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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와 사귐 (요일 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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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들 주위에 도가 넘친 신비주의자들이 상당히 많다.

특히 여호와의 증인들처럼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을 부인하는 자들과 오대양 사건의 장본인인 속칭 구원파와같은 이단들이 많다.

 이 요한서신이 기록되던 당시에도 구원파와같은 영지주의자들이 상당히 많았다.

 또 죄를 물먹듯 먹고 마시면서도 죄를 깨닫지 못하고 살고 있는 사람들이 날로 늘어나고 있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잘못된 신앙생활을 바르게하기 위하 참 믿음의 사람이 맛보는 즐거움과 기뿜의 감격을 주고자 이 서신을 기록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사도 요한이 전하는 말씀을 듣고 순종하면서 사는 사람에겐 구원의 감격이 넘쳐날 것임과 동시에 생활에 기쁨과 즐거운으로 충만할 것이다.

 3절에서 사도 요한이 당시의 성도들을 향하여 "우리와의 사귐은"이란 말로 권면한 내용을 따라서 말씀의 제목을 "우리와 사귐"이라고 했다.

 먼저 여러분 모두가 이 말씀과 아름다운 사귐이 있기를 축원한다.

그리고 말씀의 주인이신 하나님과 더 귀한 사귐이 있으시길 축원한다.

 1,우리가 듣고 눈으로 본바요 손으로 만진바라 1절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여기 이말씀을 좀더 자세하게 설명해 드리면 이런 내용이다.

"태초부터 있었던 그 생명의 말씀은 우리가 과거에 들은 것이지만 지금 듣는 것과 같이 생생하고 과거에 우리의 눈으로 본 것이지만 지금에 보는 것 처럼 똑똑하고 과거에 우리들의 손으로 만져 본 것이지만 지금 만지는 것과 같으다"

그럼 태초부터 있었던 생명의 말씀은 무었인가

요1;1절에 이런 말씀이 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1;14절에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독생자의 여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사도 요한은 내가라는 말을 쓰기보다는 우리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고 있는게 이 선신서의 특징이라면 특징일 수 있다.

 사도들인 우리가 들은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사도들인 우리가 본것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예수 그리스도였다.

사도들인 우리가 손으로 만진바 된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했던 삶의 실천이었 던 것이다.

 지금 사도요한의 연세가 90 이 훨씬 넘은 때였다고 생각된다.

그렇마단면 에수 그리스도와 함께 사였했던 때는 무려 90년전의 일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지금에 일처럼 확실하고 생생함을 느끼고 있었다.

 이 말은 사도 요한이 60 년전에 주님과 함께 있을 때의 일과 그 때 받은 말씀이지만 지금 받는 것처럼 늘 아멘의 사람이었음을 볼 수 있다.

 2,우리가 너희에게 증거하고 전함은 2-3절에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지라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 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사도 요한은 2절과 3절에서 다시 1절에 했던 말을 반복하고 있다.

2절에서도 "우리가 보았고" 3절에서도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거듭 거듭 되풀이 하고 있다.

 이는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건이 너무도 신비롭고 귀하기 때문이다.

이는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실이 말할 수 없이 소중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사도들만큼 확신속에 신앙생활을 했던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사도들만큼 즐겁게 인생을 기쁨으로 살아간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목숨을 걸고 이 기쁨의 소식을 증거하고 전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의 생활에 사도들이 누렸던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가 또는 사도들이 가지고 있었던 구원위 확신이 있는가 지금이라도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복음 때문에 죽어질 각오가 되어 있는가

여러분은 지금 마지못해 질질 복음에 끌려 다니는 사람인가 아니면 사도들처럼 목숨을 걸고 증거하고 전하는 능동적인 사람들인가

3,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함이니 왜 우리들에겐 사도들에게서처럼 그런 확신과 기쁨이 없는 것일까

말씀과의 사귐의 생활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사도들과의 사귐의 기회가 적은 증거이다.

주님과의 뜨거운 사귐의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 사도 요한은 말씀을 통하여 사귐을 권하고 있는 것이다.

 3절을 다 같이 보자.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여기 사귐이라는 말은 참으로 의미가 대단하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와의 사귐"이라고 한다면 이는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는 것을 의미한다.

말씀과 사귐 이라면 이는 말씀과 하나됨을 의미하고 사도들과의 사귐이라면 이는 사도들과 하나의 공동체가 된 것을 의미한다.

 우리 모두는 예수 만난지가 참으로 오래된 사람들인데도 옳바른 "사귐"의 역사가 없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그렇고 말씀과의 관게에서도 그렇고 성도들과의 사귐에서도 그런면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요일2;9절에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

요일1;6절엔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하거니와"

하나님과의 옳바른 사귐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란다.

주님과의 튼튼한 사귐의 관계가 되시길 바란다.

말씀과 깊은 사귐이 있으시길 바란다.

옆에 계시는 여러분들의 형제 자매들과도 뜨거운 사귐이 있기를 바란다.

 4절에 사도 요한이 우리와 사귐을 간절히 원함은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라"

하나님과 사귀고 주님과 사귐고 말씀과 사귀고 또 성도들과 뜨겁게 사귀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그리고 주님게서 말씀께서 주시는 참된 즐거움과 기쁨과 구 원의 확신속에 든든히 서 가실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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