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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자와 사회 (벧전 02: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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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어려운 처지가 아니면 신앙 생활이 휠씬 용이할 터인데…’ 우리는 모두 이런 말을 털어 놓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들은 보다 나은 입장에 있는 듯한 다른 교우들을 보고 그들과 같은 경우라면 신앙 생활을 휠씬 여유있게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은 흔히 현재의 열악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웃으면서 활기찬 믿음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현실입니다. 우리들은 지금 현재 처해 있는 상황에서 주님을 섬겨야 하며 남의 떡이 항상 더 크게 보인다고 푸념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들은 원하는 곳으로 이사를 갈 수는 있어도 나쁜 이웃과 맞닥뜨리는 것을 거부하지는 못합니다. 우리들은 친척들을 사랑할지라도 그들의 질병이나 나쁜 성격들은 어찌하지 못합니다. 우리들은 자녀들을 사랑합니다. 그렇지만 그들의 시끄러운 팝송을 어찌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들은 현재 처한 장소와 여건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들은 다른 곳으로 옮겨가고 싶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께서 원하셔서 우리들을 어떤 곳에 붙잡아 주시면 그 곳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순종입니다.

종들과 주인들
베드로는 종들이 주인들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베드로가 본문에서 언급한 종들은 집안의 종들입니다. 한 통계 자료에 의하면, 당시 로마 제국에는 6천만 명이 넘는 노예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각 계층에 고용되었는데 일반 노동뿐만 아니라 의사나 교사와 같은 전문직에도 종사하였습니다. 로마 제국의 노예들은 몇백 년 전 아프리카에서 끌려와 미국 남부의 목화 농장으로 이송되었던 흑인 노예들보다는 휠씬 나은 대우를 받았습니다. 그들에게는 사회에서 감당해야 할 역할이 분명하게 주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로마의 노예들은 자유의 몸이 아니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비교적 편안하게 사는 자들도 있었고, 노임을 받는 경우도 있었으며, 은퇴 무렵에는 자유인의 신분을 돈으로 살 수 있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유를 얻기까지는 역시 노예였으며,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살수 있는 권리가 없었습니다.
이것은 현대 사회의 구주에서 보면 매우 바람직하지 못한 제도입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노예들에게 주인들을 대항해야 한다고 촉구한 구절이 없습니다. 바울은 노예와 주인의 관계에 대해 많이 언급했었지만, 종들이 주인을 떠나야 한다고 가르치지는 않았습니다(엡6:5-8 ; 골3:22-25 ; 딤전 6:1-2 ; 딛2:9-10) 오네시모는 자기 주인인 빌레몬에게서 도망을 쳤지만 바울은 그를 회심시킨 후 주인에게로 돌려 보냈습니다.
바울은 노예 제도를 정죄하지도, 인정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노예 제도를 당시에 존재했던 삶의 한 현실로 받아들였을 뿐입니다. 그는 노예들이 주인들에게 항거할 경우 유혈이 따를 것을 알았습니다 실제로 스파르타커스(spartacus) 노예 봉기시 커다란 유혈 폭동이 일어났습니다.
한편, 노예 해방 원칙들은 성경에 매우 분명하게 세워져 있습니다. 서구에서는 영국의 월리암 월버포스(Willam Wilberforce)와 같은 그리스도인들의 영향으로 노예 제도가 완전히 불식되었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아직 이 세상에는 피고용인들을 노예처럼 부리거나 여자와 아이들을 종처럼 대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베드로는 18절에서 “순복”하라는 말을 다시 인용하였습니다. 그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인간이 세운 제도의 권위에 복종해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2:13), 그런데 이번에는 그리스도인 종들이 주인에게 순복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바울도 동일한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골3:22)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골3:23)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하고 사람에게 하듯하지 말라 (골3:24) 이는 유업의 상을 주께 받을줄 앎이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이 교훈은 현대 사회의 근로자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윗사람이 볼 때에는 열심히 일을 하는 척하고 지켜보는 사람이 없으면 한눈을 파는 것이 일반적인 피고용인의 성향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 근로자들은 자신들이 우선 하늘 아버지에 의해 고용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일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봉사라고 생각해야 마땅합니다.
그럼 종들은 어떻게 일해야 할까요 그들은 주인들을 “두려워함으로” 섬겨야 합니다 이 말은 무서워한다기 보다는 존경한다는 뜻입니다. 종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있으므로 자기들을 부리는 주인들에 대해 불평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 종들은 자기의 상전들을 존경해야 한다는 것이 성경의 분명한 가르침입니다. 사실상 베드로는 17절에서 상전들만 아니고 “뭇사람을 공경”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 종들은 까다로운 상전들에게도 순복해야 합니다. 상전들 중에는 관대한 자들도 있고 몰인정하며 악한 주인들도 있습니다. 그래도 그리스도를 믿는 종들은 하나님이 그들을 그런 주인들 밑에서 선한 삶을 살도록 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2:12), 그리스도인 종들을 통해서 그들의 주인들이 주 예수를 믿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한 목적입니다.
현대사회에서도 우리는 본문의 원칙을 적용해야 합니다. 특히 고용주와 피고용주가 신자들일 경우 더욱 그러해야 합니다. 피고용자는 고용주를 잘 섬길 의무가 있습니다. 자신이 먼저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자라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고용주를 위해 하는 일을 단순히 사람에게 하는 근로 작업으로 보지 말아야 합니다.
고용주도 건전한 노동 조건을 마련해야 하고 공정한 임금을 지불해야 합니다. 19세기 스코들랜트의 조선업자들은 거액의 헌금을 선교 사업에 바쳤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근로자들은 박봉에 시달리며 지독한 가난 속에서 살아야 했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 고용주들은 그런 과오를 범하지 말고 임금을 착취하지 말아야 합니다. 별도의 이익이 생기면 근로자들을 잊지 말아야 하며 경영주로서의 지나친 재산 축적을 삼가야 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 고용주들에게 이렇게 권면하였습니다. “(골4:1) 상전들아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배풀지니 너희에게도 하늘에 상전이 계심을 알지어다” 그는 또 근로자들에게도 “(살후3:10)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 이 말씀은 장애인으로 일하지 못하거나, 무직자 실직자들이 굶어 죽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고의로 일을 하지 않으려는 자에게는 재정적 혜택을 주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현대 사회에서의 경제 활동에 엄청난 부정이 개입되어 있다는 사실은 상식에 속합니다.장부를 속이고 뇌물을 주고 받는 사례가 너무도 허다합니다. 만일 어떤 고용주가 부정한 방법으로 사업을 하면서 그리스도인 피고용인에게 입을 다물거나 부정을 하라고 명령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상전에게 순종해야 된다고 말했습니까
그 대답은 ‘아니요’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께 복종해야 합니다. 바울의 권면은 부정과 불법을 방조하거나 인정해야 된다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들은 모든 일에서 정직해야 합니다.

복음을 위해 받은 고난
베드로는 모든 교인들이 복음을 위해 기꺼이 고난을 받아야 한다고 촉구하였습니다. 19절을 보십시오. 베드로는 부당한 고난을 받는 자들을 향해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공의에 대해 많이 가르칩니다. 예를 들면 성경은 가난한 자에 대한 압제를 자주 거론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부당한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럼 신자가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 어떻게 처신해야 하겠습니까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어 봅시다.
(눅6:32)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느니라 (눅6:33)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를 선대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눅6:34)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빌리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의수히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빌리느니라 (눅6:35)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헤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로우시니라
주님의 말씀은 우리들이 자신의 권리를 내세우는 데 급급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물론 다른 사람들의 권익을 위해서는 앞서야겠지만 우리 자신들이 부당한 취급을 당할 때에는 “슬픔을 참”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 슬픔을 참으면” 은혜로운 일입니다. 성경은 우리 성도들이 주님을 위해 고난을 받으면 하나님으로부터 보상을 받는다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이 보상은 우리가 인간들로부터 받을 수 있는 그 어떤 칭송보다도 휠씬 더 나은 것입니다.

성도들은 때때로 부당한 고난을 받습니다. 그럴 때, 자칫하면 우리들은 마치 순교자라도 되는 듯이 처신하려는 유혹에 빠질 수 있습니다. 고난이 오히려 영적 우월성을 내세우는 교만의 계기가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나를 보십시오. 나는 고난을 잘 견디고 있지 않습니까. 내가 얼마나 겸손하고 영적인지를 주목해 주십시오!” 참으로 겸손한 교인이라면 자신이 받는 고난에 대해 침묵하면서 주님이 허락하시는 난관을 기쁘게 극복해 나갑니다. 그런 교인은 자신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4:13) 하는 특권을 누린다고 조용히 기뻐합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생각하므로” 부당한 고난을 참는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집토에서 자기 백성들이 겪는 고난을 보셨듯이(출3:7) 오늘날의 성도들이 받는 고난도 보십니다. 주께서 성도들의 고난을 아신다는 사실은 큰 위로가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들의 고통과 시련에 몸소 들어와 계시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에 보내는 메시지에도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의 어려움을 아신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계2:2)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계2:9)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 (계3:8)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
그리스도인들은 선을 행하면서 받는 고난을 달게 여겨야 합니다. 이것은 ‘아름다운’일입니다. 베드로는 19절과 20절에서 이 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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