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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고난의 복음 (벧전 03: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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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사도 베드로는 고난의 복음에 대하여 권면하고 있습니다. 본서의 중심 사상입니다. 이부분은 고난에 대한 조직적인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먼저 ①그리스도안에 있는 자의 태도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권면하고 있으며,(13-17) ②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으며,(3:18-22) ③그리스도의 본을 따를 것( 4:1-6)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의 고난에 대한 태도에 대해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고난은 그리스도인의 공통적인 십자가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도 마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는 고난의 상징입니다. 예수님이 지셨던 십자가는 굉장히 무거운 십자가였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에 가실때에 쓰러지셨는데 “아니! 예수가 그렇게도 힘이 없었나”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모르고 하는 소리입니다. 예수님이 지셨던 십자가는 굉장히 무겁고 돌덩이 같은 십자가였습니다. 튼튼하셨던 예수님도 쓰러지셨던 것입니다. 원래 십자가는 등에 지는 것인데 요즈음 젊은 사람들은 목에 걸고 다닙니다. 결코 십자가는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장식이 악세사리가 아닙니다. 고난의 상징이요 실제입니다. 성도라 함은 누구든지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고난은 그 누구도 예외일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때 당시에는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목숨 각오하고 믿어야 할 때입니다. 유대인에게 있어서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그 때 당시 가정적으로 사회적으로 매장을 당함을 의미했습니다. 인정을 하지 않고 추방하는 것과 다를바가 없었습니다. 왜 니고데모가 밤중에 온 줄 아십니까 그의 체면도 있었지만 발각되면 랍비 사회에서 유대인 사회에서의 추방 즉 매장을 당함을 의미했기 때문에 밤에 온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이 그만큼 어렵고 고난을 각오해야 하는 사회적 배경을 갖고 있었습니다.
다같이 13절과 14절을 읽읍시다.“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14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저희의 두려워 함을 두려워 말며 소동치 말고”
예수님의 산상 보훈중에서 8복을 연상시키는 말씀입니다.마태복음 5:10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는 말씀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의 산상 수훈의 그 교훈의 말씀들이 생각이 났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무엇보다고 고난에 대한 올바른 권면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고난이 왜 옵니까 그것은 어떤 영향을 성도에게 미칩니까 고난에 대한 성도의 올바른 태도는 무었입니까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것이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더 좋은 것이라고 17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셉의 고난은 정말 값지고 아름다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의 20년간의 고난의 세월은 어머니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두려움과 비겁한 모습을 보여 주기도 했습니다. 요셉의 고난은 의를 이루었지만 야곱의 고난은 자신의 자아가 깨어지는 아픔이 있기도 했습니다. 성도에게 있어서의 고난도 바로 선을 행함으로 오는 고난을 감수해야 합니다. 악이나 실수로 인해서 오는 고난은 결코 자랑거리가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다는 한가지 이유때문에 우리가 불이익을 당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러나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자가 복이 있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예수 믿음으로 인해, 선을 행함으로 인해 오는 여러가지 핍박,즉 고난을 기쁨으로 여기며 인내하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 선생님은 로마서 8:18에서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난이 가져다 주는 유익이 얼마나 큰지 고난을 인내함으로 천국에서 주어지는 영광이 고난과 상극이 되어 비교할 수 없는 놀라운 보상이 있다는 소망을 알려줍니다 또 야고보 선생은 약 5:13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라고 위로 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고난을 당하는 성도의 삶은 이와같이 뭔가가 달라야 합니다. 그러나 말은 쉽지만 실제로는 정말 어렵고 고통스러운 것이 고난이요 핍박입니다.
그러면 고난이 다가 올때의 성도의 마음은 어떠해야 합니까
벧전 3:15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성도의 마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주로 삼아 거룩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셔야 합니다. 내가 주인이 되어서 할려면 되는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힘이 없고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쓰러지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의지해야 할 분은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또 그 분이 보내주신 보혜사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께서 연약한 성도를 도우십니다. 영원토록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세상의 불의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우리의 거룩함입니다. 거룩한 성도는 마귀가 흔들지 못합니다. 고난을 통해 흔들어 보기도 하지만 결국 쓰러뜨리지 못하고 물러가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난의 풀무불이 여러분을 후라이팬의 콩처럼 달달 볶는다 하더라도 성도의 거룩함을 잃지 마시기 바랍니다. 거룩한 성도는 사람들에게 담대하게 소망적인 말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쌀통에 쌀이 떨어져도 자녀들에게 학자금을 당장 주기 어렵다 해도 소망에 찬 말들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께서 채워 주실꺼야 ! 하나님은 부족함이 없으신 분이야 주님은 나에게 은혜로 채워 주실 꺼야 하는 소망의 말을 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처럼 똑같이 슬퍼하고 절망하고 넘어진다면 세상 사람들이 무엇을 보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은 뭔가가 다르다는 평을 하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영광을 얻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의 구원자가 되십니다. 또 성도의 고난을 기억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당하시는 분들은 마음속에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거룩한 삶을 사시므로 고난을 이기시기 바랍니다.
또 고난을 당해도 괜찮으냐고 하는 정말 의아해 하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참 평안과 기쁨을 또 소망을 이야기 해주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고난당하는 성도의 삶은 바로 선한 양심을 가지는 것입니다.선한 양심은 마음의 중심입니다. 양심이 살아 있을때에는 소망이 있으나 양심이 죽어 있을때에는 소망이 없습니다. 양심이 화인 맞은자는 악한 양심을 소유한 것이 되고 맙니다. 양심은 자기의 행위에 대하여 선악의 판단을 내리는 지적의식과 도덕적 의무감의 양면성을 갖고 있습니다. 선한 양심은 자기의 행위나 마음을 선한 것으로 판단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악한 양심은 선한 마음을 무시하고 정욕적인 죄악적인 판단을 하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도의 삶속에 선한 양심은 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그래서 성도의 양심은 거룩하게 됩니다.
고난을 당하는 성도의 태도는 바로 선을 행하다 의를 행하다가 받는 고난이 되어야지 악을 행하다 얻는 고난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고난이 다가오면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주로 모시고 주님의 판단에 나의 모든 것을 맡기고 거룩함의 옷을 입고 선한 양심을 유지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의 나라에서 고난을 이긴 댓가로 주어지는 영광을 다 얻으시는 성도님들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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