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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고난에의 투신 (벧전 03: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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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내가 이 땅에 있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이런 질문을 던져왔습니다. 우리는 마치 하나의 각본을 연출하기 위해 사는 듯합니다.
(시90:10)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 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시편 기자는 우리가 일평생을 한숨으로, 일식간에 끝마친다고 하였습니다(시90:9). 그렇다면 인생을 살 필요가 어디에 있습니까
어떤 이들은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기 위해서 산다.”고 대답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존재 목적을 훌륭하게 제시해 줍니다. 만일 우리들의 인생 목적이 “열심으로 선을 행”(3:13)하는 것이라면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베드로는 12절에서 시편 34편을 인용하여 “주의 낯은 악행 하는 자들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라고 묻습니다. 그 대답은 ‘아무도 없다’거나 혹은 ‘몇 사람밖에 없다’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은 그리 단순하지 않습니다. 악한 사람들은 사방에서 득실거립니다. 특히 우리들이 예기치 못한 곳에서 악인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유혹합니다.

고난에 대한 자세
고난은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도 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때때로 고난을 받습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질병에 걸리지 않는다는 법은 없습니다. 질병은 선인과 악인 모두에게 닥칩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의 판단으로 보아 꼭 걸려야 할 사람들에게만 질병을 보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평생을 친절하고 남을 위해 선하게 산 사람들도 종종 고난을 겪도록 하십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고난 속에 긍정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고난에는 흔히 큰 축복이 뒤따릅니다. 이 축복은 내밀한 기쁨을 의미합니다. 고난을 당하는 신자는 항상 순탄하게만 사는 사람보다 자신의 믿음을 훨씬 힘있게 간증할 수 있습니다.
고난은 인생을 직시하도록 합니다. 고난에 처해 본 사람이라면 인생의 기쁨과 슬픔을 균형 있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인생의 길에서 고난을 많이 체험한 작곡가들의 음악이 평탄한 삶을 산 자들의 음악보다 훨씬 더 깊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궁중의 음악사의 멘델스죤 음악보다 베에토벤과 모짜르트의 작품들이 더 감동적입니다.
데이빗 쿡(David Cook)은 이렇게 말합니다. “고난은 선을 행할 기회를 제공한다. 고난은 타인들을 봉사하고 도울 수 있는 가능성을 야기시킨다 … 고난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기회를 마련해 준다.”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이 있는 자니”(3:14). 이 말씀은 아마 베드로가 그의 독자들에게 고난의 조짐이 있을 것이라고 예고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혹은 핍박의 위험을 조금 다른 방법으로 이 구절에 반영시킨 것인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예상하지 못한 어떤 고난이 온다는 것을 베드로가 그의 독자들에게 암시하고 준비시키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베드로는 본 서신을 통해 지금까지 줄곧 불신자들에 의한 신자들의 핍박을 예고해 왔습니다.(1:6, 2:12,15,19, 3:1,9)
이제 베드로는 신자들이 이러한 난관을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상술합니다. 그의 말은 한마디로 이런 것입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여러분이 의를 위해서 고난을 받는다면 축복을 누릴 것입니다.” 3:17절을 보십시오.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베드로는 본문에서 자신이 과거에 직접 들었던 예수님의 산상설교를 상기하는 듯합니다.
(마5:10)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마5:11)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마5: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베드로는 이사야 8:12절에 나오는 “그들의 두려워하는 것을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며”라는 말씀을 14절에서 인용하였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이 말씀을 했을 당시에는 예루살렘 주민들이 앗시리아의 침략을 크게 두려워했었습니다. 그들은 앗시리아인들이 포로들에게 자행하는 끔찍한 잔인성에 대해서 많이 들었던 터이므로 공포에 떨었습니다.
‘두려워한다’는 말은 부정적으로 무서워한다는 뜻이지만 긍정적으로는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의미입니다. 이사야는 공포에 휩싸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부정적인 의미로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였고(사8:12) 이어서 긍정적인 뜻으로 여호와를 두려워하라고 말하였습니다(사8:13). 주기도문에서 “이름이 거룩히”(마6:9) 여김을 받는다는 말씀도 이 후자와 동일한 맥락입니다.
베드로는 이사야의 메시지를 현대의 복음 시대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합니다. 베드로는 말합니다.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누가 여러분을 해치겠습니까 마귀가 애를 쓰지만 만약 여러분이 주님을 신뢰하면 보호를 받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 말씀 후에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라고 교훈 하였습니다. 이것은 이사야 선지자에게 말씀하셨던 만군의 여호와가(사8:13) 주 예수 그리스도와 똑같이 거룩하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베드로의 말씀은 풀어쓰면 이런 것입니다. “이사야가 여호와를 거룩하신 분으로 보았듯이 여러분도 그리스도를 마음 속에 주님으로 신령하게 모셔야 합니다.” 마음은 인격체의 중심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주(主)요, 주인과 왕이 되셔서 당신의 마음 속에서 다스려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특권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들의 믿음은 때때로 도전을 받습니다. 베드로는 신자들이 이에 대비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럼 시련의 때를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요
첫째,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내세우는 자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를 마음 속으로 알아야 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신자인 우리들은 우리 죄를 회개하고 주께 자신들을 던져야 합니다. 우리들 자신부터 구원받은 사실을 확신해야 다른 사람을 영적으로 도울 수 있습니다.
둘째, 우리들은 주님과 올바른 관계 속에서 살고 있어야 고난에 대처할 수 있습니다.
주님과의 관계가 올바르다는 것은 건전한 기도 생활이 있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려는 진정한 관심이 말씀의 묵상을 통해 날마다 증진되고 확인되는 생활을 말합니다.
셋째, 복음 자체를 알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왜 구원을 받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영원한 구원을 받았음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지를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해 줄 능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래야 불신자들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으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끝으로, 우리 속에 있는 성도의 소망에 대한 이유를 제시함으로써 고난을 대비해야 합니다.
바울은 그를 비난하는 자들 앞에서 그리스도를 자주 변호하였습니다. (행22:1, 25:16, 고전9:

3. 빌1:16).
(행22:1) 부형들아 내가 지금 너희 앞에서 변명하는 말을 들으라 하더라
(행25:16) 내가 대답하되 무릇 피고가 원고들 앞에서 고소 사건에 대하여 변명할 기회가 있기 전에 내어 주는 것이 로마 사람의 법이 아니라 하였노라
(빌1:16)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명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우리도 예수님을 위해 담대히 증언할 준비를 갖추어야 합니다. 베드로는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에비”하라고 교훈 하였습니다.
복음의 소망은 불투명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의 종교는 막연한 희망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참으로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주로 안다면 우리의 소망은 확고한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그리스도인의 믿음, 소망, 사랑의 덕성에 대하여 논하였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아”야 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히10:23).
그럼 어떤 상황에서 “소망에 관한 이유”에 대하여 대답하게 될까요
우리는 아마 법정에서 서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변호해야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들 대부분은 일반 불신자들로부터 기독교 신앙에 대한 문의나 도전을 받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우리들의 신앙 생활이 일반 사람들과 뚜렷하게 구별되면 불신자들은 그 연유를 묻거나 왜 자기들처럼 살아가지 않느냐고 의아해 합니다.(4:4). 성경은 신자들이 세상 사람들과 달라야 한다고 말합니다.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은 속된 무리들과 다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고후6:17)있으라고 권고하였습니다.
우리들의 믿음이 도전을 받을 때 우리는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까요 베드로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부드럽고 공손하게 대답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오만한 자세로 복음을 전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자기 의(義)에 젖은 태도를 갖지 말아야 합니다. “나는 당신에게 전도할 의무를 다했소, 당신이 이제 어떻게 되건 난 상관치 않겠소, 당신은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기를 거절했으니 나는 손을 떼겠소, 이제 내 책임은 없소!.”
이런 자세는 반발만 일으킵니다. 예수님은 그런 식으로 전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이 세상 앞에서 신사 숙녀답게 처신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을 존경해야 합니다(2:17).

우리들은 깨끗한 양심을 지켜야 합니다. 우리들의 양심은 우리 속에서 옳고 그른 행위를 알려주는 작은 목소리입니다. 자기 양심을 묵살시키지 않는 자는 자연히 자신이 하나님과 이웃을 속이려고 하는지 않는지를 알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옳고 그른 것을 구별할 수 있는 양심이라는 귀중한 은사가 있습니다. “선한 양심을 가지라”는 말은 우리가 의식적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생활을 훼손시키는 짓을 삼가라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 자동차에 성구나 전도 문구 스티커를 붙이고 과속을 한다면 우리는 깨끗하고 선한 양심대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선행”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자신들을 굳이 변호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3:16).
하나님의 백성들은 “내가 선을 행하려고 애쓰는가”라고 물어 보아야 합니다. 우리들은 예수님 당시의 열심 당원들처럼 극단적인 정치 운동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베드로는 교인들이 어떤 특정 정당의 기준에 따라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하는 일을 삼가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우리들은 선한 양심에 따라 항상 선행을 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이 선행에는 물론 우리들의 영광스러운 주님을 증거하는 말씀을 준비하는 것도 포함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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