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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광 뒤의 시련 (왕상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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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지자 엘리야를 한마디로 평한다면 "시련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왕상 17-19까지의 말씀을 보면 엘리야의 시련과 고통에 대해서 소상히 기록해 주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그가 당한 시련은 무의미하거나 삶에 손상만을 끼치는 시련이 아님을 알 게 됩니다. 그러므로 시련의 중요성과 유익성에 대해 사도바울은 롬5:3-4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환란중에도 즐거워 하나니 이는 환란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이 말씀은 주를 위해 당하는 시련에는 반드시 좋은 결과가 있는 것임을 가르쳐주는 말씀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하는 자에게는 고난이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고난과 시련이 있습니까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년동안 우로가 있지 아니하리라"고 하면서 아합의 왕권에 도전한 이후부터 엘리야게는 시련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이후 갈멜산상에서 하늘의 불을 내리고, 삼년반 동안이나 한발에 시달렸던 대지위에 단비를 내리는 이적은 행했을때 시련은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이것은 큰 영광뒤에 큰 시련이 기다리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면 시련은 무엇을 통해 올까요

첫째 물질적인 가난을 통해서 옵니다.

아합에게 도전한 엘리야는 그릿 시냇가에 살면서 까마귀가 물어다 주는 떡과 고기를 먹고 그날그날을 살았습니다. 그후 아합과 아세벨의 추적을 피해 머물게된 사르밧 과부의 가정에서도 넉넉한 생활을 영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런 경제적인 고통과 시련이 있을 수 있습니다. 신앙의 뜻을 따라 산다는 한가지 이유때문에 전혀 호전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극한 경제적 시련속에서 고통하며 살아가야 하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둘째 시련은 사람을 통해서 오기도 합니다.

본문 1-2절 말씀은 시련은 사람을 통해올 수 있음을 보여주는 말씀입니 다.

사실 엘리야의 갈멜산상의 역사는 나라를 위한 구국적 사역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세벨이 엘리야를 죽이려 한 것은 시련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결국 엘리야는 브엘 세바 광에서 방황해야 했고, 절망과 좌절속에 빠져 고독한 몸부림을 쳐야 했습니다. 이렇게 시련은 쓴 것읍니다. 엘리야가 맛본 영광이 컸다면 시련 또한 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시련은 통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첫째 사람을 믿지 말라는 뜻입니다.

갈멜산상에서 하늘의 불을 내리고, 메말랐던 대지에 단비를 오게 했던 엘리야의 사역은 가히 아합왕을 노라게 했습니다. 그리하여 엘리야에 대한 아합의 인식을 크게 바꾸어 놓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왕상18:44,46 절을 보면 여기서 우리는 엘리야와 아합의 관계가 부드러워지고 가까와 지기 시작함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아합은 하나님의 사람이 가까이 할만한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바알우상을 끌어들여 온 이스라엘 백성들로 우상 숭배케 했고, 사사로운 욕심에 끌려 나봇을 죽인 살인자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많은 선지자들로 거짓된 예언을 하게 하여 아람과의 전쟁에서 죽게한 불의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런 불의하고 사악한 아람으로 부터 엘리야를 떼어 놓기 위하여 이세벨을 이용하여 엘리야를 광야로 내어 몰아 내셨던 것입니다. 1900년대 연합군이 중국을 침공했을 때 청나라의 황제가 총애하던 애첩 진비가 시어머니 서태후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작은 우물이 중국 자금성에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은 악한 존재입니다. 또한 약한 존재이며, 부화회동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믿고 가까이 한다는 것은 자기 패망의 길을 걷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입니다.

 둘째 시련은 자신을 믿지 말라는 뜻입니다.

사람은 큰일을 하고나면 자만에 빠지기 쉽습니다.하늘의 불을 내린 역사와 기도의 능력으로 메마른 대지위에 비를 오게한 것은 위대한 역사였습니다. 이것은 그에게 스스로 교만해질 수 있는 조건이 자라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왕상 18:46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의 능력이 엘리야에게 임하매 저가 허리를 동이고 이스라엘로 들어가는 곳가지 사람앞에 달려갔더라" 그는 서서히 사람앞에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일보다 불의한 아합앞에 나서서 얼씬거리는 것은 합당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성경은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다 하였고 (잠16:18)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2)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세벨을 통해 엘리야의 마음속에 자만심이 자라지 못하도록 역사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시련은 겸손을 가르쳐주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셋재 시련은 하나님만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만 의지하는 말씀은 하나님만 찾으라, 하나님께 기도하라, 하나님께 순종하라는 복합적인 뜻을 갖고 있습니다.

본문 4절을 보면 이세벨에게 쫓기어 브엘세바의 광야를 방황하다 로뎀나무 아래 쓰러진 엘리야는 드디어 "여호와여!" 라고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인간은 시련과 역경에 봉착하게 될때 드디어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시련중에 있는 성도의 입에서 "여호와여"라는 기도가 터지면 다 된것입니다. 그것ㄹ은 일이 해결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시편 23편의 말씀처럼 스스로 자기의 길을 개척할 수 없고 또 스스로의 힘으로 살 수 없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어려운 일이 있을때나 언제나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엘리야처럼 쫓기고 있는 절박한 순간에 "여호와여"라고 소리기치만 하면 하나님은 그때부터 우리를 위해 일하시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부르짖는 엘리야를 위해 하나님은 떡과 물을 공급해 주셨습니다.

사십주사십야를 달려가도 쇠하지 않는 새힘을 주셨습니다.

호렙산 동굴속에서 세미한 음성으로 새로운 사명을 주셨습니다.

 성도여러분!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법입니다.

세상영광 후에 찾아오는 일시적인 시련을 두려워 말고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하나님께서 놀라운 역사로 당신을 위로해 주시고 붙들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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