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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떻게 그 아픈 십자가를 (요 19: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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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봄날 따사로운 햇살 아래서 수많은 군중들이 길가에 도열하여 뜨거운 열기를 품으면서 외쳐대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호산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아직도 귀에서 울리고 있는 소리입니다. 바로 몇 일전 우리의 예수님이 비록 적은 나귀를 타셨지만 예루살렘을 입성하실 때만 하더라도 이스라엘을 구원하고도 남을 만큼 위세가 당당하셨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겉옷을 벗어 그 분이 지나는 길에 깔아드렸습니다.
그런데 그 며칠 사이에 무슨 일이 어떻게 발생되었기에 지금 이 순간은 전혀 다른 소리가 들리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차라리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참으로 이해 할 수 없이 뒤바뀐 함성들입니다. 그 분이 무슨 범죄를 저질렀기에 이렇게도 군중의 함성은 성난 파도로 변하였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하늘은 침묵을 지키고 따뜻한 햇살만을 내릴 뿐입니다. 아무도 “아니다”라는 소리를 발할 수 없는 살벌한 분위기만이 예루살렘을 감돌고 있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몸부림)

우리의 주님 예수님은 이미 예견하셨나 봅니다. 평소와는 다른 저녁식탁을 준비시켜 제자들과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깨닫기에는 아주 어려운 말씀을 하십니다. 떡을 들어 축사하시고 쪼개어 주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상한 내 몸이다. 받으라 먹어라”
또 식후에 포도주 잔을 들어 축사하시고 주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흘린 나의 피다. 너와 내 사이에 맺어진 새 언약의 피다. 받으라 마시라”
그러시면서 이 예전을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계속적으로 재연(再演)할 것을 명령하십니다. 그리고서는 겟세마네 동산을 향하여 발길을 옮깁니다. 한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앉아 있어 기도하라는 말씀을 남기시고 적막으로 쌓인 한적한 곳에서 홀로 기도를 하십니다. 기도를 멈추고 제자들의 기도하는 모습을 점검하십니다. 그러나 무슨 영문인지도 모른 제자들은 졸음 속에서 정신을 차리지 못합니다. 인자한 말씀이 주어집니다.
깨어 있어라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너희는 한시도 나와 함께 깨어 있을 수 없느냐
주님의 간곡한 당부도 피곤한 육신과 무감각한 영혼을 소유한 제자들의 잠을 깨울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고요한 별빛 아래서 너무나 비통한 기도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인간의 몸으로 견딜 수 없는 처절한 수난의 잔을 앞에 두고 깊은 고뇌의 기도를 드립니다.
“나의 아버지여 될 수만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실로 고통과 아픔의 울부짖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기도의 끝은 전혀 다른 내용이었습니다.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인류의 역사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순종의 외침이었습니다. 땀방울이 핏방울 같이 되어 땅에 떨어지는 처절한 세 번의 기도를 마치신 예수님의 모습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키 위한 비장한 결단의 모습이었습니다. 결론은 내려졌습니다. 이제 십자가의 길만이 그의 앞에 남아 있을 뿐입니다.
고통의 쓴잔, 곧 십자가의 죽음을 앞에 둔 예수님의 절규 앞에서도 무감각한 영혼의 잠에 빠져있던 세 사람의 제자들이 가엽게 보일 뿐입니다. 그들을 불러일으키시고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가자. 나를 넘겨줄 자가 가까이 와 있다.”

(가롯 유다의 배신과 잡히심)

예수님의 말씀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한 때 총애를 받던 그의 제자 가룟 유다가 다가옵니다. 세상 적인 욕망을 채워주지 않는 예수님께 대한 거부감에 불타 있던 그는 은 30의 노예가 되어 대제사장과 장로들의 무리를 이끌고 예수께 나아옵니다.
“선생님 안녕하시옵니까”라는 인사의 입맞춤으로 예수님은 체포되셨습니다. 가증스러운 입맞춤 속에는 무서운 독소가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군병들이 어두운 밤에 알 수 없는 얼굴을 똑똑히 알려주는 신호였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애정의 표현은 전혀 아니었습니다.
마치 가증스러운 입술로 “주여 주여”를 형식적으로 부르짖는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의 모습과도 같은 순간이었습니다.
그때 그 분만을 사랑한다던 제자들은 끌려가는 스승을 버리고 달아나 버립니다. 캄캄한 겟세마네 동산을 밝히는 예수를 호송하는 횃불의 행렬을 멀리서 숨어 보는 제자들의 모습은 두려움과 떨림으로 가득 찬 배신의 모습이었습니다.
세상적인 욕망의 노예가 된 유다. 체포되는 예수를 버리고 달아나 버린 제자들의 배신의 모습이 마치 우리의 모습인 듯 합니다.

(사형선고를 받으신 주님)

우리 주님은 마치 무서운 범죄자 마냥 취급을 받고, 죽음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의 모습처럼 군병들의 손에 끌려가고 있었습니다. 예수를 체포한 무리들은 예수님을 끌고 어두운 밤길을 헤치며 대제사장 가야바의 궁으로 갑니다. 어두운 밤이었지만 그곳의 장로들, 율법학자들은 그들의 권위와 이익에 해가 되는 예수의 증거와 거짓 증인들을 통하여 예수님의 죄를 찾으려 합니다. 예수님은 조용히 침묵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초조해진 가야바는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냐”하고 질문하였습니다. 침묵하던 예수님은 입을 열어 천천히 대답하십니다. “네 말 대로다”
가야바는 이때다 싶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모독죄야 말로 예수님을 죽일 좋은 빌미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옷을 찢으며 외칩니다. “하나님께 대한 모독 외에 더 이상 무슨 증거가 필요하겠소 “그는 사형에 해당하오”
우리 주님에게 사형을 구형한 무리들은 유대총독 빌라도에게 그 분을 끌고 갑니다. 가이사에 대한 충성심을 내세우며 외쳐대는 백성들에게 빌라도는 자기 지위의 위태로움과 폭동을 걱정한 나머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줍니다.
진리를 가리고 정의를 핍박하는 불의와 거짓이 승리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여기에 동조하여 춤을 추는 양심의 불구자인 인간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자기의 이익에 연연하여 가야할 길을 거부하는 인간들의 행렬이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오늘을 사는 우리현대인의 모습이었습니다.

(십자가 위의 주님)

예루살렘 북쪽에 위치한 골고다 언덕! 아침의 햇살이 구름을 뚫고 지면에 내리쪼일 때 세 개의 십자가 위에는 고통을 참는 세 사나이의 모습이 있었습니다. 중앙의 십자가에는 예수라 불리는 우리의 주님이 좌우의 두 범죄자와 마찬가지로 고통의 시간을 인내하고 있었습니다. 십자가 아래에는 시기와 증오심, 잔인과 조롱의 모습을 띤 일단의 무리들은 인간 예수의 패배의 순간을 만끽하고 있었습니다.
십자가 위의 우리 주님에게는 못 박힌 손과 발의 고통은 견딜 수 없는 한계에 도달합니다. 더욱 죄여 들어오는 가시관의 아픔과 함께 온 몸이 아래로 쳐지며 호흡도 가빠옵니다. 그러나 십자가 아래의 병사들은 예수님의 옷들을 나누며 제비뽑아 가지려 합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모욕합니다. 가야바는 의기양양하게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조롱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무리들은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저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저를 기뻐하시며 이제 구원하실 지라. 제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라는 말들을 해대면서 조롱과 비웃음, 시기와 증오심의 모습을 예수님께 보내고 있습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자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들의 눈은 어둠으로 덮여 있었기에 빛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의 귀는 이유 없는 반항의 함성에 휩싸여 있었기에 진리를 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입은 독사의 궤휼로 길들여져 있었기에 참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찬양하지 못하였습니다.

(가상 칠언)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위의 일곱 말씀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그들은 자기의 하는 짓을 알지 못하나이다” 곧 용서의 말씀입니다.
수단과 방법 안 가리며 남의 고통과 자기의 이익을 맞바꾸어 버린 지도자들의 웃음소리, 남의 고통에는 무관심한 채 자기의 이익을 찾고 있는 병사, 지나가며 조롱의 말을 무책임하게 내뱉는 백성들의 모습은 어두운 현대를 사는 우리들의 모습은 아닐는지요.
고통과 조롱이 교차되어 흐릅니다.
예수님과 함께 못 박힌 좌측의 강도가 고통을 못 참겠다는 듯 울부짖습니다.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야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그러자 우측의 강도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그의 말을 가로막습니다. “우리는 죄가 있기에 처형당함이 마땅하거니와 이분은 아무런 죄가 없는 분이다.” 그는 예수님을 갈망의 눈빛으로 쳐다보며 말합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소서” 예수님은 대답하십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십자가 위의 두 번째 말씀 곧 구원의 말씀이십니다.
고통을 참으시는 예수님의 눈앞에 세상에서 가장 비극적인 장면이 펼쳐집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 다른 여인들과 함께 슬픔과 고뇌의 모습으로 서 계시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모습이 보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음을 보시고 마리아를 향해 “보십시오. 당신의 아들입니다.” 또한 그 제자를 향해 “보라. 네 어머니다”라는 가상 3번째의 말씀 곧 애정의 말씀을 하십니다.
낮게 드리우던 3월의 태양이 중천까지 떠올라 정오 때가 되었음을 알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어두움이 온 땅을 덮기 시작하였습니다.
십자가 위에는 예수님의 고통이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예수님은 큰 소리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외치십니다. 지루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잡담을 나누던 무리들이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엘리야를 부르나 보군” 거기 서있던 몇몇 사람이 말합니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이 말합니다. “어디 엘리야가 와서 구해주나 보자” 그들은 호기심과 조롱의 얼굴로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하지만 그것은 가상 4번째의 말씀 곧 고뇌의 외침임을 그들은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갑자기 심한 갈증을 느끼셨습니다. “내가 목마르다.” 고통의 말씀 다섯 번째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들 중 하나가 신 포도주를 예수님의 입에 대어줍니다.
십자가 위의 예수님을 쳐다보는 무리들의 눈에 예수님의 입술이 다시금 움직이는 것이 보입니다. “다 이루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승리 가장 완전한 승리. 사랑의 승리를 예수님은 선포 하셨습니다.
“아버지여 나의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합니다.”라는 최후의 말씀을 하신 후 예수님은 운명하셨습니다.
그러자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지며 땅이 흔들리며 바위가 터지며 무덤이 열리는 구원의 완성의 표징들이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죽음으로서 얻은 승리의 표상이었습니다.
갈보리 산정의 군병들은 긴 창을 들어 우리 주님의 운명을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 옆구리를 깊이깊이 찔러 심장까지 터지게 만듭니다. 우리를 향한 애정과 구원과 희생의 피가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심장이 터져 물 한 방울도 남김없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우리 주님 한 손으로는 하나님의 손을 그리고 또 한 손으로는 우리들의 손을 붙잡은 채 지금도 그 보혈을 흘리시면서 우리 앞에 서 계십니다.
이제야 그 험한 십자가 위에서 주님이 흘리신 피를 바라보니, 그것이 바로 죄인 된 우리를 용서하시려고 흘리신 우리 주님의 보혈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이제야 드디어 주님 지신 십자가를 사랑합니다. 그 험한 십자가를 붙들고 송구스러운 눈물을 흘립니다.

주님이 맞으신 채찍의 수는 내 병듦의 수이며
주님이 쓰셨던 가시관의 가시 하나하나는 내 허물 그 자체 이었습니다.
군중들의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정죄는 나에게 합당한 것이었습니다.
대제사장들의 고소는 내가 받아야할 고소였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지셨던 무게는 내 죄악의 무거움이었고
주님이 짊어지신 십자가의 크기는 나의 모든 죄였습니다.
주님이 당하셨던 아픔은 나의 당할 고통이며
주님이 담당하신 죽음은 나의 죽음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주님이 받으신 저주는 나의 당할 지옥의 형벌이었습니다.
내가 누구며 나의 받을 징벌을 십자가로 알게 되었습니다.

2. 본 설교가 있기까지

십자가 위에서 솟구치는 메시지

십자가 위에 매달려 신음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과 거기에서 솟구치는 진리는 가장 핵심적인 복음의 진수이다. 이 소중한 진리의 메시지는 어느 시대나 어느 장소에서든지 성도들의 가슴에 가장 엄숙하고 진지하게 파고들었다. 그리고 이 진리 앞에 수많은 심령이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를 새롭게 발견하는 역사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마침내는 이 진리의 위력은 전 세계를 정복하는 무서운 힘을 발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오늘의 한국 땅에 있는 기독교는 참으로 기이한 현상을 보이고 있다. 그것은 온 마을에 가득한 십자가와 거기서 발산하는 네온사인은 밤하늘을 수놓는데 강단에서는 그 십자가의 메시지가 너무나 드물게 들려진다. 모양새를 갖춘 십자가의 액세서리는 많은데 막상 가슴을 파고드는 십자가의 메시지는 옛날과 다르게 외쳐지고 있다.
사도들과 속사도들을 중심 하였던 초대교회에서는 중심을 이루는 메시지가 거의가 다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외쳤다. 누가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했는지를 밝히면서 스스로를 공범자로 규정하고 눈물을 짓고 가슴 아파했다. 왜 그 십자가가 출현했어야 하는지를 들을 때는 ‘나 같은 죄인을 미리부터 구원하시려 뜻하신 그 은혜’가 너무나 고마워서 자신의 몸과 재산과 시간을 송두리째 바치는 역사가 도처에서 발생하였다. 이러한 까닭에 십자가의 진리는 살아 역사 하는 진리라고 말한다. 그리고 십자가의 진리가 언급되지 않은 메시지는 설교가 아니라는 말까지 나오게 된 것이다.
실질적으로 이러한 말은 정확하게 기독교의 역사에서 입증되고 있다. 즉, 기독교 복음의 진수인 십자가의 도가 사라진 교회는 급속하게 하향의 길을 걸었다. 십자가의 진리 대신 오늘의 삶이 윤택해진 것만을 찾는 교회는 모두가 세속화되는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 결과 교회는 생동력을 상실하고 고유한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게 되었다. 기독교인이라는 이름을 간직하면서도 힘을 잃고 방향감각을 잃어버린 비참한 실존들로 추락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우리의 한국교회도 이러한 전철을 밟고 있지는 아니한지 진단을 필요로 하는 시점에 와 있다. 부흥회마다 ‘축복’이라는 단어가 주종을 이루고 성도들의 관심은 ‘복 받고 사는 지름길’을 찾는데 만 혈안이 되어 있지는 아니한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국의 교회가 일제의 핍박과 육이오의 전쟁과 가난의 늪에서 해 매이던 시절에도 십자가의 도는 쉼 없이 외쳐지고 있었다. 설교단에서 주님의 십자가의 수난이 선포되고. 그 십자가의 역사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이 외쳐지면 우리의 성도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감사하였다. 그리고 그 빚을 갚아야 한다는 뜨거운 신앙이 열화처럼 번져갔다.
진정으로 십자가의 도가 힘 있게 선포되어진 현장에서 우리의 신앙은 솟구치게 된다. 그리고 기독교는 구원의 종교로서의 다짐을 거듭하게 될 것이다. 기독교가 구원의 종교로서의 튼튼하게 그 뿌리를 내릴 때 구원의 주님을 향한 감격이 진하게 될 것이며 그 은총 안에서 늘 새로운 만남과 기쁨을 가슴에 앉게 될 것이다.

본 설교가 있기까지의 정황과 사연

현대의 신학교육에서 십자가의 도를 외쳐야 한다는 당위성은 인정하지만 실질적으로 십자가의 진리를 설교로 작성하고 그 진리를 외치게 하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이러한 결과는 선지생도들에게 십자가의 진리에 대한 이론적인 분석이나 지식은 가득하게 심어주고 있으나 몸에 베인 십자가의 진리는 그 뿌리가 너무 약하다는 생각을 종종 하게 된다. 이러한 아쉬움을 늘 안타깝게 생각한 필자는 선지생도들이 신학교육의 문을 나서기 전에 반드시 십자가의 진리를 직접 외치고 경청하는 기회를 갖기를 원하고 있다.
필자의 이러한 소망은 실질적으로 설교학 교육의 장에서 실천되고 있다. 필자가 사역하고 있는 신학교육의 장에서 설교학 교육을 받고 있는 선지생도들은 반드시 주님이 보여주신 가장 처절했던 수난의 십자가와 그 고통을 설교화하게 한다. 이 수난의 설교는 단순한 이론으로 전개되는 설교가 아니라 그 현장에 설교자가 깊이 몰입되고 듣는 선지생도들을 모두 그 가운데로 이끌어 가도록 하는 설화체 설교로 해마다 진행하고 있다. 여기서 경험하게 되는 사실은 해마다 듣게 되는 십자가의 수난에 관한 설교이지만 한 번도 반복된 감이 없고 언제나 새롭게 감명을 주고 있다는 것이다. 비록 설교를 배우고 있는 나의 학생들의 설교이지만 십자가의 그 아픈 현장을 보여주는 그들의 신선한 시각과 메시지의 섬광(閃光)은 언제나 필자의 가슴에 깊은 감동을 안겨준다.
오늘의 설교도 이러한 과정에서 나온 한 편의 설교이다. 비록 몇 차례의 수정을 가하여 제출된 설교이지만 필자가 다시 재작성을 하여 독자들에게 선을 보이는 설교이다. 이 설교를 다시 쓰면서 필자의 가슴에는 견딜 수 없는 송구스러움을 주님 앞에 다시 갖게 되었다. 그 사연은 남다른 것이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목사가 되기 전 어느 날 밤 꿈에 우리 주님이 십자가 위에 매달린 채 발끝으로 선혈을 줄줄 흘리시며 나타나신 적이 있었다. 그 때 그 발목을 붙들고 하염없는 눈물을 흘린 적이 있었다. 이 사연이 오늘의 설교를 작성하는 동안 너무나 적나라하게 나를 붙들고 있기에 필자는 부끄러움과 죄스러움을 안고 본 설교를 탈고하게 되었다.

설화체 설교를 위한 본문

한편의 설교가 존재한 까닭은 하나님의 말씀을 운반하기 위함이다. 설교가 이 목적을 벗어나면 인간의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미화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비록 회중들이 설교에 대한 해박한 기본 지식을 소유하고 있지는 못하더라도 일정한 시간을 지난 다음에 그 설교가 하나님 말씀을 순수하게 운반해 주었는지 아니면 설교자의 사상과 지식을 하나님의 말씀처럼 위장하여 먹여 주었는지를 깨닫게 된다.
실질적으로 설교자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 가운데서 엄격하게 감시를 당하고 있는 존재들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을 얼마나 성실하게 운반하고 있는지를 주시하고 계시며, 그 설교를 듣는 이들은 그날 주어진 본문을 얼마나 성실하게 해석해주고 효과적으로 그들의 삶에 적용해 주는지를 분석하면서 듣는다. 교육수준이 낮은 과거와는 전혀 다른 설교사역의 정황이다. 설교자의 말이 모두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시절은 옛말이다.
특별히 설화체 설교는 계속하여 지적한데로 사실을 허구화시키는 오류를 범하기가 가장 쉬운 설교이다. 사건이나 인물을 감동적으로 운반하려는 설교자의 과욕은 지나친 수식과 더불어 성경의 기록을 벗어나 추상적인 묘사로 실지의 사건을 퇴색시키는 무서운 결과를 가져온다. 그러하기에 어느 설교보다 성경의 기록에 더욱 충실해야한다.
그러나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설화체 설교는 하나의 사건이나 인물의 전반에 걸친 기록을 모두 점검해야 하고 그 기록이 모두 본 설교에서 언급되어져야 한다. 그러기 때문에 설화체 설교는 다른 형태의 설교와는 다르게 본문의 선택의 폭이 광범위하다. 실질 적으로 설화체 설교의 본문은 그 사건이나 인물을 기록한 모든 부분이 본문으로 되어져야 한다. 문제는 설교시작 전에 이 본문을 모두 봉독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부분을 찾아야 하고 시간을 그 만큼 소비해야 하는 번거러움이 따르게 된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인 본문을 찾는데 소비한 시간을 줄인다는 것은 모순된 표현이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66권에 언급된 모든 부분을 찾아 봉독을 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설화체 설교의 본문은 예배시간에 봉독할 본문과 자신의 설교에서 운반해야 할 본문을 이중적으로 조정하게 된다. 즉, 예배시간에서 봉독할 본문은 자신이 본 설교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부분을 가장 잘 표현한 문단 전체의 말씀을 정한다. 그리고 설교를 작성하는 데는 자신이 운반하고자 하는 메시지로서의 사건이나 인물을 기록한 모든 말씀을 설교의 본문으로서 정하여야 한다.

본문과의 대화

설화체 설교를 설명하면서 몇 번이고 반복하는 것은 자신이 설교하고자 하는 사건이나 인물에 관한 성경의 모든 기록이 충분히 연구되어져야 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주님이 지신 수난의 십자가를 선포하려는 목적을 세웠으면 구약에서 주어진 예언에서부터 계시록까지 모든 기록을 찾아 그 뜻을 헤아려야 한다. 그럴 때 십자가의 수난을 통한 구원의 역사가 분명해진다.
오늘의 설교의 근본 목적은 우리 주님이 당하신 십자가의 수난의 현장을 어떻게 해야 내 자신이 먼저 볼 수 있을까의 문제였다. 설교자가 그 현장을 정확히 목격하는 경험이 없이는 나의 회중들에게 아무런 실감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한 까닭에 본 설교에서는 설교자의 분석이나 설명을 철저히 배제하였다. 그리고 오직 최선을 기울여 내 자신이 보고 경험한 실체를 보여주는데 그 주안점을 두었다.
이러한 목적은 우리 주님의 수난에 대한 이사야를 통한 예언으로부터 계시록 11장에 이르기까지 72회에 걸쳐 언급되어진 성구를 컴퓨터 프로그램을 통하여 모두 읽게 되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중요한 범위를 단계별로 정리하여 그 세계에 깊숙이 몰입되어 말씀과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먼저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이 이미 보여주신 수난의 종의 모습을 53장을 통하여 반복하여 읽고 그 말씀의 뜻을 헤아리기 위하여 석의 책을 정독하였다. 그리고 그 서술에서 언급된 멸시와 천대의 장면이 새롭게 가슴 속 깊이 피고듦을 경험하였다.
두 번째의 단계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입성하실 때의 환경과 백성들의 반응을 다시 읽게 되었다. 그 이유는 종교지도자들의 선동에 의하여 어제의 모습을 감추고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쳐대는 그들의 모습을 대비시키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거기서 변절을 일삼는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을 생각해 보았다.
세 번째의 단계는 우리 주님이 마지막 십자가의 수난의 시점을 아시고 미리부터 준비하신 과정을 보게 되었다. 특별히 아무 것도 짐작하지 못한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가지시고 성만찬을 제정하신 그 현장이 새롭게 가슴에 와 닿으면서 머리를 숙이게 되었다.
네 번째의 단계는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주님의 몸부림과 땀 흘리시며 기도하는 모습이었다. 인성을 가지신 인간 예수의 모습을 새롭게 보면서 그의 위대함을 다시 발견하게 되었다. 죽음의 공포를 벗어난 후 우리 주님이 보여주신 그 순종과 결단의 모습은 오늘 우리의 신앙을 새롭게 관찰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다섯 번째로, 가롯 유다의 가증스러운 행위와 자신의 유익만을 추구하는 제자들의 추태에 눈길이 멈추고 있었다. 그 이유는 그들의 행위 자체에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내 자신의 언행심사(言行心思)가 바로 그러한 행위를 오늘 재현하고 있다는 가책 때문이었다.
여섯 번째로, 어떤 질문에도 침묵을 내내 지키시다가 침묵할 수 없는 질문 앞에서는 입을 여시는 주님의 용기가 행동하는 신앙을 일깨워 주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는 질문 앞에 침묵을 깨고 “그렇다고 하는 대답이 자신에게 사형을 선고 할 수 있는 항목이 되리라는 것을 모를 리 없는 주님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에 침묵을 지키어 생명을 건지는 것보다 하나님의 뜻을 그대로 실현해 드리는 위대한 결단이 너무나 돋보였다.
일곱 번째의 단계는 십자가 위에서 당하시는 조롱과 멸시, 그리고 육체적인 고통의 현장이었다. 단순한 두뇌로 만의 감상이 아니라 가슴으로 느껴보는 십자가 위의 주님이 눈에 보여 괴로움을 느끼었다. 특별히 이미 운명하신 그 몸에 창을 들어 얼마나 깊이 찔렀으면 심장까지 터지고 물 한 방울 피 한 방울도 남김이 없이 다 흘리시게 되셨을까 이러한 현장을 보면서 다시 한번 “그가 찔림을 받음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는 말씀을 정중히 읽게 되었다.
마지막 단계의 말씀과의 대화는 가상칠언의 분석이었다. 주님이 남기신 일곱 마디의 말씀을 단순하게 순간적으로 주어진 말씀으로 보지 않았다. 바로 오늘의 의미를 연결시켜 그 말씀을 가슴에 새기면서 십자가 위에 달리신 주님을 이 설교를 듣는 회중들과 만날 수 있도록 하였다.

설화체 설교와 커뮤니케이션의 문제

일찍이 폴 틸리히는 심혈을 기울여 원고화 된 자신의 설교가 비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에 의하여 실패한 경험을 가지고 “커뮤니케이션이 되지 않은 메시지는 메시지가 아니다.”라는 의미 깊은 말을 남긴바 있다. 설교사역의 현장에서 느껴지는 커뮤니케이션의 문제는 가장 중요한 문제임을 실감하게 된다. 특별히 설화체 설교는 그 성패가 바로 커뮤니케이션의 성사 여부에 달려 있기에 더욱 깊은 관심을 요구한다.
설교에 있어서의 커뮤니케이션이란 설교자가 작성하고 준비한 메시지를 자신의 언어를 비롯한 기타의 도구를 통하여 회중들에게 전할 때 그들이 그 메시지를 자신의 언어와 사고를 비롯한 기타의 구조를 통하여 받아들이고 합당하다고 생각할 때 그것을 공유(共有)하는 것이다. 설교자가 정성을 기울여 운반한 메시지가 자신의 회중들에게 아무런 흥미를 유발시키지 못하고 그들에게 공유되지 아니한다면 이것은 완전한 실패를 의미하게 된다.
설화체 설교가 설교의 한 형태로 등장한 이유는 대지 설교나 분석 설교에서 이룩할 수 없는 효과적인 진리의 커뮤니케이션을 위함이었다. 예를 들어 오늘의 설교가 십자가를 지신 주님이라면 그 주님을 좀더 정확하게 회중들이 만나고 거기서 지울 수 없는 진리와의 만남을 가져오도록 하려는 것이 바로 설화체 설교가 있게된 동기이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설교자는 이 메시지의 커뮤니케이션에서 중대한 문제에 직면한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회중들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다시 전해야 한다는 것이 적지 않은 부담이 된다. 다시 말하면 설화체 설교는 일반 설교의 형태처럼 자신의 분석이나 해석 또는 예화의 도입을 통하여 설득의 과정을 향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설화체 설교는 오직 하나의 사실을 보다더 정확하게 나타내 보이는 것을 전부로 하는 설교이기에 완전한 커뮤니케이션의 시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의 설교를 실례로 삼아서 분석해 보자. 그리스도인으로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과정을 거쳐서 십자가의 형장으로 끌려갔으며 거기서 어떤 수난을 당했는지를 모두가 다 알고 있다. 회중은 여기서 자신이 알고 있는 인물이나 사건을 이야기로 엮어주는 것을 다시 듣다가 두 가지의 반응을 보인다. 하나는 자신이 알고 있고 표현 할 수 있는 수준을 넘기지 못한 설교를 바로 외면해 버린다. 또 하나의 반응은 자신이 알고 있던 십자가의 사건이 자신의 고정된 사고의 구조를 벗어나 전개될 때 흥미를 갖게 된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설교자에 따라 그 현장에 인도되면서 아무런 죄가 없으신 분이 그 무겁고 고통스러운 십자가를 지시게 된 사연을 자신과 연관 지으면서 눈물을 흘린다.

3.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요건들

어떤 형태의 설교보다 설교자의 깊은 명상과 진리를 보는 맑은 영성을 요구한 본 설교는 그 준비 자체부터 많은 시간을 요구한다. 그리고 절대적인 정성과 집중을 요구한다. 글로서 그림을 그린 메시지를 원고에 모두 싣게 되는 순간 설교자는 참으로 흐뭇한 성취감에 젖는다. 그 설교를 손에 들고 소리 내어 읽은 동안 스스로의 마음에 감동을 안겨주는 부분들 앞에서는 때로는 눈물을 흘리면서 고개를 숙여 기도를 드린다. 그리고 오는 주일의 설교단에서 거대한 은혜의 물결이 일게 될 것을 기대한다. 그러나 그러한 기대가 현실화되기까지는 메시지의 성공적인 소통(疏通)이 있어져야 한다. 이러한 소통은 설교자가 정성을 기울여 작성한 원고를 유창하게 읽은 것만으로 서는 도저히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 적어도 다음의 중요한 커뮤니케이션의 요건들이 먼저 효과적으로 활용되어져야 한다.
1) 설교자의 눈과 회중의 눈이 마주쳐야 한다

모든 설교는 원고화 되어야 하고 그 원고는 설교자의 몸에 완전히 소화되어져야 한다는 것은 설교의 이론에서 가장 기초적인 강조점이다. 그러나 설화체의 경우 수려(秀麗)한 문장과 함께 질서 있는 전개를 그대로 옮겨야 한다는 압박감은 설교자로 하여금 늘 원고에 의존하려는 경향을 버리지 못한다. 이러한 결과는 설교자가 사람을 향하여 설교를 하지 못하고 원고를 향하여 설교를 하게 된다.
설화체 설교는 읽는 설교가 아니라 자신이 작성한 문장 하나하나를 완벽하게 소화하여 회중을 바라보고 입으로 운반해주어야 한다. 현대의 커뮤니케이션에서 가장 강조하는 부분은 메시지가 설교자의 눈을 통하여 회중의 눈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이다. 귀만을 이용한 것과 눈과 귀를 이용하는 것의 차이는 실로 엄청난 차이를 주고 있다. 마치 청각만을 상대한 라디오 매체와 청각과 시각을 상대한 텔레비전의 매체가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지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설교의 현장에서 언어로 그리는 그림을 운반하는 설화체 설교에서 설교자가 회중의 청각만을 활용한다면 얼마나 그 효과성이 감축되는 지를 충분히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하기에 설화체 설교는 어떤 설교보다도 눈에서 눈으로 메시지를 심어주려는 노력이 절대로 필요한 것이다.

2)설득(說得)을 포기해야 한다

대지 설교를 비롯한 분석설교나 상관설교 등은 모두가 설득이라는 것이 주안점이다. 설교자가 어떤 방법으로 본문을 해석을 하여 회중들의 동의를 찾아 낼 것인가를 생각한다. 그리고 그 해석된 말씀을 어떤 경로를 밟아서 회중들의 공감대를 불러일으킬 것인가를 찾는다. 바로 이러한 공감대의 형성과 추종을 목표로 하는 그 자체가 설득이라는 논리학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러하기에 설교자의 언어와 분석과 지식과 견해가 주종을 이루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러나 설화체 설교는 결과는 동일 할 수 있으나 그 출발이 다르다. 즉, 이 설교에서는 설득을 위한 자신의 주관적 설명이 전혀 개입할 수 없다는 점이다. 오직 사실을 아름답게 감동적으로 서술하여 회중들의 눈앞에 운반해 주는 것뿐이다. 그러하기에 설교자의 주관적인 입장으로 이어지는 적용이 거의 전무한 상태이다. 사실 설화체 설교는 회중들이 자신과 연결을 지어 어느 부분에서인가 진리를 발견하여 주기를 바라는 희망으로 끝난다. 그림처럼 보여주는 그 현장에서 회중의 개체들이 성령의 강한 힘에 의하여 필요한 진리와의 만남을 가져오기를 바라는 설교자의 간절한 소망이 있을 뿐이다.

3) 동화된 정서가 있어야 한다

모든 설교에는 설교자의 뜨거운 감정, 즉 파토스(Pathos)가 있어야 한다. 설교자의 정서가 없는 설교 앞에는 회중들이 아무런 변화를 가져오지 못한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유명한 설교가에게는 남다른 정렬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 뜨거운 정렬의 가마솥에서 내 뿜는 메시지 앞에 숱한 영혼들이 감동을 받았다는 기록은 오늘도 사실로 입증되고 있다.
그러나 설화체 설교를 위한 설교자의 동화된 정서란 일반 설교보다는 훨씬 진하고 성스러운 것을 말한다. 예를 들면 베드로를 주제로 한 설교를 위하여 깊숙이 몰입하다가 어느새 베드로의 눈물 짓는 뉘우침과 한탄이 자신의 것이 되어 베드로의 회한(悔恨)에 버금가는 아픈 가슴을 느끼면서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하는 것은 바로 설교자에게 동화된 정서가 자리를 잡았다는 뜻이다. 십자가의 설교를 준비하면서 거기 그 현장에 내가 서 있었고 그 험한 십자가를 주님께 지우는데 동참했던 죄인임을 깨닫고 괴로워하며 눈물을 짓는 순간이 발생된다면 바로 설교자의 가슴은 이미 설교를 충분히 전할 수 있도록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하게 된다.

4) 신체언어가 메시지를 전해야 한다

설교의 현장에서 느끼는 가장 아쉬운 점은 설교자의 신체언어가 균형을 잃어버린 점이다. 설교자가 설교의 준비에 자신이 없는 경우에 빈약한 내용을 화려한 화술과 함께 열정을 쏟으면서 온 몸을 동원하는 지극히 억지스러운 설교들이 종종 보인다. 반면에 참으로 성실성을 지키면서 설교를 준비하였으나 설교자의 냉랭함과 미온적인 전달 때문에 그 설교가 효과를 거두지 못한 경우를 본다.
설화체 설교는 이상의 균형을 절대적으로 요구한다. 설교를 준비하는 동안 주님이 지신 십자가의 형장(刑場)을 경험한 설교자는 이 설교를 운반할 때 그 음정과 표정과 몸의 움직임이 무감각할 수가 없다. 그 수치를 표현하는 순간, 그 고통을 표현하는 지점, 그리고 그 분이 용서를 외친 순간 앞에서 아무런 감정이 움직이지 않은 채 서술만 하고 있다면 그 설교자는 냉혈적인 설교가로 지적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러하기에 설화체 설교는 설교자의 살아있는 감정과 몸, 그리고 그 음정과 표현이 필수적인 요건으로서 활용되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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