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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고난의 축복들 (벧전 0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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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은 온갖 형태로 옵니다. 고난은 온갖 이유로 발생합니다. 고난은 다양한 형태로 옵니다. 어떤 이는 질병으로, 어떤 이는 불의의 사고로, 또 어떤 이는 정신적인 문제로 고난을 받습니다.
베드로는 북부 터어키에서 고난을 당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서신을 보냈습니다. 그들의 고난은 순전히 예수님을 따르기 때문에 생긴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핍박을 받았습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이라고 우롱하고 기독교가 새로운 이단 종파라고 모욕하였습니다. 다른 소수 종파들처럼 기독교 신자들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는 이유에서 의심을 받았습니다. 소수 종파들에게 대해서 사람들은 편견을 갖고 온갖 소문을 유포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일반 사회의 풍조를 무턱대고 따르지 않았습니다. 터어키 북부에 있던 신자들은 로마의 여러 잡신들을 섬기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시장에서 싸게 살 수 있는 고기를 사지 않았습니다. 그런 육류들은 이교의 신전에 제물로 바쳐졌던 고기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터어키 북부 시민들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해서 의심을 품고 경계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우선 로마 총독 앞에서 심문을 받고 유죄 판결을 받아 반란자에게 행해지는 십자가형을 당한 죄수를 숭배하는 자들이라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또한 식인종이라는 말도 들었습니다. 그들은 이른 아침에 일어나서 옥외에서 만난 후 기도를 올리고 나서 자기들의 신을 먹었다는 악평을 들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우리는 그분의 몸을 먹고 그분의 피를 마신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저런 이유로 그리스도인들은 로마 제국에서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들이 당한 박해는 가혹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의 신자들이 자신들의 상황에 대처한 방법에는 퍽 특이한 점이 있었습니다.

고난 중의 기쁨
베드로는 터어키 북부의 그리스도인들이 고난 중에서도 기뻐하였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당시의 신자들이 고통과 상처를 즐겼다는 뜻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고통을 주거나 받는 것을 즐기는 자는 병든 자이므로 즉시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의를 위해 핍박을 받을 경우에는 유익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같은 유익들은 고난의 결과로 나타납니다.
오늘날 만일 우리들이 시련을 당한다면 그 고난의 지평선 너머를 볼 수 있어야 하며 주께서 얼마나 크신 구원을 허락하였는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의 고난이 잠시 동안만 지속된다는 사실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우리들이 천국에 가면 고통과 슬픔도 없을 것입니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시30:5).

고통받는 성도는 죽음을 자주 고대합니다. 죽음을 지나면 모든 고난이 다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계21: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그런데 놀라운 것은 우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겨 주시는 분이 하나님 자신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온갖 시련과 염려와 고난에도 불구하고 참된 신자로 살 때에 받게 되는 유익들을 항상 기억할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의 수신자들이 “여러 가지 시험”(6절)을 당한다고 말하였습니다. 이 여러 시험들은 자주 반복되기도 하고 때에 따라 그 강도에 차이가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도들이 받는 시험의 종류가 어떤 것이든, 하나님의 백성들은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현세가 모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크게 기뻐합니다.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우리 믿음의 목표인 우리 영혼의 구원입니다(1:9)

믿음을 강화시키는 시련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핍박이 일어나는 곳에 있는 교회는 강해지는 법입니다. 예컨대 여러 해 동안 박해가 계속되었던 러시아에도 신자들이 존속하였습니다. 그 회중들 가운데에는 상당수의 젊은이들도 있었고 진실된 참 신자들도 많았습니다. 물론 다른 나라들에서도 이와 유사한 실례들을 찾아 수 있습니다.
18세기 잉글랜드에서는 분리 주의자들(비국교도들)이 잉글랜드의 국교인 성공회 목회자들도 아니면서 복음을 전한다는 이유로 투옥되었습니다. 그래서 존 번연도 여러 해 동안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는 아무것도 도적질하지 않았고 누구를 죽인 적도 없었습니다. 그는 단지 가정 집회나 야외 집회에서 설교를 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당시의 국법을 어기는 일이었습니다. 당시의 합법적인 예배 장소는 교구 교회였으며, 법적인 유일한 기도서는 국교의 기도서( The Book of Comman Prayer)였고, 설교를 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자들은 성공회 감독이 안수한 목사들 뿐이었습니다.
그러면 이처럼 엄정한 제재 조치가 복음의 확산을 막았을까요 아닙니다. 1662년에 약 2천 명의 목회자들이 복음 전파에 대한 규제 조치에 반대하여 성공회를 떠났습니다. 그들과 같은 비국교도들은 독립적으로 예배 처를 많이 열었고 설교자들도 증가했었습니다.
7절은 불같은 시련에 대한 한 예시인데 금을 실례로 들고 있습니다. 금은 매우 값진 금속입니다. 그런데 순금을 얻으려면 높은 수준의 정련을 거쳐야 합니다. 금이 담긴 광석은 고열을 받아야 불순물이 제거됩니다. 그래야만 일체의 불순물의 흔적이 없는 순금이 되어 귀금속으로서 인정을 받을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 순금 제련의 예시를 통해 신자들의 믿음을 설명합니다. 성도의 믿음은 제련된 금과 같은 것입니다. 이 믿음은 어떤 귀금속들보다도 더 귀합니다. 그런데 때가 되면 금까지도 없어질 것입니다. 이 악한 세상이 완전히 파괴되는 마지막 날이 오면 황금도 남아 있지 못할 것입니다.(벧후3:7). 그렇지만 참 신자들의 믿음은 모든 사건들의 극점까지도 통과하며 끝까지 견딥니다. 고난은 주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신자들의 믿음의 신실성을 드러내는 방편으로 사용될 것입니다. 그래서 본분에서는 베드로가 마치 다음과 같이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의 믿음은 하나님의 임재 속으로, 곧, 하늘 속으로 여러분을 계속 인도해 갈 것입니다”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갖가지 고난들을 사용하여 신자들의 믿음이 참됨을 증명하도록 하신다고 말합니다. 뜨거운 열(熱)이 금을 정련하듯이 시련은 우리들의 믿음을 인간적인 공로나 열성의 오물들로부터 정화시켜 줍니다. 시련은 신자들로 하여금 오직 하나님만 신뢰하도록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 중에는 주님을 위해 말할 수 없는 고난을 받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분들을 보면 우리들의 믿음이 과연 얼마만큼 참된 것인지를 반성하게 됩니다. 우리들의 믿음은 이 세상의 온갖 시련들을 견딜 수 있을까요 만약 이 세상이 갑자기 무너지는 듯한 일들이 생겨도 우리들의 믿음이 굳게 서 있을 수 있을까요 예를 들어봅시다. 만약 우리들의 배우자나, 아들이나, 딸이나 혹은 부모가 고통 중에 죽어도 우리들의 믿음이 흔들리자 않을까요 베드로전서의 수신자들에게는 이미 여러 종류의 시련들이 닥쳐왔습니다. 그런 때에 베드로는 믿음의 신실성을 증명하도록 하기 위해 시련이 오는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이런 시련의 목적은 베드로전서의 수신자들에게 적지 않은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야고보도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약1:2-3)
“목사님들의 죽음에 대한 가족과 성도들의 자세”
(약1:12)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그리스도를 아는 기쁨
베드로는 예수님과 함께 걷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육신으로 오셨던 예수님을 보는 특권을 누리지 못한 자들도 기뻐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 까닭은 지금도 믿음의 눈으로 예수님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주께서 우리의 동반자가 되시고 우리와 매우 가깝게 되십니다. 12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주님의 손에서 못자국을 자기 눈으로 확인하고 예수님의 옆구리와 손발에 뚫린 상처에 자기 손을 직접 대어 보기 전에는 주님의 부활을 결코 믿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모든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 때 주님은 의심하는 도마에게 십자가의 못 자국을 보여주며 손을 대어 보라고 청하였습니다. 도마는 다만 예수님을 향해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20:28)라고 고백할 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도마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20:29)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베드로는 그의 수신자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을 상기시켜 주는 진술을 하였습니다. (벧전1: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이 영광스러운 즐거움은 새로 거듭나는 자들에게 주어집니다. 그래서 인생을 새롭게 보고 새롭게 사는 새 출발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신자들은 확고한 산 소망을 받았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즐거워합니다. 우리를 위해 간직된 유산이 하늘에 있으므로 우리는 기쁨에 차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받기 때문에 즐거워합니다. 우리들은 예수님을 더욱 사랑하며 주님을 믿으면서 살기 때문에 말로 다 형용할 수 없는 영광스런 기쁨을 누립니다. 이같은 성도의 즐거움을, 거듭나지 못한 불신자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5절에서처럼 베드로는 이 모든 것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능력과 영광으로 계시될 시점을 향해 나아간다고 말합니다. 그 때에 우리들의 믿음은 주님을 위한 찬송과 영광을 드러낼 것이며 우리들도 영화롭게 될 것입니다. 우리들은 현재 영원한 구원의 보장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오실 때 우리 믿음의 목표인 우리 영혼의 구원을 온전히 받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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