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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의 고난의 이유 (벧전 02: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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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앞에서 그리스도인이 노예들이 종종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때 참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노예가 아니더라도 신자들은 부당한 벌을 달게 받고 불평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도 베드로와 바울의 교훈에서 살펴보았습니다.
한편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잘못하지 않았는데 벌을 받아도 참아야 한다는 것은 퍽 이상스러운 가르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교인들이 고난을 견디여야 한다는 것을 주님을 실례로 들어 예시합니다.

그리스도는 고난의 모범입니다.
베드로는 우선 모든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부름을 받았다고 상기시켜 줍니다. 우리들이 진실로 주님을 우리의 구주로 알면 그분의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만일 주님이 우리를 부르셨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무엇인가를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주도권을 잡고 우리를 부르신 것이므로 우리는 그분의 주권적인 소명에 복종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목자가 자기 양들의 이름을 부르면 그 양들이 주인의 목소리를 듣고 따른다고 하였습니다. 본 서신에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가르침이 계속 이어져 나옵니다. 사실상 하나님의 소명은 신약 전체에 흐르는 중요한 주제 중 하나입니다. 신자들은 무엇보다도 ‘은혜의 부르심’을 먼저 받았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1:2절의 말씀에 의하면 신자들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미리 아시고 우리들을 택해 주셨으므로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먼저 우리를 불러주셨으므로 우리들이 죄를 회개하고 믿음의 선물을 받게 된 것입니다(엡2:8), 그 결과 우리들은 영원한 구원을 위해 오직 그리스도께 우리 자신을 던지면 되는 것입니다.
이 부르심의 주제가 2장에서 다시 거론됩니다. 9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참 신자들은 죄와 악의 어둠을 떠나라는 부름을 받은 자들입니다. 이 부름은 누구로부터의 소명입니까 성삼위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그런데 이 신령한 부르심의 목적은 먼저 자신을 세상의 빛이라고 하시는(요8:12) 예수님께로 신자들을 넣어주시고 그 다음 신자들로 하여금 그 기이한 빛을 어둠을 향해 비추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사명입니다.
3:9절에서 베드로는 우리들의 소명이 지닌 또 하나의 목적을 지적합니다.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나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때에는 성도의 소명을 기억하며 긍정적으로 대응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방법대로 대처해야 합니다. 신자들은 아무리 억울하거나 잔혹한 대접을 받을 때에도 축복으로 응해야 합니다. 이것은 자연스럽지도 않고 쉬운 일도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이 주님의 명령이므로 모욕을 축복으로 돌려주도록 힘써야 합니다.
5:10절을 보십시오. 소명이라는 주제에 대한 베드로의 마지막 구절입니다.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억울한 고난을 받을 때에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신자들보다도 더 가혹한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신자들은 위를 쳐다보고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속된 하나님의 백성들이 받을 하늘의 보상을 기억하고 기뼈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우리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영광”을 받도록 부름을 받았다고 말하였습니다.
예수님이 고난을 받으신 목적 가운데 하나는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본보기가 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들은 처음 글쓰기를 배울 때에 연습장이 제대로 없었지만 요즘은 글자들이 점선으로 인쇄된 책에다 직접 연필을 움직이면서 글쓰기를 익히는 단계를 거쳐서 그 단계가 지나면 공책의 맨 윗줄에만 인쇄된 글씨를 보고 공란에 스스로 글씨를 쓰는 연습장을 사용하는 것이 대개의 글쓰기 교육 방법입니다.
베드로가 21절에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라고 ‘본’이라는 말로 사용했습니다. 이 말은
“부당하게 고난을 받으면 그리스도를 바라 보십시오. 그리스도는 우리가 따라야 할 모범입니다.” 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린아이들이 글씨 교본을 보고서 글씨를 쓰듯이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고난을 받으셨으므로 우리가 마땅히 그분의 발자취를 밟아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럼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에 어떻게 예수님을 따를 수 있을까요
주님은 모욕을 당할 때에 같이 모욕으로 맞서지 않았습니다(2:23). 그분은 자기를 괴롭히는 자들에게 위협으로 대항하지 않았습니다(2:23).
예수님은 또한 고난 속에서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부당한 고난을 받을 때에 침묵하였습니다. 21-25절은 마치 개인의 간증처럼 들립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예수님의 이러한 모습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그 대답은 간단합니다. 5:1절을 보십시오.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고난을 겪으신 것은 이사야 53장의 성취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베드로가 본 예언이 성취되는 현장의 목격자로서 증언했기 때문에 더욱 더 분명한 증거를 가진 셈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체포되셨을 때 함께 있었습니다.
☆그는 또 칼을 뽑아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잘랐다가 예수님의 견책을 받은 자였습니다(요18:10-11).
☆그는 대제사장의 집에 감금했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다가 주님의 꿰뚫는 시선을 받았던 자였습니다(눅22:61).
☆그는 예수님이 수차례의 심문을 기다리는 동안, 로마 군인들에게 조롱과 매질을 당한 것을 목격하였습니다(눅22:63-64).
☆그는 헤롯 왕과 그의 군병들이 예수님을 무자비한 말로 모욕하고 우롱한 것도 알았습니다(눅23:11).
☆그는 예수님이 빌라도 앞에서 무서운 매질을 당한 것을 알았습니다(요19:1).
☆그는 자신의 주님이 쇠와 뼈조각이 달린 회초리로 맞아서 생긴 상처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아마 멀리서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처형되는 장면을 목격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의 진술은 너무도 생생합니다.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23절).
십자가 사건은 놀라운 측면들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예수님이 영광의 주(主)로서 그런 끔찍한 형벌을 피하시지 않은 것이 가장 이상합니다.
†예수님은 10,000명도 더 되는 천사들을 즉시 소집할 수도 있었습니다.
†유태 종교 지도자들의 사악한 계획들도 얼마든지 무산시킬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빌라도가 옳다고 여긴 애초의 판정을 끝까지 관철시켜 자신을 무죄 석방하도록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전혀 그런 일을 하시지 않았습니다.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23절). 주님은 사랑의 아버지께 자신을 맡겼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에게 얼마나 귀한 모범이 됩니까! 이것은 불공평하고 불의한 대우를 받을 때에 우리들이 가져야 할 자세가 무엇인지를 역설해 줍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모범입니다.우리는 마땅히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야 합니다.
우리들이 부당하고 억울한 일을 당할 때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사랑의 하늘 아버지께 우리 자신을 의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힘으로 보복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느니라”(롬12:19). 하나님은 온 세상의 심판관이시며 공정하게 판결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하나님의 손에 우리들의 억울한 사정을 맡기고 공정하게 판결될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단순한 고난의 모범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의 고난과 성도들이 견뎌야 할 고난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었습니다.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2:22). 아무도 예수님의 의로우신 수준을 따르지 못합니다. 본 절도 이사야 53장에 대한 예언을 암시해 줍니다. 예수님은 전혀 죄가 없이 이 세상을 사신 유일한 사람입니다. 만약 죄가 조금이라도 있으셨다면 우리의 구주가 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받으실 수 있는 속죄 제물은 흠이 없는 온전한 것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자”(히7:26)이므로 우리들의 죄를 사하시기 위한 완전한 제물이 되실 수 있었습니다.
24절은 예수님이 어떤 죽음을 당하셨는지를 말해줍니다.
예수님은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나무’란 ‘십자가’를 의미합니다. 사도행전 5:30절에서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이 대제사장과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말하기를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셨다고 증언하였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3:13절에서 신명기 21:23절을 이렇게 인용하였습니다. “(갈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 자기 백성들 한사람 한 사람의 죄를 모두 담당하였습니다.
우리들은 아마 그다지 심각한 죄를 짓지 않았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아무리 작은 죄일지라도 우리들을 천국에 둘 수 없을 만큼 심각한 죄입니다(계21:27).
(계21:27)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뿐이라
우리들의 깊은 양심은 우리가 다 죄인임을 압니다. 문제는 우리 죄의 무서움을 우리 자신들이 인식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온전히 거룩하신 하나님은 죄를 쳐다보실 수도 없다는 것을 쉽게 수긍하지 못합니다.(합1:13). 우리는 죄를 씻지 못하고 죽으면 영원히 멸망되고 만다는 것도 잘 믿지 않습니다.
옛날 유대인들은 죄를 없애기 위해서 속죄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많은 돈을 주고 산 희생 제물들을 성전으로 가져갔습니다. 그들은 매년 계속해서 제물을 바쳤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죄로 거룩하신 하나님을 거스리는 일을 어찌나 두렵게 여겼던지 죄를 씻기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라도 불사하였습니다. 그들의 삶은 성전 의식에 온통 매여 있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들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두려워서 흠없는 양들을 쉬지 않고 성전에 바쳤습니다. 그들은 물론 죄를 해결하려고 제물들을 부지런히 드렸지만 그런 의식이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황소나 염소의 피가 그들의 죄를 영원히 없애지는 못합니다(히10:4). 그래서 희생의식이 성전에서 반복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 때, 그 죽음은 단번에 바쳐진 속죄 제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써 우리의 모든 죄들을 파괴시키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죽음이 가져오는 효과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게”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인해 주어지는 한 가지 축복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받는 것입니다. 새 생명은 “의에 대하여”살고 “죄에 대하여”죽는 삶입니다.
당신은 예수님이 당신의 죄책과 형벌을 대신 져주기 위해 그 모든 고통과 고난을 겪으셨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는 다른 사람의 어깨 위에 지울 수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죄의 무게는 오직 예수님의 어깨만 짓누릅니다. 당신은 예수님을 당신의 주(主)요 구주로 믿으십니까 그러다면 “저가 책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24절)라는 말씀이 당신에게 진리로 응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목자의 사랑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양들의 목자라고 말합니다. 양들은 본능적으로 방황을 하는 동물입니다. 우리 죄인들도 하나님의 길에서 떠나 방황하는 자들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다.”고 말하였습니다(사53:6), 그런데 예수님은 선한 목자로서(요10:11), 큰 목자로서(히13:20), 목자장으로서(벧전5:3) 자기 초원의 양들을 부르고, 먹이며, 돌보아 주십니다.
이러한 목자의 사역을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으로 이루셨습니다. 우리들이 확신있게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23:1)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은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 일입니까! 베드로는 자기 죄를 회개하고 구원을 받기 위해 그리스도께로 나오는 자는 자기의 목자에게로 돌아오는 양과 같다고 말합니다. 그는 또 예수님이 자기 백성들의 영혼을 돌보시는 감독이라고 가르칩니다(25절). 우리들이 구원을 위해 예수님께 나아오면 많은 축복을 받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당신 자신에게로 불러주시고,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가시며,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을 수 있게 하십니다. 죄에 대하여 죽게 한다는 말은 주님이 우리에게 죄를 미워하는 마음을 주시고 죄로부터 돌아서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일은 쉽지 않습니다. 일평생의 성화가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새 생명도 주시고 의를 위해 살려는 마음도 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이 곁길로 탈선했다가 돌아가도 기꺼아 받아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의 목자이시며 우리를 돌보시는 감독자이십니다.
우리의 복되신 주님은 자기 백성들을 돌보시며 그들을 평생토록 인도하십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다음과 같은 말로 그리스도인들을 격려합니다.
(히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12:3)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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