더하게 하려는데 있다는 점을 우리가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라는 말이며,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라는 것은 욥기에서 지상의 인간 생활을 끝없는 전쟁이라(욥7:1)고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인간의 참된 평화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성립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진노의 자손으로 태어났으며 나면서부터 하나님과 전쟁상태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와 적대 관계에 있다고 느끼는 우리는 참된 평화를 가질 수 없는데 이제 하나님께의 우리의 죄책을 깨끗이 없이 하고 아무런 죄도 우리에게 전가하지 않으시면 하나님에게서 내적인 화해를 받아 마음의 안정을 되찾은 참된 평화가 회복된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이 신비스러운 탄생은 하늘만의 사건도, 땅만의 사건도 아닌 하늘과 땅이 찬양하는 예배의 대상이 되는 사건이요, 지상에 근본적인 샬롬(Shalom) 을 일으킨 사건인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영광을 되찾으시고 인간은 이사야가 11장 6절 이하에서부터 그렇게도 염원하던 완벽한 평화의 시대에 돌입하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믿음이 형제들이여! 구유에 나신 아기 예수를 평화의 왕으로 영접하는 길은 믿음뿐입니다. 동방박사들처럼 황금. 유향, 몰약은 예물은 없어도 진리이며 만 왕의 왕이신 그 앞에 겸허한 자세로 경배 드립시다.

불의하게 살면서 주님 맞을 준비 없이 방종하다가 갑자기 오시는 주님께 심판과 소동의 날이 되지 않도록 깨어 믿음에 거합시다. 질그릇 같은 내 속에 주를 영접할 때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다"하면서 "영광을 받으시고" "평화를 주옵소서"라고 목자들처럼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며 평화의 왕을 영접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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