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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의 열매 (빌 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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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에는 ‘종말’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에베소서의 종말에서는 영적인 싸움을 잘 싸워 승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빌립보서에서는 기뻐하라고 하십니다. 이 두 군데 말씀을 합해 보면 “성령 충만하여 잘 싸워 승리하고 기뻐하라”는 말씀이 될 것입니다. 또는 기쁜 마음을 가지고 성령 충만하여 승리하라“라는 말씀도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봉독한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종말로 나의 형제들아 “주안에서 기뻐하라!” 그리고 계속되어지는 빌4:4에서는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나니 기뻐하라”고 말합니다.

우리 기독교인의 본분 중에서 중요한 것 중 하나가 기뻐하는 것임을 우리들에게 교훈 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수많은 기독교인들의 모습을 볼 때 이 기뻐하라는 말씀대로 살아가는 성도들이 얼마나 되는지 우리는 안타까운 모습으로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을 두고 마르크스 러너라고 하는 사람은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 많은 자유를 누리고, 행동의 제재를 받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놀라운 충격은 우리가 하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곳, 생각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하면서도 기쁨이 없다는 사실이다"-
올바른 관찰에 따른 올바른 표현입니다.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많은 문명과 문화의 혜택을 받으면서 살아갑니다.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많은 신앙의 자유를 누리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놀라운 축복 속에 사는 우리들의 모습 속에서 기쁨이 점점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 데로 기쁨의 삶을 누리지 못하고 기독교인들은 기독교인들 나름 데로 기쁨의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 이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만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이유는 여러 가지 각도에서 생각해 볼 수 있지만 빌 웨버라는 목사님이 쓴 부정적인 세상에서도 긍정적으로 기쁨으로 사는 방법이라는 책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거부감, 분노, 원한, 스트레스, 부정적인 자아상, 좌절, 평범에만 머무르는 것, 고립감, 낙담, 외로움 등이 우리들로부터 기쁨을 빼앗아 간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이렇게 우리들이 기쁨을 되찾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그것은 우리들로부터 기쁨을 빼앗아 간 그 부정적인 것을 극복하면 되는 것입니다. 거부감을 극복하고, 분노를 극복하고, 스트레스를 극복하고 외로움을 극복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기쁨을 앗아가는 부정적인 것을 극복하는 방법은 어떤 것입니까
크게 두 가지의 종류가 있는데 그 첫째는 세상 사람들이 극복하는 방법이요, 그 둘째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극복하는 방법입니다.

첫째로 세상 사람들이 극복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대부분의 경우 술, 마약 등을 사용함으로 술집이나 디스코텍이나 혹은 야외에서 저들의 그 부정적인 것들을 극복하려고 시도를 합니다. 그리고 더 건전하게는 70년대에 있었던 스마일 운동과 같은 사회 운동으로 명랑한 사회 속에서 기쁨을 되찾으려고 시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과연 진정한 기쁨이 세상 사람들에게 주어졌습니까 그렇지가 못했습니다. 그런 세상적인 기쁨은 일시적인 것이었습니다. 오래가지를 못했습니다. 스마일 운동을 한답시고 가슴에다가 배지를 달고 모든 매스컴을 총 동원해서 전 국민적인 운동을 펼쳤지만 그게 과연 얼마나 갔습니까 지금은 아주 오래 전에 있었던 추억의 한 장면으로 지나가 버리지 않았습니까

세상이 주는 기쁨은 일시적인 것이요 영원한 것이 되지 못합니다. 세상이 주는 기쁨! 그 기쁨은 사라짐과 동시에 그 기쁨이 변하여 오히려 근심과 걱정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세상적인 기쁨은 여건과 환경의 지배를 받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일시적인 기쁨이 아니라 영원한 기쁨은 어떤 것입니까 그 영원한 기쁨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적인 부정적인 것들을 극복하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부정적인 요소들을 극복하는 방법은 오늘 우리가 봉독한 빌립보서 말씀 속에서 계속해서 밝혀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안에서 기뻐하는 것입니다.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주안에서 이 말은 하나님의 사람 사도 바울의 전용 어입니다. 주안에서,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 말은 그의 서신서 가운데 132회나 나옵니다. 주안에서,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 말은 너무나도 신비로운 말입니다. 바로 이 말이 있기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적인 그런 부정적인 요소를 극복하고 변하지도 않는 절대적인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 주 안에서 가지는 기쁨이 있습니다.

1. 구원 얻은 기쁨입니다.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진 기쁨입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막혔던 죄의 담이 허물어졌을 때에, 내 죄가 용서받았다는 확신이 나에게 생겼을 때 기쁨이 넘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기쁨은 절대적인 기쁨이 되어서 우리가 평소에 가지고 잇던 모든 고민 근심거리들을 이겨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 얼마나 살아가기가 힘이 듭니까 모든 부닥치는 대소간에 문제들이 다 우리를 괴롭게 하는 것들이라고 해도 지나친 표현은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우리의 삶속에서 한가지 큰 기쁜 일이 생겼을 때 예컨대 아들이 고시에 합격을 했다든지 자녀가 최고학부를 졸업을 했다든지 혹은 결혼을 했다든지 하면 그 큰 기쁨으로 인해 모든 괴롭고 근심스러웠던 일들이 다 묻히고 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생의 삶 중에서 가장 기쁜 일이 무엇입니까 죄로 인해 죽었던 우리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그 크신 십자가의 사랑으로 다시 살게 된 것입니다. 지옥 백성이 천국 백성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을 소유한 우리는 부정적인 세상의 것을 물리치고 이겨낼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기독교인이 가지고 있는 큰 무기인 기쁨의 근본입니다. 그러므로 주안에서 기뻐할 때 건강합니다. 창조의 힘이 생깁니다. 능력이 생깁니다. 생의 진정한 가치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안에서 기뻐하지 못할 때 그렇지가 못합니다. 돈을 벌어도 오히려 그 돈 때문에 걱정이 앞섭니다. 출세를 해도 그 출세한 자리 때문에 불안합니다. 사람을 사귀어도 그 사람 때문에 더 고독하고 외롭게 됩니다. 오직 주안에서 기뻐할 때 절대적이고도 영원한 기쁨을 간직하게 됩니다.

2. 주안에서 가지는 기쁨은 주님과 동행하는 기쁨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비록 죄악 된 세상 속에서 도저히 기뻐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사는 우리들이지만 살아 계신 하나님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고 조성하시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나와 동행하심을 믿는 가운데서 체험하는 가운데서 생기는 기쁨입니다. 이런 사실을 알고 체험한 사도 바울은 로마서 8:35-39에서 진정한 그의 기쁨을 말하고 있습니다. “35-39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나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 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굳게 믿고 악한 세상 속에서도 기뻐할 수 없는 세상 속에서도 참된 기쁨을 간직한 사도 바울의 모습인 것입니다.

3. 주안에서 가지는 기쁨은 약속된 미래가 있는 기쁨입니다.
영원한 소망, 미래지향적인 희망, 종말론적인 약속 쉽게 말하자면 천국이 바로 우리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죽고 나서 하나님의 나라에 간다는 것 확실하게 믿는다면 그 무엇이 걱정이 되겠습니까 걱정이 있다면 천당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하고 이게 문제가 아닙니까 걱정이 있다면 천당에 내가 들어가지 못할 것 같아서 그게 문제가 아닙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가 천당에 분명히 들어간다는 어떤 약속 증서를 준다고 한다면 우리가 이 땅위에 살아가면서 그 무엇이 걱정이 되겠습니까 세상의 걱정 근심 고통 어려움 별로 문제될 것이 없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그렇다면 "주 예수를 믿으라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바로 이 말씀이 여러분의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이 말씀 역시 여러분의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스데반은 바로 이런 약속된 미래가 있었기에 그는 돌에 맞아서 순교를 하는 그 절박한 상황 속에서도 성령이 충만해서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고 그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인성을 가지신 우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얼마나 많은 고통 가운데에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양쪽 옆에서 같이 십자가에 달린 한 강도와 더불어서 대화를 나누시면서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나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을 하셨을 때 그 피가 쏟아지는 고통 속에서도 우리 예수님은 물론이고 그 말을 들은 미래를 보장받은 그 강도의 마음은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바로 이런 기쁨이 주안에서의 진정한 영원히 변하지 않는 절대적인 기쁨인 것입니다. 생의 마지막 한 순간 그 누구도 그 사람에 대해 기대를 하지 않는 그 절박한 순간에도 하나님께서는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라고 하면서 주 예수를 믿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기쁨을 주셨던 것입니다.

유명한 바이얼리스트인 파가니니라는 사람이 '마니'를 연주했을 때의 일화입니다. 아인슈타인은 이 연주를 듣고서 하나님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파가니니가 바이어린을 연주 할 때 그만 줄이 하나 끊어졌습니다. 그러자 파가니니는 나머지 줄을 가지고 연주를 했는데 또 하나의 줄이 끊어졌습니다. 파가니니는 당황하지 않고 그 나머지 줄을 가지고 연주를 계속했는데 또 한 줄이 끊어져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외줄 하나로 마지막까지 훌륭한 연주를 했습니다. 그래서 '파가니니의 외줄 바이얼린'이라는 말이 생겨났다고 합니다.
옳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있는 모든 줄이 끊어지고 외줄 하나만 남더라도 우리가 주안에서 믿음으로 살 때 하나님께서는 그 외줄과 같은 우리 인생을 연주하십니다.
그래서 그 가운데서도 기쁨을 누릴 수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우리가 세상 속에서 특히 기뻐할 수 없는 세상 속에서 우리가 살고 있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부정적이고도 세상적인 요소들을 주안에서 극복하고 그로 인해 우리 안에서 진정한 기쁨을 누릴 수 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런 말씀을 듣는 우리 성도 님들 중에서는 이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은 쉽게 말하지만 우리가 도저히 실천할 수 없는 것이다 라고 단정지어 버리는 분들이 없잖아 있을 것입니다.
이런 주안에서의 기쁨은 그 옛날 초대 교회 당시에 수많은 성도들이 사자 앞에서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도 체험했던 기쁨임을 우리는 기억해야만 됩니다. 그리고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에게도 이 기쁨이 재현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어느 사모님의 이야기를 이 기쁨의 삶과 연관시켜서 여러분들에게 잠시 소개하고자 합니다. 그 사모님은 결혼 할 당시에는 전혀 사모가 된다는 생각도 없이 준비도 없이 결혼을 했는데 살다 보니까 남편이 다시 신학을 하고 목사가 되어 어쩔 수 없이 사모가 되었습니다. 그 사모님은 사모가 되면서 늘 걱정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모는 모든 교인들이 바라보는 대상인데 세상 말로 하자면, 도마 위에 올라 있는 생선과 같은 신세인데 어떻게 해야 하는가 라는 고민이었습니다. 그래서 평소에 늘 웃던 웃음도 없어지고 우울해지고 걱정의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14년 전에 중학교에 다닐 때 여선생 님이 생각이 났습니다. 그 여선생은 경북 대학교에서 5월의 여왕으로 뽑혔을 정도로 미모의 선생님이었는데 그 선생님은 항상 얼굴에 미소를 지으면서 다녔고 그로 인해 그 당시 그 마을에서 어린아이들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사랑을 온 몸에 받았던 분이었습니다. 사모님은 그 선생님의 생각이 떠오르자 수소문을 해서 지금은 결혼을 해서 서울에서 살고 있던 그 선생님을 방문했습니다. 그리고 자초지종을 그 선생님에게 말씀을 드리고 물었습니다. "선생님은 그 당시에 참으로 아름다워서 남들로부터 시샘도 받고 미움도 받을 만했는데 어떻게 온 마을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을 수 있었습니까" 이 질문에 그 선생님은 참으로 좋은 대답을 했습니다." 야! 나는 교사 발령을 받고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나를 바라보는 대상이 되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 생각하다가 기도원에 가서 하나님께 많은 사람들이 나를 바라볼 때 예수님의 평화를 느낄 수 있는 평화의 미소를 짖게 해 달라고 기도했단다."

성도 여러분 !
이 얼마나 놀라운 기쁨을 위한 적극적인 신앙의 자세입니까 이 얼마나 놀라운 희락의 삶을 산 한 신앙인 입니까 우리 이런 여선생 님의 삶을 살아보지 않으시렵니까
어떤 심리학자는 웃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를 내렸습니다. 즐거워서 웃는 것이 아니라 웃어서 즐겁다
웃을 수 있는 모든 상황이 마련되어 그래서 웃을 때 즐거운 것이 아니라 먼저 웃을 때 즐거운 상황이 전개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안에서의 기쁨 주 예수를 믿는 우리 모두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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