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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정의의 공동체 (호 10:12 요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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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란 본래적으로 '모든 사물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고 해야 할 역할 을 할 수 있도록 정리되어 있는 세상'의 의미로 이해되어왔다. 이러한 개 념 위에 플라톤은 정의를 개인과 국가의 도덕성으로 구별하면서 "사회정 의란 모든 인간이 자신에게 가장 적합하도록 주어진 사회적 기능을 타자 의 방해없이 할 수 있는 사회의 상황"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국가는 반드 시 국민 각자가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얻을 수 있도록 사회구조를 만들어 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고전적 이론은 인간이 홀로 자족할 수 없고 분업에 의한 각자의 참여로 그 이익을 서로 나누는 협력과 협동의 관계가 제대로 이루어져서 누구나 그 역량대로 역할을 할 수 있는 사회이 어야 함이 전제되어 있다.

 현대 사회에 있어서 정의의 문제는 '풍요로운 사회가 될수록 삶에 필요 한 모든 것이 사회구성원에게 어떻게 분배가 되며 이에 대한 만족도는 어 떠한가' 하는 것에 관심을 모으고 있다. 특히 개인의 이익을 우선적으로 추구하는 사회구조 속에서 부의 균등한 분배와 기회의 부여 만이 대중의 일반적인 관심이 되고, 사회전체 또는 국제적인 정의의 문제는 관심 밖의 것이 되고 있다. 사회가 복잡해지고 통치의 방법이 발달되면서 정의의 문 제는 한 사회나 국가, 또 국제적인 연관 관계 속에서 중요한 문제가 될 뿐 아니라 사회정의 없이 개인의 정의가 이루어질 수 없다.

 법치사회에서의 정의의 문제는 타인의 법률적 권리를 옹호하느냐 또는 침해하느냐에 따라 결정되고, 정의의 신학적 과제는 인간과 하나님, 인간 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자연 또는 국가간의 관계에서 발생한다. 또한 정 의의 과제는 인간의 존엄성 또는 평등과 가치, 인간의 생존권과 경제적 분배의 문제, 인간의 정치적 권리 또는 인권의 보장, 그리고 인간의 평화 와 행복의 권리 등이다. 이러한 정의의 과제의 출발은 역시 자연법사상과 사회계약의 개념, 즉 하나님의 법에 속한 절대적 진리를 전제하고 있다.

 1990년, 서울에서 열렸던 [JPIC(정의와 평화와 창조질서 보전)세계대 회]는 정의와 평화와 창조질서의 보전을 함께 인식하고 다짐하며 실천해 나가자는 교회의 협의와 결단의 과정이었다.

JPIC가 갖는 정의의 관점을 우리의 입장에서 풀어 보면 몇가지로 정리 된다.

첫째, 민중의 참여와 권리가 보장되는 정의로운 정부는 모든 권력 행사 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도록 실천될 수 있는 정부를 뜻한다. 우리는 새 로운 정부가 과거의 군사통치 체제를 철저히 청산하고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의 청지기로서 하나님의 목적에 봉사해야 하며 민중을 위한 정치, 민 중에게 책임지는 정치를 하여야 한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정의로운 경제 구조는 새로운 정치체제로의 과감한 변혁 없이는 이루어갈 수 없다. 그러 므로 정부가 행하는 개혁은 정의의 실천이 그 목적이 되어야 한다.

 둘째, 가난한 자의 문제는 세계경제체제와 국내경제체제의 구조적 변화 없이는 해결될 수 없다. 오늘날 특히 제기되고 있는 강대국중심의 우루과 이라운드 협상에 관하여는 국민적 합의를 바탕으로 이를 대처해 나가야 한다. 부의 축적이 곧 하나님의 축복이며 가난의 문제는 개인적인 것으로 돌려 버리는 것은 교회의 큰 잘못 가운데 하나이다.

 셋째,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사실, 곧 계급과 인종, 성(性)을 초월하 여 하나님 안에서 평등함을 교회안에서 입증하여야 한다. 이것이 교회의 보편성으로서 우리가 실천해 나가야 할 과제이다. 그러나 이 보편성이란 '지극히 작은 자'가 하나님의 보호아래 평등한 삶으로 이끌어지는 과정에 서 가능한 것이다.

 넷째, 땅이나 경제력의 소유 문제는 그것이 절대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는 공개념의 바탕에서 새롭게 이해되어야 한다. 특히 교회의 경우, 교회가 가지고 있는 재산이나 기관 등은 사회 공개념에서 관리, 이용되고 그 가치가 공유되어야 한다.

 다섯째, 인권의 문제는 가장 첨예한 정의의 과제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에 그 근원을 두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서 집단적 이며 사회의 질서를 형성하는 기본요소가 된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다도 법률 자체의 정당성이 있어야 하며 그 법을 판단하거나 집행하는 사람들 이 공정하고 정당할 수 있어야 한다.

 정의를 위해서 교회는 계약 관계가 필요하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계약 인 동시에 다른 교회와 이웃과의 계약을 포함한다. 이러한 계약의 관점에 서 정의의 신학은 한국교회의 과제인 통일을 이루어 나가는 신학적 근거 가 되는데 이를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전제 조건들이 요구된다.

 첫째, 교회의 개혁이 필요하다. 이것은 교회가 이제까지 지켜온 반통일 의 요소를 척결하기 위하여 반공주의 중심의 신앙, 자본주의 중심의 사 고, 그리고 기득권 중심의 조직에서 벗어나야 한다. 통일을 위하여 교회 의 새로운 모습을 형성하기 위한 통일신학, 정의의 신학을 정립하여 교육 하며 이를 신앙고백으로 연결시킬 수 있도록 이끌어 가야 한다.

 둘째, 교회는 과거의 역사를 청산하기 위한 역사적인 회개가 필요하다.

과거 일제시대로부터 군부독재에 이르기까지 소위 정교분리를 내세워 정 치적 억압과 수탈에 침묵하고 정치세력과 오히려 야합하거나 비호세력이 되어 왔던 과거를 씻어내기 위한 죄책 고백과 개혁이 있어야 한다. 교회 가 정치적 침묵을 강요하는 대신 팽창과 축복의 신앙을 지나치게 강조한 것은 정의에 역행하는 것이다.

 셋째, 교회는 통일을 저해하고 있는 군사적 대결이나 법과 제도의 개혁 을 위하여 서로 연대하여야 하며 이를 위하여 더욱 적극적인 평화운동과 평화교육이 실시되어야 한다. 이러한 교육에는 갈등, 평화, 전쟁, 핵, 정 의, 권력, 성차별, 인종차별, 환경, 미래 등의 주제를 포함한다. 우리의 경우 복한의 핵문제에 대하여는 상당히 올바른 이해가 있어야 한다.

 넷째, 교회는 통일조국이 이루어 갈 국가나 교회의 새로운 형태, 정치 체제와 경제사회구조는 물론 복지제도에 이르기까지 새나라를 만들어가는 청사진을 가져야 한다.

 다섯째, 교회는 역사의 원상회복과 개인의 피해를 보상하기 위한 화해 의 운동을 벌여야 한다. 이것은 분단 이전의 역사를 회복하고 분열이전의 교회의 선교를 이어가기 위하여 참된 기독교의 상통을 이루어야 한다. 다 시 말하면 예배공동체로부터 고백공동체를 지향하며 참된 연대공동체를 실현해야 한다.

 여섯째, 교회는 통일을 위한 에큐메니칼 연대를 새로히 다짐하여야 한 다. 이것은 세계평화와 정의를 위한 세계교회와의 연대를 의미한다. 지금 까지의 교권주의나 교파우월주의를 벗어 버리고 교회간의 대화와 연대가 필요하다.

 일곱째, 교회는 끊임없이 파수꾼과 예언자의 역할을 감당하며 민중의 뜻을 살피고 이를 대변하는 데 게을리해서는 안된다.

교회는 언제나 새로워져야 한다. 이 말은 교회가 늘 거듭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는 병든 사회와 불의한 사회를 비판하는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신앙공동체를 형성하고 믿음을 생활로 연결시 켜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가는 책임을 가져야 한다.

오늘의 세계에서 교회가 안고 있는 다음과 같은 세계 정의의 문제점들 을 살펴 보면서 세계안적인 견해로 우리의 작은 믿음을 고백하는 나눔공 동체를 구현해야 한다.

 오늘날 세계 정의의 문제들은 대략 다음과 같다.

첫째, 기근과 기아문제에 있어서 UN아동기구(UNICEF)의 보고서에 의하 면 매일 4만명이 여러가지 이유로 굶어 죽어 가는데 이 숫자의 대부분이 어린이들이라고 한다. 이 비극적인 재앙의 원인들은 가뭄, 전쟁, 강제추 방, 절대빈곤, 정치적인 억압 등이다. 이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줄 수 있는 손길이 아쉽다.

 둘째, 인권유린 문제에 있어서 국제인권위원회에 따르면 고문당하고 감 금되고 실종되고 암살당했거나 어떠한 형태로든 억압 정부에 의해 폭행당 했다고 보고되는 사람들의 숫자는 줄어들지 않고 있고 현재 35개 정부가 긴급조치나 계엄령을 시행 중이라고 한다. 이것은 그 나라 국민들이 자기 나라의 일들을 결정하는 데 참여할 권리를 잃은 채 살고 있음을 의미한 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는 항상 정치, 경제 혹은 국가의 이데올로기를 넘 어서서 억압에 희생되는 자들의 편에서 증거해야 한다.

 셋째, 정부권위의 정당성과 부당성 문제에 있어서 정부란 항상 그 정치 적 권위가 정당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오랜 교회의 입장은 억압 정권 아래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도전받으며 정부권위에 대한 부당성과 학대, 정권에 대항한 폭력을 비롯한 항거나 저항을 교회가 암묵 적으로 승인함과 동시에 체제의 희생자들의 권리를 대변해 왔다. '하나님 의 정의'와 다가오는 '하나님의 통치'의 완성이라는 측면에서 정권의 정 당성, 부당성 문제를 논의하는 것은 정의실현의 출발점이 된다.

 넷째, 국제적 부채의 위기 문제에 있어서 제3세계의 어마어마한 부채는 이제 미화로 총 11,250,000,000,000달라를 넘어섰다. 이 문제는 매우 복 잡하지만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1) 이 비극의 결과는 불공평하게도 가장 갚을 수 없는 사람들, 즉 가 난한 자 특히 남반구나 북반구의 가난한 여성과 아이들에게 해당된다.

2) 국제적인 문제로 인하여 남반구와 북반구의 경제가 상호의존적이기 에 남반구와 북반구는 지배와 종속의 위치에 놓여졌다.

3) '이율이 한 치 높은가 낮은가'하는 것이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치명 적인 영향을 주기 때문에 남반구의 많은 사람들에게는 이 부채 위기가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가 된다.

 다섯째, 피난민 문제에 있어서 오늘날 전세계에 15,000,000명의 피난민 이 있다. 수단의 1,300,000명 난민을 포함해서 약 4,000,000명이 아프리 카에 있다. 중앙 아메리카에는 약 900,000명이 자기 나라에서 쫓겨 나서 살고 있으며 그밖의 곳에서는 730,000명에서 1,000,000명에 이르는 피난 민이 살곳을 찾고 있다. 많은 나라가 피난민들에게 국경을 차단하고 있는 데 반하여, 세계적인 인권선언과 그밖의 다른 국제조약들이 이 피난민들 을 원래의 자기 나라로 돌려 보내는 운동을 벌리고 있으며 도망쳐 온 사 람들을 보호하려고 애쓰고 있다.

 정의가 감추어지고 왜곡되어진 현실 속에서 억압당하는 모든 자에게 자 유를 주고 정의로운 세상을 경험하게 하는 일은 오늘의 교회가 세상에 복 음을 전하는 형태로 외쳐져야 한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피정복과 해방

성경 본문:호 3:1-5

3월은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 잊을 수 없는 고난과 감격이 엉켜있는 달입니다.

 우리는

3.1절을 맞이하여서 우리 민족이 왜 섬나라 일본에게 38년이 라는 장구한 세월을 피정복자로 있어야 되었는지를 재고하여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 민족은 다른 민족이 아닌 이스라엘 민족입니다. 그러 므로 이스라엘 민족을 살펴보고 이 민족을 살펴봄으로써 우리 민족이 피정복자가 된 원인과 해방을 하게 된 비결을 알아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말씀속에서 정확하게 알고 넘어가야 할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서 이방의 우상을 섬겨도 여전히 이스라엘을 사랑하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호 2:19-20).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이 피정복의 민족이 된 원인을 살표보겠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이 왜 많은 민족들 가운데서 이스라엘민족을 택 하셨는지의 목적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택하신 이유는 하나님을 설명하기 위한 도구로 하나님만을 위하여 살게 하기 위해 이스라엘 민족을 많은 민족 가운데서 선택하셨던 것입니다. 그런 데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멸시하고 하나님을 떠나 분리된 삶을 살 았기 때문에 피정복의 민족이 된 것입니다.

 우리 민족이 일본에게 모든 주권을 빼앗기게 된 구한말 당시 한민족 의 실태는 아주 부정적이었습니다. 이러한 시대를 무어라 설명하면 되 겠습니까모두가 이기주의에 빠져서 자기 밖에 모르는 시대였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을 떠나서 우상을 섬길 때 포로가 되어서 살 았습니다. 한민족은 이 세상에 가장 큰 우상인과 이기주의에 빠졌을 때 일본에 속국이 되는 슬픔을 맛보았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 시대가 구한말 같 은 시대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자신을 위해서 살때 행복을 누리게 될 줄로 알지만 불행을 몰고 오는 길 이라고 하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을 위하여서 살고 이웃을 위하여서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민족이 해방을 얻게 된 원인을 살펴보도록 하겠습 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우상을 섬기다가 포로가 되어서야 목숨을 내걸고 하 나님을 향한 신앙운동을 전개하고 자신들의 행함에 대해 회개하고 하 나님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섬기는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이 계시는 예루살렘을 사모하게 되고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다시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다시 돌아오게된 원인은 바로 하나님을 중심한 신앙 을 회복하고 하나님을 위하여 살 것을 새롭게 한 이유입니다.우리 민 족의 해방도 이스라엘의 해방과 같은 맥락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우리말도 없는 쓰라린 고통속에서 나라 잃은 설움을 체험하게 되어서 야 나라의 귀중성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때 나라를 위해 애국자가 목 숨을 걸고 일어섬으로서 이 나라가 다시 독립을 하게 된 것입니다.여 기서 자세히 살펴보면 독립운동을 주도했던 사람들이 거의 다 하나님 을 믿는 신앙인이었다는데 우리는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즉

3.1 운동은 한마디로 요약하면 하나님의 신앙운동이었습니다.

 이렇게 이기주의를 버리고 돌아올 때 이 민족에게 기쁨이 왔습니다.

우리 모두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사가 아니라 나라와 이웃을 위하여서 사는 다짐을 다시하고 실천하여야 하겠습니다. 또한 우리는 해방되어 자유 하다고 하지만 영적으로 양심적으로 육신적으로 사단에게 정복당 하여 고통을 당하는 자가 지금 이 시대에 더욱 많은 것 같습니다. 사 단의 정복으로부터 해방되려면 나 중심의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중심 의 삶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본받아 소외되고 불쌍한 자들을 위 한 희생과 봉사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할때 우리는 참된 자유를 누리면서 살수가 있을 뿐만 아니라 이 민족을 강하게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손길이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 니다. 이 시대의 가장 큰 우상인 이기주의에서 벗어납시다!!!...

 형제의 범죄함이 드러나거든

성경 본문:호 4:1-4, 갈 6:1-5

우리 사회의 계층간의 갈등과 증오는 이제 위험수위를 훨씬 넘은 것 같습 니다. 그래서 정부도 총제적 위기상황이라 결론짓고 그 치유책을 세우느라 많은 애를 쓰고 있습니다.

 민족의 최대명절이라 하는 추석을 전후하여 몇일이 멀다 드러난 인천 북구 청 세무공무원들의 세금횡령사건, 소위 "지존파"일당의 엽기적 살인사건, 온보현의 부녀자 연속납치 추행 살인사건 등이 치안부재의 상황으로 마음놓 고 살 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고 모두가 불안해 하고 있습니다.

 왜 우리 사회가 이렇게 되었을까! 이에 대해 각계각층의 신분에 따라 처리 나 그 원인에 대해 말하고 있으나 자신에겐 아무 책임이 없는 것인양 처신 할 뿐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나오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 끌 려온 여자에게 돌로 처죽이고자 하였던 것처럼 범법자들을 향하여 격한 감 정을 표출하고 욕설을 퍼붓기에 급급하기만 한 태도들입니다.

 이러한 우리들에게 구약성경중 호세아 4:1-4에서는 무어라 말씀하시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땅 거민과 쟁변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오직 저주와 시위와 살인과 투절과 간음뿐이요 강포하여 피를 뒤대임이라 그러므로 이땅이 슬퍼하며 무릇 거기 거하는 자와 들짐승 과 공중의 나는 새가 다 쇠잔할 것이요 바다의 고기도 없어지리라 그러나 아무 사람이든지 다투지도 말며 책망하지도 말라 네 백성이 제사장과 다투 는 자 같이 되었음이니라"하셨습니다. "피를 뒤대임"이 된 원인과 사회병리 적인 현상이 창궐함은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에 대하 여 전혀 아는 것도 없는 일에서 비롯되었음을 돌리려고 애쓰지 말라. 보라.

너희 제사장들과 내가 책망할 사람은 바로 너희다라고 그 책임은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이다고 하시니 이제라도 그 책임을 통감하고 하나님 앞에 먼저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진실 편에 서야 할 우리가 피해를 입을까 염려되어 거짓의 편에 섰었고 불 의한 강자에 붙어서 부스러기 권세를 누리려는 불한당들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것과 하나님이 없다고 여기는 자들과 다를 바 없이 한 일에 대해 우리 그리스도인들 모두가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열매를 맺기 위하여 이 땅에 진실이 회복되고, 인애가 넘치며, 하나님을 두려워 하며 경외하는 민족이 되기에 앞장서야 합니다.

 그러면 이 병든 사회를 건강이 넘치는 사회로 만들기 위하여 우리 그리스 도인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신약성경 갈라디아서 6:1-5 에서 해답을 얻고 자 합니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 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 보라 너도 시 험을 받을까 두려워 하라.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 을 성취하라 만일 누가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된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 이니라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만 있고 남에 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임이니라"라는 말씀에서 그리 스도인이 할 것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죄를 드러내고 죄에 빠진 형제를 바른 길로 돌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말씀 중 "바라잡고"라는 말로 쓰여져 있는 "회복하다"의 헬라어 원어는 의 학적 용어로서 외과의사가 삐뚤어지거나 부러진 다리를 다시 곧게 맞춘다는 의미를 가진 말입니다. 이러한 개념에서 범죄자의 죄의 용서는 하나님께서 하시지만 우리는 죄로인해 화를 자초한 자를 치료해주는 하나의 도구가 되 어야만 합니다. 그럼에도 그동안 우리는 죄에 빠진 형제를 바른 길로 돌아 오게 하는 사명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극에 달한 이기주의 때문입니다. 그 러므로 이기주의에서 벗어날 바른 길로 돌아오게 하는데 여러 형태의 불이 익이 따른다 할지라도 이를 감수하고 이 사회를 건강하고 화목한 사회를 이 루는데 다 같이 힘써야겠습니다.

 2. 바른 길로 돌아오게 하는 옳은 방법에 대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 하나는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라 했습니다. 즉 음으로 다가 가야 한다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는 죄를 범한 형제는 이미 회복하기 어려운 상처를 입은 상태입니다. 마치 유리가 산산 조각난 것 같이 되어 버 렸기 때문에 인간적인 체벌이나 핀잔이나 책망 등은 오히려 그들을 더 큰 곤경에 빠지게 할 뿐만 아니라 자포자기 상태에서 더 끔찍한 일을 저지르게 할 가능성이 농후에 집니다.

 한 예로 5공시절의 "삼청교육대"와 같은 것은 비인간적인 방법으로 이전 방법으로는 결코 바른 길로 인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일이였을 뿐 만아니라 더 큰 후유증만을 남겼을 뿐임을 똑똑히 알게 했습니다.

오직 온유한 마음으로 다가가 세심히 돌보며 바른 길로 돌아오게 하는 방법 뿐입니다. "온유한 마음"이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 니"라 말씀하신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그리스도인 모두 는 마음에 품고 범죄한 자를 바른 길로 돌아오게 해야 할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의 방법은" 너희가 짐을 서로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와 법을 성취하라"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짐을 서로 진다'라는 말은 사랑의 실천 을 의미합니다. 사랑의 실천이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 것이니라"(요 15:12).

 3.바른 길로 돌아오게 함에 있어 금해야 할 것 하나가 있습니다.

 먼저 교만입니다. 왜냐하면 교만은 능력은 상실케하는 마귀적인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진실과 인애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으므로 죄를 들어내 고 죄에 빠진 형제를 바른 길로 돌이키는데 그리스도인을 도구로 사용하시 기를 원하십니다. 이러한 사실은 깨닫지 못하던 우리에게 상상키 어려운 끔 찍한 사건들을 통하여 우리 자신의 잘못을 발견케 하신 하나님의 오묘하신 역사에 감사하며 죄를 범하고 죄인줄 모르는 이들에게나 죄를 짓고 고민하 며 고통하는 이들에게 진실과 인애와 하나님의 사랑하심의 힘이 있음을 보 여줍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와 겸손의 방법으로 바른 길로 돌아 오게 하십시다.

 하나님을 알자

성경 본문:호 6:4-6

1. 하나님의 존재를 알자 가) 그 지으신 만물을 보아서 알 수 있다 (롬 1:19-20).

나) 우리의 양심을 보아서 알 수 있다 (벧전 3:21).

다) 그 선하심을 맛보아서 알 수 있다 (시 34:8).

 2. 하나님의 속성을 알자.

가) 영원하심 ( 시90:1-2).

나) 전능하심 (창 17:1,18:14).

다) 무소부지하심 ( 시139:1-4).

라) 무소부재하심 (렘 23:24).

 3.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알자 가) 그 목소리에 순종하는 것을 기뻐하심 (삼상 15:22).

나) 산제사를 드리는 것을 기뻐하심 (롬 12:1).1) 믿음의 제사 (빌 2:17).

2) 통회하는 제사 ( 시51:17).

3) 찬미하는 제사 (히 13:15).

4) 감사하는 제사 (시 50:23).

5) 헌금의 제사 (빌 4:18).

 결론:하나님을 바로 알고 기쁘시게 하면 은혜와 축복을 넘치도록 주실 것이다.

 뒤집지 않은 점병

성경 본문:호 7:8-9

'뒤집지 않은 전병' 이라면 한 쪽은 심히 타고 다른 한 쪽은 아직 설익 어 서 먹을 수 없는 떡을 말합니다. 선지자 호세아는 이스라엘의 죄와 심판 에 대하여 말하면서 '너희는 뒤집지 않은 전병이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왜 이스라엘은 이러한 책망을 받을 수 밖에 없었던가 하는 그 역사적인 배경을 먼저 살펴보고 이것을 오늘 우리의 상황과 비교하여 생각해 봅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을 여로보암 2세가 통치하고 있었던 시대에 그 나라는 경제적으로 크게 번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민족은 내적으로 심히 썩 어가고 있었으며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다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경제적인 발전을 이루면 무얼 합니까 사람들의 물질에 대한 탐욕은 한이 없고 또 돈 을 벌기 위한 수단과 방법은 간교하여서 되와 말을 속이고 저울을 속이는 부정한 거래가 만연하고 있었습니다. 거기에서 온갖 부정과 불법이 시작되었 습니다. 또한 빈부의 차이가 격심하여 화려한 상아 침상에 누워 술과 향락으 로 세월을 보내는 자들이 있었는가 하면 겨우 짚신 한 컬레 값에 가난한 사 람들의 인신이 매매되는 일이 허다하였습니다. 그뿐 아니라 영적으로는 여호 와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 다 식어 버렸고 바알신을 믿고 숭상하는 이상스런 열풍이 온 나라안에 만연해져가고 있었습니다. 나라의 정치는 정치대로 갈팡 질팡하여 갈 길이 어디인지 모르고 방황하고 있었고 이로 인하여서 북왕국 이스라엘이 애써 이루어 놓은 경제가 일시에 무너져 내릴 위기에 봉착하였 던 것입니다. 이러한 시대에 활동하던 선지자가 바로 호세아입니다.

저는 오늘 우리의 시대와 상황들을 눈여겨 볼 때에 그 옛날 북왕국 이스 라엘 때와 흡사한 것이 너무나도 많다고 생각합니다. 경제가 좀 성장하면서 우리에게 밀어 닥친 여러가지 현상들 중에는 과거에 볼 수 없었던 괴이한 일들이 많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인신을 매매하는 일, 잔인한 폭력, 무서운 마약 사범들, 가정 파괴범들, 그리고 나라의 자원과 자본을 독점하고 있는 재벌들의 향락과 방종, 또한 거기에 반발하는 극렬한 반항세력들..... 그뿐 아 니라 사상적인 혼란과 십수년동안 계속되어온 사회의 혼란과 데모사태,..... 이러한 현상들은 땀흘려 일하고 성실히 살아가려고 하는 다수의 국민 대중 을 너무나도 실망시키고 어렵고 피곤하게 만듭니다.

왜 이런 혼란이 생기는 것입니까 이러한 혼란은 정신적 혼란에서 비롯됩 니다. 사람들이 바른 생각을 못한 때문입니다.

 때가 이르면 사람들이 건전한 교훈을 받으려하지 않고, 귀를 즐겁게 하는 말을 들으려고, 자기네 욕심에 맞추어 스승을 끌어들일 것입니 다.그들은 진리를 듣지않고, 허탄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딤후4:3-4)

라고 하였습니다. 한 마디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면 우리가 이루어 놓은 경 제 기적은 하루 아침에 무너져 버릴 수 있습니다. 사람의 정신 생활, 그것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호세아 선지는 이 외형적인 혼란과 부패와 타락의 근본 원인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생활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즉 백성들이 여호와 하 나님을 진실히 믿는 신앙심을 저버리고 바알신 숭배와 우상으로 타락하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이스라엘의 배신일뿐 아니라 영적인 간음 행위라고 규정하였습니다.

선지자 호세아는 우연히 자신의 가정 생활에서 철저히 이것을 체험하고 북왕국 이스라엘의 장래와 운명에 대하여 슬퍼했습니다. 그리고 진지하게 그 나라와 백성들 앞에 권면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당시 그나라의 형편을 마 치 '뒤집지 않은 전병'과 같다고 본 것입니다.

'뒤집지 않은 전병'은 설익어 못먹는 떡입니다. 이것은 덜 되었다는 것입 니다. 되지도 않았는데 다 된 줄로 착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요사이 일부 부유층 사람들의 낭비하는 것을 보고 걱정하는 소리들이 많지만 지나친 사 치와 과소비 풍조는 조금도 자제되지 않는 것같습니다. 또한 나라의 정치도 매우 미숙한 것 같습니다. 정치란 국민이 안정되고 편안하게 살며 정부를 믿 고 국가에 대한 사랑과 자부심을 갖도록 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나 라 정치는 지금 뒤집지 않은 전병과 같습니다. 정치가 설익은 정치가 되어서 그렇다고 볼 수 밖에 없습니다.

신앙도 뒤집지 아니한 전병과 같다면 그것은 설익어 먹을 수 없는 떡과 같은 것입니다. 겉으로는 그럴 듯하나 속으로는 썩어가고 있는 그런 모습, 겉으로는 편안하고 안전하고 잘 되는 것 같으나 안으로는 부패와 폭력과 타 락과 혼돈에서 헤어 나올 수 없는 그 어려움......이런 것을보고 '뒤집지 않은 전병'이라고 한 것입니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힘 있는 자든 힘 없는 자든, 모두가 자기 잇속만 채우며, 사기를 쳐서 재산을 모몽았다.

예언자와 제사장 까지도 모두 한결같이 백성을 속였다.

백성이 상처를 입어 앓고 있을 때에, 그들은' 괜찮다! 괜잖다!' 하고 말하지만 괜찮기는 어디가 괜찮으냐(렘6:14-15)

라고 노래하였습니다. 겉은 멀쩡하나 속은 익지 않은, 먹지 못할 떡입 니다. 회개는 하는 것 같으나 진실한 회개가 아닌 것, 기도는 열심히 하 는 것 같으나 상달될 수 없는 기도..... 하나님은 그들이 '손을 펼때 눈을 가리고 많이 기도할지라도 듣지 아니 하시겠다.'(사1:15)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겉은 그럴 듯하나 속은 아주 설익은, 뒤집지 않은 떡과 같기 때문 입니다.

그런데 이 뒤집지 않은 떡은 한 쪽은 너무 익어 새까맣게 탔고 한 쪽은 익지 않아 그대로 있다고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차라리 익지 않으려면 전체 가 익지 않았으면 좋을 뻔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그 당시의 사회상과 개 인의 신앙 상태가 모두 다 그런 모양이었습니다. 이것을은 오늘의 말로 한다 면 양극화 현상을 말합니다. 오늘 우리 사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양극화 현상입니다. 부자는 너무 많고 가난한 사람은 너무 없습니다가. 잘하는 사람 은 너무 잘하고 못하는 사람은 너무 못합니다. 사랑과 봉사의 실천자가 있는 가 하면 폭력.마약. 가정파괴범 같은 극악한 범죄자들이 있습니다. 고사리같 은 손으로 어린학교 학생들이 자연 보호를 위하여 휴지를 줍는데, 소위 대기 업을 경영하는 어른들은 몰래 어머어마한 폐수를 강에다 쏟아 버립니다.

사상적으로는 극우와 극좌가, 신앙생활에서는 열광주의와 냉소주의가 있 습니다. 호세아 선지자 당시에도 여호와 신앙은 점점 식어가고 바알 종교에 대하여 사람들이 깊이 빠져서 그릇된 과열 현상으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한 쪽은 설고 한쪽은 타버려 결국 이것도 저것도 다 못쓰게 되고 마는 꼴입니 다.

현대인들은 강한 자극을 주지 않고는 잘 움직이지 않습니다. 무엇이나 강 력하고 뜨겁고 화끈한 체험들을 가지기를 원합니다. 일도 화끈하게 하고, 노 는 것도 '미치게' 놀고, 죄도 엄청나게 짓고, 회개도 무지무지하게 하고, 그렇 습니다. 어쩌다 우리는 이 모양이 되었습니까 이제는 웬만한 자극이나 충격 을 주지 않으면 사람들이 꿈적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양극화나 극단론이 생겨납니다. 대화와 타협을 거부하고 극단적으로 나아가야만 무엇이 되도 되 니까요! 그러니까 지금 우리 사회는 한쪽으로만 치우치고, 한편으로만 몰아 부칩니다. 이런 편중된 일들을 바로 잡으려면 한번쯤 뒤집는 일이 필요합니 다. ' 뒤집는다'는 것은 혁명이나 의거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 의 관점과 시야를 설익은 쪽으로 돌리자는 것입니다. 골고루 익히고 균형을 유지하고 관점을 바꾸자는 말입니다. 새로운 생각을 가져 보자는 말입니다.

그러기 위하여는 뒤집어야 합니다. 떡은 떡인데 이것을 뒤집지 않은데 문제 가 있습니다.

뒤집는다는 것은 실제적인 회개를 의미합니다. 가치관의 전도입니다. 새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설익어 서걱서걱 소리가 나고 먹을 수 없 게 된 것은 골고루 익히자는 것입니다. 우리 개개인의 신앙도 한번 뒤집어져 야 하고, 사회와 국가도 구태의연한 당쟁이나 오랜 타성으로 움직이는, 그런 판에 박힌 쇼 같은 것은 이제 모두 집어치우고 새롭게 되어야 합니다. 한쪽 은 너무 익어 꺼멓게 타고 있는데 한쪽은 설익어 그대로 있는 것, 그래서 결 국 이쪽도 저쪽도 다 못쓰게 되는 것은 낭비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우리는 언제까지 쓸모없는 낭비를 계속해야 하겠습니까 뒤집어지지 않 으면 생산적인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잘 구워진 전병이 되려면 반드시 뒤집 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뒤집어 진다는 것은 꼭 한번만 필요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신앙도 꼭 한번 뒤집어지는 것이 필요합니다. 철저한 율법주의 를 고수하던 사울이 뒤집어질 때에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복음주의자 가 되었습니다.

그가 또다시 뒤집어 질 필요는 없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는 복음으로 구 원 받은 것을 아는 교회였습니다. 복음이 죄와 율법에서 자기들을 해방한 것 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이미 뒤집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뒤집혀진 그들 이 또 다시 뒤집어져야 한다고 했을 때에 그들은 심각한 이단에 빠졌습니다.

뒤집어지는 것의 목적은 구원을 얻는데 있습니다. 구원 얻지 못한 자가 뒤집 어지므로 구원을 얻게 됩니다. 구원은 예수를 믿고 시인하는 데서 성취됩니 다. 우리는 진정으로 예수를 믿는 일로써 뒤집어져야 합니다. 뒤집어지는 것 은 예수로 인하여 나의 인생관과 가치관이 전도됨을 의미합니다. 다만 예수 님으로 인하여 뒤집어지는 경험이 필요한 것이지 그 밖에 다른 경험은 필요 없는 것입니다.

뒤집어져야 한다고 해서 다시 또 뒤집어지고 또 뒤집어지면 열광주의자 가 되거나 갈라디아 교인인들처럼 율법으로 되돌아 가는 복귀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일단 뒤집은 전병은 아직 익지 않은 부분을 천천히 시간을 기다리면서 깊숙히 익혀야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천천히 익혀 나가는 것 그리고 시간을 두고 골고루 익게 하는 일입니다.

오늘 우리의 문제는 '얼마나 뜨거우냐' 라는 문제보다는 '얼마나 고루 균 형있게 익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만하면 뜨거운 것은 충분합니다. 우리는 과열도 잘하고 흥분도 잘 합니다. 지금 우리 사회 어디를 가 보아도 뜨겁지 않은 데가 없는 것같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뜨겁고 그렇게 열기가 대단한데 우리 자신은 어째서 완숙하지 못합니까 어째서 아직도 덜 익었습니까 어 째서 먹을 수 없는 떡으로 남아 있습니까 그것은 뜨겁지 않아서가 아니고 아직도 내가 내 자신을 뒤집어 엎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한쪽은 너무 뜨거워 타버렸고 한쪽은 아직도 익지 않은 상태 그대로입니다.

하나님은 이 뒤집지 아니한 전병을 책망하시고 탄식하십니다. 그것은 먹 을 수 없는 떡입니다. 우리는 나 자신을 뒤집어 엎고 그리고 조용히 익을 때 를 기다립시다. 우리의 삶의 내면 깊숙히 열기가 스며들게 하고 그리고 골고 루 잘 익어 맛있고 볼품있게 구워진 전병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 아직도 '뒤집지 않은 전병'이라고 책망듣지 말고 신앙과 은혜가 깊이 더 깊 이 스며든 원숙한 신앙인들이 다 되시기를 권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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