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통한을 안고 쓰러진 죽음 (마 27:1-9)

첨부 1


그 해에도 팔레스틴에는 유월절이 어김없이 돌아 왔습니다. 애급에서 장엄한 하나님의 승리와 해방을 경험했던 조상들의 유월절이 머나먼 추억으로 여겨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번 유월절에는 뭔가 다른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설렘과 기대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온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을 들뜨게 하는 예수님의 사역에 관한 소문 때문이었습니다. 그분은 새로운 사회의 이상을 펼치는 듯한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회개해도 받아들어 질 수 없다던 세리와 창기들에게도 죄 사함을 선포하고, 율법을 모른다고 단죄 당하는 소망 없는 자들에게는 교사로, 쓰라린 상처를 부여안고 살아가는 자들에는 위대한 지도자로 그들과 함께 숨쉬고 함께 고통을 느끼면서 산다는 이야기가 들려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롯 유다의 꿈과 야망)

가롯 유다가 현실을 알 수 있던 나이가 되었을 때 이미 팔레스틴은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로마 제국의 정복의 환호성과, 로마 시민들의 사치와 향락의 뒤편에는 무서운 착취로 말미암은 팔레스틴 땅의 고통의 신음소리가 메아리치고 있었습니다. 거룩한 성 예루살렘은 피비린내 나는 로마 제국의 독수리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습니다. 조국을 위해 헌신해야 될 엘리트들은 민족의 심신을 괴롭혀 이익을 취하는 세리 직으로 봉사하는 뒤틀린 시대였습니다. 화려한 종교의식과 지도자 자신만을 위하는 권위가 백성들을 짓누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저주받은 역사와 시대가 엎어지고,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기를 소망하고 있었습니다. 다윗과 같은 현명한 왕, 정치적 군왕, 그러한 메시야의 도래를 꿈꾸고 있었습니다. 유다는 이러한 꿈을 자기의 꿈으로 동일시하면서 남다른 야심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에는 누구보다 재물에 밝은 눈을 뜨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미래를 그리면서 어느 날엔가 남보다 우월한 지위에 대한 욕망도 그 야심 속에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마치 오늘날 예수님도 믿고, 세상의 명예와 영향력 있는 위치에도 있고 싶어 하는 우리들처럼 말입니다.

(주님과의 만남과 착각)

청년 유다는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그리고 그분의 행적을 남달리 관찰합니다. 그분의 인기와 기사이적의 비범한 행적은 그의 눈을 번쩍 뜨게 하고도 남았습니다. 드디어 어느 날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 분의 갈릴리 바다보다 더 깊은 눈빛을 보았을 때 유다의 가슴은 설레었습니다. 자신의 심정을 헤아리기나 하는 듯 예수님은 가로 유다를 제자의 일원으로 불러 주셨습니다. 감격과 흥분으로 이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남다른 꿈과 야심의 젊은이에게 다가온 그분의 부름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기에 그의 가슴은 설레고 있었습니다. 나의 꿈을 그분을 통해 한 번 펼쳐보리라!
그러나 그 길은 쉽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모든 것을 등지고 고향을 떠날 때 무책임하다는 비난의 말들.....험악한 저 북쪽 지역을 전도할 때 잦았던 조롱과 수모, 전대 없이 다니다가 허기에 찬 지침....광야에서 노숙을 하면서 새벽이슬을 맞고 떨어야 하는 추위........ 이러한 정도의 고행의 길은 미래에 대한 남다른 야망을 안고 있던 유다에게는 두려울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드디어 민족의 이동처럼 수많은 인파가 줄을 이어 유월절 행사를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모여들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을 입성합니다. 평소에 전혀 볼 수 없던 예수님의 모습이었습니다.
“호산나!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이스라엘의 왕 찬미 받으소서.
이 메시아적적 시위! 이 영광의 퍼레이드! 지금껏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환영의 소리에 모든 피곤이 가시고 있었습니다. 봄 햇살에 모든 고통은 눈 녹듯 사라졌습니다. 이제야 그 대망의 날이 눈앞에 다가왔다는 생각에 제자들은 모두가 흥분합니다. 가롯 유다는 남다른 감회를 느끼면서 그 꿈이 이룩되고 있다는 착각을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이제 나의 야망은 현실로 다가 오는구나 이제 그 야심이 실현되는 날 그 다음의 나의 단계는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남다른 계산을 할 수밖에 없던 그의 명석한 두뇌마저 쉼 없이 날 뛰고 있었습니다.
마치 철없는 환호성에 도취되어 진실을 파악하지 못한 오늘의 성도들처럼 말입니다.

(가롯 유다의 갈등)

예수님께서 제자와 유다에게 “보라 우리가 지금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내가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의 손에 넘기 우리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군중의 열광의 소리에 취해있던 유다의 귀에는 그 말씀이 들려오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일행은 예루살렘 성문으로 통하는 언덕을 지나, 시가지를 통하여 성전 쪽으로 갔습니다. 백성들이 수군대는 소리들이 들렸습니다. 유다와 백성들이 기대하는 일들은 벌어지지 않고 성전 뜰 구석에서 상인들을 꾸짖으시고, 거기에 있는 짐승들을 내어 쫓으시며, “이것들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너희 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소리소리 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성전을 지나 베다니로 가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이상합니다. 군중들의 뜨거운 환영과 그 환호성은 가롯 유다가 생각했던 방향으로 이어지지 아니했습니다. 예루살렘을 가득 매운 인파를 모아놓고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그 유창하고 권위 있는 말씀이 있어야 하는데 방향이 달라지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흥분과 기대는 점차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유다의 마음속에는 불길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의 야심어린 꿈들이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자신의 기대와 희망이 빗나가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꿈과 희망을 걸고 달려온 지난 3년의 세월이 너무 허망하게 무너짐을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기대가 무너지는 순간 허전함만이 유다의 온 전신을 붙들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치밀어 오른 감정은 배신감과 같은 것을 느끼기에 충분할 정도였습니다. 피곤이 엄습해 옵니다. 허탈감에 젖어들기 시작합니다. 모든 것이 미워집니다.
베다니 시몬의 집에서 마리아가 감사와 기쁨으로 값진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신앙의 표현과 주님을 사랑하는 그 표현의 향기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뒤틀린 심정을 안고 있는 젊은 가롯 유다의 눈길에는 이 모든 것이 낭비로만 여겨졌고 헛수고라는 판단을 하게 됩니다. 그러하기에 그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진하게 감정을 쏟고 있었습니다. “어찌하여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느냐”라고 경멸하듯 말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예수님을 향한 항변이었습니다. “아무리 당신이 사랑을 이야기하나 그것이 현실에 무슨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간난한 사람을 위한 말이 아니고 유다 자신의 물질에 대한 욕심을 내 보인 말일 뿐이었습니다. 또 이것은 아마 돈이면 뭐든지 다 된다는 오늘의 시대정신의 소리이며, 영성이 어두워져 현실에 예민한 타산적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의 소리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여인을 괴롭게 말라! 나의 장례를 위한 것이라”고 부드럽게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유다에게 “나는 제가 원하는 정치적, 물질적 메시야가 아니라 십자가의 메시야이니라”는 대답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예수님의 계획과 생각을 이해 할 수 없었습니다. 점점 주님과의 교제가 점점 괴리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뜻이 깨어지고 계획대로 되어지지 않음에서 오는 예수님에 대한 원망과 후회와 배반의 감정이 공허한 유다의 가슴을 파고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갈등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사랑했던 스승을 따라 고난과 무보상의 험난한 길을 갈 것인가 아무 것도 얻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갈 때 사람들은 나에게 뭐라고 할 것인가 지난날의 보상을 위해 최소한의 것은 건져야 할 것이 아닌가”
이권의 추구와 계산에 밝은 오늘의 성도들의 모습을 보이는 듯한 갈등이었습니다.

(배신과 범죄)

가롯 유다의 마음에는 결코 자신의 지난 3년의 세월을 보상받고야 말겠다는 이기심이 발동됩니다. 명예가 아니면 물질이라도 챙겨야 한다는 계산이 그를 유혹합니다. 드디어 그의 양심에서 외쳐대는 진리의 소리를 애써 억누르며,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종교지도자들을 찾아갔습니다. “내가 당신들에게 예수를 넘겨주면 그 값으로 얼마를 주겠소” 제사장들은 경멸하듯 표정을 짓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유다는 은 30을 거머쥐게 됩니다. 유다에게는 쓴 웃음만이 있을 따름이었습니다. 단 돈 30이라도 손에 쥐게 되는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 순간 자기의 스승을 노예의 값으로 팔고 있지만 사실은 자기의 영혼을 노예의 값으로 팔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자기의 이익만 된다면 소중한 신앙과 양심, 그리고 주님마저 저버리는 현대의 교인들처럼 말입니다.
무교절 첫날 밤 예수님은 유월절 식사를 하시며, 이날이 제자들과 함께하는 최후의 밤이요, 이별의 연회라는 것을 알고 계시었습니다. 유다의 분노와 배신을 아시는 주님은 그의 마음을 돌이키기를 원했습니다.
“너희들 중에서 한 사람이 나를 배반할 것이다. 그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 했다.”
라고 말씀하시었습니다. 제자들은 차례대로 “주님 저는 아니지요”라고 여쭈었습니다. 유다의 차례가 되었을 때 찌르는 감정을 감추면서 묻습니다.
"선생님 저는 아니죠“
비록 태연한 듯한 질문입니다 마는 그 음성은 떨렸습니다. 양심은 몹시도 요동쳤습니다. 그의 얼굴의 근육은 실룩거렸고, 마음은 굳을 대로 굳어져 버렸습니다. 구원의 사역을 끝내시려는 시점에 도달한 우리 주님은 피곤하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눈에는 긍휼과 자비의 눈길이 쉼 없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유다는 이 자비로운 스승의 눈길을 피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아니 이미 그는 주님을 외면한 채 얼굴을 돌리고 있었습니다. 벌써 그의 마음은 캄캄한 어두움으로 덥혀 있었습니다.

(현실이 된 범죄)

감람산의 그 밤은 쌀쌀했습니다. 깊고 어두운 밤처럼 예수님의 마음도 무겁고 고독했습니다. 예루살렘의 증오의 화살, 군중들의 실망에 찬 분노, 살기 가득한 종교지도자들의 위협이 주마등처럼 주님의 눈앞을 스치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더하여 예수님은 그의 제자의 배반을 등에 지고 겟세마네 동산을 향하여 오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 앞에 자기를 굴복시키는 피눈물 나는 기도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이 잔을 마시지 않을 수 있다면, 이 장엄한 역사에 피 흘림을 피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멀리하여 주시옵소서.
인성을 가지신 주님의 최후의 고뇌가 섞인 기도의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남긴 최후의 기도의 한마디는 오히려 단순하였습니다.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인간의 상상을 초월한 기도였습니다. 젊은 청년 유다, 자신의 꿈과 뜻을 펴기에 몸부림치고 조금의 이익이라도 챙겨보겠다는 유다와는 너무나 대조적인 순간입니다.
어느새 가롯 유다는 칼과 몽둥이를 들고 온 무리를 이끌고 자신의 스승 앞에 나타납니다. 어두운 밤 군병들은 누가 예수님인지를 분간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3년이란 세월동안 그림자처럼 따르던 유다에게는 자기의 스승을 쉽게 알아보는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배신자의 인사는 이어집니다. 가증한 입을 스승의 얼굴에 맞추면서 인사를 연출합니다. 자신이 입을 맞춘 그분이 예수일터이니 지체 없이 체포하라고 제사장들에게 들려주었던 그 입과 양심은 이제 완전히 사탄의 노예가 되어 나타났습니다.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그 밤의 적막을 깨뜨리며 외쳐진 유다의 위선적 음성에 저 하늘의 별빛도 부끄러워 빛을 가렸습니다. 세상을 향한 예수님의 자비의 달빛은 자기의 스승을 파는 유다의 죄악의 검은 구름으로 가려지는 순간이었습니다. 마치 우리 자신의 이기심과 탐욕의 구름이 우리 안에 있는 진리의 양심을 덮어 버리는 순간처럼 말입니다.

(십자가의 출현과 유다의 후회)

무리들이 예수님을 끌고 가 심문하고, 온갖 조롱을 했습니다. 인간들이 더러운 죄악의 침을 그 분의 얼굴에 뱉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날카로운 납덩이로 만든 채찍이 그분의 부드러운 살을 파고들고, 살점이 찢겨 땅에 떨어 졌습니다. 고통의 가시로 장미보다 더 붉은 예수님의 피는 인간이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신음소리와 함께 뚝뚝 흘러 내렸습니다. 원수들의 날카롭고 예리한 창이 그분의 살을 파고들어 난도질을 하였습니다. 십자가상의 예수님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 홀로 고통스러워했고, 그 분의 눈동자가 충혈 되었습니다. 그의 사랑하는 제자들과 온 인류를 향한 뜨거운 심장은 배신과 증오의 칼에 터지고 말았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의 고통당하신 것을 보면 자기의 마음이 흔들림이 없을 줄 알았습니다. 적은 돈이라도 챙긴 자신의 계산적인 생각이 승리의 노래를 부를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자꾸만 마지막 만찬에서 보내셨던 예수님의 눈빛이 눈에 아른거립니다. 배반의 입맞춤을 할 때도 “친구여....” 하시면서 어서 계획된 대로 자신의 할 일을 계속할 것을 재촉하셨던 그분의 음성이 뇌리를 떠나지 아니합니다. 사라져 버린 양심인줄 알았는데 일말의 양심을 남아서 움이 트기 시작합니다. 자신에 대한 혐오와 자학만이 생겨났습니다. 이제야 제정신을 가다듬고 스승을 노예의 몸값에 팔아 십자가의 형장으로 가게 한 자신의 범죄를 뉘우칩니다. 마치 죄의 장에서는 승리의 개가를 부르고 정신을 가다듬고는 눈물을 지우는 현대의 생명들처럼 말입니다.
가롯 유다는 드디어 당황합니다. 대제사장들과 원로들을 찾아갑니다. 어제까지도 유다를 반겨주던 그들은 이제 가롯 유다를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아니합니다. 냉대의 눈길만을 보낼 뿐입니다. 경멸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유다는 철저히 죄의 도구로 전락한 몸이 되었습니다. 늦게야 잠을 깬 그의 양심은 그가 손에 쥐고 있는 은 30이란 물질이 얼마나 무가치한 것을 알게 됩니다. 아무리 많은 물질이 산더미처럼 자신의 앞에 쌓일지라도 그것은 한낱 물거품과 같을 뿐임을 깨닫게 됩니다. 세상의 어떤 부귀영화와도 바꿀 수 없는 스승님을 생각하면서 그제야 통한의 눈물을 흘립니다. 그리고서는 자신의 손에 쥐고 있는 그 부끄러운 은 30의 현금을 종교지도자들의 면전에 던집니다. 그리고 실로 부끄러운 자신의 모습을 서술합니다.
“내가 죄 없는 분을 배반하여 그의 피를 흘리게 하였으니 나는 죄인입니다.”
천추에 씻을 수 없는 죄의 공범자들이 그 말에 귀를 기울일 리가 없습니다. 가롯 유다를 이용하여 거대한 목적을 이룩한 종교지도자들에게는 이제 가롯 유다에게 더 이상 찾을 것이 없습니다. 이용가치가 없었습니다. 그러하기에 그들에게서 나오는 말은 아주 간단합니다.
“우리가 알바 아니다. 그대가 알아서 처리하라”
툭명스러운 한마디로 그들의 관계는 끝이 났습니다. 물질과 명예에 눈이 어두워 살던 젊은 청년 가롯 유다, 그는 3년의 세월을 동거 동락하던 제자들에는 영원한 사탄의 몸으로 규탄되었습니다. 어느 제자 한사람이라도 그의 손목을 다시 잡아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자신을 반기던 공범자들로부터도 버림을 받았습니다. 세상의 어느 구석에서도 그를 반기는 자가 있을 리 없습니다. 자신의 꿈이 이룩되지 못할 바에야 스승을 팔아서라도 몇 푼의 돈을 챙기겠다는 불쌍한 행동을 저지른 유다의 갈 곳은 진정 이 땅위에는 마련되어 있지 아니했습니다.
이제 그는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자기 머리를 쥐어뜯으며, 성읍 변두리로 뛰어 갔습니다. 그는 자기의 가증스러운 몸이 의지할 곳이 이 땅위에 없음을 잘 알았습니다. 자신의 피안처는 스스로 목숨을 끓는 길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드디어 인적이 없는 밭에 나아가 나무에 목을 매어 달립니다. 그의 목숨이 끊어지자 땅에 거꾸러져서 배가 갈라져 내장이 온통 터져 나오는 처절한 죽음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어두운 물질에 눈이 밝은 인간의 당연한 종착역입니다. 싸늘하게 식은 한 젊은이의 시체가 들판에 나뒹굴고 있었습니다.
오늘도 이 들판에는 가롯 유다의 난파당한 꿈의 배에서 후회와 통한의 소리가 들리는 듯 합니다. “여러분의 종교적 열심 속에 숨겨진 꿈과 야망이 무엇이냐”고 누구인가 묻고 있습니다. “당신은 자신의 꿈을 펼치기 위하여 예수님을 찾고 있는지 아니면 그분의 부르심에 순수하게 모든 것을 맡기고 오늘을 살아가는지”
오늘도 가롯 유다는 우리 가운데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아니 내 안에 머물고 있습니다. 나마저 통한을 안고 쓰러진 죽음의 주인공으로 만들기 위하여........

2. 본 설교가 있기까지

오늘의 가롯 유다

21세기의 문전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변천은 하루가 다르게 그 내용과 형태의 모습을 달리하고 있다. 특별히 이 변화의 물결에서 가슴이 아픈 것은 가치관의 기준이 너무나 많이 변하여 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인류의 가장 소중한 것을 상실하면서도 그 상실에 대한 아쉬움마저 느끼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특별히 고결한 정신세계의 몰락이 심하게 연출되고 있다는데 그 문제의 심각성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요즈음처럼 “정신은 언제나 우주의 지배자"라고 설파했던 플라톤의 말을 실감해본 적이 일찍이 없었다. 이 땅의 모든 것을 지배하는 것이 고결한 정신이 아니고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물질적인 것이라는데 뜻이 있는 사람들의 탄식이 일고 있다. 20세기의 후반을 완전히 지배한 물질만능의 자본주의 사회구조가 정신세계의 몰락을 가져와서 예전에는 상상할 수 없는 기이한 현상들이 이곳저곳에서 발생되고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물질만을 추구하는 이웃나라의 사람들을 보면서 ‘경제 동물-Economical animal'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그들을 조롱거리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리고 가난해도 고고한 정신을 가지고 높은 도덕률과 윤리적인 삶을 지켜가는 우리의 민족에 대한 긍지를 가지고 그동안 잘 지탱하여 왔다. 그러나 오늘 우리 민족이 직면한 사회상은 바로 우리가 이웃나라의 조롱거리로 비추어지는 현상을 빚고 있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다.
한국의 방방곡곡에 교회가 가득히 서 있고 교회의 네온사인에 불이 켜 있는데도 이 땅의 어두운 사연은 오히려 기승을 부린다. 세계의 기독교가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주시하는 교회로서 급성장한 한국의 기독교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변질된 사회의 구조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오히려 침몰의 위기를 맞고 있다. 교회가 하나님의 백성들이라는 고유한 신분을 가지고 그 고유한 정신세계(Ethos)에 머물지 못한다면 쉬이 죽음의 골짜기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위기적 현상의 진단이나 처방은 한국 교회라는 거대한 집단에서부터 시작할 것이 아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집단을 형성하는 개체의 신앙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복원되어야 한다. 오늘도 곳곳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는 신분의 소유자들이 그 예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자신의 욕구를 체우고 명예를 이룩하고 부를 추구하는 모순이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다. 심지어 길가의 걸인들까지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스피커로 들려주면서 먹고 살아가는 기이한 모습을 본다. 이 모두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뜻이 있는 설교자들은 오늘도 고민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찾고 있다.

오늘의 설교가 있기까지

필자가 사역하고 있는 선지학교에서는 2학년 2학기마다 어김없이 주는 설교의 형태와 주제가 있다. 설교의 주제는 가롯 유다이고 그 형태는 설화체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대학을 졸업하고 선지동산의 문안에 들어 온 선지생도들은 나름대로 엘리트 의식을 가지고 오늘의 우리 교회의 현실을 날카롭게 비판한다. 그러나 그 주체의 일원이 자신일 수 있다는 진단의 소리는 좀처럼 듣지를 못한다. 그래서 가롯 유다의 이야기를 30명의 학생들이 설교로 준비하여 스스로와 동료 학생들이 경청하도록 한다. 그 이유는 나와 유다의 간격이 어떨 때는 너무나 근접해 있음을 느낄 때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나를 구원해 주신 예수님에게 채무자의 심정으로 오늘을 사는 것이 아니라 그 이름을 유산으로 하여 나의 의식주와 명예를 추구하고 있는 듯 한 순간들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오류를 나의 학생들만은 범하지 말아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에서 가롯 유다를 섬세히 살피고 거기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메시지를 찾도록 한다.
필자는 설교학 교수로서 ‘설교의 실제’를 맡은 학기에는 200편이 넘는 설교를 경청해야한다. 설교자의 자세를 비롯하여 그 설교의 내용과 그 전달의 섬세한 부분까지를 관찰하고 평가하는 것이 그 학기의 주 임무이다. 감사한 것은 사랑하는 선지생도들에 의하여 운반된 동일한 주제의 메시지를 한 주간에 30여 편을 들어도 염증이나 싫증을 느끼지 아니한다. 특별히 이 사역은 하나님이 주시는 남다른 은혜로 여겨진다. 이유는 나의 학생들의 신선한 설교를 통하여 많은 메시지를 접하고 감동을 받을 수 있기에 귀하고 값진 사역이라는 긍지를 가지고 있다.
오늘의 설교는 95년 2학기에 있었던 설교의 실제 시간에 발굴된 설교이다. 한 학생이 최선을 다하여 준비하고 운반한 설교로서 교수의 가슴에 와 닿은 진리가 서술되어있었다. 설화체 설교를 연제하고 있는 필자로서는 내 자신의 설교만을 실은 것보다는 설교를 가르치는 과정에서 발굴된 우수한 한편 정도의 설교를 다시 재편집하여 내 놓을 필요성을 느낀다. 그 이유는 설교에 깊은 관심을 갖는 필자의 문하생들에 의하여 설화체의 설교가 어느 정도의 수준에 이르고 있으며 그 효과성이 어느 정도인지를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본 설교의 보완 과정

앞에서 설명한대로 본 설교는 한 학기의 설교이론을 끝낸 학생이 설교의 실제 과정에서 학점 이수를 하기 위하여 준비한 설교원고이다. 이 원고를 제출한 학생은 자신에게 배당된 시간에 학생들과 교수 앞에서 설교를 해야 한다. 이 때 설교를 듣는 동료 학생들은 주어진 평가서에 따라 평가를 하고 교수는 전달에 있어서의 장단점을 섬세하게 지적을 해 준다. 그리고 제출된 설교 원고는 교수로부터 인정을 받을 때까지 수정보완을 계속한다. 오늘의 설교도 이러한 수정보완의 과정을 몇 차례 거쳐서 통과된 것이다. 본 설교가 수정보완 되었어야 할 부분들은 다음 네 가지의 사항이었다.
먼저는, 가롯 유다의 인물이 보여준 기록의 모든 부분을 빠지지 않고 서술하려는 의욕을 부림으로서 어디에 중요한 메시지가 있는지를 보여주지 못하는 결점이 있었다. 중요하지 않은 부분들은 단 한 줄로 해결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것을 그대로 한 문단 이상으로 이어져 감으로 설교의 장황함이 그대로 노출되었다.
둘째는, 석의의 과정을 거쳐서 가롯 유다에 대한 완전한 이해와 그 정황을 정확히 파악해야 하는데 한글 성경에 나타난 표상적인 서술만을 의존하여 복음서와 사도행전에 나타난 그의 행적에 대한 깊은 연구가 부족함이 너무 뚜렷하였다.
셋째는, 본 설화체 설교는 조용한 시간에 석의를 하고 다시 해당된 본문을 읽고 원고를 쓰기 전에 유다의 입장에 깊이 몰입되어야 하는 정관(靜觀-contemplation)의 시간을 통과하여야 하는데 그 점이 부족하였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넷째는,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자신과 연관을 맺어야 할 메시지의 부분을 먼저 발견하고 항목화 하는 단계를 거치지 아니하였다.
이상과 같은 지적과 함께 본 설교를 재구성하게 하였다. 그리고 간결하면서도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의 눈에 섬광처럼 빛날 수 있는 메시지를 찾도록 지시하였다. 그리고 본 메시지의 효율적인 접근을 위하여 다음과 같이 우선적으로 단원을 분류하도록 하였다.
먼저는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예수와 함께 살면서 누구나 갖기 쉬운 가롯 유다의 야심을 생각하게 하였다. 둘째는, 주님과 동행하면서도 밀려오는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늘 고민하기 쉬운 문제들을 생각하면서 가롯 유다가 보여준 갈등을 찾도록 하였다. 셋째는,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죄에 끌려 마침내는 죄의 종이 되어버리는 현실적인 문제들을 스스로의 것으로 생각하면서 가롯 유다의 배신과 범죄의 장을 적나라하게 표출시키도록 하였다. 그리고 끝의 부분은 배신과 범죄를 저지를 다음에 누구나 한 번쯤은 후회를 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실상을 연상하면서 가롯 유다의 후회하는 모습을 뚜렷하게 부상시키도록 하였다. 특별히 설교자는 객체의 입장에서 서서 서술할 것이 아니라 반드시 자신이 가롯 유다로 변신되어 깊은 명상의 시간을 갖도록 권하였다. 그럴 때 살아있는 체험적 서술이 가능함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보완의 작업을 통하여 본 설교는 비록 완전하지는 못하나 독자들에게 선을 보이게 된다.

본 설교의 목적과 그 형태

설교의 목적은 광의적인 입장에서 네 분야로 분류한다는 사실을 이미 서술한바 있다. 그 네 분류는 전도를 목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생애와 교훈과 수난과 부활과 승천과 재림을 선포하는 선포적인 설교(Keygmatic Preaching)를 비롯하여, 성경의 진리와 교리 또는 신학을 담아 가르치는데 목적을 둔 교훈적인 설교(Didactic Preaching)와 상처받은 영혼과 삶의 아픔을 싸매어 주는 목양을 목적으로 하는 치유설교( Therapeutic Preaching)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고 곁길로 나아가는 사회와 개인을 바르게 인도하기 위한 예언적인 설교( Prophetic preaching)로 분류됨을 설명한바 있다.
이상과 같은 설교의 기본적인 목적들을 앞에 놓고 본 설교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이미 예언적인 설교로 확정하였다. 그 이유는 이 설교가 예수 그리스도를 방패삼아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지적하고자 하는데 그 일차적인 목적을 두었기 때문이다. 환언하면 본 설교는 가롯 유다의 생각과 행동과 범죄를 생생하게 보여줌으로서 설교자를 포함한 모든 회중들이 얼마나 가롯 유다와 근접해 있는가를 발견하게 하는 그 의도를 가지고 있다. 이 의도 자체가 본 설교로 하여금 예언적인 설교로 그 목적을 정하게 한 것이다.
본 설교의 형태는 바로 이상과 같은 목적을 가지고 준비한 설교로서 지금까지 다루어 온 대지설교나 분석설교의 전개형태를 빌리지 아니하였다. 이 설교는 설교자의 주관적인 해석이나 적용을 가급적이면 배재하고 그 사실 자체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데 온 정신을 기울이는 설화체 설교의 형태를 취하였다. 그래서 이러한 형태를 이야기를 해주는 설교형태(Story Telling Preaching)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설교 형태를 사용함에 있어서 언제나 부담이 되는 것은 비록 설교자가 깊은 정관(靜觀)을 통하여 신령한 은혜의 진리를 발견했다고 하더라도 그 진리의 표현에서 실패를 가져오기 쉽다는 점이다. 설교자가 가지고 있는 어휘 실력이나 빈곤한 문학적 표현을 통하여 자신이 받은 감동을 다 표현하지 못한 채 회중들의 수준을 넘지 못한다면 이 설교형태는 완전히 실패를 가져오기 쉽다. 회중은 언제나 자신이 알고 있는 수준의 내용을 반복하는 설교자를 따르지 않고 경멸에 가까운 눈으로 주시한다는 사실은 설교 사역에서 얼마든지 경험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래서 본 설화체 설교는 회중들이 우러러 볼 수 있는 통찰력과 전개와 문학적 서술을 요구받게 되는 것이다.

설화체 설교가 기대한 효과성

1. 지금까지의 교회의 강단에서 외쳐진 설교는 거의 대부분이 명령형의 내용과 형태를 취하여왔다. 설교자의 생각과 언어도 하나님의 이름만 빌려 사용하면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神言)이 되는 듯한 착각을 발생한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 교회의 강단에서 유난히도 심각한 현실이다. 이러한 그릇된 발상은 자연적으로 설교를 명령형 일변도로 이어 가게 된다. 여기에 반기를 들고 나선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과 그가 전개하신 사건은 인간에 의해서 조작되지 않고 그대로 운반되어야 한다는 학설이 나오게 되었다. 이러한 이론은 바로 설교의 형태에까지 이어져서 사실의 현시(顯示)를 가져오는 설화체 설교가 등장하게 되었다.

2. 이와 같은 설교의 뜻을 내포하고 나타난 설화체 설교는 설교자가 주관적으로 설명하고 ‘이것이 당신이 먹어야 할 양식이다’고 외치는 고정된 설교의 틀을 벗어나는 획기적인 효과가 있게 되었다. 즉, 설교자가 선택하여 주는 것이 아니라 회중이 스스로 선택하여 먹도록 하는 새로운 시도를 하게 되었다.

3. 이러한 결과에 대한 연구의 발표는 한결 같이 회중이란 스스로 선택한 메시지에 훨씬 더 실감을 느끼게 될 뿐만 아니라 그 메시지에 대한 책임을 안고 가게 된다는 보고를 하고 있다. 여기에서 인간이란 상대로부터 주어진 것에 대한 관심보다는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한 진리를 더욱 소중하게 생각한다는 원칙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4. 지금까지 수직문화에서 이어진 명령일변도의 설교분위기를 본 설화체 설교가 등장함으로서 수평문화의 설교 분위기를 새롭게 형성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결과는 회중들이 매우 신선하고 편안한 감각을 소유한 채 설교를 경청하게 된다.

5. 설화체 설교는 구어체의 언어로 생각나는 대로 구사하는 설교가 아니라, 정선된 언어로 문학적 감각을 가지고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는 새로운 설교이기에 회중들은 매우 진지한 자세를 취한다. 그리고 설교자가 보여준 그의 진지하고 예리한 통찰력과 정성을 기울여 수식된 어휘들을 들으면서 설교자의 준비성에 새로운 반응을 보이게 된다.

3. 본 설교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

오늘의 설교는 앞에서 설명한대로 필자의 설화체 설교 이론에 따라 제출된 설교이다. 이 설교는 바로 몇 차례의 보완과정을 거쳐 제출된 것이다. 그리고 필자의 손에 의하여 여러 곳에 새로운 수정보완이 따랐다. 비록 수정보완이 따라서 독자들의 손에 주어진 설교이지만 다음의 몇 가지를 설화체 설교의 이해를 위하여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함께 평가하고자 한다.
첫째로, 본 설교는 그 서론이 매우 우수하다. 본 설교형태의 서론은 다른 설교에서 필연적으로 가져오는 형태를 전혀 사용할 수 없다. 오직 그 인물이나 사물을 접근해 가는 정황(context)을 지혜롭게 서술해야 하는데 이러한 점을 본 설교의 서론에서는 효과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둘째로, 본 설화체 설교가 빠지기 쉬운 함정은 정확한 석의를 하지 않고 임의로 정황을 묘사함으로 자칫 진리를 비사실화( Fictionalize) 시키는 경우이다. 그러나 본 설교는 이러한 균형을 매우 적절히 지키고 있다. 예를 들면 오늘의 설교에서 향유를 주님의 발에 바른 마리아를 향한 가롯 유다의 지적을 스승을 향한 항변으로 서술한 경우이다. 아주 적절한 수준을 지키고 있다. 여기서 조금만 벗어나면 사건을 자신의 시각으로 서술하게 되고 그 서술은 사건을 비화 시키는 경우로 가게 된다.
셋째로, 철저한 석의 과정을 거쳐서 당 시대를 정확히 이해하려는 노력의 흔적이 보인다. 예를 들면 로마 제국의 국기에 독수리 그림이 있었다는 사실을 인용하면서 로마의 잔인성을 부각시키는 것은 매우 효과적인 표현들이다. 이러한 것은 설교자의 깊은 통찰력과 섬세한 연구가 함께 한 흔적이기도 하다.
넷째로, 그러나 본 설교에서 무엇보다도 지적을 받아야 할 것은 문장의 묘사에 문학성의 결여가 매우 아쉽다는 문제이다. 설교학 교수로서 최근에 느끼는 것은 70년대부터 이어지는 우리나라의 교육이 인성과 정서 등의 분야는 도외시하였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낀다. 그 이유는 오늘의 젊은이들이 자연을 감상하고 문학전집을 읽으면서 성장할 겨를이 없었기에 그들의 표현이나 사고가 문학적인 세계와는 점점 거리가 멀어 감을 발견하게 된다. 설교자로 진출해야 할 젊은이들에게는 참으로 아쉬운 부분의 결여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다섯째로, 아직도 설교자가 가롯 유다를 멀리서 바라보면서 예리한 비판만을 가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본 설교의 작성자가 가롯 유다의 입장에 깊이 들어가지 못하고 있음으로 인하여, 본 설교를 읽은 후 ‘가롯 유다와 같은 나’를 찾는 것보다는 ‘역사적인 죄인 가롯 유다’만을 생각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여기서 본 설교의 보다 효과적인 결과를 상실했다는 평가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끝으로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을 점검하는 길이란 하나님이 성경을 통하여 들려준 말씀에 따라 자신을 조명해 보는 것이 가장 정확한 길이다 는 점이다. 성경에서 보여주신 사건과 인물을 통하여 스스로를 비교해 보고 거기에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발견하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한 신앙생활의 한 과정이다. 이것은 어느 설교자의 견해와 판단이나 충고에 의한 것보다 훨씬 더 정확하고 효과적인 길이다. 그러하기에 진정한 설교자는 하나님이 성경을 통하여 주신 말씀에 회중을 이끌고 가서 거기서 직접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도록 하는 노력을 기울인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