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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고난을 즐거워하라 (벧전 04: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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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 아침 고난의 문제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 하는 것으로 즐거워 하라'고 하셨습니다. 물론 이 말씀은 교회가 심히 박해를 받던 때에 그 신자들의 고난을 위로하고 격려하 면서 용기를 갖도록 하기위한 사도의 편지입니다. 교회가 그리스도 때문에 당해야했던 고난에 대해서 우리는 막연하게 알고 있기는 하지만 오늘 우리의 입장에서는 실감이 잘되지 않을런지 모르겠습니다. 사도 베드로가 살았던 시 대의 고난과 핍박 같은 것이 지금 우리시대에는 있지도 않고 또 있을 수도 없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 여하라' 고 하며, 또한 그것을 즐거워 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고난이란 무엇입니까 그리고 오늘의 우리가 그 고난의 참여한다는 것은 무 엇이겠으며 그리고 그 고난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예수의 십자가의 고난은 그 시대나 지금이나 사람들에게 '거침돌'이요 '어 리석음'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죽었다는 그 가 도대체 누구이냐 하는 문제 때문에 신학적으로 많은 논쟁이 있었는데 그 러한 의문과 논쟁은 지금까지 여전히 계속고 있읍니다. 초대교회 당시의 유 대인들은 '나사렛 예수가 어떻게 메시야 이냐' 라고 했으며, 이방인들은 '그가 어떻게 성육신 되신 하나님이냐' 라고 했읍니다. 또한 인본주의자들 은 '예수의 인간성과 무죄성을 어떻게 시인 할 수 있느냐' 고합니다. 그리 고 오늘의 무신론주의자들은 '예수에게서 해방과 정의가 무엇이냐' 하는 의문을 제기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대한 확실한 신앙과 고백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는 아직도 거침돌이요 어리석고 미련한 것으로 보일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 믿는 사람들은 세상에서 멸시를 받고 천대를 받고 또 핍박을 받는것입니다. 그러나 크리스챤은 그의 증인들입니다. 그가 누구이시 며, 그가 왜 오셨으며, 그가 왜 죽으셨으며, 그가 왜 다시 사셨는가 를 말하고 전하고 증거하는 증인들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고전1:18) 우리는 이 도와 진리를 전하는 증인으로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모르는 세상은 오해하고 핍박하고 조롱하고 배척하려고 하기 때문에 자연히 고난을 당하게 됩니다. 성서는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히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그들은 나의 제자인 '너희들을 출회 할 뿐만 아니라 너희를 죽이려고 할것이요 그들은 그것이 곧 정의요 그것이 곧 하나님의 예대로 하는 일이 라 고 생각 할 것이라' 고 하였습니다(요16:2). 그러나 너희들은 그런 일이 있을 때에 낙심하지 말고 실족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고 예수님은 말씀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험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 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 하게 하려 함이라'(벧전4:12-13)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과 사도들이 실제로 당했던 고난은 물리적인 고난이었습 니다. 스테반과 같은 분은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그리고 주의 제자들은 대부 분 장열히 순교를 당했습니다. 베드로는 로마에서 거꾸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고 합니다. 안드레는 x자형 십자가에 처형되었다고 하며 바돌로메는 산채로 살갓이 벗겨져 처형되었고 도마는 쇠망치로 맞아 순교를 당했고 또한 빌립은 기둥에 묶인 채 매를 맞고 고문당해 순교 했습니다. 그리고 마태는 칼에 찔려서, 야고보의 동생 유다는 활에 맞아 순교를 당했다고 합니다.

왜 예수님이 부르시고 사랑해 주시던 그의 제자들이 모두 한결같이 그렇게 비참하게 죽었겠습니까 그 무슨 해괴한 운명입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 게 주의 제자가 되겠다고 선뜻 나설 수 있겠습니까 또 그러한 운명을 택하 겠다고 할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그 뿐만 아니라 핍박하는자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며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바른 방법이라고 여기고 계속하 여 핍박을 가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스테반을 처형한 사울은 어떻게 생각했습 니까 '사울이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행8:1)고 했읍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되실때 군중들은 소리 지르며 '저를 없이 하라! 저 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 '고 했읍니다. 백성들과 관원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보면서 '저가 남은 구원 하면서 자기는 구원하지 못한다'(눅23:35)고 비웃었습니다. 심지어는 함께 처형 당하는 행악자 중 하나도 '네가 그리스도 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눅23:39)고 예수를 비방했읍니다. 십자가 밑을 지나가는 행인들은 예수가 처형된 것을 지극히 당연하게 생각 하면서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 하고 십자가에서 내려 오라' 고 하면서 모욕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그때에 당 연히 죽을 자가 죽었다고 생각 하였던 것입니다. 소위 경건한 유대인들도 그 는 저주를 받아 하나님께 극형을 당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 이러한 일은 아무런 핍박이나 고난이 없는 평화스런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실감이 되지 않고 이해도 되지않을 것입니다. 어 떻게 보면 고난과 십자가는 인간들의 무지와 몰이해로 빚어진 비극이 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비극을 보는 우리들의 시야와 그 태도 가 가장 중요한 문제가 아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같은 일에 대하여 인간의 무지와 무식에 소치로 빚어지는 어리석은 자들 의 싸움이라고 욕을 하고 등을 돌리고 마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자세는 독선이요 또 역사의 방관자 가 될 뿐입니다. 우리는 인간사회 의 얽히고 설킨 복잡한 문제, 그리고 서로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는 싸움들을 수없이 많이 보아왔습니다. 그러한 싸움은 옳고 그른 것을 가리는 것으로 문 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십자가를 지는 일이 없이는 아니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그 분은 아무 죄없이 극형을 당하면서도 무죄를 항변하거나 자기의 정의를 주장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부당하게 처형을 당 하고 온갖 저주와 욕설과 모욕을 당하시면서도 묵묵히 참고 대항하지 않으시 며 욕을 먹었지만 욕하지 않으시고..... 그 모든 것을 공의로 심판하시는 분에 게 다 맡기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에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그는 그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우리는 거기에 문제 해결의 길이 있고 인류의 구원이 있다고 믿습니다. 이것은 사랑과 용서의 길이었습니다. 예수님 은 인류를 깊이 사랑하셨기 때문에 고통를 친히 담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곧 고난을 짊어 지는 일입니다! 기독교는 고난을 통하여 사랑을 발견 하는 종교입니다. 시성(詩聖) 타골은 '진정한 사랑은 고통에 의해서만 이룩되 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물론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고난과 고통을 원하 지 않습니다. 그것을 즐겨하거나 일부러 자초할 수는 없습니다. 할수만 있으 면 그 쓴잔은 지나가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피할 수 있으면 피해야 하겠지 요! 우리가 주님의 고난에 동참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무 릎에 피가 낭자 하도록 돌계단을 맨 무릎으로 올라 가는 것입니까 고행이나 금식이나 금욕 같은 행위나 공적 이겠습니까 그런 것으로 주의 고난에 동참 할 수 있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동참해야 될 고난은 작은 것일지라도 사랑을 행하는 일이라 고 믿습니다. 그런데 사랑은 좋게 해 주고 잘해 주는 것만이 사랑이 아니라 '고난을 기쁘게 당하는' 사랑이라야 됩니다.

우리가 형제를 위하여 시간을 내 주는 일도 사랑 일것입니다. 공연히 '그 사람 때문에 시간만 손해 봤다' 라고 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닐 것입니다.

지금도 끼니를 걱정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그 분들을 무능한 사람들이라고 일축해 버려도 않될 것이고 값싼 동정으로 책임을 다했 다고 생각해도 않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사회에 큰 문제가 되고 있는 광주 민주화항쟁 때에 억울하게 희생 된 분들, 감호보호소에서 20년 30년씩 수감되여 있는 이들, 화염병을 던지 며시위에 나서는 학생들, 노사갈등으로 고민하는 노동자들, 소외와 천대를 당 하고있는 농민들...... 우리 사회가 안고있는 이 고민과 심각한 문제들을 남 의 일로만 보지말고 함께 생각하고 함께 고민하고 함께 대화하고 그리고 이 모 든 문제를 하나님 앞에 깊이 기도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 참하는 일일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지난간 역사에서 비리와 부정을 저질렀던 것으로 인하여 지금 비난과 규탄의 대상이 되고있는 사람들에게 대해서도, 그 사람들이 그 당시 에 그 특수한 상황에서 생각하고 처신했던 점을 이해하고 생각해 보는 아량 도 있어야할 것입니다. 변화하는 시류에 따라 무조건 과거를 매도해 버리는 것도 바른 태도가 아니라고 믿습니다. 사실은 우리도 모두 과서사에 알게 모 르게,직접 간접으로 참여 했던 사람들입니다. 누가 누구를 정죄하고 돌을 던 지겠습까 우리 모두가 다 역사 앞에 죄인들인 것입니다.

또한 우리 주변에는 심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병든 사람들, 영적으로 암흑 과 혼돈속에서 방황하는 심령들도 허다히 많습니다. 여러분들께서 그러한 어 두움과 고독과 절망속에서 방황하는 사람들을 만나주고 따뜻하게 위로하고 붙잡아 주신다면 그것은 고난의 동참하는 일일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다 각기 자기 몫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했습니다. 물론 우리는 예 수님이 지신 십자가는 도저히 질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십자가' 는 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각자가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도 고난을 각 오 하지 않으면 할 수가 없습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 으로 즐거워 하라' 이것이 무슨 말씀 일까요 우리가 사랑을 가지고 고난을 당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며 보람있고 가치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 는 고난은 두려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 쫓는다'고 하 였습니다. 정말 두려운 것은 고통 그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는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알지 못하는 것 그것이 가장 큰 두려움입니다.

그러면 이 사랑의 고통에는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음으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 여 그 고통은 다시 기억치 아니한다'(요16:21) 고 했읍니다. 산모의 해산하는 아픔 그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것이지만,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은 그 모든 고 통을 다 잊게 합니다. 거기에 참 고난의 의미가 있습니다. 기독교의 십자가는 끔찍스런 고통의 상징 이면서 동시에 사랑의 상징입니다. 기독교는 고통을 통해서 사랑을 발견하고 십자가를 통하여 부활을 가져 오는 종교입니다.

생활에서 우리는 고난과 고통은 나에게 참 좋은 선생이 었다고 깨닫게될 때 가 많습니다. 자녀들은 병상에 있을 때 어머니의 사랑을 더욱 절실하게 느낌 니다. 가장 두터운 우정은 전쟁마당에서 죽음의 고비를 함께 넘긴 전우들의 우정입니다. 항해하는 범선은 모진 바람이 불어야만 목적지에 빨리 닿습니다.

죽어가는 환자는 날카로운 메쓰로 살을 잘라야만 다시 소생하게 됩니다. 혹 한이 부는 북극 하늘에서 보는 밤 하늘이 가장 아름답다고 합니다. 시인은 피로써 쓴 글이라야 그것으로 사람을 흐느끼게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모든 고통의 경험은 뜻이 있고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여기지 말라' (벧전4:12)고 권면하여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시험을 당하면 그것을 이상히 여깁니다. 또한 수치와 모멸감도 느끼지만 성도들은 이것을 '예수님의 고난 에 참여 하는 것으로 알고 기뻐해야 된다' 고 하였읍니다.(벧전4:13) 다만 우리가 사랑때문에 고난을 당한 것이라면 반드시 그 분의 영광이 나타 날 때에 우리도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될것입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 으로 욕을 받으면 복이 있는 자로다!'(벧전4:14)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시대는 어떻습니까 지금은 고난과 고통이란 것을 모르 는 시대가 된 것 같습니다. '십자가' '십자가' 하지만 도무지 실감이 않됩니 다. 그리고 너무 거리가 멈니다. 우리는 지금 좋은 때를 살아가고 있는 듯 합 니다. 과거보다 잘 살고 교회를 핍박하거나 박해하는 일도 없습니다. 그러나 안일 무사하게 이 모든 풍요로운 축복을 향유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지 마십 시오. 우리가 정신 차리지 않으면 급격한 몰락과 패망이 닥쳐 올지도 모릅니 다.

지금 이렇게 좋은 시기와 기회를 사람들은 향락과 사치의 기회로 삼고 있지 나 않습니까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무엇이던지 할 수 있 고 무엇이던지 가질 수 있고 어디든 갈 수 있고 무엇이나 성취 할 수 있게 되니까 사람들이 자기들의 도전할 목표가 없어서 마약 같은 것에 그만 빠져 버리고 맙니다.

민주화다 자유다 인권이다 하니까 그러한 좋은 축복을 우리는 왜 바로 사용 하고 건설적으로 이바지 하지 못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민 족에게 은혜를 주셨는데 헛되히 받으면 은혜는 저주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십자가와 고난의 뜻을 아직도 모르면 불가불 다시 더 큰 연단과 채찍 밖에 올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주후 1세기의 교회들이 극심한 핍박을 당했을 때에 '너희가 그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 하라' 하셨습니다. 그러면 20세기의 마지막을 사는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드려야 하겠습니까 모쪼록 우리는 이웃과 형제들의 고난에 동참하게 될 수 있기를 원합니다.

모든 것을 바로 보고 더 깊이 볼 수 있기를 원합니다! 지나친 낙관도 지나친 비관도 말고 나에게 주어진 그 상황속에서 나의 힘에 닿는 만큼 사랑을 실천 해 나갑시다. 그것이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겸손한 길이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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