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베드로의 눈물 (눅 22:54-62)

첨부 1


베드로가 주님을 처음으로 만나 시선이 교환되던 순간이었습니다. 갈릴리 바다 속 깊이 까지 훤히 보시는 그 시선으로 자신의 심장까지 꿰뚫어 보시는 그 분의 위엄 앞에 그의 마음이 묶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나를 따르라. 이제부터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어라”는 명령 한마디에 사로잡힌 몸이 되었습니다.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질문 한마디 없이 주님을 따라 나섭니다. 생업의 전부였던 배도, 그물도, 삶의 터전도, 미련 없이 버리고 따라 나섭니다. 하늘의 권세를 지니신 주님의 가르치심에 아낌없이 그의 생애를 던질 수 있었습니다. 모든 것을 버렸어도 주님의 사랑만으로 충분했던 3년의 세월이었습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나 잡으면서 살던 어부의 신분으로서 그는 그동안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위대한 스승을 모시는 기쁨은 그에게 가장 행복한 조건이었습니다.
주님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실 때 주저함 없이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고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라고 대답할 수 있는 그의 신앙고백은 어느새 그의 믿음이 단순한 열정에 머문 것이 아니라 깊은 지성에까지 자리 잡고 있었음을 입증해주었습니다. 이러한 신앙은 스승님의 인정을 받기에 충분하였고 드디어는 “내가 너에게 천국 열쇄를 맡기리라”는 상상할 수 없었던 극찬의 순간을 맞기도 했습니다. 베드로는 누구보다 행복했습니다. 만족했습니다. 그리고 그 주님을 사랑하는데 자신의 생명을 내 놓을 수 있다는 장담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주님과의 가장 가까운 관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실망과 두려움의 밤길에서)

주님의 지상 생애의 마지막 장이 넘어가고 있던 때였습니다.
칭송하는 무리의 환호와 "호산나" 외치며 흔들던 종려나무 가지는 아직도 그의 가슴을 흔드는데, 마지막 만찬을 나누시던 자리에서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하신 주님의 예언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주님을 위로하듯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주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라고 베드로는 가슴을 펴 보이며 장담했었지만, 이 밤 졸고 있는 베드로의 머리위로 어두움의 그림자는 한 걸음씩 다가서고 있습니다.
기드온 시내 건너편, 감람산 기슭에는 겟세마네 동산이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제자들을 이끌고 어두운 밤길 우리 주님은 이 동산에서 심각한 기도의 순간을 갖게 됩니다. 이제 이 기도 속에 인류의 구원이 달려 있었습니다. 제자들에게 "깨어 기도할 것"을 부탁하시고 홀로 올라가 기도하는 순간에 고통과 비탄의 파도는 주님의 영혼을 덮치고 있었습니다. 달빛만이 피땀으로 고뇌하는 주님을 지키고 있을 뿐 아무도 주님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합니다. 피곤에 지쳐 잠든 제자들은 기도는 고사하고 그들을 일깨우는 주님의 음성도 제대로 듣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도 요한도 야고보도 그 왜 어떤 제자들도 주님의 깊은 고뇌에 동참하지 못하였습니다.
거룩한 희생의 길목에서 주님이 아버지의 뜻 앞에 자신의 모든 것을 굴복시키시고 조용한 신뢰로 기도를 마치셨을 때, 갑자기 감람나무 숲이 흔들리며 횃불을 든 행렬이 검과 곤봉을 가지고 나타납니다. 대제사장들과 성전 관원들, 그리고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무리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무장은 필요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끌려 주님은 잠잠히 어두움의 시간으로 걸어 들어가십니다. 두려움에 쫓겨 뿔뿔이 흩어지고 있는 제자들 틈에서 베드로의 자신 만만했던 충성심과 죽음도 불사르려던 결심이 촛불처럼 흔들거립니다. 그의 주님은 무력해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실망과 두려움으로 얼룩진 가슴을 추스르며 그래도 주님 곁에 있고자 쫓아가지만 자꾸만 무거워지는 마음이 그를 멀찍이 따라가게 합니다.

(배신의 언어를 외치고서)

예루살렘 거리를 지나 어두움 속에서 입 벌리고 있는 대제사장의 집으로 주님은 침묵하는 양이 되어 끌려가시고, 주저하듯 뒤따르며 따라 들어서던 베드로는 뜰을 향하여 열려있는 그 집의 문들을 보는 순간 가슴이 조여듭니다. 도망가고 싶은 충동과 공포에 맞서면서 그래도 그는 사랑하는 주님 곁에 있으려고 합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지켜보아야만 하겠다는 충성심이 아직도 살아있었습니다. 차가운 바람이 두려움에 떠는 베드로의 어깨 위로 스치고 지나갑니다.
불을 피우고 앉아 있는 사람들 틈에 끼어 앉으면서 베드로는 자신이 그 들 중의 하나로 여겨지기를 바라지만 승리감에 들떠있는 사람들의 분위기 속에서 자꾸만 자신이 없어집니다. 불빛에 베드로의 얼굴이 드러나자 야멸치게 그를 고발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이 사람도 예수와 함께 있던 사람이다." 한 여종의 말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 쏠리자 그렇지 않아도 두려움에 가슴 조이던 그의 입에서 즉각적으로 자신을 방어하는 배신의 말이 튀어나왔습니다. "여자여, 내가 저를 알지 못한다." 주와 함께 옥에도 같이 가고 죽는데도 같이 가겠다던 그 입술로 말입니다.
마치 주님을 따라 걷노라 하면서 주님의 이름이 모욕당하고, 기독교 신앙이 웃음거리가 되는 곳에서는 스스로 슬며시 그리스도인임을 감추고 싶어 하는 오늘의 신자들의 모습과도 같지 않습니까
애써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며 발각되지 않기만을 바라고 있는 베드로의 귀에 조금 후에 또 한사람의 말이 들립니다. "너도 예수당이지" 순간적 위기감이 그를 감쌉니다. 불안으로 헐떡이며 그가 단호히 말합니다. "나는 아니다." 주님을 지키려 말고의 귀를 자르던 베드로의 용기는 어디로 갔습니까 베드로가 자신을 변호하려 하면 할수록 그의 성급해진 말에서 튀어나오는 갈릴리 억양이 그의 출신을 더욱 분명하게 해 줄 뿐입니다. 확증을 얻은 듯 또 한사람이 말합니다." 이 사람은 갈릴리 사람이다. 참으로 그와 함께 있던 사람이다." 베드로는 집요하게 자기를 예수의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그들에게 화가 납니다. 당황하고 흥분한 베드로는 예수님과 무관한 관계임을 증명하고 싶어 더욱 단호하게 부인합니다. "나는 네가 하는 말을 모르겠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아무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마16:24)라고 가르치시곤 했습니다.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베드로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져야 할 때인데, 그러나 지금 오히려 자기를 위해 주님을 부인하고 있는 이 모습은 오늘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까

(새벽의 수탉이 울때)

베드로의 세 번째 배신의 말이 끝날 때에 그의 가슴을 때리듯 닭이 울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몸을 돌이켜 자신을 변호하느라 여념이 없던 베드로를 바라보십니다. 주님의 시선에 사로잡히는 순간 베드로의 가슴은 힘없이 무너집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닫습니다.
"새벽의 닭이 울기 전에 네가 나를 부인하리라." 하신 말씀이 사실로 되는 순간임을 직감했습니다. 예수님은 책망이 아닌 슬픔과 안쓰러움의 눈빛으로, 이 나약한 제자의 당황을 이해하시며 그를 바라보셨습니다. 그 눈빛은 변함없는 사랑이셨습니다. 달려가면 이제라도 안아주실 듯한 그 주님의 품에 배반의 돌을 던진 더러운 자신의 모습이 추하고 부끄러워 차마 그 자리에 있지 못하고 뛰쳐나가 베드로는 통곡합니다.
주님 자신은 불의하고 잔혹한 폭도들 가운데 계시면서도 마지막까지도 이 연약한 제자의 실패와 쓰러짐을 염려하셨습니다. 몸부림치며 우는 베드로의 귓가에 주님께 장담하던 자기의 약속과 고백이 공허한 메아리가 되어 사라집니다. 처음 주님을 만난 날 이후 수많은 무리를 가르치시며 물위를 걸으시던 주님을 바라보며 감격하던 순간들, 참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며 죽기까지 주님을 따르겠노라고 다짐했었고, 유다가 주님을 배반해도, 다른 모든 제자들이 주님을 떠나도 자기만은 홀로라도 주님을 지키리라 자부했었는데...... 그렇게 장담하던 충성이 위기의 순간에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후회와 개탄으로 얼룩진 통곡)

베드로는 실패했습니다. 자신의 믿음이 얼마나 연약한 것인가를 경험했습니다. 주님을 따른 숱한 무리들에게 실망과 슬픔을 안겨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를 버리시지 않으시고 용납하시는 주님의 사랑은 베드로를 일으키십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부인을 미리 들려주시는 자리에서 동시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라."(눅22:32)
베드로는 인자한 주님의 얼굴과 음성을 다시 되새기면서 사랑했던 주님 앞에 송구스러운 눈물을 흘립니다. 후회와 개탄으로 얼룩진 통곡을 계속합니다. 날이 밝자 우리 주님은 벌써 빌라도의 법정에 서시게 되고 어느새 무거운 십자가를 끌고 골고다 언덕길을 오르고 있었습니다. 쓰러지고 일어서고를 반복하시는 주님을 보면서도 가까이 달려가 그 십자가를 자신이 져 드리지 못한 그 안타까운 순간에 발만을 구르면서 눈물을 흘릴 뿐이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그 살이 다 찢기시고 그 몸의 피와 물이 다 흐를 때 베드로의 가슴은 찢어질 듯이 아팠습니다. 그 장렬한 십자가의 수난 앞에 이제는 눈물마저 멈춥니다. 그리고 입술을 깨물고 새로운 다짐을 합니다.
베드로는 마음에 깊은 상처를 안고 주님을 따르기 전의 생업이었던 어부로 돌아갑니다. 갈릴리 바다에 그물을 던지면서도, 그 그물을 다시 끌어 당기면서도 그의 마음은 사랑하는 주님 앞에 변절자의 모습을 보였던 자신의 나약했던 모습만이 원망스러울 뿐이었습니다. 마치 오늘의 우리들이 주님 앞에 저지른 과오를 생각하면서 오늘도 괴로워한 것처럼 말입니다.

(부활의 주님 뵙고 받은 사명)

그 악몽의 순간이었던 날들이 지난지 3일만에 우리 주님은 부활하셔서 고기 잡는 베드로를 찾아오셨습니다. 밤새껏 노력했으나 아무 소득이 없어 허탈감에 빠진 그들을 도와 고기를 가득히 잡게 해 주었습니다. 그 순간 누구인가 외칩니다. “저 분은 주님이시다”
바로 그 순간입니다. 베드로는 감격합니다. 변절자인 자신을 끝내 버리시지 않으시고 다시 찾아와 주신 주님이 너무나 고마웠습니다. 너무나 황송하였습니다. 그 주님 앞에 일초라도 먼저 달려가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고백을 해야 했습니다. 그는 벗었던 몸에 겉옷을 성급하게 걸치고 바다로 뛰어듭니다.
실패자에서 승리자로, 죽은 몸에서 부활의 몸으로 찾아오신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이 때 주님은 베드로가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 겨를도 주시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은 허기진 제자들이 먹을 아침 식사를 준비하시고 “와서 아침을 먹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준비하신 식사를 마치자마자 주님은 베드로에게 묻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참으로 기대하지 않던 질문이었습니다. 너무나 뜻밖의 질문이었습니다. 차라리 주님이 다음과 같은 질문을 주시기는 것이 그에게는 부담이 더 적었을 것입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어찌하여 네가 나를 부인하였느냐
어찌하여 그렇게도 용기가 없었더냐
죽어도 나를 버리지 않겠다던 너의 약속이 그렇게도 허무한 것이었더냐
베드로야! 너마저 나를 버린다면 누가 나를 따르겠느냐”

그러나 주님의 질문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마음을 파고드는 질문이었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대답할 말은 오직 한 마디였습니다. 비록 자신이 순간의 환경에 휘말려 전혀 엉뚱한 행동을 했을지라도, 비록 육신적인 공포에 젖어서 주님을 실망시킨 언어를 남발했을 지라도 주님 사랑하는 그의 일편단심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머리 숙여 정직하게 대답합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십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십니다.
주님! 주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십니다.

그 때 주님은 간단한 명령을 베드로에게 내리십니다.

내 어린양을 먹이라
내 양을 쳐라
내 양을 먹이라.

(새롭게 태어났다가 죽은 생명)

베드로는 허약한 믿음과 결심으로 부끄러운 결과를 초래했던 자신에게 주님이 책망의 말씀을 주시기를 기다렸건만 주님의 양을 먹이라는 분부만을 받게 됩니다. 이 명령 이후로 베드로는 다시 고기 잡는 어부로 돌아가지 아니합니다. 새로운 세계를 향하여 달려갑니다. 주님의 명령대로 주님의 양들을 먹이는데 삶 전체를 던집니다. 그 이후로 어떤 아픔도 눈물도 땀도 자신이 받은 거대한 주님의 용서에 비교 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떠한 수모도 어떠한 핍박도 새롭게 주신 주님의 소명을 실천하는데 거침돌이 될 수 없었습니다.
실패의 쓴잔이 평생을 따랐던 고통의 세월을 보낸 베드로에게 드디어 십자가가 지워지던 날 그의 눈에는 남다른 감회가 번쩍거립니다. 그것은 사랑하는 주님이 십자가를 지셨던 모습이었고 그 주님을 부정해버렸던 자신의 죄스런 모습이었습니다.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혀 생명을 앗아가려는 집행관에게 엄숙하면서도 절박한 간청을 합니다. 십자가에 자신을 매어달릴 때 그의 머리는 땅을 향하여 그의 발은 하늘을 향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의 최후의 순간에 찾아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 주님의 용서를 받고 싶은 마음의 표현은 너무나 눈물겨운 것이었습니다. 그는 끝내 십자가를 거꾸로 지고 눈물을 흘리면서 주님의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의 전신의 피는 발끝에서 흘러내리지 아니하였고 머리끝에서 줄 줄 흘리면서 아무도 어떤 경우도 주님을 자신처럼 배반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 것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곁으로 갔습니다.

2. 본 설교가 있기까지

죄송스러운 후회를 가슴에 앉고

신앙의 연조가 깊어 갈수록 아쉬워하고 그리워하는 사연이 있다. 그것은 주님을 믿고 구원의 확신과 은혜를 경험하였을 때 자신의 가슴에서 타오르던 감사와 열정이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신앙고백이 순간마다 있어지던 것이 세월이 가면서 그 고백들이 식어져 간 것을 누구나 경험하게 된다. 차라리 식어진 열심이라도 명맥을 유지해 준다면 다행이려니와 그 열심마저 망각의 세계에 파묻혀 버린 현실이 발견될 때는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인이 맞는 심각한 위기의 현상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선지생도들을 훈련시키는 장에서 살고 있는 필자에게는 이러한 고민이 누구에게 보다 진하게 나의 가슴을 두드린다. 생각하면 부모님의 핍박을 받으면서도 주일학교만은 출석하여 예배를 드리고 성경공부를 하고 돌아와 감사의 기도를 드리던 어린 시절의 그 순박한 신앙이 아름다웠다. 매일의 새벽을 비롯하여 삼일과 주일의 예배를 알리는 종을 치는 책임을 맡고 그렇게도 좋아했던 그 기쁨이 나에게서 요즈음에는 보이지를 아니한다. 종직이 소년의 사명이 그렇게도 좋아서 종 줄을 붙잡고 "이 종소리를 듣는 사람들을 모두 예배당으로 보내 달라"는 기도를 드린 후 종줄을 끌어당기던 그 시절의 착한 믿음이 지금은 어디엔가 숨기어져 있기에 괴롭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주님!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라는 고백과 기도를 순간순간 드리던 그 열정이 목사가 되고 교수가 된 후에는 나에게서 너무나 멀어진듯하기에 무척이나 괴로워한다.
더 나아가 탈선에 가까운 삶이 이어지면 더욱 당황해진다. 나의 육신의 욕구를 접근해 오는 유혹이 다가오면 “사탄아 물러가라”는 함성을 대담하게 지르지 못하고 힘겹게 비켜가는 위태로운 삶을 살고 있다. 주님을 먼저 생각하고 그 분에게 영광이 되는지를 먼저 저울질 해보던 나의 신앙은 옛 이야기가 되어가는 삶의 장에 서있다. 나의 안일과 명예와 부를 제일로 여기는 탈선의 모습이 종종 보일 때마다 실로 흐트러진 나의 신앙생활에 위기를 느낀다. 솔직히 주님과의 동행을 망각하고 나 홀로 나의 생업의 배를 타고 그물을 던지고 한 마리의 고기도 건지지 못하면서 허탈해 한다. 나의 주인과 그가 명령한 사명을 망각할 때가 적지 아니하다. 그러나 날 버리시지 아니하시고 나의 삶의 현장을 도우시면서 찾아오신 주님이 나를 쳐다보시고 우뚝 서 계신다. 그가 나의 그물을 던져야 할 방향을 지시하신다. 그리고 주님이 주신 일용할 양식을 먹게 하신다. 그리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질문을 던지신다. 그때서야 정신을 가다듬고 주님을 정면으로 보지 못한 채 “주님! 그렇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십니다.”라고 조용히 속삭인다. 그리고 새로운 다짐을 한다. 이러한 과정이 단 일회적이었으면 하지만 늘 반복을 거듭한다. 용서받을 수 없는 배은자의 모습이지만 그래도 주님의 용서가 이어질 것이라는 확신 때문에 다시 일어선다. 오늘의 설교는 이러한 신앙의 고민을 안고 있는 내 자신과 같은 성도들에게 우선적으로 운반되어져야 할 메시지이다.

본 설교가 있기까지의 정황과 사연

앞에서 열거한데로 이 설교자 자신은 늘 후회로 얼룩진 삶이 가득함을 본다. 주님을 섬기는 뜨거운 열심이 식어지고 나의 몸만을 간수하려는 이기주의적인 행동이 늘 발생됨을 느끼면서 괴로워한다. 그 때마다 베드로의 모습이 늘 떠오른다. 그가 주님 앞에서 다짐하던 신앙의 모습과 육신적으로 위기의 순간에 주님을 부정해버린 모습은 2천년 전의 사건으로 끝난 것이 아님을 실감한다. 그것이 바로 내가 연출하고 있는 오늘의 모습과 너무나 근사하다는데 깊은 관심을 두었다. 그리고 더욱 더 나의 관심을 두는 것은 주님을 부정하고 괴로워했던 베드로를 끝내 버리시지 않으신 주님의 모습이었다.
이것은 나 하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공통된 문제라고 생각 하였다. 특별히 교회의 중직을 맡은 사람들, 그리고 선지생도들과 목회자들에게는 모두가 공통된 고민의 문제라고 확신을 하게 되었다.
이 설교는 한 해를 다 보내면서 주님과 나와의 관계를 결산해 볼 필요를 느끼면서 작성된 설교이다. 한 해를 넘기면서 후회스러운 나의 신앙이 발견되어져야 하고 그 발견은 새해에는 바로 정상으로 회복되어져야 한다는 신념에서 찾아진 메시지이다. 그 메시지의 구성은 이미 목회의 장에서 대지설교로서 선포되었으나 만족한 단계에 이르지 못함을 늘 아쉬워하였다. 수년전 신대원 2 학년 2학기에 진행된 설교의 실제 시간에 주제를 ‘베드로’로 정하여 설화체 설교를 발표토록 하였다. 여기서 드디어 필자가 그리던 메시지의 표현이 발견되었다. 그 설교를 다시 보충하고 정리하여 이 설교자가 원하는 메시지의 방향과 표현과 구성을 다듬게 되었다.

본문과 주제의 선정

나를 구원하여 주신 주님 앞에 그 은혜를 다 보답하지 못하고 살아온 나에게는 언제나 후회와 송구스러움이 앞을 선다. 앞에서 서술한데로 처음 사랑을 회복하지 못한 채 살아온 나의 신앙의 현주소를 점검할 때마다 머리를 들고 떳떳이 주님을 쳐다 볼 수 없는 실정이다. 그때마다 후회 섞인 눈물을 흘리고 명상과 기도를 드리노라면 언제나 따뜻한 주님의 다가오심을 느낀다.
이러한 신앙의 고민이 자리 잡은 마음의 바탕에서 본 설교의 준비는 출발되었다. 그러기에 이 설교는 남을 향한 것이기 이전에 내 자신의 직접적인 문제와 관계를 이어갔다. 이럴 때 설정된 주제는 後悔와 再起였다. 이 주제를 가지고 본문 말씀을 찾아 나섰다. 성경에서 후회로 얼룩진 기록을 가지고 평생을 괴로워하면서 살았던 인물을 찾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 후회 때문에 다시 일어서서 주님의 자랑스러운 종의 모습을 장렬하게 보여준 인물을 보여 달라는 기도를 드린다. 그럴 때 어느 때 보다 뚜렷하게 나타난 인물이 주님이 그렇게도 사랑했던 베드로였다.
하나님이 보여주신 성경의 인물을 따라 본문을 선정한다는 것은 쉽지 아니하다. 이유는 그 인물이 관계된 성경의 구절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이럴 때는 그 설교의 전개 형태를 설화체로 하는 경우 관계된 모든 관계성구는 설교에서 보여줄 수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본 설교의 주제와 가장 근접한 말씀을 본문으로 해야 했다. 그것이 바로 베드로에게 일생동안 후회와 괴로움을 안겨준 오늘의 본문이다.

설화체 설교를 위한 석의 작업

모든 설교의 기본이요 최선의 작업은 본문의 석의 작업임을 수차에 걸쳐 강조해오고 있다. 그 이유는 선포해야 할 본문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설화체 설교의 경우 그것이 인물을 중심하였을 때는 그 석의 범위가 넓게 된다. 베드로의 경우 그의 기록이 나오는 모든 성구는 다 찾아야 한다. 그리고 그 기록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겸허히 찾아야 한다. 그 인물에 대한 기록에 대하여 정확한 이해가 끝나지 않고서는 그 인물을 통하여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말씀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베드로의 그 광범위한 기록을 모두 단번에 다 다룰 수 없다는 것 때문에 다음의 부분에 중점적인 석의를 시도하였다. 먼저의 부분은 주님이 어부로 있던 베드로를 부르시던 순간의 기록이었다(마 4:18; 눅 5:1-11). 두 번째의 부분은 주님을 따르면서 누구보다 주님을 정확하게 알고 고백한 가이샤라 빌립보에서의 그의 신앙고백이었다(마 16:16). 세 번째의 부분은 본 설교가 핵심적인 메시지로 운반한 부분으로서 베드로가 예수님의 제자 됨을 부정하는 부분이다(막 14:54-72). 그리고 마지막 부분은 후회로 얼룩진 기록을 안고 어부로 돌아간 베드로를 주님께서 찾아와 그를 용서하시고 새로운 용기를 부어 주시면서 사명을 부여한 부분이다(요21:1-23)

설화체 설교란

설교의 기본 유형은 기본적으로 본문설교 주제설교 강해설교로 요약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유형에 따라서 전개하는 형태는 대지설교 상관설교 분석설교 설화체 설교 예화설교 인물설교 독백설교 대화설교 등으로 설교학에서는 분류하고 있음을 이미 서술한바 있다.
그 가운데서 설화체 설교는 다른 형태의 설교와는 완전히 구별되게 엮어진다. 본 설교는 그 주제가 단순한 성구의 말씀이 아니라 사건이나 인물을 대상으로 한다. 그리하여 그 등장된 사건이나 인물을 아름다운 언어라는 붓을 가지고 감동적으로 그린 한복의 그림을 비쳐주고 거기에 회중들이 몰입되게 하는 매우 어려운 설교이다. 어떤 설교자들은 이 형태의 설교를 단순한 이야기 체 설교로만 생각하고 쉽게 흥미 위주로 이어가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그러나 이 설화체 설교는 어떤 설교보다도 긴장되고 깊이 있는 진리를 보여주는 진지한 설교이다. 이 설교의 형태를 빌려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성공적으로 운반하려는 설교자는 다음의 몇 가지를 유의해야 한다.
먼저는, 설교자가 본 설교의 축을 이루는 사건이나 인물을 객관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 또는 인물 속에 깊이 주관적으로 몰입될 필요가 있다. 거기에서 영성의 눈을 뜨고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하시는지를 발굴하는 작업을 펼치게 된다.
둘째는, 이 설교는 주어진 사건의 내용이나 인물의 성패를 볼 수 있는 설교자의 깊은 통찰력을 요구한다. 일반 사람들이 보고 느끼는 차원을 벗어나 설교자만이 발견 할 수 있는 깊은 진리와 효율적인 메시지를 찾아야한다. 이것은 철저한 석의 다음에 이어지는 깊은 명상과 함께 그 사건과 인물의 한 복판에서 서서 스스로를 조명해 보는 과정이 필요하다.
셋째는, 이 설교는 제시하고자 하는 사건이나 인물을 한 폭의 그림처럼 묘사할 수 있는 문학성과 분석력이 있어야 한다. 잡다한 언어나 예화 등은 일체 사용할 수 없다는 특성 때문에 이 설교에서는 함축성 있는 어휘와 시적인 언어의 개발을 필요로 한다.
넷째는, 본 설화체 설교에서는 설교가 없다. 즉 적용이 거의 보이지 아니할 정도이다. 다른 형태의 설교는 설교자가 진리를 회중들의 삶에 적용시키는 것이 상례이다. 그러나 본 설교는 감동적인 그림을 보면서 회중들이 스스로 진리를 발견하고 감동을 받도록 하는 것이 그 특성이다.
다섯째는, 이 설교는 25분 이내의 시간적 재한을 두는 것이 좋다고 본다. 그 이유는 본 설교에서는 예화를 비롯한 기타의 자료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오직 그 사건이나 인물만을 언어로 그리면서 거기에 내포된 진리를 운반해야 하기 때문이다. 무게 있는 언어나 진지한 장면의 전개가 시간을 지속하면 그 효과성이 감소된다는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여섯째로, 본 설교는 결론도 설교자가 맺는 것이 아니고 순수하게 그 사건 또는 인물에서 그대로 결론을 맺으면서 설교를 끝내야 한다.
끝으로, 이 설교의 함정은 설교자가 다루고저 하는 사건이나 인물을 화려한 문장과 서술로 이어 가는 과정에서 진리를 비실제적인 것으로 만들 위험성을 안게 된다는 점이다.
이상과 같이 설화체설교가 필요로 한 항목들은 제시된 설교를 면밀히 검토하면서 대조하는 과정에서 그 이해가 빨라질 것이다.

본 설교의 자료의 문제

일반적으로 모든 설교는 성경이외의 많은 자료를 필요로 한다. 예화를 비롯하여 삶의 장에서 보이는 모든 것이 설교의 유익한 자료로서 활용될 수 있다. 그러한 자료의 활용이 없이 성경의 내용과 언어만으로 설교를 진행하는 것은 여러 면에서 무리가 따르기 마련이다.
그러나 본 설화체 설교는 적용자체가 설득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설교자의 주관적인 해석을 가지고 이해를 시키려는 시도 같은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오직 설교자의 언어를 통하여 보여주는 사건이나 인물을 통하여 스스로 자신과의 관계된 부분의 진리와 만남을 가져올 뿐이다. 그러기에 인용구나 예화나 삶의 장에서 발생된 어떤 사연도 도입되지 아니한다. 오히려 이러한 자료들을 사용하게 되면 본 설교의 효과는 반감되고 그 효과에 대단한 문제성을 안게 된다.
그러하기 때문에 설화체 설교의 자료는 그 사건과 그 인물 그리고 그 정황(Context)이다. 그 사건이나 인물이 연루된 성경의 모든 부분을 연구하고 그 정황을 정확하게 파고드는 것이 본 설교의 자료의 원천이다. 그래서 본 설교의 형태를 구상할 때는 어느 때보다 많은 성경을 읽어야 하고 석의를 해야 한다. 진리를 허구화 시키지 않기 위한 정확한 어휘를 사용하면서 원고에 서술을 해야 한다. 이러한 소임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서는 설교자가 아름다운 언어의 개발과 습득을 위하여 많은 시집과 문학집들을 평소에 탐독하는 것이 간접자료의 확충이라고 하겠다.

3. 본 설교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

먼저, 다음에 제시되는 설화체 설교란 논리적인 설득이나 감동적인 예화를 통하여 은혜를 주는 설교가 아님을 밝힌다. 이 설교는 설교자가 석의와 원고화의 과정에서부터 깊은 감동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이미 강조한 바 있다. 본 설교자는 오늘의 설교에서 제시된 주안점을 먼저 자신에게 맞추었다. 설교를 들어야 할 회중을 제쳐놓고 나와의 직결된 문제로 본 설교의 메시지와 만나는데 노력하였다. 스스로의 문제를 하나님 앞에 내 놓고 이 문제를 향하신 해답을 듣기 위하여 명상과 기도를 하면서 본 설교의 작성에 임하였다. 원고를 쓰고 읽는 과정에서 어느 순간에서는 눈물이 글썽거리면서 죄스러움과 감사가 솟아나는 경험을 갖기도 했다.
둘째는, 무엇보다도 아쉬움을 느끼는 것은 보다 더 풍부한 시적이고 문학적인 표현을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는 문학적 바탕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같은 서술도 설교자가 가지고 있는 감상적인 어휘와 묘사에 따라 감동의 차이가 크다는 사실을 잘 아는데 진정 아쉬움이 적지 아니하였다. 감수성이 예민하고 많은 어휘를 나의 것으로 주어 담던 청소년 시절 좀더 많은 문학서적들을 읽고 시적인 감정과 감상을 기록하는 생활을 지속 했었더라면 하는 또 하나의 후회를 다시 새겨보았다.
셋째는, 본 설교에서 베드로를 통하여 주는 후회와 재기의 메시지에 초점을 맞추는 관계로 성령의 역사 안에서 돌풍을 일으켰던 그의 설교사역 부분이 언급되지 아니했다는데 본 설교가 문제성을 안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가 초대교회의 지도자로서 활약하였던 부분들이 본 설교에서 언급되지 않은 점이 문제로 지적되지 않을 수 없다.
끝으로, 적용을 위한 표현이 한두 번 정도는 더 있을 수 있는데 메시지만을 보이려는 고집이 적용을 너무 외면하지는 않았는지 생각해 본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