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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인생이 목자를 모실 때 (시 편 23; 요 10: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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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홀로 설 수 없는 생명체입니다.
생명체로 꿈틀거리기 시작한 태아적부터 철저한 보호를 받으면서 이 땅에 태어납니다. 이 땅에 태어나면 먹여 주고 재워주고 몸을 씻어 주는 어버이의 희생적인 보호 속에서 성장을 합니다.
이 과정에서 어버이는 주어진 자식의 목자로서 먹일 것만을 먹이고 먹지 못할 것은 그 곁에도 두지 않은 섬세한 배려가 있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자식의 몸이 춥지 않고 또 덥지 않도록 온도를 맞추어서 옷을 입혀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적인 성장을 위하여 교육의 과정에까지 인도를 받으면서 성장합니다.
비록 50이 넘은 자식일지라도 80이 다되신 그 부모께서 ‘길조심해라’‘건강에 해로운 담배는 피우지 말라’‘너무 지나치게 과음을 하여 실수를 범하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하여라’ 등의 깊은 애정이 담긴 주의는 목자로서의 어버이의 의무를 다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어버이는 우리의 육신이 성장하기까지 이 땅에 계시다가 떠나신 목자에 불과합니다.영원히 우리와 함께 사시면서 우리의 영혼을 보살펴 주시고 우리의 삶과 죽음을 책임지는 그러한 목자는 아닙니다.
험준한 인생의 광야를 통과하고 있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목자는 우리 인생의 生과 死를 포함하여 영혼의 세계, 그리고 우리의 민족의 운명까지를 책임지고 있는 영원한 목자가 우리에게는 필요합니다. 한정된 어느 기간만이 아니라 영원이라는 세계를 다스리는 목자가 필요합니다.어느 한정된 지식이나 능력의 소유자가 아니라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지배하시고, 모든 것을 소유하신 그러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이러한 목자만이 한 인생의 가는 길을 온전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목자 안에서만이 그 인생은 온전한 삶을 누리게 됩니다.

본문 접근

생각이 있는 생명체는 언제나 다음과 같은 질문을 스스로 던져 보아야 합니다. 내 영혼은 오늘을 어떻게 지탱하며 내 영혼은 어디로부터 와서 어데로 가는 것인가 나의 험준한 이 땅위의 삶에서 완벽한 보호자인 목자는 누구인가 나는 목자의 손에 이끌리어 사는 편안한 존재인가 아니면 나홀로 서서 몸부림치면서 험한 파도에 휩싸여 인생을 사는 지극히 외롭고 불행한 존재인가 내가 속한 민족은 하나님의 보호를 받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으로부터 외면을 당하고 있는가
이러한 질문 앞에 서서 대답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오늘 하나님께서는 분명한 대답을 구약에서는 다윗의 입을 통하여 우리에게 들려주십니다. 그리고 신약에서는 우리 주님이 그 대답을 정확하게 하고 계십니다.
. 먼저, 하나님은 시편 23편에 나타난 다윗이라는 특수한 인물을 오늘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치 아니하
오나 응답지 아니하시나이다.

그는 분명히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스라엘의 제 2 대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는데도 사울 왕으로부터 후계자로 인정은커녕 죽임을 당할 어려운 역경에서 해 매이고 있었습니다. 이리 쫓기고 저리 쫓기면서 인생의 처절한 곤욕을 치르고 있었습니다. 사울 왕이 직접 칼과 활을 들고 죽이겠다고 구석구석을 찾아 해매일 때 다윗은 한 인생의 피나는 눈물을 흘리면서 세상을 원망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자신을 이렇게도 처절한 환경에 처하게 된 것은 하나님이 자신을 외면하심이라고 판단을 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을 합니다. 바로 그 원망이 22편을 통하여 들여준 그의 원망의 고백입니다.

이토록 다윗은 자기의 인생을 무척이나 외로워하고 슬퍼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육신과 영혼을 보살펴 줄 목자가 자신의 주변에 전혀 없는 것처럼 느끼게 되면서 하염없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죽음에 쫓기는 절박한 자기인생을 도와줄 목자가 자신의 눈 앞에 보이지 아니할 때 원망하고 좌절하고 두려워하면서 슬픈 눈물을 흘린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으로 하여금 원망과 통곡의 늪에서 정신을 다시 가다듬게 하십니다. 그리고 순간의 고통과 슬픔으로 하나님을 원망한 신앙을 바르게 잡아 주십니다. 그리고 그 입으로 올바른 신앙을 고백하게 해 주십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던 그 입을 통하여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새로운 신앙고백을 하게 하십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배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이 얼마나 아름답고 소망이 가득한 신앙고백입니까 방금 전의 원망과 좌절과 슬픔의 자국을 찾을 길이 없습니다. 눈물의 흔적도 없습니다. 절망의 모습도 없습니다.

오늘의 메시지가 필요한 현장

바로 여기서 다윗 뿐만 아니라 수많은 성도들이 자신의 인생의 목자가 바로 여호와 하나님임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고통과 두려움과 눈물의 옷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소망의 옷을 갈아입게 됩니다. 그 때 만족과 감사와 확신의 행진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94년 봄 한 반도에 몸담은 우리들은 몹시도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 땅에 전운이 감돌고 있다고 세계가 떠들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목자 없는 황막한 사막 위를 거니는 양떼처럼 느껴질 때가 적지 아니합니다. 뿐만 아니라 문민 정부가 들어선 후에 각종 대형사고가 발생되어 수많은 생명이 무참이 죽어 가는 요즈음입니다. 이 때마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덧없는 인생이 쌓은 수고가 공이 되고, 땀흘려 쌓은 탑이 무너지고, 애써서 칠한 색깔이 퇴색되어 가는 듯한 절망을 갖기도 했던 이 땅의 삶의 장이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 시간 하나님은 이러한 상항속에서 몸부림치는 우리들에게 다윗의 입을 통하여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다”라고 고백한 사실을 들려주십니다. 그리고 신약을 통하여 우리의 인간을 양으로 늘 말씀을 하시던 예수님은 “나는 선한 목자라”고하십니다.
다윗이 발견하고 불렀던 그 인생의 목자 여호와 하나님이 바로 우리의 목자시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원의 주님이라고 부르는 시간부터 여러분은 하나님을 위대한 목자로 모시었습니다. 그 목자의 품속에서 오늘도 숨결을 계속하고 수없이 계속된 고단한 사연을 해결 받아 오늘을 살아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찬송을 합니다.

주는 나를 기르시는 목자요 나는 주님의 어린 귀한 양
나의 주님 강한 손을 펼치사 나를 주야로 지켜주신다.

이러한 목자를 모신 우리들은 실로 행복한 존제들입니다. 세상에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깊은 행복에의 의미를 경험하고 사는 여러분입니다. 이 행복이 여러분과 함께 이 아침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이제 이 행복에의 세계를 달리고 있는 양들에게 이 아침 하나님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다시 한번 들려주십니다.

본문을 통한 메시지

먼저는, 하나님은 다윗의 입을 통하여 목자를 발견한 인생은 부족함이 없다는 사실을 들려주십니다.

(선포)

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도다 (1-2절)

(해석)

하나님을 자기의 목자로 모시고 살아간 인생은 자신의 욕심 때문에 솟아난 불만이 있을지라도 그것은 순간적인 것이며, 바로 오늘을 만족하는 새로운 질서를 경험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나의 목자로서 나라는 한 생명체를 양으로 삼으시고 충분히 먹고 뛰놀 수 있는 푸른 풀밭으로 이끌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 진리를 다윗은 바로 깨닫고 있었습니다.
양들을 먹이고 기른 목자의 경험을 가진 그는 하나님을 자신의 목자로 깨닫게 됩니다. 목자이신 하나님이 하나님 만을 의지하는 자신에게 그가 보지 못했던 온 누리를 여호와 하나님이 미리 충분히 보시고 계시었음을 깨달았습니다. 가장 영양이 풍부하고 해롭지 않은 좋은 풀이 있는 곳으로 이끌어 주심을 깨닫고 믿었습니다. 그때 그는 그 목자이신 하나님이 지켜보는 가운데 꼴을 먹게 되었습니다. 그 목자 되신 하나님이 양들이 목이 말라 하면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여 갈증을 풀게 하고 편히 쉬게 함을 다시 한번 확증하고 있습니다.

(적용)

만족함의 반대말은 부족함입니다. 오늘의 인생은 어제 어데 서나 부족함에 쫓겨 삽니다. 부족함이란 것은 욕심의 부산물입니다.
집이 없는 사람은 머리 둘 곳 만 있는 초가삼칸이라도 주어진다면 더 이상의 행복이 없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막상 십평의 집이 주어지면 좀 더 넓은 공간의 평수를 찾고 그것이 주어지면 더 큰 것을 요구하는 심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적은 것을 가졌을 때는 큰 것을 소유하는 끝없는 욕심을 펼칩니다. 그것이 발전을 가져오는 인간의 본성이라는 측면도 있으나 그것이 지나치면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5)는 말씀대로 이어집니다.
인간이란 최대의 큰 것이나 최상의 목표를 소유했을 때는 모두가 공허감에 잡혀 있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자기 속에 있는 인간적인 욕망에 모든 기준을 두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의 욕망이 자신의 인생을 지배하도록 놔두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다. 지난 숱한 세월동안 그 어려운 전쟁과 가난의 역경과 함정 속에서 여러분 스스로 오늘을 해쳐 오셨다고 생각하십니까 맹수처럼 달려든 갖은 슬픈 사연과 위험한 고비에서 내 힘으로 오늘을 이룩하셨다고 생각하십니까 실패의 쓴잔을 마시고 신음하는 사람들이 여러분보다 못한 슬기와 두뇌를 가졌기에 그들은 병에 시달리고 사업에 실패하고, 가정이 깨지는 아픔을 안고 있다고 보십니까 이 땅에서 전쟁의 위험이 솟아 오를 때 우리의 재능과 영특한 두뇌로 오늘 우리가 숨을 돌리는 기적을 이룩하시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신앙의 눈을 좀더 깊이 뜨시고 회고하여 보십시오. 우리들의 오늘이 있기까지는 모두가 우리의 목자이신 하나님의 보살핌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라는 고백을 거침없이 우리는 하게됩니다.
오늘도 우리의 목자 하나님은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데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 4:19)

둘째로, 하나님은 다윗의 고백을 통하여 목자를 발견한 인생의 영혼이 소생되고 의의 길로 인도함을 받는다는 사실을 들려주고 계십니다.

(선포)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 하시는 도다 (3절)

(해석)

하나님은 육적인 삶을 위하여 의식주만을 해결해 주시는 목자만은 아니십니다. 그 목자는 우리의 영혼을, 지쳐 버린 영혼을, 육신적인 삶의 노예로 짓밟힌 내 영혼을 다시 살아나게 하십니다. 시들어져가는 내 영혼에 새로운 생기가 차고 넘치도록 하십니다. 그리고 신음 속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애타게 몸부림치는 민족을 붙잡아 주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목자로 모신 한 인생은 그 육신만이 생기가 넘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영혼이 새로운 세계 속에서 영원한 의의 길로 나아가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 가운데서 우리의 목자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살고, 그 목자 되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면서 바른길에 머물기를 오늘도 원하고 계십니다.

(적용)

그렇습니다. 역사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자기 인생의 목자로 모신 사람의 생애와 민족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 굳굳이 살았습니다. 혼탁한 죄속에 말려들지 않고 바른길만을 걸으려고 노력을 다했습니다. 그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을 목자로 모신 후에 그 영혼이 새로이 살아났고 자기가 걷는 길이 바른길로 인도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진실로, 이 위대한 목자가 없이는 이 죄악의 파도에서 우리는 순간이라도 해쳐 나올 수 없습니다. 이 화려한 문화와 말초신경을 최대한 자극시키는 이 말세적 현상의 무대 위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자신의 의지와 결단만으로는 이 거대한 위력의 죄악의 세계를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육신이 병들고, 영혼이 쉬이 병들게되는 이 험준한 물결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힘이 우리 인간에게는 부족합니다. 그래서 그 죄악의 파도에 휩싸이게 됩니다.
그러나 오늘도 우리의 하나님은 우리 개인의 목자로서, 오늘의 험준한 세상의 한 복판에 서서 외롭게 시들어져가는 우리의 영혼을 새롭게 일으켜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 민족의 목자로서 언제나, 갈 길을 몰라 방황하는 이 민족에게 바른길을 인도해 주십니다.
다시 우리의 귀에 들려주십니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도다.'

세째로, 하나님은 목자를 발견한 인생은 용기와 불굴의 의지가 솟아남을 다윗을 통하여 알려주고 계십니다.

(선포)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은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님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4절)

(해석)

다윗은 실로 음산한 죽음의 골짜기를 수없이 해 매던 사람입니다. 사울이 죽이겠다고 군병을 거느리고 쫓을 때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긴 사람입니다. 때로는 낙심을 하기도 했습니다. 외로워도 했습니다. 통곡의 눈물도 흘렀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 되심을 깨달았을 때 그의 입에서는 이와 같은 담대한 신앙고백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는 이러한 대담한 고백을 하면서 새로운 용기와 굽히지 않은 의지를 불태웠습니다.

(적용)

오늘의 현대인들! 생각하면 너무나 음침한 사망의 골짜기에서 방황하고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아무 예고 없이 달려드는 주검의 골짜기가 너무 깊고 험준합니다. 돈이라는 사망의 골짜기가 우리를 엄습합니다. 권력이라는 죽음의 골짜기가 우리 앞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육신의 정욕을 이용한 사망의 골짜기가 이곳저곳에 난무하고 있습니다. 목자 되신 하나님의 품을 떠난 사람들은 모두가 빠질 수밖에 없는 무서운 사망의 함정들입니다. 거기서 모두는 쓰러지고 소생하지 못한채 인생의 종말을 고하고 맙니다. 거기서 실패와 죽음의 눈물을 쏟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목자로 모신 양들은 자기를 찾는 목자의 손길이 자기 뒤에 따라오고 있음을 발견하면, 새로운 용기가 솟아납니다. 그 함정에서 뒤쳐 나올 수 있는 의지가 발동됩니다.

(예화)

어느 어린 개구쟁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시골의 놀이터에서 동네 형들과 놀 때마다 체구가 허약한 가장 어린 몸이기에 늘 형들로부터 손찌검을 당하면서 놀 수밖에 없었습니다. 억울하고 밉지만 그곳에서 함께 놀려면 그러한 수치심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의 손목을 붙잡고 그 놀이터를 지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아주 키가 크고 손에는 고급지팡이를 걸친 멋진 신사이며 무서운 분이었습니다. 이 개구쟁이가 친구들이 “어디 가니 우리하고 놀자”하고 부릅니다. 이 개구쟁이는 잠깐 아빠의 손을 놓고 달려가서 평소에 자신에게 손찌검을 하던 형들을 힘있게 몇 대씩을 때려주고 쏜살같이 달려와서 아버지의 손을 꽉잡았습니다. 불시에 얻어맞은 형들은 달려와서 그 개구쟁이에게 보복을 하려고 달려왔지만 그 아버지가 무서워서 억울한 화만 낼 뿐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못했습니다.

이 개구쟁이의 그 연약한 몸에서 어떻게 그런 용기가 솟아날 수 있습니까 그 대답은 간단합니다. 주위의 어떤 인간보다도 강한 아버지의 손목이 함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아버지를 믿고 따르는 한 무한한 용기가 발생됩니다.
그렇습니다.
목자 되신 하나님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우리를 지켜 주시는 한 우리 주변의 어떤 음침한 골짜기도 우리를 삼킬 수 없습니다. 더욱이 우리의 목자로서 생명까지 버리신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와 동행해 주실 때 어떤 두려움이 우리를 이길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의 험준한 삶의 장에서 용기를 잃으셨습니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갈 길을 몰라 방황하십니까
더 이상 지탱할 힘이 없으십니까
일어서십시오. 그리고 외치십시오.
'하나님이 나의 목자시다'라고 소리 높이 외치십시오. 우리 목자의 손에 있는 지휘봉이 그리고 그 튼튼한 목자의 긴 지팡이가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어떤 맹수라도, 죽음의 세력이라도 내려칠 수 있는 무기가 그 손에 있습니다.
우리의 대통령도 불상을 섬기는 자들의 원성에 귀를 기울이지 말고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자신의 주변에 우상을 치워버릴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인간의 주변만을 살핀다면 비굴해 집니다. 그러나 우리의 목자 되신 하나님의 지휘봉과 그 거대한 지팡이를 의지한다면 그 순간 용기는 솟아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지혜가 솟구쳐 오르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이 험준한 땅에서 목자의 손목을 붙잡고 그 힘에 의지하여 솟아나는 용기야말로 너무나 절박하게 필요합니다. 그 용기가 없이는 우리를 둘러싼 음침한 사망의 골짜기를 벗어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신앙도 손실을 입게 됩니다. 우리의 위대한 목자의 손목을 붙드시고 힘을 내시고 좌절과 슬픔과 고뇌와 아픔의 세계를 벗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외쳐야 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다. 어떠한 사망의 음침한 사연도 나를 삼킬 수 없노라]고 말입니다.

넷째로, 하나님을 목자로 모신 인생의 잔은 차고 넘친다는 말씀을 하나님은 다시 한번 들려주십니다.

(선포)

원수를 보라는 듯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 부어 내 머리에 발라 주시니
내 잔이 넘치옵니다.
한 평생 은총과 복에 겨워 사는 이 몸
영원히 주님 집에 거하리 이다. (5-6절)

(해석)

이 말씀은 한 인간이 여호와 하나님이신 목자를 따르고 살아 갈 때 그 생명은 영원한 즐거운 행복에 젖어 산다는 뜻입니다. 한 인생이 하나님을 목자로 모실 때 한 평생 하나님의 은총과 복에 겨워 살게 된다는 뜻입니다. 전에 느껴 보지 못한 즐거움에 살게됨을 알려주시는 말씀입니다. 오늘 내 육신이 고단해도 나의 속마음과 영혼은 마냥 즐거울 뿐임을 보여주시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육신 적으로 고독해도 우리 주님을 모시는 그 기쁨이 차고 넘쳐 외롭지 아니함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적용)

여러분의 잔이 아직도 차고 넘치지 않는다고 불평과 불만을 가득하게 가지고 계십니까 상대적 빈곤에서 오는 우리의 불만입니다. 남과 비교해서 나의 소유가 적다는 것일 뿐 사실은 우리 모두는 부유합니다.
우리의 엊그제를 생각해 보면 충분히 이 사실을 인정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냉장고가 아주 귀하던 시절에 그것을 가지고 있는 가정이 얼마나 부럽게 보였습니까 텔레비죤이 드물 때 그것을 가지고 있던 가정이 얼마나 부러웠습니까 그러나 지금은 모두가 필수품으로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남이 가지고 있는 또 다른 항목을 쳐다보면서 못 가진 불만과 빈곤감에 스스로 빠지는 모순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을 자신의 목자로 모시는 사람들은 과거의 어려웠던 경험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만족의 비결을 배웁니다. 허덕대는 삶의 세계를 벗어납니다. 목자를 따르면서 사는 가벼운 마음과 여유와 차분한 발길을 옮기면서 삽니다. 그리고 밀려오는 끝없는 육신의 욕심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지금껏 받은 것으로 감사하면서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양에게, 하나님이 떠나시지 않고 오히려 함께 하시면서 섬세하게 더 살펴 주시는 따뜻한 보살핌을 주십니다. 오천년의 수난의 역사의 현장에서 이 민족을 지켜주시는 하나님을 향하여 만족과 감사를 드릴 때 하나님은 더욱 큰 사명과 미래를 허락하십니다.
거기서 참 행복과 평안과 기쁨과 감사를 경험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목자를 모시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이 행복과 평안과 기쁨과 감사가 없습니다. 언제나 그들의 잔은 차지 아니하였다고 불만을 합니다. 그리고 불만과 짜증으로 그 잔이 비어 있습니다. 그리고 끝없는 욕심 속에서 살다가 슬픈 종말을 고합니다.

(예화)

이 설교자가 잘 아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시골의 어느 가난한 가정에서 노 부모님 밑에서 성장했고 부모님의 슬하를 벗어나 고등학교 때부터 고학을 하여 대학 신학을 졸업한후 유학을 떠나 석사 박사를 받고 지금은 교수로 있는 사람입니다. 그의 가정을 방문하면 응접실의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나의 잔이 넘치나이다를 액자에 넣어 걸어 두었습니다. 왜 저 성구를 사랑하고 저곳에 걸어두었느냐의 질문에 그 친구의 대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나의 생을 생각하면 나는 완전한 빈손이었습니다. 가난했고 어려운 시절에 나의 몸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를 택하여 오늘에 이르게 했습니다.나의 나된 것은 내가 아니오 우리 주님의 은혜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제 나에게 더 필요한 것을 달라고 주님께 더 아뢸 체면이 없습니다. 지금껏 받은 것만도 나의 잔이 차고 넘칩니다. 그러나 때때로 더 많은 명예, 더 많은 물질을 추구하고 싶은 충동을 느낍니다. 그 때 마다 나는 이 말씀을 보면서 인간적인 욕심을 자제하면서 행복해 합니다.”

(결론)

우리는 그 전능하신 하나님을 우리의 목자로 모시는 특권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안심하시고 오늘을 살아가십시오. 즐거운 미소를 얼굴에 지으십시오. 명쾌하고 활발하고 패기에 찬 삶의 장을 걸어 가십시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는 행복한 양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목자이심을 우리는 알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목자 없는 양으로 길 잃고 해 매이는 분이 계십니까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의 목자로서 방황하는 양을 찾으시며 그 곁을 떠나 있는 사람을 찾아, 산 넘고 물 건너 또 어둔 밤을 해 매며 고생하십니다.
더욱 감격에 벅찬 것은 우리 주님 예수께서 자신의 생명을 버리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목자라고 이 시간도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사실입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이 말씀대로 십자가 위에서 그 귀한 몸을 찢기시고 그 귀한 보혈을 남김없이 쏟아주신 우리 주님 예수께서 우리의 목자로, 이 민족의 목자로 우리의 곁을 오늘도 지키시고 계십니다.
그러면서 거듭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
이제 우리는 불안과 고통과 질병과 좌절의 함정에서 일어서서 다음의 찬송을 힘있게 부릅시다.
주는 나를 기르시는 목자요 나는 주님의 귀한 어린양
푸른 풀밭 맑은 시냇물가로 나를 늘 인도하여 주신다.
주는 나의 좋은 목자 나는 그의 어린양
철을 따라 꼴을 먹여 주시니 내게 부족함이 전혀 없어라 (453)

2. 본 설교가 있기까지

설교자의 잔이 차고 넘침을 보면서

설교의 역사에서 우뚝 솟은 거성들은 한결같이 주어진 본문을 통하여 주어진 메시지가 자신과 무관할 때는 그 설교의 생명력이 감소된다는 말을 계속하고 있다. 사실 설교란 자신이 먼저 그 말씀에서 깊은 은혜를 받지 않고서는 어떤사람에게도 은혜를 전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다. 이것은 단순한 이론이 아니라 설교사역을 계속한 목회자들에게는 누구나 다가오는 경험이다. 실질적으로 설교란 설교자의 심령에 먼저 감동을 주고서야 남을 향하여 외치게 된다.
시편 23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누구나 깊은 감동을 주는 말씀이고 유대교나 기독교 역사에 이 성구만은 너무나 많이 애송되고 있다. 그러나 필자에게는 이 말씀이 삶의 시기를 따라 주어진 의미가 늘 달라지고 있다. 어린 시절에는 이 성구가 교회에서 의미없이 단순하게 외우는데 사용되었다. 고생 많던 고학의 시절에는 나의 역경에 동참해주시고 그 순간을 지켜주시는 나의 목자이신 하나님을 확인하는데 가장 소중한 말씀의 성구였다. 그러나 인생의 후반기에 들어선 나에게는 지금까지 체험하지 못했던 소중한 진리가 나의 가슴에 깊이 파고들고 있다. 그것은 “나의 잔이 넘치나이다”는 말씀이다. 육이오 이후의 그 가난과 눈물의 고학시절을 돌아보면 필자는 오늘의 “나의 나 된 것은 내가 아니라”는 고백을 서슴없이 하게 된다. 그리고 나의 목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총에 은한 것임을 확인한다.
이 설교자는 이러한 감사의 시각으로 나의 잔을 자세히 볼 때마다 나의 잔이 분명히 차고 넘치고 있음을 발견한다. 실로 나의 어떤 노력으로도 채울 수없는 소중한 사연들로 가득히 채워지고 넘치고 있다. 나의 사역의 장이나 나의 전공분야를 비롯하여 주어진 가정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감사의 사연뿐이다. 눈물로 치세우던 지난날들과 비교하여 볼 때는 더욱더 그 잔이 넘친다. 이 설교자의 삶의 여정과 그 기록이 오늘의 본문 말씀이 너무나 감사하다. 그러기에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이 설교자는 눈시울을 적시우게 된다.

본 설교가 있기까지의 정황과 사연

본 설교가 있게 된 시기는 1994년 이른 봄 북한의 핵문제로 이 나라에 전운이 감돌고 있던 때였다. 외국의 신문에서는 연일 한반도에 전쟁이 곧 일어날 것처럼 보도가 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던 주간이었다. 김포 국제공항에는 입국하는 국민보다 출국하는 국민의 수효가 훨씬 많아진다는 소식이었다. 뿐만 아니라 여권이 있는 사람마다 딸라를 바꾸기에 정신이 없다는 사실을 은행창구에서 확인하였다.
어느 국가에서도 나라에 전운이 감돌고 있다고 할 때 국민은 안정을 잃게 된다. 특별히 육이오와 같은 처절한 전쟁을 경험을 한 우리의 민족으로서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는 사연이다. 거기에 더하여 이제는 핵이라는 무서운 공멸의 전쟁이 있을 것이라는 판단들은 더욱 이 땅의 민족을 불안하게 만든다.
이러한 정황에 놓인 이 땅의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권능과 목자로서의 보살핌이 있어야 한다는 당위성이 떠 오르게 되었다. 그리고 그 위대한 목자만이 이 어려운 난국을 피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게 되었다.

본문과 주제의 선정

본문과 주제를 위한 문은 어떤 설교보다도 쉽게 열리게 되었다. 그 이유는 평소에 설교자가 가장 어려운 환경을 만날 때마다 시편 23편을 애송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말씀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용기와 인내와 기쁨을 경험하였기 때문이다. 이 말씀이 이 설교자의 험준한 인생 여정 길을 걸어오는데 절대적인 힘이 되었기에, 이 설교자는 가장 힘든 순간에 직면하여 신음하는 성도들을 만날 때마다 이 말씀을 늘 전하여 주면서 위로한 적이 아주 많았다.
그러한 까닭에 불안해하는 오늘의 회중들에게 적절한 메시지는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것을 책임져주는 목자임을 알리는 것이 최상의 것이었다. 하나님이 책임져 주시는 일이라면 어떤 일이 우리를 위협하여도 결코 무너지지 아니한다는 믿음이 있어야 오늘을 극복할 수 있기에 주제는 [인생의 목자]가 가장 적절하였다. 거기에 더하여 우리 주님이 말씀하신 요한복음 10:11-15의 말씀을 결론적인 본문으로 받음으로 더욱 소중한 메시지로 이 설교자의 가슴에 와 닿았다.

석의와 주해와 적용의 작업

본문은 신앙생활을 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미 잘 알려진 말씀이다. 그러나 설교자로서는 조금이라도 잘못된 해석이나 이해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책임하게 운반하는 죄를 범하는 행동이기에 다시 각종 주석과 함께 말씀을 연구하였다. 여기서 설교자가 발견한 것은 22편에서 하나님이 자신의 기도를 듣지 않는다고 외면했던 다윗이 어떻게 바로 23편에서 그토록 돌변한 태도로 하나님을 목자로 고백하는 사연이 발생되었는지에 관한 의문이 발생되었다. 여기에 대한 이해는 22편과 23편의 내용이 동시적으로 발생된 내용이 아니라 시편의 편집자에 의하여 구성된 배열의 문제라는 연구의 결과에서 우선적인 이해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시기에 관계없이 다윗이 위험과 고독의 늪에서 원망과 불평과 비탄으로 가득했던 시절을 겪었다는 사실을 22편에서 먼저 확인하였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실체를 정확히 깨닫게 되었을 때에 드디어 23편과 같은 위대한 신앙을 고백하게 되었고 하나님은 오늘도 그 고백을 우리에게 들려주신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 특별히 다윗은 양을 키우는 목동의 삶에서 얻어진 현장의 경험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정확히 묘사하여 어떤 성구보다도 하나님의 깊은 애정과 경륜을 깨닫게 했다는 점을 다시 확인하였다. 이러한 목자와 양과의 관계성은 요한복음의 예수님의 말씀에서도 같은 맥락으로 선포되었다는 점에서 더욱 그 의미는 정확해졌다.
이러한 석의 작업의 과정에서 오늘의 현재적인 진리로 주어진 부분들은 크게 네 가지로 요약할 수 있었다. 먼저는, 지쳐있던 인생이 믿음의 눈을 뜨고 볼 때 여호와가 목자로서 자신을 푸른 풀밭에 누워 놀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이끌어 쉬게 하시기에 그 몸에 생기가 차고 넘치면서 아쉬울 것이 없는 생의 의미를 발견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우리 앞에 나타나신 여호와 하나님이 목자로서 인도하는 길은 언제나 옳은 길로 인도하시기에 우리의 영혼이 새롭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셋째는, 험준하고 음산한 죽음의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목자이신 하나님이 내 곁에 계신다면 무서울 것이 없는 용기와 불굴의 의지가 솟아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끝으로, 목자로서 보살펴 주시는 그 은혜를 깨달을 때 우리의 잔은 하나님의 은총과 주시는 복으로 차고 넘친다는 사실이다.

본문 사역의 생략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해석하고 적용하는 것이라는 기본 자세는 설교를 작성하는 순간마다 설교자의 머리에서 떠날 수 없는 명령의 언어들이다. 특별히 설교자는 선포라는 부분에서 많은 갈등을 느낀다. 자신의 말과 수식과 분석과 지식의 전달을 선포로 간주할 수 있는 가치가 있는 것인지에 대한 갈등을 느낀다. 이러한 갈등은 이 설교자에게게 끊임없이 주어진 문제였다. 그러나 본 설교자는 웨스트민스터의 예배모범에 나타난 본문의 봉독에 대한 규정에서 선포의 의미를 담을 수 있는 부분을 발견하였다. 그것은 어떤 형태로든지 봉독되어진 본문을 새롭게 정리하여 그들의 언어로 다시 들려주는 부분이 선포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후 이 설교자는 모든 설교의 원고에 자신의 언어로 본문을 쉽게 재번역하여 선포하는 노력을 기울여 왔다.
그러나 본 설교에서는 본문의 사역을 생략하였다. 그 이유는 본문은 개역 성경의 원문대로 그대로 암송을 해 오면서 그 내용도 어려움없이 자연스럽게 소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문장 그대로 살림이 문학적 감각과 함께 실감나는 효과를 주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시편 23편과 얽혀있는 성도들의 기본정서를 손상시킬 필요가 없다고 판단되기 때문이었다.

목적의 설정

본 설교의 목적은 본문의 성격에 따라 치유적인 설교(Therapeutic Preaching)로 그 목적을 정하고 있다. 치유적인 설교란 원래 설교를 듣는 회중의 육체와 영혼과 정신의 상태가 건강하지 못함을 전제로 하고 그 치유에 목적을 둔 설교이다. 이 설교는 일명 목양설교라고도 하며 삶의 정황설교(Life-situational Preaching)라고도 일컫는다. 흔히들 이 목적의 설교는 성령의 역사에 의하여 새롭게 건강해지는 내용을 주로 내포하고 있다.
본 설교에서는 비록 성령의 역사라는 신약적 접근은 없으나 피곤과 좌절과 불안과 긴장과 허탈감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들어야 할 메시지라는 점에서 우선적으로 치유설교로서 그 목적을 설정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보았다. 이러한 목적은 오늘의 본문이 주는 메시지가 우선적으로 적절하다는데 더욱 그 의미를 더해주고 있었다. 치유설교가 갖추어야 할 위로와 격려와 확신과 만족이 실린 메시지가 바로 오늘의 본문이라는 데서 더욱 정확한 실감을 갖게 되었다.

설교의 유형과 형태

설교의 이론에서 제시된 설교의 기본 유형은 본문설교(Textual Preaching)와 주해 또는 강해설교(Expository Preaching), 그리고 주제설교(Topical preaching)이다. 그리고 그 전개형태는 본문의 성격에 따라서 또는 설교의 기본 유형에 따라서 대지설교를 비롯하여 분석설교 상관 설교 설화체설교등 그 형태가 다양하다.
본 설교의 형태는 그 기본유형으로서는 주해설교를 따랐다. 그리고 그 전개형태는 대지설교를 따랐다. 그 이유는 시편 23편이라는 전체를 본문으로 했을 뿐만 아니라 그 전체를 현재적 의미를 가지고 묵상하고 경청하는 설교이기에 말씀을 집합하고 정리하여 풀어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대지로 구분될 주안점은 4개의 부분으로 설정하였고 그 부분마다 해당된 말씀은 모두 본문에서 발췌하였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제시된 주안점(대지)들이 설교자의 분석이나 사고의 표시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으로서의 표현을 시도하였다.
예를 들면 흔히들 사용한 [첫째,목자를 발견한 인생은 부족함이 없습니다.]의 표현을 탈피하여 [먼저는, 하나님은 목자를 발견한 인생은 부족함이 없다는 사실을 들려주십니다.]로 표현하였다. 이것은 설교자가 전혀 개입되지 않고 말씀의 주인과 회중이 직접 만나도록 하는 시도의 표현이다. 본 설교자가 가장 크게 관심을 갖는 것은 어떻게 하면 설교사역에서 설교자 자신이 감추어지고 말씀의 주인이신 성삼위 하나님만이 나타나실 수 있는지의 문제이다. 그 이유는 우리 한국의 강단에서는 설교자에 의하여 하나님이 보이지 아니하는 문제가 너무 심각하기 때문이다.

본 설교의 자료수집의 과정

본 설교의 기본 자료는 다윗의 생애를 섬세하게 살피는 것이었다. 다윗이 경험한 삶의 여정은 성경의 어떤 인물보다도 특유한 것이었다. 그의 목동시절부터 왕이 되기까지 겪어야 했던 삶은 하나님이 현대인들에게 보여주신 특유한 기록이었다. 그러기에 다윗이라는 인물을 연구함이 우선적인 자료였다. 둘째는, 본 설교가 작성되고 선포되었던 당시의 시대적인 환경이었다. 특별히 북한의 핵문제가 국제사회의 초점이 되고 전쟁의 가능성이 짙어간다는 외국 언론의 보도는 가장 현실감이 있는 설교의 자료였다. 외국으로 직접 전화를 걸어서 최근에 보도된 그곳 언론의 동향을 들어가면서 본 설교의 작성에 임하였다는 것은 비록 본 설교에서는 그 구체적인 자료의 제시는 없으나 위기의식의 확인등에 큰 도움이 되었다. 셋째는, 본 설교의 내용과 너무나 그 의미가 일치되고 있는 찬송가 453장의 “주는 나를 기르시는 목자”를 두 곳에서 사용하여 회중들과의 접근을 시도하였다. 끝으로, 본 설교에서 사용된 두편의 예화는 모두 본 설교자가 경험한 일들이다. 아버지 손목을 붙잡고 가면서 있었던 개구장이의 일과 [나의 잔이 넘치나이다]라는 글을 걸어놓은 것들은 모두 본 설교자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그 수식은 제삼자의 것으로 표현하여 설교자를 감추는 노력을 기울여 보았다. 기 이유는 앞에서 밝힌 데로 설교의 어느 부분에서도 설교자 자신이 보여서는 안된다는 평소의 주장을 실천하기 위함이었다.

3. 본 설교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

많은 설교자들이 시편 23편을 본문으로 하여 행하는 설교는 무수하리라고 본다. 그 이유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설교로서 이 말씀을 옮기려고 할 때 적지 않은 노력이 필요하였다. 가장 실감나고 효과적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회중들의 가슴에 적시어주는 설교이기를 바랬으나 다음과 같은 아쉬움을 남기게 되었다.
먼저는, 양의 생리를 섬세하게 연구하여 발표한 바 있는 Phillip Keller의 A Shepherd look at Psalm 23의 책을 읽고 십분 활용할 수 없었다는 아쉬움이다. 물론 본 설교의 접근이 양의 체질연구를 통한 메시지의 발굴이 아니었다는 점도 있으나 최소한의 응용을 하지 못한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둘째는, 절망과 피곤과 불안의 현장에서 목자 되신 주님을 뵙고 새롭게 소생된 사례를 예화로 사용할 수 있었다면 더 많은 효과를 가져 올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설교에서 예화 사용의 남발을 언제나 억제하면서 살아온 본 설교자가 겪은 문제점이라고 스스로 지적해 본다.
셋째는, 설교의 전개란 언제나 질서정연하고 간결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타당한 주장이다. 그러나 본 설교의 [석의적 접근]의 부분과 [본문을 통한 메시지]의 부분이 본 설교의 질서정연한 논리를 어지럽게 만들 우려가 있다고 본다.
끝으로, 비록 석의적 접근에서 우선적으로 본문의 의미들을 해석해 주고 있으나 할 수 있으면 제시된 대지 다음에서 해당된 본문을 해석해주고 그 말씀을 바로 적용함이 더욱 효과적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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