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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곤경을 돌이키시고 (욥 42: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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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는 크게 세 부분으로 구분됩니다.
첫째 부분은 욥이 당한 참상에 관한 것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집이 무너져 10남매가 죽고 소와 양떼들은 약탈당했습니다. 아내는 가출했고 자신은 불치의 병에 걸렸습니다. 이 정도에서도 살아 있다는 것이 기적입니다.

둘째 부분은 친구들의 위문에 관한 것입니다.
평소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이 욥의 소식을 듣고 찾아 왔습니다. 그러나 그 친구들은 욥에게 위로가 되지 못했습니다. 이유는 욥이 겪고 있는 고통을 인과 응보론적인 차원에서 이해하고 해석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까닭 없이 이런 고통이 있을 수 있겠느냐, 잘못한 것 없이 이런 실패가 있을 수 있겠느냐며 욥에게 충고했고 회개할 것을 강권했습니다.

우린 여기서 잠시 고통 당하는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에 대하여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① 상처를 건드려선 안됩니다.
② 정죄의 수단으로 사용해선 안됩니다.
③ 자신의 의를 과시하는 기회로 삼아선 안됩니다.
④ 진실한 마음으로 위로해야 합니다.
⑤ 그 사람의 입장에 서서 말해야 합니다.
⑥ 생각 없이 불쑥불쑥 말해선 안됩니다.

셋째 부분은 원상 회복에 관한 것입니다.
오늘은 욥기의 셋째 부분에 해당되는 원상 회복과 받은 축복에 대하여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떻게 원상에 회복되었으며 그 원인은 무엇이었는가를 본문 속에서 찾겠습니다.

1. 하나님께서 욥을 기쁘게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욥기 42:9 끝을 보면 “여호와께서 욥을 기쁘게 받으셨더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기쁘게 받으셨더라」는 것은 제사 용어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기쁘게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노아나 아브라함이나 이삭의 제물을 기쁘게 받으신 것처럼 욥을 기쁘게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경우를 보면 제아무리 장엄하고 값비싼 제물을 받혀 제사를 드린다고 해도 하나님 마음에 들지 않는 제사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1에서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했습니다.

제물보다 더 중요한 것은 누가 드리느냐 입니다. 같은 제물이라도 드리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제사를 받으시기도 했고, 거절하기도 하셨습니다.

욥은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 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주경가 베이커는 “하나님은 먼저 그 사람을 받으신 후에 그 사람의 기도나 봉사를 받으신다”고 했습니다. 베이커의 말대로 라면 하나님은 욥을 받으신 것입니다. 욥기 42:8을 보면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인즉 내가 그를 기쁘게 받으리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왜 욥을 받으셨을까요.

1. 그의 회개 때문입니다.
42:1 이하를 보면 그 동안 자신이 어리석은 말과 행동으로 하나님의 뜻을 가리웠던 일들을 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6절을 보면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사람은 용납하십니다.
사람이 당하는 고통 가운데는 하나님의 연단도 있고 시련과 핍박도 있습니다. 그러나 죄로 인한 고통이 가장 많습니다. 그리고 고통을 당한 그 당시에는 그것이 연단인지 시련인지 죄 값인지 구별이 잘 안됩니다. 그러므로 어려운 일이 있거든 무조건 잘못했다고 회개할 일입니다.
지금 우리들이 당하는 국가적인 어려움도 이런 차원에서 보고 회개를 먼저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겸손한 회개가 아직은 부족한 것 같습니다. 마음으로 회개하고 그 회개하는 것이 생활에 나타나야 합니다.
텔레비전에서는 수십만 달라의 중개료를 지불하고 권투 중개를 하고 천만 원이 넘는 밍크 코트를 입고 근검 절약하자는 정신 빠지고 분위기 파악을 못하는 아낙네들이 띠를 두르고 명동을 활개치면서 여성 운동의 지도자로 자처하는 꼴을 보면서 아직도 우리는 혼이 덜 났다고 생각합니다. 아직도 국민을 속이고 나라는 망친 자들이 각성을 하지 않은 체 다른 사람에게 책임 전가를 하고 있는 한 우리 국민들은 한참 고생을 더 해야 할 것입니다.

비록 둘째 아들처럼 하나님을 떠났던 사람이라도 회개하고 돌아오면 용납하시고 용서하시는 것입니다.

2. 그의 정당성 때문입니다.
42:7을 보면 하나님은 욥의 친구들에게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정당하지 못하다”고 했고 8절 끝에서도 “너희가 나를 가리켜 한 말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정당하지 못함이라”고 했습니다.
욥기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친구들과 욥 사이에 벌어졌던 논쟁은 욥이 밀리는 쪽이었습니다. 친구들의 충고는 옳았고 정당했습니다. 그리고 신앙적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내리신 결론은 그 반대였습니다. 욥이 정당하다는 것입니다.
고전 4:3을 보면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고 했습니다.
누가 옳고 그른가 하는 최후 판단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누가 잘 믿느냐 못 믿느냐 하는 것도 하나님이 결정하십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정당성을 인정해 주시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어떤 행동이 하나님께 정당한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는가는 별반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정당성을 정의라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정의는 진실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외하는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정당한 사람만이 정정당당하여 힘이 있고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정당한 사람은 죄가 없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한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국민들은 나라를 파산시킨 사람들에 대하여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지금 한 사람도 잘못을 시인하거나 사과하지 않고 있어서 더욱 우리들을 분개하게 하고 참담하게 합니다. 그래서 참다 못한 검찰에서 조사를 하고 감사원에서 감사를 해서 처벌할 것이라고 합니다. 참으로 한심스럽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3. 하나님의 종이었기 때문입니다.
42:7 끝을 보면 “내 종 욥”이라고 했고 42:8 첫머리와 끝에서도 역시 두번씩이나 “내 종 욥”이라고 했습니다.
종은 주인의 소유이며 주인을 위해 일하는 존재입니다.
욥은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충성된 종은 주인의 칭찬과 상급을 받는 것입니다. 욥은 하나님의 종이었기 때문에 그를 기쁘게 받으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이 기쁘게 받으시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종으로 처신을 바르게 합시다. 하나님의 종은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대로만 사는 것입니다. 그 명령만이 최고의 명령이 됩니다.

4. 벗들을 위해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10절을 보면 “욥이 그 벗들을 위하여 빌매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라고 했습니다.
욥은 자신이 당한 곤경을 풀어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벗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욥의 중보 기도를 들으시고 욥의 곤경을 돌이켜 주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남을 위해 기도했더니 내 문제가 해결됐다는 것입니다.
욥이 드렸던 기도 내용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만 미루어 짐작컨대 친구들의 공격에 대한 서운한 감정과 적개심을 먼저 풀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실수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2. 그런데 축복은 먼저 욥에게 임했습니다.
이제 우리도 위정자들이나 기업 하는 사람들을 미워하고 증오할 것이 아니라 위해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들이 잘못한 일들이 너무 많습니다. 자기 돈은 얼마 되지 않는데 자기 자본의 수 십배 또는 수 백배의 국민 세금과 은행돈과 나라 돈을 가지고 착복을 하고 재산을 축적했습니다. 그들에게 콩고물을 얻어먹은 자들이 그들의 배후를 보살펴 주어 공존 공생 관계를 이루어 부귀 영화를 누렸습니다. 그리고 나라를 망쳤습니다.
그런 자들은 죽어도 좋고 벌을 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최선의 길은 아닙니다. 모두 용서하고 새로운 질서를 바로 잡도록 온 국민이 감정을 삭힐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국민들이 살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을 다 용서하셨습니다.
몇 년 전에 그날이 9월 13일 워싱턴에서는 수 백년 동안 적대 관계에 있었던 이스라엘과 PLO간의 평화 협정이 체결 되였습니다. 그들은 여호수아 시대부터 지금까지 원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 평화 협정은 그 동안 피로 얼룩졌던 두 나라 역사에 종지부를 찍게 한 역사적 사건으로 전세계가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뉴스위크지의 해설에 의하면 이 협정이야 말로 전문(前文)에 불과하며 해결해야 될 난제는 산적해 있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스라엘대로 자기네가 안고 있는 정치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PLO는 PLO대로 더 이상 전쟁이나 긴장 관계를 유지하거나 지탱해 나갈 수 없는 정치 경제 국제적인 이유 때문에 협상에 조인을 했습니다. 그러나 언제 어떻게 다시 문제가 폭발할 것인가 하는 것은 더 두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 국제 정치 전문가들의 견해입니다. 그렇더라도 이제 저들은 더 이상 피를 흘릴 필요도 없고 군비 증강에 열을 올일 필요도 없게 되었습니다. 서로 복을 받은 셈입니다.

욥과 친구들의 경우는 하나님께서 직접 중재에 나섰습니다. 욥의 친구들이 욥을 찾아가서 할 일도 하나님이 지시해 주셨고 욥이 취할 태도 역시 하나님이 지시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과 PLO의 중재자는 주로 미국이었습니다만 욥과 그의 친구들은 하나님이 중재자가 되셨습니다. 욥과 그의 친구들 사이를 중재하신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명령하십니다. “서로 사랑하라, 서로 용서하라”고.

3. 결과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1. 고통의 세월이 끝났습니다.
10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셨다”고 했습니다.
주경가 베이커는 “사탄에 의해 시작된 욥의 곤경은 하나님의 자비로 끝났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겪고 있는 모든 곤경은 크게 두 가지 잘못된 관계에서 비롯됩니다. 하나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며 다른 하나는 사람과의 관계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욥 역시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로 정립하고 친구들과의 원한을 풀고 바른 관계를 맺었을 때 곤경이 해결되었습니다.

2. 소유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1절 끝을 보면 그전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12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욥의 모년에 복을 주사 처음 복보다 더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잃었던 아들 딸 10남매도 다시 낳게 되었습니다.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섭섭한 일입니다. 그러나 다시 찾은 기쁨은 비길 수 없이 기쁜 일입니다. 그냥 계속 가지고 있던 때의 기쁨보다도 잃어버린 것을 찾는 기쁨의 더 큽니다.
그런데 욥은 갑절로 받았습니다. 그것은 고통을 인내하고 견뎌 낸 신앙의 장부에게 주신 큰 축복이었습니다.

3. 떠났던 사람들이 돌아왔습니다.
욥을 저주하며 자살을 강요했던 그의 아내도 그리고 잃었던 10남매도 다시 찾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형제 자매 친구들이 한아름씩 선물을 꾸려 가지고 찾아왔습니다. 욥의 집에선 한바탕 잔치가 벌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동안 겪었던 욥의 고통을 서로 위로하는 정겨운 장면이 벌어졌습니다.
저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교회 공동체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바람직한 교회의 모습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바람직한 교회의 모습이란
○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 서로의 감정을 풀고 용서하는 것입니다.
○ 서로 함께 기쁨과 슬픔을 나누고 위로하는 것입니다.
○ 서로 돕고 격려하는 것입니다.

제임스 피셔의 말이 생각납니다. “남의 흉을 볼 경우 흉을 보는 사람의 가치가 더 떨어진다. 어떤 사람을 놀리고 싶은 생각이 들 때는 자신이 놀림을 당할 경우를 생각하라. 남에게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어라”고 말했습니다.
누군가가 내 곁을 떠났다고 가정합시다. 왜 떠났는가 못된 놈이라고 역정을 내기 전에 왜 떠나게 했는가를 생각하는 것이 현명한 태도입니다.

우리는 본문 속에서 다음과 같은 교훈을 찾게 됩니다.
①. 그 사건 자체가 문제인 것이 아니라 내가 문제라는 것입니다.
욥의 문제는 고통, 실패, 좌절, 친구의 공격이 문제였던 것이 아니라 욥 자신이 문제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고통이 문제인 것이 아니라, 내가 문제이며, 당신들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문제라는 것입니다. 나를 찾았을 때 문제가 풀렸습니다.
②. 그 문제가 문제인 것이 아니라 내 믿음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욥의 문제는 욥기 42장에서 언급된 대로 하나님 앞에 자신의 신앙을 올바로 고백하면서부터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만일 어떤 문제가 아직도 풀리지 않고 있다면 그 문제를 풀게 될 나 자신의 믿음에 문제가 있음을 깨닫고 그 믿음을 점검해야 합니다.
③. 하나님 앞에 바로서야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입니다.
즉 신앙이 바로서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욥을 받으시도록 합당하게 섰을 때 문제가 해결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저마다 특이한 문제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문제를 풀기 위해 노력하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문제이며 내 믿음이 문제이며 하나님 앞에 바로서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곤경을 돌이키시고 문제를 해결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주여 나의 곤경을 돌이켜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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