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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온전한 사귐 (요일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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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마치 계단을 오르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겠다.

예수를 믿기는 믿는데 늘 제자리 걸음만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예수를 믿기는 믿는데 이는 제자리 걸음도 아니고 뒷걸음을질을 하는 사람도 있다

어떤 사람은 날마다 날마다 예수의 모습으로 변화되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매사에 밝게 살려고 즐겁게 살려고 애쓰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게된다.

 요한일서는 예수 믿는 사람들의 삶이 계속해서 계단을 오르듯이 올라가는 변화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면서 쓰여진 서신이다.

 그래서 1-4절까지의 말씀은 말씀과 깊은 사귐을 권하고 있다.

또 예수 그리스도와 뜨거운 사귐을 가지기를 원하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온전한 사귐을 권하고 있는 것을 말씀 드렸다.

 1,하나님에겐 어두움이 없다.

그러기 위하여는 하나님을 바로 알아야 한다.

5절에: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하나님은 빛이시라 했다.

하나님에겐 어두움이 조금도 없다고 했다.

 하나님은 빛을 만드신 분이시다.

하나님은 태양을 만드신 분이시다.

하나님은 빛 자체이시다.

 그 빛이 인간의 옷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셨던 것이다.

그 빛이 곧 에수 그리스도이셨다.

 요1;4-5절에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세계에 오신것은 어두움의 세게를 밝히시기 위한 것이다.

 빛이 있는 곳에 거룩이 있다.

빛이 있는 곳에 순결이 있다.

빛이 있는 곳에 용서가 있다.

빛이 있는 곳에 사랑이 있다.

 밤에 방에 불이 꺼졌다고 하자.

그러면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다.

마음은 있지만 마음대로 할 수는 없다.

어둡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다 우리 모두는 불꺼진 어두운 방과 같은 마음의 소유자들인 것이다.

불꺼진 어두운 마음의 방들을 밝히기 위하여 빛되신 에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모신 심령은 밝아야 한다.

빛을 모셨기 때문이다.

 2,우리에겐 어두움이 있다 6절에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니라"

이 세상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첫째는 어두움 가운데 거하는 사람이 있고 둘째는 빛 가운데 거하는 사람이 있다.

 먼저 어두움에 거하는 사람은--그럼 6절이 말하고 있는 어두움에 거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예수를 믿지 않는 불신자를 말하는 것일까 아니다.

6절에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여기에 어두움에 거하는 사람은 교회에 다니는 사람을 말한다.

 물론 철야기도도 잘 할 수 있다.

찬송도 잘하고, 성경도 많이 알고 봉사도 많이 하고 출석도 잘 할 수 있다.

그런데 세상에 들어가면 죄도 열심히 짖는 사람을 말한다.

 이런 사람의 신앙은 그 신앙 자체가 어딘지 잘못된 것이다.

아니 이런 사람의 신앙은 신앙이 아닐 수도 있다.

교회의 등록만으로는 시낭의 사람이라고 말할 순 없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잘 18-21절에서 어두움데 있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곡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술수와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짖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고 했다.

 그래서 어두움에 있는 사람은 이율배반적인 삶을 살게 된다.

교회생활과 교회 밖의 생활이 다른 사람을 말한다.

 이렇게 사는 사람을 성경은 짓말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진리가 그 속에 없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진리는 곡 에수 그리스도이시다.

 둘째 빛가운데 사는 사람은--빛가운데 사는 사람은 하나님과 즉 빛과 사귐이 있다고 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죄를 깨끝게하는 경험을 하는 사람이다.

 그럼 비빛에 거하는 사람은 누군가 교회는 완전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 아니다.

성숙한 성도들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많이 있다.

 교회는 성숙을 향해가는 사람들의 모임이라 할 수 있겠다.

그래서 서로서로의 사이가 불편할 때가 많은 것이 또한 사실이다.

 냄새나는 일들이 많이 있다.

눈골 사나운 일들도 많이 일어난다.

복잡한 사람들 문제가 많은 사람들이 모였기 때문이다.

 빛가운데 사는 사람이란 완전한 사람이라기 보다는 에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 씻음을 믿으면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쉽게 말하면 빛의 사람이란 회개의 사람을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는 사람이다.

죄 씻음을 경험하면서 사는 사람이다.

 7절에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잇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께끗하게 하실 것이요"

3,우리의 어둠을 고백하자

8-10절을 다 같이 읽자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 하였다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이 말씀은 현대인들의 죄에대한 견해를 잘 말씀해 주고 있다.

흔히 사람들은 사람의 본성은 착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기가 죄를 짖는 것은 주위의 환경이 나쁘기 때문이라 한다.

 또 어떤 사람은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법적으로 완전하다고 말한다.

 물론 지고한 학문과 논리적으로 죄를 않지는 방법을 터득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잠시 살펴 볼까요 사람들에겐 들킨 죄가 있는 사람이 있고 들키지 않은 죄를 가지고 살고 있을 뿐이다.

 안들키면 성자고 들키면 죄인인 것이다.

 본성이 착한 것이 아니다.

착한것같은 착각을 하고 있을 뿐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은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 죄인이었음을 말하고 있다.

아담과 하와의 원죄를 말하고 있다.

 이는 본성이 착하지 못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죄를 짖을 때 무식하게 짖고(성내고 찡그리면서) 어떤 사람은 유식하게 죄를 짖고 있는 것이다. (웃으면서)

여러분은 8절이 말하는 것과 같이 스스로 자신을 그리고 하나님을 속이면서 살고 있지 않은가

스스로 속이는 자 안에는 진리가 없다고 했다.

자기가 죄인인 것을 고백하지 않으며 살고 있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든다고 했다.

 9절 하반절에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고 했다.

 옛날에 임금이 길을 가다가 밭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 아주 나이가 많으신 분을 만나게 되었다.

임금:"할아버지 연세가 어떻게 됩니까" 노인:"내 나이 이제 네살이야" 여든이 넘어 보이시는 노인의 대답이다.

그 이유인즉 사람 노릇하면서 살게된 나이가 네살이라는 것이다.

 임금:"지금 심고 있는 나무는 무슨 나무인가 그 열매를 따 자실 수 있겠읍까" 노인:"이 나무는 사과 나무로 7년이 걸려야 열재를 맺는데 자기가 따 먹을려고 나무를 심는다면 거지보다 못하다. 나는 훌륭하게 살기 위해 나무를 심는다"

노인:"내가 심는 나무의 열매는 7년 후에 열재를 맺는데 그것도 일년에 한번 뿐이다. 그러나 옳바른 양심을 가진 사람은 날마다 열매를 맺을 수가 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참으로 하나님과의 종전한 사귐을 가지신 나이가 얼마라고 생각하는가 참된 회개의 삶으로 십자가의 보혈에 여러분의 영혼을 적시면서 살고 있는 경험을 하고 있는 년수가 얼마라고 생각하는가

여러분은 빛 가운데 살고 있는가 하나님과의 참된 사귐을 가지고 살고 있는가

하나님은 빛이시다.

우리들은 어두움의 사람들이다.

우리들의 어두움을 우리들은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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