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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할 말이 없는 사람 (롬 08:3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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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신앙이 좋은 실업가가 뜻하지 않은 일로 사업에 실패하고 건강마저 잃어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불행한 일을 당하자 그 아내는 도저히 위로할 말을 찾지 못해서 마침내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어째서 하나님은 우리를 이렇게 내버려두시고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느냐고 짜증을 냈습니다. 이때 남편이 대답하기를 "우리가 지금 어렵다고 결코 하나님이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맙시다. 하나님은 실패하지도 않으시고 실수하지도 않는 분이시오.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방법으로 우리를 사랑하고 계십니다"라고 말했답니다.

실패의 원인이 있다면 그것은 분명히 지나친 욕심 때문일 것입니다. 근심의 원인이 있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바로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무력한 바가 있다면 그것은 생각이 너무 복잡하기 때문입니다. 능력은 단순한데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 불안의 요소가 있다면 그것은 거짓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깊이 생각해 보면 진실만이 강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처럼 믿음을 구하면서도 믿음이 없다면 이것은 우리 마음 깊숙이 도사리고 앉아 있는 교만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합니다. 믿음은 어떤 의미에서는 생명보다 더 귀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 보다 더 소중하고 우선적인 것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믿는 것을 제3, 4위 순서에다 놓고 믿어도 좋고 안 믿어도 그만인 것처럼 하고 사는 사람에게 하나님을 믿도록, 하나님 앞에 진실하도록 깨우치고 훈련시키시며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잘못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까 소중하지 않은 것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을 깨우쳐서 진정 소중한 것을 찾도록 이끄시는 역사가 하나님이 실수하시는 것입니까 진실을 생각하면서도 진실 되지 못한 사람들을 진실하도록 도와주시는 이 역사가 하나님이 잘못 하시는 것입니까 그럴 수는 없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신념이나 확신 따위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바른 관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모든 관계는 수평적인 것이지만,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는 항상 수직적이며 항상 종말론적인 것입니다. 이 수직적인 바른 관계가 바로 신앙입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크신 역사에 대한 바른 응답이 신앙입니다. 사실 믿음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믿어지지 않는 것처럼 불행한 일은 없습니다. 믿어지지 않는데는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내 마음도 마음대로 못하는 것이며 내 믿음도 내 것이라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8절에 보면 믿음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을 일반적인 개념으로 소화해서는 안됩니다. 보통 일반적으로 신을 믿는다든지 보통 사람들이 신이 있다고 생각하는 그런 뜻의 유일 신관 또는 유일 신론의 의미와 같은 뜻으로 하나님에 대한 고백을 가지고 있는 것은 잘못입니다.
적어도 우리가 믿는 신앙고백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믿고,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라는 채널을 통해서 하나님도, 이웃도, 세계도 생각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의 무한하심을 믿고, 그 지혜가 항상 초월하신 것을 믿고 있습니다. 내가 아는 것 보다 더 높이 알고 내가 생각하는 가능성 보다 훨씬 더 높은 능력의 하나님이심을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믿으므로 선한 자에게 복을 주시고 약한 자에게 벌을 주심을 믿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그의 계심과 그가 그를 찾는 자에게 상 주시는 것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 우리는 분명히 이 말씀을 믿고 있습니다. 우리는 또한 하나님의 공의 즉, 올바르심을 믿습니다. 비록 내 사업이 잘 되든 안 되든, 내가 병들어 오늘 죽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옳습니다. 어느 순간에라도 하나님이 잘못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공의로우시고 항상 잘하고 계십니다. 이렇게 믿는 것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나를 기준 해서 하나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기준 해서 하나님의 공의를 믿는 것입니다. 내게 좋으면 하나님이 좋으시고, 내게 나쁘면 하나님도 나쁘시다 라는 말은 믿음의 말이 아닙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습니다. 십자가를 통한 분명하고 놀라운 사랑의 계시를 믿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주에 대한 사랑, 만민에 대한 사랑도 중요하지만 그런 것은 잘 모릅니다. 단지 내게 대한 사랑은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 하나를 개별적으로 사랑하고 계심을 알고 있습니까. 우리가 그가 계심을 믿고, 그가 나를 아심을 믿고, 그가 나와 함께 하심을 믿고, 나아가서 내가 그 분 안에 있음을 믿습니다. 이런 사랑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할 말이 없습니다. 사랑이란 깨닫고 보면 말로 표현 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생각하는 것만큼 말할 수 없고, 말하는 것만큼 쓸 수가 없습니다. 가르치는 것만큼 행하지 못합니다. 이런 약점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이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 엄청난 사랑 앞에 정말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다윗이 시편 8편 4절에서 "사람이 무엇이관데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데 저를 권고하시나이까"하고 감격하는 노래를 썼습니다. 무한하신 하나님께서 버러지 같은 나를 무엇 때문에 이렇게 돌보십니까 잘못한다고 책망하시고 돌아왔다고 영접해 주시는데 도대체 당신은 누구십니까 무엇이기에 저를 이렇게 사랑하시고 권고하십니까 다윗은 황송하고 감사에 벅차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이 일에 대하여 내가 무슨 말을 하리오"할 말이 없다는 것입니다. 집을 나갔던 탕자가 돌아올 때는 심정이 착잡했을 것입니다.
아버지 앞에 가서 무슨 말부터 해야 하고 또 아버지는 어떻게 나를 대해 줄 것인가 하고 근심하며 왔습니다. 그러나 돌아와 보니 여전히 아들로 사랑하시고 잔치까지 베푸니 할 말이 없었습니다. 자기를 보아서는 무엇인가 말을 해야겠지만 기뻐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니 아무 할 말이 없었습니다. 할 말을 잃었던 것입니다. 돌아왔기에 사랑하신 것이 아니고 벌써부터 사랑하셨고, 돌아왔기 때문에 용서하신 것이 아니라 벌써 용서하고 그를 기다리신 것입니다.

유명한 이야기로 성. 안토니오는 3년 동안 산에 가서 기도를 하는데 이렇게 했다고 합니다. "당신은 누구며 나는 무엇입니까 "즉 당신은 누구시기에 나를 사랑하시며 나 같은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당신은 누구며 나는 무엇이냐고 3년 동안 같은 기도를 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 하나님을 만난 자의 감격, 그 십자가의 사랑을 아는 사람의 마음은 할 말이 없을 뿐입니다.

바울은 자기 자신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를 죄인의 괴수라고도 했고 또는 만삭되어 태어나지 못한 자와 같다고 했습니다. 무엇인가 모자란다고 자기의 나약함과 근본적인 부족함을 꾸짖고 있습니다. 모든 사도보다 지극히 적은 자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7장 24절에서는 비참하게 자기를 보고 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죄의 노예가 된 존재로서 하나님의 뜻을 원하면서 행할 수가 없고 원치 않는 죄에 머물러 있는 자기 자신을 살피면서 불쌍한 사람아! 하고 탄식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이 자리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자기를 잘 아시고 구제 불능인 것을 아심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사랑하신다는 하나님의 큰사랑을 깨달았습니다. 내가 알지 못할 때부터 그는 나를 사랑하셨고, 죄인이었을 때도 사랑하셨고,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할 말이 없었던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가 나를 사랑하셨고 내가 그를 사랑하기 벌써 오래 전에 그는 나를 사랑하셨음을 진정으로 깨달은 것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난 이후였습니다. 그러나 깊이 깊이 생각하면 갈라디아 1장에서 말한 것 같이 어머니의 태로부터 (아주 의식이 없을 때) 나를 택정하시고 사랑하신 것이었습니다. 만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신 것을 깨달았을 때 정말 할 말이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있는 말씀은 로마서 주제입니다. 의롭다 하시는 사랑입니다. 죄인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의인으로 사랑하고, 탕자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아들로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소망 없는 자로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고 소망 있는 자로, 구제 불능한 자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자로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볼 때는 필요 없는 존재이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필요한 존재입니다. 내가 나를 볼 때에는 타락한 탕자이지만 그가 나를 볼 때에는 중요한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렇게 사랑하십니다. 사랑할 만한 자 사랑하시고 자격을 주어서 사랑하시고 창조적으로 사랑하십니다. 구체적이요, 현실적입니다. 이 의롭다 하시는 사랑을 받아들이고 이것을 믿는 것이 신앙 인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나에게 대해 절망하지 맙시다. 하나님이 절망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나에게 필요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가 나를 필요로 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제는 버려진 존재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가 나를 의롭다 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들까지 희생하시고 십자가에 죽게까지 하신 그 사랑이 단순히 낭만적이고 감상적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자기 자신을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의인으로 보아야 하고, 하나님의 자녀로 보아야 하고, 사랑 받는 자로 보아야 합니다. 비록 고통을 당한다 할지라도 버려진 자의 고통이 아니고 사랑하는 자의 고통으로 당하는 것입니다. 비록 실패했다고 하더라도 저주가 실패가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이루어지는 사건임을 알아야겠습니다. 어떤 형편의 시련이 오더라도 이 사랑을 부정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나 어떤 것이라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 어떤 환경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부정할 수 없느니라"고 대단히 중요한 말씀을 했습니다. 우리도 어떤 조건하에서도 내가 받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는 결코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렇게 믿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바른 신앙입니다. 의롭다 하셨기에 우리는 의인으로서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사도 바울은 또한 십자가 안에서 모든 것을 보았습니다.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고 내어 주신 이가 아들과 함께 어찌 모든 것을 은사로 주시지 않겠느냐 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들까지 주셨는데 무엇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이것을 믿는 것이 신앙입니다.

저는 가끔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남편은 영국 여왕의 남편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내를 사랑해서 좋은 선물을 주고 싶지만 세상의 좋은 것은 다 갖고 있는 여왕에게 무엇을 주겠습니까 줄 것이 없습니다. 사람에게 선물이란 것처럼 기분 좋은 것도 없습니다.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주는 자와 받는 자가 감격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런 것을 모르면 행복이 없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불행한 자는 사랑을 믿지 못하는 자입니다. 사랑을 못 받는 자도 답답하지만 사랑을 받으면서 못 느끼는 자는 더 비참합니다. 분명히 사랑하시는데 못 느끼는 자에게 어떻게 보여줘야 합니까 어떻게 증명해야 합니까 사랑처럼 전달하기 어려운 단어도 없습니다. 그러면서 최대의 언어도 이것입니다. 사랑의 최대의 증거는 십자가뿐입니다.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신 분이 무엇을 아낀다고 의심하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의 믿음은 어디 있습니까 주실 것이라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주셨다는 것입니다. 아들과 함께 벌써 다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근거는 바로 여기에 있고 우리의 고백은 모든 것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소원을 이루기 위하여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소원을 이루고 믿는 것입니다. 더 이상 우리에겐 소원이 없습니다. 다윗처럼 '여호와는 나의 목자 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다 받았으며 그 사랑으로 충분합니다. 원수 되었을 때도 나를 사랑하셨으니 하나님의 자녀로 된 지금 나를 사랑하시니 않겠습니까 시편 84편 11절에 "그는 정직히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라" 이미 다 주셨으므로 우리는 다 받았습니다. 십자가로 확증하셨음을 우리는 믿습니다. 그는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고 그뿐 아니라 부활하시고 또 하나님 우편에 계시고 오늘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고 계십니다. 여기에 무슨 소원이 더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엄청난 은혜가 넘칠 뿐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5:24에서 그런고로 정과 욕심까지 십자가에 못박았다고 했습니다. 우리도 모든 나의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까 죄와 환난과 사망과 곤고와 기근이 이제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벌써 모든 것을 받았기에 이제 더 할 말이 없습니다. 만약 있다면 오직 감사와 찬송과, 헌신이 있을 뿐입니다. 이제 우리는 사랑 안에서 넉넉히 이길 뿐입니다. 생명 적인 활력이 있는 이 사랑 안에서 용기를 가지고 두려움이 없이 항상 새로운 생명력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큰사랑 안에서 넉넉히 이기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성도들이 세상을 살면서 피곤해 지고 답답해지는 것은 세상의 일들 때문입니다. 하나님 때문에 답답하고 피곤한 일을 없습니다. 사랑은 사람을 답답하고 피곤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에 그런 사랑이 있다면 그것은 진실한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에게는 넉넉한 위로와 만족과 감사할 조건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며, 바로 행복 그 자체가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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