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예수님과 나뿐 (막 09:1-8)

첨부 1


지금은 고난의 시간입니다. 임마누엘 칸트는 말하기를 “아무리 어두운 밤이라도 자세히 보면 별 하나는 보인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정말 암담한 세월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어떤 희망이 있겠다든지, 차차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직 우리들의 기대의 믿음밖에 없습니다. 현실은 정말 답답합니다. 모두 고통을 하고 삽니다.

통계 청이 지난해 사망자의 신고를 분석 발표한 바에 의하면 암이 세계 1위. 뇌혈관 질환이 2위. 각종 사고가 3위였다 합니다. 이같은 분석은 우리 사회의 측면과 우리들의 삶의 질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암은 우선 간암이 1위였으며 90년에는 10만명 가운데 24.1명이 였고 93년도에는 13.1명이 였습니다. 그러나 간암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간병 증은 세계 4위이며, 심장 질환 대장암 등 일은 바 선진국형 질환이 급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 병들은 모두 흡연, 스트레스, 공해, 육류 과다 섭취가 원인이라 합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우리 사회가 스트레스 덩어리라는 증거입니다. 골치 아픈 일이 너무 많아서 나쁜 줄을 알면서 술을 먹게 되고 쉴 틈을 얻지 못해 우리들의 인성이 날마다 황폐해 지고 있는 것입니다. 경제는 선진국을 행하여 나가는 데 우리들의 정신 상태는 후진성을 면치 못해서 결핵이나 위암 같은 후진 성적 질병도 2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성수 대교나 가스 폭팔 같은 사고는 우리들의 의식 수준이나 질서, 안전, 수준이 후진성을 면하지 못하고 있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지금 스트레스가 많은 사회, 사고가 많되 인재가 가장 많은 나라, 살기 힘든 나라, 무질서한 나라라는 오명을 벗지 못하고 있습니다.

새가 나무에서 지저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새가 노래를 한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새가 운다고 합니다. 같은 소리에 느낌이 다른 것은 그 소리를 듣는 사람의 마음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고통은 우리들의 이상과 현실에 너무 많은 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흔히 듣기를 “마음이 편하려면 먼저 욕심을 버리라” 또는 “마음을 비워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도 우리들의 마음을 완전히 편안하게 하지 못합니다. 마음을 비우는데서 오는 좌절과 고통도 있는 것이며 실패 감도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성과 현실의 차이에서 오는 고통, 이 문제를 우리가 해결하지 못하면 우리들은 평생 고생을 하며 삽니다. 사회적인 현실도, 개인적인 현실도, 그리고 교회 적인 현실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 이상과 현실의 높은 언제나 우리들을 따라 다닙니다. 우리들이 아무리 우리들 자신의 자세를 나추어도 그것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어느 날 주님은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시고 산으로 올라가십니다. 그리고 그 몸이 변형되십니다. 거기다 이미 세상을 떠난 모세와 엘리야 선지자께서 언제 오셨는지 그 자리에서 예수님과 대화를 하십니다. 예수님은 그 옷이 희다 못해 광채를 발하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너무나 두렵고 놀랍고 행복해서 “여기가 좋습니다. 이대로가 좋습니다. 이대로 오래 오래 살고 싶습니다. 이대로 모든 것이 끝나도 좋습니다. 세상에 내려가고 싶지 않습니다. 초막에서 살아도 좋습니다. 주님과 선생님들을 모시고 산다면 어떤 형편도 좋습니다.”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그 생각을 예수님에게 말씀 드립니다.
사도는 아마 그곳이 천국 인양 생각되었을 것입니다. 상당히 높은 산이 였기 때문에 산 정상에는 언제나 눈이 쌓여 있었지만 추운 줄도 모릅니다. 지금이 좋다고 말합니다. 그곳이 좋다고 말합니다. 무아의 지경입니다. 꿈속에 사는 것 같습니다. 괴로운 현실이 없습니다. 완성된 세상입니다.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여기가 좋습니다. 여기서 살지요.” 우리는 괴로움이 많은 세상에서 베드로 사도의 마음을 이해할 것 같습니다.
오스트리아의 심리학자 ‘프로이드’의 말에 의하면 사람이 의식을 가지고 한 말은 대체적으로 거짓 말이고, 정신없이 한 말이 참 말이라고 했습니다. 그의 말대로 라면 베드로는 정말 참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첨이 아니라 그의 인간 깊은 곳에서 저절로 울어 나오는 참 말을 하는 것입니다. 평소에 늘 생각하고 있던 삶의 현실을 이제사 이 산에서 발견한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산 사람이 되어서 산이 좋아 그런 말을 했을까요 겨울 사람이어서 눈이 좋아 그런 말을 했을까요 출세를 했기 때문입니까 좋은 집이 있어서 입니까 천박한 말로 먹을 것이 풍부하고 아름다운 아가씨가 있어서 입니까 무엇을 많이 가졌기 때문입니까 그곳에 금광이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아닙니다.

그곳에 예수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어떤 예수님이셨습니까 변화되신 예수님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힘드시고 어려운 구속 자의 길을 가셨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제자들은 그런 예수님이 늘 측은했습니다. 욕을 당해도 욕을 하시기 않으시고 핍박을 당하셔도 픽박을 하시지 않으십니다. 사랑하는 사람도 사랑하시고, 미워하는 사람도 사랑하시고 사랑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사랑하시고, 주님의 사랑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도 사랑하십니다. 그런 주님을 그들을 늘 보아 왔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변화되신 예수님, 영광 속에 하나님의 본체 적인 모습을 그들은 본 것입니다. 그들이 이런 주님의 모습을 본 순간 기쁨이 충만해진 것입니다. 종합적인 인식 속에 주님이 계신 천국에 왔음을 그들은 순간 깨달은 것입니다. 철학이, 정치가, 경제가, 삶의 질적 향상이, 세상의 문제가, 아픔이-아무 것도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주님이 계시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천국입니다. 지금 그들은 그런 세상을 본 것입니다.

1. 제자들은 예수님의 참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예수님의 변형! 그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변형이라는 말 (transfiguration)이라는 말은 모형, 모습이 변화된 것을 말합니다. 헬라어의 원문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이때의 모습은 엄밀히 말하자면 변화가 아니고 원래의 모습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본래 모습은 하나님이십니다. 영화로우시고 완전하신 하나님이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초라하신 죄인으로 세상에 오셔서 갖은 고난을 당하신 것뿐입니다. 제자들은 지금 주님의 참 모습을 대하게 된 것입니다. ‘내가 선생님으로, 구세주로 모시고 사는 이 분이 바로 이런 분이시구나’ 할 때 베드로는 복받치는 감격을 금할 수 없습니다. 행복해 집니다. 기쁩니다. 그래서 “여기가 좋습니다. 여기서 사시지요”라고 말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만일 우리도 사도들처럼 이런 예수님을 만난다면 이런 말을 했을 것입니다. 이대로 살아 좋지만, 죽어도 좋을 것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만나고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요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우가가 그 분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굉장한 고백입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고백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실체를 보아야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사도들은 주님을 증거할 때 우리가 보고 듣고 만진 주님을 증거한다고도 했습니다. 우리도 주님을 고난 당하신 주님으로만 보지 말고 영광되신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베드로의 기쁨과 은혜를 받을 것입니다.

2. 이 사건은 나약한 인간을 사랑하시는 주님을 증거합니다.
이 사건은 마, 막, 눅 복음에 다 기록이 되여 있는데 특히 누가복음 9:32에 보면 세 제자가 졸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곤히 졸다가 눈을 떠보니 예수님에게 놀라운 광경이 생겨 있더라는 말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들에게 더 큰 은혜가 됩니다. 사람들은 대게 예수님 비슷한 경지에 달해야 예수님의 영광된 모습을 본다고 생각들을 합니다. 기도도 많이 하고 선행도 많이 해서 다른 사람보다 무엇이든지 월등해져야 예수님을 볼 수 있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 제자들은 그렇게 월등하지 못한 상태에서 예수님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이 말씀이 다분히 휴머니즘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같은 사람들도 예수님을 만나 큰 은혜를 받을 수 있다는 소망을 줍니다. 어느 성도는 말하기를 “언젠가 천국에서 영광스러웠던 시련에 대해 이야기할 생각을 하니 지금 당하는 고난이 즐거움이 됩니다.”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주님의 품안에, 주님의 영광에 들어 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들의 참 행복입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 1서 1장 1절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요일1: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이것은 이 세상의 모든 철학과 지식을 초월한 말씀입니다. 주님을 만나고, 이야기하고 힘께 살고 하는 것은 지식이 아닙니다. 경험입니다. 이 경험이 있고 나서야 복음을 올바르게 전할 수 있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3. 이 사건은 우리 자신을 초월한 천국의 행복을 알게 하십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본 후 자기 자신을 잃어 버렸습니다. 과연 내가 이런 영광스러운 자리에, 감히 하나님의 존전에 있을 수 있는 사람인가를 망각해 버린 것입니다. 이 영광된 순간에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면 어떻게 그 자리에 있을 수 있을 것입니까 그 추한 모습, 졸기나 하는 사람들, 다투기 좋아하는 인간들의 추한 모습이 어떻게 하나님의 존전에 존재할 수 있을 것입니까 그런데 그는 그런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리고 오직 주님을 바라보고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고 말합니다.
베드로는 현실에 안주하여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지금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에 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 사는 사람입니다. 그에게는 처와 자식이 있고 산아래 고난이 준비되어 있지만 지금은 그런 모든 것을 초월해 잇습니다. 산 아래에서는 다른 제자들이 귀신들린 아들 때문에 온 아비로 인해 곤욕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그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과 자기만 있을 뿐입니다.
또 재미있는 일이 있습니다. 주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위해 초막 셋을 짖겠다고 합니다. 초막을 짖자면 자기들이 살 초막도 지어야 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주님께서 초막에 거할 수 있으시겠습니까 그런데 베드로는 자기들이 살 걱정은 없습니다. 주님만 가치가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눈물이 날 정도로 그 정성이 가상합니다.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계획도 없습니다. 오직 주님을 잘 모시고 주님과 함께 하신 어르신들만 잘 모시면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눅9:31)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 쌔”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주님과 모세와 엘리야 선지자는 영광 중에 십자가를 의논하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초 셋을 짖겠다고 합니다. 마치 큰 전쟁을 치르려 출전하는 아버지에게 아이가 종이로 집을 지어 놓고 같이 살자고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것이 아버지를 섭섭하게 하는 일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어린 아들이 아버지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소박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표현입니다. 주님께서도 베드로의 그 일을 그렇게 보십니다.
변화 산에 있는 베드로,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잃어도 상관이 없습니다. 세상에 있는 것 다 가지라고 해도 안 가질 판입니다. 오직 예수님만 계시면 좋습니다. 그런 베드로를 예수님께서는 사랑하십니다. 하나님과 누추한 인간의 사랑은 하나님의 영광을 넘고 인간의 죄악을 넘어 하나님과 인간이 하나 되는 영광을 만듭니다. 이것을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인간이라 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 그 사람이 누구입니까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요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라 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와 함께 하시는 우리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4. 주님의 영광은 고난을 전재로 한 영광입니다.
본문에 중요한 말씀은 주님의 변형 사건이 십자가를 앞에 두고 일어난 사건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베드로와 제자들이 참석하였다는 점입니다. 왜 십자가를 앞에 두시고 이렇게 변형을 하셨을까요 주님은 이 사건이 있기 6일 전에:여기 있는 사람들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을 볼 사람도 있으리라“고 말씀을 하셨는데 지금 제자들이 이 광경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건은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이 주님 십자가를 앞에 두고 일어났다는 것에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의 일이 너무 힘들고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인 것입니다. 어떤 고통, 어떤 좁은 길, 어떤 가시밭 길, 어떤 십자가의 길도 잘 가시므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신 구세주로서의 사명을 감당하기에 필요한 힘과 능력을 가지기 위하신 변형이셨습니다.
여기에 우리들이 받아야 할 은혜가 또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베드로와 같은 일을 할 수 있으려면 그가 받은 고난을 당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고난을 잘 감당할 수 있어야 할 것이며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베드로와 같은 변화 산의 체험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베드로와 같은 체험을 시키시지 않는 것은 우리들에게 베드로가 당한 전도자의 고난이 필요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 주님이 죽은 것을 보아야 하는 큰 사건의 큰 고통이 우리들에게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한번으로 족한 지독한 고통이요 어려움이 였습니다. 기래서 우리는 그 고통이 없이 예수님과 함께 하는 은혜 속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병중에 있는 어떤 환자가 기도를 했습니다. “주님, 저는 출세를 위해 당신에게 건강과 지혜를 구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제게 순종이 제일이라고 나약함을 주셨습니다. 위대한 일을 해 보고 싶어 건강과 물질을 구했으나 주님은 더욱 큰 믿음과 선을 베푸시기 위해 병을 주셨습니다. 주님, 저는 행복하게 살고 싶었고 부귀 영화를 구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제게 주님을 본 받아 살며 지혜로운 사람이 되라고 가난을 주셨습니다. 저는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싶어 영광을 구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비참하게 사신 주님의 낮아지심을 알게 하시기 위해 멸시를 당하게 하시고 오직 주님만을 생각하고 살도록 사람들에게 천대를 받게 하셨습니다.. 홀로 있기가 외로워 우정을 구했으나, 당신은 세상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라고 넓은 마음을 주셨습니다. 저는 아버지께 청한 것들을 한가지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내게 바라시는 것을 모두 저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바라는 것들 보다 훨씬 더 가치가 있었다는 믿음과 깨달음을 주셨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것이 진정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기도가 되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의 고단한 길에서 외로워하고 힘들어하고 갈 길에 염려가 많은 것은 예수님, 그것도 변화하신 예수님, 다시 말해서 하나님 자신을 바로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올바르게 잘 믿읍시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음성이 있었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희 말을 들으라” 이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임할 것입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