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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무엇을 위해 삽니까? (고전 13: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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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우리 한국 사람의 가정에 가장 많이 걸려 있는 그림 중의 하나가 프랑스의 농민 화가 프랑소와즈 밀레가 그린 ‘만종’일 것입니다. 이 그림은 자주 보기 때문에 평범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깊이 음미해 보면 이 그림 속에는 인생의 위대한 진리가 그려져 있습니다.
어두움의 장막이 조용히 땅을 덮기 시작합니다. 해는 지평선 저쪽으로 사라지고 넓은 벌판은 정적과 암흑과 안식의 옷을 입기 시작합니다. 먼 마을의 교회에서 저녁을 알리는 종소리가 은은 하게 들려 옵니다. 부지런히 일하던 젊은 부부는 하루 종일 건강 하게 일할 수 있었던 것을 감사하면서 경건하게 고개를 숙여 기도드리고 있습니다. 이 그림에는 부부의 사랑이 그려져 있고, 성실한 믿음이 그려져 있고, 부지런한 노동이 그려져 있습니다.
야만인이나 미개인은 하루 세끼 밥이나 먹고 자녀를 낳는 것만으로 만족해합니다. 그들은 그저 생존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지식인, 문화인은 그것으로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 생활을 원합니다. 삶의 보람을 느껴야 합니다. 사람은 보람을 찾고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똑같은 일을 반복하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천편일률의 매너리즘에 빠지고, 제자리걸음을 되풀이하므로 생활은 따분 해지고, 정신은 생기를 잃게 되기 쉽습니다. 그것은 의욕 상실과 권태감과 무미건조의 산 송장과 같은 생활입니다. 으리는 날마다 새롭게 살고, 해마다 전진해야 합니다. 매일 똑같은 일이 기계적으로 반복되는, 변화와 향상이 없는 생활은 우리의 정신을 위축 시키고 질식하게 만듭니다.
생활에 새로운 변화와, 새로운 기대와, 새로운 경험과, 새로운 성과가 있을 때 사람은 사는 보람이 있고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파우스트의 정신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파우스트는 진리를 찾아, 선을 찾아,이상을 찾아 쉬지 않고 공부하고 활동하고 탐구한 사람입니다. 그에게는 끊이지 않는 정열이 있었습니다. 칠전팔기의 분투, 노력이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영원한 젊음이 있었습니다. 그는 마르지 않는 샘이요, 시들지 않는 상록수요, 꺼지지 않는 활화산이었습니다.
우리 한국 사람은 너무 일찍 체념하기를 잘하고, 숙명론의 사상에 물들기 쉽고, 팔자소관의 철학을 믿어 버립니다.
파우스트는 100세가 넘어 장님이 되었지만 탐구의 정신과 개척의 의욕은 시들지를 않았습니다. 그는 사시사철 푸르고 싱싱한 상록수처럼 살았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추구해야 합니다.
팽이는 쉬지 않고 돌기 때문에 넘어지지 않습니다. 돌지 않는 팽이는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활동이 없는 생은 죽음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새로운 경험을 하려는 마음이 불탈 때 우리의 행동에는 생기가 돌고 활력이 넘칩니다.
그런데, 사람의 욕구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랑의 욕구입니다. 우리는 누구를 사랑하고 싶고, 누구에게서 사랑을 받고 싶어합니다.
어린애는 사랑을 받고 싶은 욕구가 강합니다. 그러나 청년이 되고, 어른이 되면 누구를 사랑하고 싶은 욕구가 점점 강해집니다. 사랑하고 사랑을 받는다는 말처럼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일반적으로는 사랑이란 말을 한 가지로 표현합니다. 그러나 헬라어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아가페(Agape)와 에로스(Eros)와 필리아(Philia)입니다. 헬라인들은 무엇을 사랑하느냐 다시 말하면 사랑의 대상에 따라 사랑의 성격과 내용과 특색이 각각 다르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깊은 파악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사랑을 말할 때 아가페라 했고, 젊은 남녀간의 뜨거운 사랑을 표현할 때 에로스라고 했고, 넓은 의미의 인간적인 우애를 말할 때 필리아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동물은 아닙니다. 사랑을 먹고 사는 동물입니다. 밥은 육체의 양식이요, 사랑은 마음의 양식입니다. 아니 전인격의 양식입니다. 밥이 절대로 정신의 양식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육체를 가진 영혼이요, 영혼을 가진 육체이기 때문에 밥과 사랑의 두 가지 양식이 다 필요합니다.
밥이 부족할 때 우리의 육체는 영양불량의 병에 걸립니다. 따라서 사랑이 부족할 때 우리의 인격은 애정 결핍에서 오는 병에 걸립니다. 애정이 너무 결핍되면 냉정하고 이기적이고 비뚤어진 인간이 됩니다. 이런 사람은 사회에 대해서 복수심이 생기고, 폭력 충동의 노예가 되어 반사회적인 범죄자가 되기 쉽습니다. 애정이 너무 과다하면 독립심이 적어지고, 의존심이 강한, 나약한 사람이 되기 쉽습니다.
화초에 거름을 너무 많이 주어도 병들고, 너무 안 주어도 병듭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의 결핍도 병나게 하고 사랑의 과잉도 병나게 합니다. 고아가 왜 범죄자로 전락하기 쉽습니까 인격의 성장기에 가장 중요한 애정의 양식을 먹지 못했기 때문에 성격에 병이 생긴 것입니다. 인간은 사랑을 먹고 사는 동물 입니다.
행복하려면 사랑이 필요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사랑을 떠나서 행복을 말하는 것은, 나무를 떠나서 열매를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물이 몸의 주성분을 이루는 것처럼 사랑은 인간의 주성분을 이룹니다. 소금에서 짠맛을 빼면 소금이 아니고, 사탕에서 단맛을 빼면 사탕이 이니고, 고추에서 매운 맛을 빼면 고추가 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에게서 사랑을 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랑이 없는 인생은 향기 없는 꽃과 같고, 꽃이 없는 화원과 같습니다. 인생에서 사랑을 제거하면 풀 한 포기 없는 사막처럼 허무하고 황량해집니다.
오늘 주신 말씀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의 복음입니다. 방언이나 천사의 말을 해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언을 해서 모든 비밀과 지식을 알고 있다고 해도 사랑이 없으면 소용없습니다. 산을 옮길 정도의 큰 믿음이 있다고 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게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 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사랑은 투기하거나 자랑하지 아니합니다. 교만하거나 무례하지도 아니하고 사랑은 제 생각만 하지도않습니다. 사랑은 원한을 품지 않고, 의가 아닌 것을 기뻐하지아니하며, 바른 것을 기뻐하고 범사에 참으며, 범사에 믿으며, 범사에 바라며, 범사에 견딥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입니다.
이 글은 사랑에 관한 최고의 문장입니다. 가장 깊은 철학입니다. 동서고금의 위대한 종교와 철학이 모두 사랑을 강조했습니다. 이것은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크고 가장 높은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1.사랑하면 관심이 있습니다
꽃을 사랑하는 사람은 꽃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집니다.꽃에 물을 주고, 거름을 주고, 벌레를 잡아 주고, 소독을 해주고, 풀을 뽑아 줍니다. 꽃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꽃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사랑과 관심은 정비례합니다. 사랑이 깊으면 깊을수록 관심이 크고, 사랑이 적으면 적을수록 관심이 적습니다. 아들을 사랑하면 아들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집니다. 내가 누구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사실은 그를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무관심할 수 없습니다.
문학을 사랑하면, 문학에 대해서 진지한 관심을 갖습니다. 나라를 사랑하면, 나라에 대해서 지대한 관심을 가집니다. 나라에 대해서 무관심한 것처럼 좋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언젠들 그렇지 아니하리오마는 오늘날과 같이 개방화 시대, 국제화 시대를 맞이 하여 세계 여러 나라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나아가려면, 우리 국민 하나하나가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이 내 나라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하고 언제나 관심을 가지고 대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의 대상에 대해서도 깊은, 그리고 적극적인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사랑은 본체만체 하지 않는 것입니다. 본체만체 할 수 없는 것이 사랑입니다. 관심의 정도가 사랑의 정도를 결정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내 가정에 얼마나 관심이 있습니까 내 교회에 얼마나 관심을 기울입니까 내 나라에 대해서 얼마나 관심을 기울입니까

2.사랑한다는 것은 책임을 느끼는 것입니다.
책임이란 말을 영어로 ‘Responsibility'라고 합니다. 이 말은 ‘대답한다’(Respond), 또는 ‘응답한다’는 뜻입니다. 책임을 느낀다는 것은 상대방이 나를 부를 때 내가 대답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몸이 아파서 엄마를 찾으면 어머니는 곧 대답합니다. 그리고 의사에게 가든지 약국에 가서 약을 사옵니다.
책임은 부르는 데 대한 대답입니다.
나라가 위기에 처해서 우리를 부를 때 우리는 당장 달려가서 나라를 위하여 싸우고 나라를 지키는 역군이 됩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의 대상에 대해서 깊은 책임을 느끼는 것입니다. 부모는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자녀의 건강에 대한 책임, 생활에 대한 책임, 교육에 대한 책임, 결혼에 대한 책임, 미래에 대한 책임을 느낍니다. 사랑과 책임은 비례합니다. 얼마나 책임감을 느끼는 지를 보면 얼마나 사랑하는 지를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면 무책임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좋지 않은 것 중의 하나가 무책임, 책임 회피, 책임 전가 입니다.

3.사랑하면 존경합니다
사랑은 남을 지배하거나 억압하거나 착취하지 않습니다. 아내를 사랑하면 아내의 자유를 존중하고 아내의 인격과 생각과 개성을 존중합니다. 얼마나 상대방을 존중하느냐 하는 것을 보고 얼마나 사랑하느냐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은 자기 중심이 아니라 상대방 중심입니다. 사랑하면 상대방의 의사를 존중하고, 그 인격을 존경합니다.
사랑은 이기주의가 아니고 이타주의입니다. 사랑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고 상대방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합창을 할 때도 같은 원리가 적용된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을 존경하고, 다른 사람의 소리를 들으면서 노래해야만 합창을 바로 할 수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야 어떻게 하든지 나만 노래하면 된다고 소리를 지르면 합창이 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 교회도 말하자면 큰 합창단과 같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존경할 때 사랑이 넘치는 교회가 되고, 화평한 가정이 되고, 화평한 교회가 될 것입니다. 서로가 존경하는 데에 화평이 있습니다.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란 말이 있습니다. 가정이 화평하면 만사가 잘 됩니다. 서로가 존경할 때입니다. ‘교화만사성(敎和萬事成)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교회가 평안하면 만사가 잘 되고 부흥하고 성장합니다.

4.사랑하면 이해합니다
사랑하면 할수록 이해하는 마음이 깊어집니다.이해하면 이해할수록 사랑하는 마음이 깊어집니다. 사랑은 이해를 심화시키고, 이해는 사랑을 심화시킵니다.
사랑이 없을 때 이해심이 부족하고, 이해심이 적으면 사랑도 부족합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보아야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고 이해하는 마음으로 보아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인도의 시성 타고르는 사랑의 별명은 이해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면 상대방의 고민, 불만, 고독, 슬픔을 깊이 이해합니다. 상대방의 눈동자, 몸짓 하나, 얼굴의 표정, 말의 억양만 들어도 상대방의 심중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해(理解)라는 말은 ‘이치로 푼다’는 뜻입니다.
원리원칙을 안다는 뜻입니다. 영어로 이해라는 말을 ‘understand'라고 하는데 이 어원은 밑에(under) 선다(stand)는 뜻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이해하려면 겸손한 마음으로 상대방의 밑에 서야 합니다. 교만한 마음을 가지면 상대방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것은 이해하는 것입니다.

5.사랑하는 것은 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상대방에게 아낌없이 줍니다. 사랑하지 않을 때는 아까워서 줄 수가 없습니다. 무엇을 얼마나 주는가를 보고 얼마나 사랑하는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적게 사랑하면 조금 주고, 깊이 사랑하면 많이 줍니다. 사랑하는 것과 주는 것은 정비례합니다. 많이 주면 많이 사랑하는 것이요, 적게 주면 적게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할 때는 주는 것이 아깝지 않습니다. 사랑하지 않을 때는 주는 것이 아깝기만 합니다.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에 돈을 주고, 정성을 주고, 모든 것을 아낌없이 줍니다. 사랑하면 주는 것이 기쁨이요, 보람이요, 축복이요, 만족입니다. 주고 나서 아깝지 않은 것, 그것이 사랑입니다.
우리 애들도 보니까 사랑하는 대상이 생기면 그저 주고 싶어서 안달입니다. 집에 좀 반반한 것 있으면 언제 가지고 가서 주는지요, 이것이 사랑입니다.
내가 가진 것을 남에게 주면 나는 그만큼 적어집니다. 물리학적, 경제학적 원리로 보면 분명히 그렇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경우에는 주고 난 다음에 내가 더 풍성해졌다고 느끼고, 더 부유 해졌다고 느낍니다. 이것이 사랑의 신비입니다. 주면 줄수록 나는 기쁘고 풍성함을 느낍니다. 받으려고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주고 싶어서 주는 것입니다. 받겠다는 의식과 의지를 떠나서 그냥 자꾸만 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사람의 마음에 커다란 혁명을 일의킵니다.
우리의 생각과 행동에 큰 변화를 가져옵니다. 사랑은 낡은 사람을 새 사람으로 만듭니다. 사랑처럼 위대한 힘은 없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 고린도전서 13장이 바로 그 진리를 우리 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무엇을 위해 삽니까
사람은 저마다 저다운 개성과, 천분과, 재능과, 적성이 있습니다. 그것을 표현하는 것을 ‘자기표현’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창조적으로 자기를 표현하는 것이라고 해도 될 것입니다. 시인은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 시작(詩作)에 전념합니다. 그것이 시인의 자기표현입니다. 화가는 정성과 정열을 기울여 그림을 그리고, 조각가는 조각에 심혈을 기울입니다. 그것이 그들의 창조적인 자기표현입니다.
등산가가 왜 땀을 흘리고 고생하면서 산에 오릅니까 운동선수가 왜 운동경기에 몰두합니까 기업가가 왜 기업에 집념을 가지고 임합니까 학자가 왜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독서와 연구에 전념합니까 창조적 자기표현을 위해서입니다. 사람은 저마다 자기표현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내가 내 마음껏 창조적 자기표현을 할 때 삶의 기쁨이 있고, 보람이 있고,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자기표현을 못하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사람은 저마다 자기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인생의 깊은 의미와 가치는 개성에 있습니다. 자기 개성에 있습니다. 자기개성을 마음껏 표현하고 실현하는 것이 내가 나답게 사는 길이요, 인생을 인생답게 사는 것입니다.
시인이 시를 쓰지 못 할 때 불행하고, 화가가 그림을 그리지 못할 때 불행합니다. 작가는 작품을 쓰지 못할 때 생의 의미가 없습니다.
행복이 어디에 있습니까 보람된 일을 하는 데에 있습니다.가치가 있는일, 의의가 있는 사업, 훌륭한 목표에 열중하고 몰두 할 때 거기서 행복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어린아이가 소꿉장난에 열중할 때, 소년소녀가 자기들이 좋아하는 놀이에 정신이 팔렸을 때, 조각가가 작품 활동에 심혼을 쏟을 때, 학자가 연구에 전심전력할 때 운동선수가 운동에 전력투구할 때, 성도들이 교회봉사에 전념할 때 거기에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키에르케고르는 22세의 대학시절 일기에서 이런 말을 썼습니다. “온 세계가 다 무너진다 하더라도 내가 꽉 붙들고 놓을 수 없는 이념, 내가 그것을 위해 살고 그것을 위해 죽을 수있는 사명을 나는 찾아야 한다.”
온 세상이 다 붕괴된다고 하더라도 절대로 놓을 수 없는 이상을 찾는 것, 그것을 위해 내가 살고 그것을 위해 내가 죽을 수 있는 사명과 목표를 발견하는 것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그런 이상이나, 그런 목표나, 그런 사명을 찾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사람은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고 무엇인가를 위해 죽습니다. 너는 무엇을 위해 살고, 무엇을 위해 죽을 생각이냐고 물을 때 나는 이것을 위해서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죽어도 주를 위하여”라고 말했고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밖에서 볼 때는 그가 고생하며 모략과 중상을 당하고 비난을 받으며 살았지마는 그에게는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행복이 있었습니다. 사명을 위해 살았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20장 22절 이하에 바울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사람은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고, 위해서 죽는 것입니다. 그 ‘위해서’가 없을 때 우리는 허무주의에 빠지기 쉽습니다.
우리는 지금 허무주의의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허무주의의 노예가 되고 있습니다. 허무주의가 무엇입니까 인생의 목표의 상실이요, 삶의 무의미감입니다. 인생의 가치 상실이요, 방향 상실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것을 ‘패역한 세대’라고 표현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방향감각을 상실한 세대입니다.
너는 무엇 때문에 사느냐 라고 물을 때 대답을 못 하는 것이 허무주의입니다. 패역한 세대의 사람들은 왜 사는지, 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모르고 살아갑니다. 인생의 방향감각을 잃어버린 채 허둥지둥 살아가고 있습니다. 인생을 자신있게, 정열을 가지고 살아가지 못합니다. 저마다 빈틈없이 짜여진 현대의 조직사회에서 기계처럼 일하면서 분주하게 살아갑니다. 도시의 고독한 군중의 물결에 휩쓸려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립니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나의 할 일은 무엇이고, 어떻게 살아야 하고, 어떻게 죽어야 하는가 어떻게 사는 것이 바로 사는 길이고, 보람있게 사는 길이고, 행복하게 사는 길인가 나는 나의 길을 가고 있는가 나는 나답게 살고 있는가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이고 이런 물음 앞에 서게 됩니다. 이것은 인생의 근본적인 물음입니다. 이러한 물음에 대해서 분명한 대답을 하지 못하면 우리는 허무주의에 빠지기 쉽습니다. 술과 도박과 향락과 유흥으로 허무한 기분을 얼버무리면서 그날 그날의 생을 불성실, 무책임, 무기력 속에 살기 쉽습니다.

이 허무주의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습니까 우리의 가슴 속에 사랑이 가득 차고, 마음 속에 신념이 가득 차고, 생활 속에 창조의 정열이 넘칠 때 절대로 허무주의에 휩쓸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금년 일 년을 보람되고, 의미있고, 행복하게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1994년 1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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