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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바보 같은 사람들 (마 20:20-28)

첨부 1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 속에는, 특별히 우리들의 주변에는 천재들이 적지 아니합니다. 엊그제까지도 가난에 쪼들려 신음하던 사람이 갑작스럽게 대 재벌 급에 속하여 돈 쓸 길을 못 찾아 애쓰다 자기가 죽어 묻혀질 땅을 몇 십억을 드려서 만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엊그제까지 이름 없이 살던 사람들이 오늘은 한 시대의 영웅이 됩니다. 그리고 마음껏 사치하고 방탕을 해도 끄떡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현대는 무슨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오늘의 내 높은 위치를 견고히 하고 나의 생활에 풍요를 누리고 내 자녀의 출세에 순풍에 돛을 달고 달리도록 하는데 모두가 천재적인 두뇌와 방법들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이런 자기 이익을 위한 천재적인 노력과 기준들은 구 시대나 새 시대나 별로 차이 없이 계속된 것만 같습니다.

본문접근

마태복음에서 봉독한 오늘의 하나님의 말씀에도 자기의 출세를 위하여 천재적인 두뇌를 소유한 한 여인과 두 아들이 있습니다. 그 여인은 세베대의 아내며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였습니다. 그 어머니는 엎드려 절을 합니다. 그리고 무엇인가를 요청하고 싶어합니다. 예수님은 묻습니다.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그 부인은 대답을 합니다. "주님의 때가 되면 저의 이 두 아들을 하나는 주님의 오른편에 하나는 왼편에 앉게 해 주십시오" 하는 대답이었습니다. 우리의 육신적인 감각과 눈으로 볼 때 그 요청은 참으로 천재적인 요청이었습니다. 인간의 권력과 부를 생의 목표로 삼는 사람들의 눈에 우리 예수님은 얼마 아니면 이 땅에 자기의 나라를 설립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의 인기와 능력과 덕망은 하나의 왕이 되고도 남을 것이라고 모두가 판단 할 수 있었습니다. 그에게 접근하고, 그에게 아부하고, 그에게 충성을 다해야만이 우 정승과 좌 정승을 할 수 있다고 하는 판단은 명석한 두뇌의 소지자들에게는 당연한 소치입니다. 이 명석한 어머니와 아들들의 요청을 앞에 두고 우리 주님은 알기 어려운 대답을 합니다.

본문의 재 경청

오늘 봉독한 본문의 말씀을 좀더 쉬운 현대언어로 옮겼습니다. 한번더 경청해 보십시다.

너희가 청하는 것이 무엇인지나 알고 있느냐 내가 마시게 될 잔을 너희도 마실 수 있느냐
이러한 질문에 야고보와 요한과 그 어머니는 아주 간단히 대답을 합니다. “예 마실 수 있습니다.” 그 때 주님은 다시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도 내 잔을 마시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내 오른편과 내 왼편 자리에 앉을 특권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있을 사람들은 내 아버지께서 미리 정해 놓으셨다."
이러한 대답을 듣고 있던 열 제자는 그 야고보와 요한을 보면서 화를 냈습니다. 그 때 주님은 그들을 모두 가까이 불러 놓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었습니다.
너희가 아는 대로 민족들을 다스린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그들을 마구 내리누르고 고관들은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끼리는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 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위대하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위하여 나의 목숨을 대속물로 내주려 왔다.

주제의 부상

그때 그 옆에 있던 제자들, 하고많은 날을 말없이 그날 그 집권의 날이 올 때 한 자리에 앉아 천박한 과거를 지워 버리고 권력 속에 파묻힌 자신들을 보여줄 그 날을 기다리던 다른 제자들은 화를 냈습니다. 기어다닌 인간 옆에 날아다닌 인간의 모습을 본 그 제자들은 한대 얻어맞은 기 분속에 대단한 불쾌감을 갖게 됩니다. 바로 그 순간 주님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참으로 따분한 얘기입니다. 참으로 바보 같은 얘기입니다. 그래도 내노라고, 자기 잘난 맛에 살고 출세를 위하여 하고많은 날을 보내 온 사람들인데 인제 그 많은 수고들의 향방을 송두리째 바꾸어야 하는 길을 걸으라는 말씀입니다. 쉬운 말로 해서 바보 같은 사람들로 자신들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높은 사람이 되면, 권력이 주어지면 낮은 사람을 누르고 필요할 때는 죽이고 권력의 지휘봉으로 내리치는 상식적인 선을 부정해 버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분명히 인간의 눈앞에는 바보스러운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가르침을 따라 걸어가는 사람들도 역시 바보 같은 사람들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1) 바보 같은 사람들이란 어떤 사람들입니까 (주제의 정의)

오늘 여기서 말하는 바보란 지능지수가 낮아서 저능아의 취급을 받는 그러한 정신적인 모자람의 사람을 가르치는 말이 아닙니다. 또는 어리석은 판단과 언행으로 사람들의 놀림을 받는 푼수가 없는 사람을 가리킨 것도 아닙니다. 너무 머리가 영리하여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가는 그러한 인간을 가리키는 것도 아닙니다.
오늘 여기서 말하는 바보란 백 명이 이 길이 옳다고 걷는데 홀로 외롭게 저 길 이 옳다고 걸어가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내 인생을 내 마음대로 살아가는 것이 바른 길이며 지극히 상식적인데 내 인생 내 마음대로 살지 못한 채 이리 끌리고 저리 끌려 다니는 인생이 바로 여기서 말하는 바보입니다. 미운 인간을 미워하지도 못하고, 나에게 손상을 입히는 인간을 향하여 원망과 분노도 표현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어리석게 보이는 그러한 사람들입니다. 오히려 잘하고도 얻어맞고 욕을 먹고 이리 쫓기고 저리 쫓기는 사람을 바보 같은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영국의 목사요, 시인인 George Hurbert 는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바보이다."라고 했습니다.
오늘의 말씀에서는 바보 같은 사람의 실체를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섬김을 받아야 할 사람이 섬기는 종이 되는 경우를 말씀하십니다. 온 인류로부터 쌍수를 들어 환호의 함성과 함께 감격의 환대를 받아야 할 분이 비참하게 죽어 가는 모습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섬김을 받아야 할 사람이 섬기는 존재가 되고, 으뜸이 되어야 할 사람이 종이 되는 사람들을 가리켜서 바보 같은 사람이라고 여기서 지칭하고 있습니다. 실컷 수고하고 땀흘려 섬기고도 좋은 말 한마디 듣지 못하고 오히려 비난을 받고 욕을 얻어먹는 그러한 사람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2) 왜 오늘은 이러한 바보 같은 사람들이 필요합니까(주제의 필요성)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말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의 교회 안을 봅니다. 모두가 영특합니다. 천재적인 두뇌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섬긴다는 소리는 우렁찬데 섬김의 손길이 없습니다. 섬기겠다고 나서는 사람은 많은데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바보처럼 섬기는 사람이 보이지를 아니합니다. 섬김의 종이 되어야 할 사람들이 세상의 어떤 자리보다도 화려한 섬김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으뜸이 되고자 하는 계산뿐이지 진정한 섬김의 혼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방관의 팔짱을 끼고 쏟아 낸 언어는 풍부하나 막상 섬김의 대열에는 아예 끼지 않는 방관자들이 허다합니다. 섬김의 가슴은 없으면서 섬기는 자들을 비난하는 함성은 누구보다 앞을 서서 우렁차게 지르는 비판자들만이 즐비합니다.
우리 모두가 방관자가 되고 비판자만 된다면 주님의 몸된 교회는 곧 쓰러지게 됩니다. 한국의 교회는 하나님의 칭찬을 받을 길이 없게 됩니다. 이 민족에 희망이 없게 됩니다. 이 땅의 기독교는 그 자취를 감추게 될 것입니다.
진정, 이 시대는 섬김이라는 일념을 가지고 우정승이 무엇인지 좌정승이 무엇인지 조차도 모른 채 살아가면서 오직 낮아지고 사람들의 종이 되고 하나님의 종이 되는 길을 찾아 등불을 켜 들고 해 매이는 바보들이 필요합니다.
오늘의 말씀에서 우리 주님은 분명히 이러한 바보들을 찾고 계심을 밝히고 있습니다.

3) 주님이 원하시는 바보스러운 삶의 주인이 될 수 있는 길이 여기 있습니다. 오늘 우리 주님이 주신 말씀에서 그 길이 주어지고 있습니다.

(주제의 실천방안)

먼저는, 우리 주님은 위대함을 생각하기 전에 섬기는 길을 걷도록 명령하십니다.

(말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26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25-26)

(해석)
오늘의 본문에서 주님 앞에 나타난 야고보와 요한과 그 어머니는 아주 머리가 명석하였습니다. 그들은 위대한 권능을 가지고 그 땅위에서 펼치는 예수님의 사역을 유심히 지켜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은 지금까지 있었던 단순한 선지자가 아님을 알게 됩니다. 틀림없이 그 예수님이 새로운 왕국을 지상에 세우실 것으로 믿게 됩니다. 그러한 미래를 그려보았던 이들은 예수님이 왕권을 행사하는 그날 그 곁에 앉아서 위대한 존재의 자리에 앉게 되기를 노골적으로 희망하고 있었습니다.
서로가 높은 서열에 앉기를 원하고 거기에 온 정신을 쏟고 있던 제자들에게는 너무나 충격적인 장면이었습니다. 그러한 그들이 갑작스럽게 등장한 이 대화의 모습을 보고 화가 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럴 때 우리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위대하게 되는 것을 생각하기 전에 먼저 섬기는 길을 걷도록 명령하시었습니다.

(적용)
우리 주님의 말씀은 너무나 정확한 말씀입니다. 섬기는 정신과 삶의 경험이 없이는 올바른 위대한 자리는 탈선을 가져옵니다. 땀을 흘리고 눈물을 흘리면서 섬기는 대열에서 일어선 지도자와 그렇지 못한 지도자와의 거리는 너무나 거리가 멉니다.
우리 주님이 여기서 말씀하신 섬김이라는 말씀의 뜻은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오늘 이 시대에 섬김의 대열에 서 있는 사람을 먼저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지금 이 순간에도 찾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구하고 수만 가지의 복을 비는 는 자를 찾는 것이 아닙니다. 잘 먹고 잘 살고 사업이 번창한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주님의 이름을 부르짖는 성도들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찾는 성도는 다음의 말씀을 자신의 신앙고백으로 실토하는 사람입니다.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내가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오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 2:20)”
이러한 고백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 몸을 던지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찾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가 위대하기를 원합니다. 섬김의 계단을 밟지 않고 무조건 위대한 명성과 위치와 유익을 얻기를 원합니다.
여기에 이 말씀이 그대로 비추어진 우리 교회 안에서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화) 서울의 어느 교회에서 있던 일입니다.
어느 현직의 국회의원의 이야기입니다. 교회에서 장로가 되기를 몹시도 원했습니다. 정치적인 수완으로 표를 얻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투표 결과는 완전한 실패였습니다. 실망한 얼굴로 목사님과 상담을 합니다. 위대한 자리를 생각하기 전에 먼저 섬기려는 정신과 실천이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그로부터 그 현직 국회의원은 주일이면 시간마다 나와서 주차장 정리를 하였고 그 땀흘려 섬기는 연습을 열심히 하는 그 모습을 보면서 교인들은 후에 글 장로로 투표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주님은 이 시간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위대하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은 오늘도 위대한 자신의 위치와 명예를 추구하는 사람들,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사람들에게 먼저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섬기는 대열에서 땀을 흘리시기를 명령하십니다.

둘째는, 주님은 진정한 섬김의 길을 걷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라고 명령하십니다.

(말씀)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27)

(해석)
마가복음 9장에서는 일찍부터 제자들은 예수님의 뒤를 따라 길을 거닐면서도 그들은 뒤에서 서로가 다투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다툰 주제는 “자신들 가운데서 누가 제일 높은 사람인가”를 가지고 지위 싸움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막9:34). 그 때 주님은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 모든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고 분명히 말씀하신 적이 있으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바로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의 이 철없는 요청과 거기에 따른 제자들의 분노를 보시면서 다시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웬만한 두뇌의 소지자는 모두가 머리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피지배자의 길보다는 지배자의 길을 찾습니다. 남이 나를 우대해 주고 선망하는 위치에 들기를 희망합니다. 오늘의 말씀 가운데서도 요한과 야고보는 이러한 인간의 본성에 의하여 서슴없이 주님께 자신들의 욕구를 간청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으뜸이 되는 자리를 모두가 갈망하는 제자들에게는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대답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러한 요청을 하는 모두에게 주어진 주님의 대답입니다.

(적용)
모든 사람의 종이 된다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입니다. 종에게는 자신의 정성과 시간과 물질을 송두리째 바치면서 섬기는데도 칭찬이 없습니다. 오히려 험담이 가득합니다. 견딜 수 없는 수모가 주어집니다. 분명히 내가 땀흘려 수고했는데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이 영광과 찬사를 받게 됩니다. 참으로 기가 막힐 사연입니다.
당연합니다. 원래 영광과 찬사는 종에게는 주어지지 아니합니다. 종은 오직 주어진 일만을 할뿐입니다. 종은 아무런 영광을 받을 수 있는 신분이 아닙니다.
남을 섬기는 종에게 주어진 것은 천박한 대우와 책망과 멸시만이 그 앞에 있을 뿐입니다. 눈물이 있을 뿐입니다. 땀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 주님은 바로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바로 이 과정을 필연코 통과해야 함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비록 그 으뜸이 이 지상에서 이룩되지 못해도 모든 것의 주관자이신 하나님만을 쳐다보고 바보스러운 종의 길을 걷도록 명령하십니다.

셋째는, 우리 주님은 받는 섬김과는 무관하고 주는 섬김을 위하여 자 신의 생명을 바친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말씀)

2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28)

(해석)
누구나 예수님의 그 화려한 대뷰를 볼 때는 착각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의 말씀의 능력은 아직까지 들어보지 못했던 참으로 위대하였습니다. 죽은자를 살리신 그의 놀라운 권능은 모든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이러한 분이야말로 장차 이스라엘의 역사를 새롭게 창조하실 분이라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그 분이야 말로 이스라엘 온 민족의 섬김을 받아 마땅할 분이라는 확신을 갖기에 충분하였습니다. 제자들은 그 분의 곁을 떠나지 아니하고 성실히 추종을 하면 그 섬김의 섬김을 자신들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너무 이상한 말씀을 하십니다.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려 왔고, 나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나의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온 것이라”
우리 주님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을 주시었습니다. 자신은 섬기는 몸이요 종의 몸이요 마지막에는 그 고결한 생명마저도 버리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바로 이러한 자신의 깊은 뜻이 주님을 따르는 무리들에게서 실현되어야 한다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적용)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주는 섬김’과 ‘받는 섬김’이 있습니다. 이 두 가지의 섬김 가운데 많은 무리들은 ‘받는 섬김’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영리한 사람은 ‘받는 섬김’에 천재적인 두뇌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보는 멍청하게 늘 ‘주는 섬김’에만 종사합니다. 자신의 물질도 시간도 육체마저도 ‘주는 섬김’에만 열심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누가 나에게 섬김을 더 많이 주었느냐에 따라 나의 관심을 쏟습니다. 그리고 자기 앞에 섬김이 가득히 쌓였을 때 모두가 행복해 합니다. 바로 여기서 뇌물이 생기고 검은 돈이 생깁니다. 부패의 싹이 자랍니다. 그러나 주는 섬김이 가득한 곳에는 사랑과 평화와 성결이 가득합니다. 우리의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받는 섬김에 무관하고 주는 섬김에만 열중한다면 이 땅의 정의도 평화도 부정의 추방도 가능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이 땅에 확장하는데 놀라운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은 우리의 정성과 관심과 시간과 물질을 남에게 주는데 무척이나 인색하다는 지적들이 이 땅에 가득합니다. 경청하십시다. 이러한 현실 앞에 오늘도 우리 주님은 “이웃을 사랑하라” “남에게 쓸 것을 주라” “이웃을 섬기라”고 독촉을 하고 계십니다.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려고 왔노라. 나의 목숨마저 주려고 왔노라”는 말씀이 이 시간도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4). 주님의 명령대로 따를 때 우리에게는 어떤 결과가 주어집니까 (주제의 실천 결과)

섬기는 종의 길을 바보스럽게 걷고 있는 사람에게는 어떤 결과가 주어지는 것입니까 받는 섬김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주는 섬김에만 열중한 사람은 분명히 현대의 감각으로 볼 때 바보 같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훗날 그 결과는 받는 섬김에 민감했던 사람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아름다운 결실이 주어집니다. 여기 자신의 생명마저 주님에게 바치고 있던 한 바보스런 사람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화):한 때 재미 작가 김은국의 순교자라는 작품이 대단한 관심을 불러일으킨바 있습니다. 그 내용 가운데 다음과 같은 부분은 그리스도만을 위하여 바보같이 사는 사람의 결과가 나타납니다.
때는 육이오 때의 일로 서술됩니다. 그리스도인 14명이 공산군의 장교 앞에 끌려와 서게 됩니다. 장교는 말합니다. “이제 과거를 더 이상 묻지 않을 태니 이 자리에서 예수를 더 이상 믿지 않겠다고 약속한 사람은 좌편의 대열로 나아오라 그러면 그 생명을 살려주겠다.” 그 때 영리한 사람들은 이 긴박한 순간만 피하고 다시 신앙생활을 계속하면 된다는 나름대로의 영특한 판단을 순식간에 내립니다. 14명중 13명이 무거운 발길을 끌고 앞으로 나옵니다. 단 한사람만 바보처럼 머리를 숙이고 중얼대면서 그 자리에 남아 있었습니다. 장교는 다시 묻습니다. “너는 무어야 예수 때문에 죽음을 스스로 자초할 건가 바보 같은 자식. . . . .” 그 사람은 바보 같은 얼굴로 아무 변명 없이 네...라고 대답을 합니다. 그 때 장교는 13명을 향하여 몸을 돌리면서 크게 말합니다. “이 배신자들아! 너희 놈들은 앞으로 우리의 공산당원이 되어도 바로 이처럼 네 이익을 챙기기 위하여 배신할 놈들이야. 나쁜 자식들! 예수를 믿으려면 저 사람처럼 믿어! 우리 어머님도 저렇게 예수를 믿다가 죽었어!”
그리고는 그 13명을 향하여 무자비한 사격을 가하여 모두 죽었습니다. 그 바보 같이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던졌던 사람은 자유자가 되었습니다.
문제는 다시 발생됩니다. 동네사람들은 살아난 이 사람을 멸시합니다. 열세 사람은 예수 믿는 신앙의 정조를 지켰기에 순교를 당했고, 이 한 사람은 배신을 하였기에 살아났다고 오해를 합니다. 실로 고단한 오해 속에 한 마디의 해명도 하지 못한 채 답답한 가슴을 안고 바보의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동네가 아군에 의하여 수복이 될 때 포로병 가운데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13명을 죽인 공산당 장교였습니다. 그 장교에 의해서 그 진실은 밝혀지고 바보는 더 이상의 바보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서 갖은 수난을 당하는 그리스도의 사람들을 외면하시지 아니합니다. 바보스럽게 수난과 역경을 겪으면서 주님만을 위하여 생명을 내 놓은 그리스도의 종들을 망각하지 아니합니다. 언제인가 그 바보의 옷을 벗기고 가장 아름다운 옷을 입혀 주십니다. 하나님의 총애를 받은 사랑하는 종으로 만인 앞에 세워 본을 삼으십니다. 하나님은 진실을 밝혀 주십니다. 그가 바보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언제인가 반드시 만인 앞에 보여 주십니다.

5) 결론:
삶의 길은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신앙의 길도 하나가 아닙니다. 어느 길을 걸어가야 하는가는 우리 스스로가 잘 알고 있습니다. 으뜸이 되는 길은 여러 갈래가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종착역에서 승리의 개가를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주님의 말씀대로 섬기는 사람. 종의 길을 걷는 사람. 주는 섬김에만 온 정성을 기울인 사람입니다.
진정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는 바보 같은 사람의 모습으로 바보 같은 길을 걸었습니다. 그 얼굴에 침을 뱉어도 침묵을 지키는 바보처럼, 주먹으로 혹은 손바닥으로 그 얼굴을 쳐도 눈만 껌벅일 뿐 입을 열지 않은 바보 같은 주인공이었습니다. 그 입에 쓸개를 탄 포도주를 먹여도 입을 다문 채 말이 없었습니다. 희롱을 당하고 홍포를 벗기고 그 옷을 다 빼앗아 가도 한마디의 표현도 없으신 분이었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옷을 벗기고 채찍을 가해도 말없는 동물처럼 신음도 없으셨던 그 분이 끝내 하신 말씀은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영특한 현대인의 눈에는 분명히 바보스런 부르짖음이며 이해할 수 없는 모습입니다.
아버지께 구하면 순간에 열두 군단(72,000명)이 넘은 천사를 보내어 눈앞에서 희롱하고 기고만장한 무리들을 단숨에 거꾸러뜨릴 수 있는데도, 끝내 무력을 사용하지 않은 채 당하기만 한 그분이었습니다. 목숨까지 바치겠다고 했던 가장 사랑하는 제자마저 저주하며 부정해도 한마디의 책망을 아니하시던 그 예수님이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바로 그 분이 우리에게 보여준 바보 같은 삶이 우리의 표본입니다.
나의 육신을 파고드는 유혹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덤덤하게 외면해 버리는 바보가 되어야 합니다. 명예도 모르는 바보, 돈도 모르는 바보, 이성도 모르는 바보, 통치의 개념도 모르는 바보가 되어야 합니다. 고독도 모르는 바보가 되어야 하고 , 피곤도 모르는 바보가 되어야 합니다.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을 내주는 바보가 되어야 합니다. 나를 미워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는 바보, 원수를 사랑하는 바보, 나를 모함하고 짓누르는 사람 앞에서도 멍청한 미소를 짓는 바보가 되어야 합니다. 오리를 가자고 하는 사람에게 십리를 가 주는 바보. 겉옷을 주었으면 하는 사람에게 속옷까지 주는 바보. 40에 하나를 감하는 매를 수백 번 맞더라도 울지 않는 바보가 되어야 합니다. 생명을 노리는 핍박이 다가와도 그대로 그 가시밭길을 피흘리며 걸어가는 바보가 되어야 합니다. 나가라면 나가고 들어오라 하면 들어가는 바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우리가 따르는 주님이 그렇게 가르쳤고 그 길을 걸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바보가 되지 않으면 주님의 참다운 종이 될 수 없습니다. 이러한 바보들이 이 땅의 교회와 민족 앞에 가득히 등장 될 때만이 한국의 교회가 삽니다. 이 민족 위에 그리스도의 영광이 빛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우뚝 솟게 됩니다. 거기에서 으뜸의 숨은 뜻은 발견되고 감사의 머리를 숙이게 되는 주의 자녀들이 속속 출현하게 됩니다.
그러나 진실에는 바보가 되지 마시요. 예언적 사명을 감수해야 할 곳에는 용기 있는 자가 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히 받아 전달하는 일만은 바보 같은 사람이 되어서는 아니됩니다. 명석한 두뇌와 수준 높은 슬기와 밝은 눈과 예민한 귀를 소유한 말씀의 운반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 주님은 오늘의 말씀을 통하여 다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아는 대로 민족들을 다스린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그들을 마구 내리누르고 고관들은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끼리는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 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위대하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내주려 왔노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2. 본 설교가 있기까지

설교노트를 위한 명상-나를 찾는 음성 앞에서

인물과 사건은 보는 사람에 따라 그 해석과 평가를 각각 달리한다. 그래서 동일한 인물과 사건인데도 그 해석은 언제나 일치하지 않고 다양한 해석을 남기게 된다. 이유는 보는 사람의 시각과 환경과 마음의 바탕과 그 지적인 수준에 따라 해석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셔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바쳐진 33년의 짧은 생애의 주인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그의 말씀을 해석하는 일도 역시 다양하다. 자신들의 신앙과 교리와 신학과 환경에 따라 그 예수님을 설명하고 해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확인해야 할 사실은 우리의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은 결코 한가지의 방향에서 해석하고 그 해석을 절대화 할 수는 없다고 본다.
혈기를 내면서 성전 숙청을 하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에서는 개혁가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병든자를 위로하고 가난한 사람을 따뜻이 보살핀 그의 사역에서는 힘없는 민중을 사랑하는 주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그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심은 섬김을 받기 위하여 오신분이 아니고 자신의 생명까지 바쳐 섬김의 도를 가르치고 실천하시기 위하여 오셨다는 사실만은 모두가 동의 할 수밖에 없다.
자기의 안일과 이익의 추구에 혈안이 되어 있는 현실 속에서 오늘 우리의 교회가 가장 시급하게 찾아야 할 주님의 참 모습은 바로 섬기려고 오신 주님의 모습이다. 그 이유는 날이 가면 갈수록 사회의 구조는 섬김을 받기 위한 처절한 싸움의 장으로 변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회 역시 섬기는 대열 보다는 섬김을 받는 대열에 모두가 줄을 서기 위하여 아우성치는 모습을 보기 때문이다. 솔직히 고백하면 오늘의 말씀을 선포하는 이 설교자 역시 주는 섬김보다는 받는 섬김에 때로는 마음이 기울어지는 모순을 발견하게 된다. 이 탈선의 모습을 주님 앞에 고백하면서 회개하는 심정으로 오늘의 말씀을 외치게 된다.
이 보여주신 이 섬김의 도를 어느 정도 실천하고 있는지에 대하여 깊은 생각을 거듭해야 할 시점에 와 있다.

본 설교에 얽힌 이야기

한국의 기독교가 이제 한강길을 걷고 있다는 이제 모두가 인정하는 시점에 와있다. 교회의 성장이라는 애처러운 부르짖음은 있어도 예배하는 공동체의 숫자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특별한 환경에 자리잡은 교회와 그 교회를 효과적으로 이끄는 목회자의 경우 몇 교회는 아직도 성장의 길을 걷고 있다. 그러나 전국에 산재해 있는 대부분의 교회는 과거와는 분명히 다른 환경을 접하고 몹시나 괴로워하고 있다. 특별히 예전의 그토록 왕성하던 청소년들과 유년주일학교는 그 수효가 격감한 현실이다. 교회에 어린 새싹들이 장년의 숫자보다 많을 때는 교회의 푸른 신호등이 켜있다고 말하고 오늘과 같은 그 반대의 현상은 교회의 적신호라고 부른다.
교회의 목사님이 기사 집사님을 대동하고 화려한 자가용을 몰고 다니고 모두가 목사님을 극진히 모시는 모습을 청소년들이 보면 자신들도 저토록 화려한 사람들이 되겠다고 오히려 더 열심히 교회를 다닐 줄 알았는데 전혀 다른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이 실천되지 못한 목회자의 설교와 섬김을 받는데 예민하고 거기에 치중하는 목회자를 경멸하는 소리가 청소년들의 입에서 들려오면서 그들은 교회를 등지고 마는 경향을 보게 된다. 이러한 오늘의 환경에서 이 설교자는 신학교를 지원하고 목사가 되겠다고 구름떼처럼 나서는 젊은이들을 때로는 지극히 부정적인 시각으로 본 때가 적지 아니하다.
행여나 이들은 의식이 있는 교회의 청소년들이 아닌 다른 부류의 젊은이들이 아닐는지 하는 의문을 품게 된다. 수천의 교인 앞에서 반신적(半身的)인 존재로 부상되고 모두가 그 앞에서 머리를 숙이는 모습을 보면서 신학에 대한 관심을 두지는 아니했는지 의심을 품어 본다. 더욱이 어는 직장인 보다 교인들로부터 환영과 존경과 섬김이 주어진 것을 보고서 신학의 문을 두드린 것은 아닌지 염려를 해본다.
그럴 때 필자는 성직자들에게 가장 무서운 적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받는 섬김이 습관화 되는 경우라고 단정을 하기에 이르렀다. 바로 섬김을 받는 길에 서 있는 것이 우리 주님의 길과는 정반대의 길이라는 확신을 하기에 이르렀다.
오해이기를 바라는 한 신학교수의 마음이지만 그 노파심을 벗어버릴 길이 없어 졸업을 앞둔 신학도들을 향하여 오늘의 말씀을 그들의 가슴 속 깊이 운반하기에 이르렀다.

본문과 주제 선정

주제는 섬김으로 일찍이 결정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거기에 합당한 말씀을 찾는 일이었다. 섬기는 종들로서의 자세를 확립하지 않고서 신학의 문전을 나선다는 것이 대단히 위험한 일이라는 사실을 잘 아는 필자로서는 우선 섬기는 종을 하나님이 찾고 있다는 사실을 들려주어야 할 사명을 느끼게 되었다. 이제는 이 섬김의 자세를 강조한 하나님의 말씀을 찾는 일이 가장 급선무였다. 66권으로 우리 앞에 펼쳐있는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어느 말씀이 오늘의 주제를 위하여 필자가 운반해드려야 할 말씀인지를 알 수 있는 것은 나의 제한된 성경지식이 아니었다.
많은 설교자들은 설교를 준비할 적마다 자신의 성경지식으로 설교의 본문을 찾는다. 그러나 필자의 경우는 자신의 제한된 성경의 지식으로 본문을 찾으려는 노력을 기울여 성공한 적이 없다. 설혹 본문이 쉽게 찾아져서 설교를 마친 후라도 훗날 그 설교를 보면서 그 본문이 얼마나 부적절하였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때 마다 실로 부끄러운 얼굴을 감추지 못하였던 때가 적지 아니하다.
이러한 경험은 설교를 준비할 때마다 생생하게 되살아나서 더 이상 나의 제한된 성경의 지식으로 본문을 해결하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설교에서도 섬김의 모습을 실천하시고 그것을 가르치신 말씀을 달라고 무릎을 꿇었다. 그럴 때 주님은 주님의 뒤를 따라 거닐면서도 서로가 높다고 길에서 다투던 제자들의 모습이 먼저 떠올랐다.(막 9:34) 그리고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을 대리고 와서 섬김을 받을 높은 자리를 요구한 모습이 선히 보였다. 그래서 바로 그 장면에서 주님이 하신 말씀을 찾게 되었다. 이 말씀은 마태복음 20 장과 마가복음 10장과 누가복음 22장에서 거의 비슷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그러나 마태복음에서 어머니까지 가세하여 섬김을 받은 자리를 추구한 모습이 오히려 마음에 와 닿았다. 그것은 신학을 진학하는 동기가 하나님으로부터의 소명보다는 부모님의 권유에 의함이 더 많다는 사실이 조사된 바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공관복음에 모두 기록되어진 동일한 내용의 말씀 중에 오늘의 마태복음에 기록되어진 말씀을 오늘의 설교에서 운반해야 할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게 되었고 그 말씀의 뜻을 헤아리기 위하여 다음의 단계에 진입하였다.

석의와 주해와 적용의 과정

설교자가 가장 심각한 실수를 하게 되는 부분은 자신이 운반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터득하지 못하고 자신의 뜻대로 옮기는 것이다. 한국의 절대수의 설교자들이 본문의 말씀을 전하고 그 뜻을 그대로 삶의 장에 운반하는데 성실을 기하지 못한다는 것이 거대한 문제로 등장하고 있다. 필자는 설교를 들을 때 마다 그 설교자가 가지고 있는 유창한 언변과 웅변술, 그리고 훈련된 음정과 정확한 발음들, 자연스러운 설교의 자율성, 그리고 회중들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그 능력들이 대단함을 느낀다. 거기에 많은 회중들이 몰입되어 아멘을 연발하고 웃고 웃으면서 설교를 듣는다. 그러나 가슴 앞은 사연은 그 설교의 내용 문제이다. 화술이 뛰어난 설교자일수록 그 설교의 내용이 너무나 빈곤함을 느낀다. 설교자의 지식과 경험과 세상을 보는 통찰력이 온 설교를 점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 교회의 설교현장에서는 설교자와의 만남은 성공적인데 막상 만나야 할 하나님과의 만남은 이룩되지 않고 있다는데 오늘의 비극을 보게 된다.
이러한 사실을 뼈아프게 느낀 필자이기에 지체 없이 공관복음에 나타난 거의 비슷한 말씀을 모두 펴고 하나님이 오늘의 본문을 통하여 하시고저 하는 말씀이 무엇인지를 찾기에 많은 시간을 쏟았다. 이러한 과정에서 이 말씀은 단순한 섬김의 강조가 아니라 우리 주님이 스스로의 정체성을 밝히는 말씀임을 다시 발견하게 되었다. 그럴 때 제자들이 그러한 주님의 실체를 전혀 모르고 저희 사이에 누가 크냐는 문제를 가지고 다투는 제자들의 모습이 새롭게 해석이 되었다. 그 제자들의 모습이 바로 오늘 우리의 현실에서 너무나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는 적용까지 선명하였다.
오늘의 말씀에서 주님은 제자들이 따라와 주기를 바라는 세 가지의 단계를 이해하게 되었다. 먼저는, 위대함을 생각하기 전에 섬김의 경험을 요구하신 일이었다. 둘째는, 머리가 되고자 하면 먼저 종이 되라는 말씀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자신이 바로 이상의 두 단계를 모두 밟고 계시며 이것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라는 것을 밝히고 계시었다. 그리고 제자들이 할 수 없는 “목숨까지 내 놓은 섬김”을 천명하시면서 자신이 그 길을 걸으신다는 의미심장한 말씀이 너무나 가슴에 깊이 와 닿았다. 바로 여기에서 필자는 이 말씀의 적용의 대상을 신학도나 일반성도가 아닌 내 자신에게 먼저 적용 하면서 부끄러운 고개를 떨구고 용서를 빌었다. 이유는 아직도 나는 주는 섬김보다는 받는 섬김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것이 정직한 고백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본 설교가 추구하는 목적

설교의 목적은 누구에게 무슨 말을 어떻게 하느냐는 것이 목적이 될 수 없다. 설교학에서 목적이란 오히려 메시지의 성격을 밝히는 것이다. 이 설교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생애와 교훈과 수난과 부활과 승천과 재림을 선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인지, 아니면 단순한 교훈과 교육을 목적으로 하는 것인지, 또는 위로와 격려를 목적으로 하는 것인지, 아니면 회개와 반성을 촉구하는 예어적인 메시지를 목적으로 하는 것인지를 구분지은 것을 설교의 목적이라고 한다.
앞에서 본 석의 과정에서 발견되어진 주님의 깊은 뜻을 그대로 운반하는데 가장 손쉬운 방법은 교훈적인 설교이다. 주님의 말씀 그대로 섬기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는 명제를 가지고 조목 조목 가르치는 설교로 발전할 가능성이 가장 많았다. 그러나 필자는 오히려 선포의 설교로 그 목적을 정하였다. 그 이유는 주님의 정체성을 밝혀 주님이 원하시는 그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데 주안점을 두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주님이 어떤 실체로서 우리 앞에 다가오셨는지를 다시 전하는데 목적을 두었다. 그러하기에 본 설교의 결론 부분에서 우리 주님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적나나하게 묘사하고 그 주님을 회중들이 쳐다보도록 할 수 있었다. 섬기기기 위하여 오셨던 주님의 모습을 그대로 운반하는데 목적을 둔 설교는 교훈이나 위로보다는 순수한 선포에 그 초점을 두지 않을 수 없었다.

설교의 유형과 그 형태

설교자가 영원히 지켜야 할 기본적인 임무는 聖言運搬一念이다. 하나님의 말씀만을 순수하게 그의 백성들에게 운반하고야 말겠다는 설교자의 기본정신(Ethos)이 살아 있을 때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이 우뚝 솟는다. 그동안 기독교의 설교단에서는 각종 설교가 여러 가지의 유형을 활용해 보았다. 이러한 과정을 지나서 얻어진 결론은 역시 설교란 주어진 본문을 성실히 운반하는 것이 최상의 것이었다.
이러한 설교의 시각을 필자는 그대로 도입하여 가르치면서 오늘의 설교도 역시 그 기본 유형은 본문설교로 하였다. 성실히 본문에서 설교의 모든 메시지를 찾았고 그 메시지의 체계와 전개를 가져오는데 전념을 하였다.
그리고 본 설교의 전개형태는 ‘섬김’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분석설교의 형태를 충분히 가져올 수 있고 또 본문이 특유하게 가지고 있는 줄기있는 이야기를 가지고 설화체 설교로 엮을 수 있었다. 그러나 본문에서 유출된 말씀의 내용을 그대로 살리기 위하여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대지화 시켰다. 그래서 본 설교는 본문을 가지고 그 말씀을 풀어가면서 엮어지는 대지설교의 전개하고 있다.

3. 본설교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

필자는 누구보다도 무거운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는 생각을 언제나 한다. 그 이유는 설교에 대하여 그 이론과 실제를 강의 한다는 것이 너무나 어렵기 때문이다. 반드시 필자가 펼치는 이론이 정확하고 올바른 것이라는 확신이 날이 가면 갈수록 식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각적으로 최선을 다 기울이면서 아홉 번째의 설교를 내 놓는다. 이 설교는 단순한 탁상위에서 펼쳐진 설교가 아니라 신학대학원생들과 교회에서 두 차례에 걸쳐 선포된 설교로서 다시 부족한 부분들을 보충한 설교이다. 그러나 다시 정독을 하면서 부끄러움을 안게 된다. 그것은 본 설교가 안고 있는 문제점이 적지 아니함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먼저는, 이 설교의 주제가 오늘의 현실과는 거리가 너무 멀어서 회중들과 접촉을 하는데 대단히 어려움을 느낄 수 있다고 본다. 필요한 주제이면서도 선뜻 받아드리기에 힘이 든 설교가 되어 독백으로 끝을 맺을 위험성을 안고 있다고 본다.
둘째는, 교회라는 공동체 안에서 섬기는 사람에게는 용기를 주고 당연성을 부여 할 수 있으나 언제나 방관과 무관심의 자세를 지켜오면서 신앙생활을 계속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거부감을 안겨주는 설교가 될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결과는 교인들을 하나로 묶어가는 공동체의 기본틀을 도와주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
셋째는, 설교의 자료가 현장에서 하나 그리고 작품에서 하나만을 취하고 설교의 모든 내용은 성경일변도를 가져왔다. 여기서 설교자료의 단조로움이 눈에 보인다. 이러한 문제는 메시지의 적용이 너무 단편적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안게 된다.
넷째는, 본 설교의 적용 부분에서 명령형의 형태를 너무 많이 취하고 있다고 보여 진다. 하나님의 권위로 이어지는 명령이라고 할지라도 엄연히 설교자는 하나의 인간이다. 인간은 어떤 경우도 설교사역에서 높은 위치에서 명령을 하는 존재로 임할 수 없다. 오히려 동일한 문제를 가지고 함께 고민하고 아파하고 기뻐하는 설교자가 오늘의 시대에서는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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