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거짓 선생들의 욕망들 (벧후 02:10-16)

첨부 1


교회가 자라면 마귀와 그의 추종 세력들도 증가됩니다. 마귀가 바라는 것은 주님의 모든 사역을 파괴시키는 것입니다. 동시에 마귀는 신자들의 성장을 방해하고, 버림받은 영혼들을 구하는 전도 사역을 막으려고 애씁니다. 이같은 훼방을 위해 마귀가 사용하는 방법 중 하나가 거짓 선생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 침투시키는 것입니다.

거짓 선생들의 교만
거짓 선생들은 천사들까지도 무시합니다. 천사들은 천상적 존재로서 하나님의 심부름꾼들입니다. 그들은 주님을 크게 섬기는 자들입니다. “천사들은 우리들이 상상할 수 있는 일체의 봉사를 주님께 올린다. 그들은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우리 가운데 주님의 뜻을 행한다. 즉 우리들을 경고하고, 보호하며, 돕고, 구해 주는 일들이다. 이 초자연적인 존재들은 사람이 사람에게 제공하는 종류의 봉사를 하지 않는다. 그들의 봉사는 하늘에서 지상으로 향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보좌에서 근원된 사역이다” ( 찰스 수윈들).
거짓 선생들은 자고 심에 가득 차서 “영광 있는 자를 훼방”(2:10)하는 일도 서슴치 않습니다. ‘영광 있는 자들’은 천상적인 존재들로서 하나님의 종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짓 선생들은 항상 자기들이 옳다고 으스댑니다. 그들은 아마 천상적인 존재들을 믿지 않기 때문에 천사들에 대해 악담을 하는지도 모릅니다. 베드로가 언급하는 거짓 선생들은 대담하고 교만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듯합니다. 한편, 천사들은 거짓 선생들보다도 훨씬 강하고 능력이 크지만, 그들의 중상 모략이나 악담을 하나님 앞에서 맞받아 치지 않습니다. 천사들은 거짓 교사들처럼 그리스도의 주인 되심을 우습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너무도 경외하기 때문에 비록 거짓 선생들이 듣기에 마땅한 말일지라도 그분 앞에서는 삼갑니다.
거짓 선생들의 또 다른 특징은 “이성 없는 짐승”(2:12)과 같습니다. 그들은 “허탈한 자랑의 말을 토하며”(2:18) 깨닫지 못하는 문제들을 가지고 불경스럽게 지껄입니다. 그들은 소위 말하는 지식인들처럼 길고 복잡한 문구와 난해한 개념들을 사용하기를 좋아하며, 학위를 자랑하고, 모든 것을 다 아는 듯이 거만을 피우며 말합니다. 그들은 잘난 모습을 보이고 싶어하며 똑똑한 사람으로 인정받기를 원하지만 사실은 자기들이 하는 말이 무엇인지 조차 모르는 자들입니다.
베드로는 왜 거짓 선생들이 야수와 같다고 하였을까요 동물들은 본능적으로 알고 그대로 행할 뿐입니다. 동물은 인간의 여러 감정이나 본성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불신자들은 성령의 일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또한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고전2:14). “잡혀 죽기 위하여 난”(3:12) 짐승들처럼 거짓 선생들의 운명도 멸망입니다. 그들은 많은 사람들을 거짓과 죄악의 길로 이끌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자기들의 죄를 받아 “불의의 값으로 불의를 당”할 것입니다(2:13).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오직 죽음뿐입니다.

거짓 선생들의 연락
“낮에 연락(宴樂)을 기쁘게 여기는 자들이니”(2:13). 거짓 선생들은 세상 재미를 한껏 누리면서 교회 봉사()를 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밤에 마시고 노는 것도 부족해서 대낮에도 흥청거리면서 삽니다. 사도 바울은 비그리스도인들의 수준을 언급하면서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한다고 말하였습니다.(살전5:7); 비교, 행2:15). 그런데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며 말씀을 가르친다는 사역자들 중에 이런 세상 사람들보다 더 저급한 수준으로 사는 사이비 인간들이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개탄할 일입니다. 거짓된 가르침의 대가로 받은 인기와 돈을 밤낮을 가리지 않고 쓰며 즐기는 사이비 목회자들은 현대 교회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 거짓 선생들이 “너희와 함께 연회할 때에 저희 간사한 가운데 연락”(2:13)한다고 지적합니다. 그들은 교회에서 무슨 잔치를 열거나 기타 행사와 관련된 파티가 있으면 빠지지 않고 참석하여 단단히 잇속을 차리고 가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마치 고린도 교인들이 주의 성찬을 진탕 먹고 마시는 계기로 삼은 것처럼 처신한 듯합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준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고전11:22) 베드로후서에 나오는 거짓 선생들도 성찬을 한낱 배나 잔뜩 채우고 취하도록 마시면서 떠들고 노는 기회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들의 술취함과 먹자판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수치를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교회의 “점과 흠”이었습니다. 이 거짓 선생들은 “흠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벧전1:19)의 성품과는 정반대였습니다. 교회는 주님이 모습을 닮아야 합니다.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엡5:27).
거짓 선생들은 실컷 마시고 마음껏 음란을 행하려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성도들에게 말씀으로 신령한 축복과 물질적인 이득과 정신적인 위안을 가져다주는 하나님의 종들이라고 속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내심에는 돈과 섹스와 방탕이 가장 중요한 사역의 목적으로 숨겨져 있습니다. 2천 년 간의 교회사를 얼룩지게 한 수많은 사이비 선생들과 거짓된 기독교 집단들은 차지하고라도 현대 교회를 멍들게 하고 유약한 교인들의 헌금과 심신(心身)을 앗아가는 못된 부흥사들과 양의 가죽을 입은 사이비 목회자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베드로는 이러한 거짓 선생들이 “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2:14)있다고 밝혔습니다. 이들은 자기들의 욕정을 만족시킬 수 있는 여성도들을 항상 찾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마5:28)한 자라고 하였습니다. 거짓 교사들은 음욕을 품고 여성도들을 바라볼 뿐만 아니라 실제로 음행을 저지르고도 태연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소유할 권리가 없는 것을 차지하고서도 회개하지 않고 더욱 더 볼의의 관계를 찾아 사방을 탐색합니다.
우리들도 동일한 덫에 걸릴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육체적인 간음을 저지르지 않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영적 간음을 행할 위험은 언제나 상존 합니다. 우리는 정규적인 교회 예배에 싫증을 내고 보다 향응적이고 자극적인 영적 체험들을 찾아다닐 수 있습니다. 신약에서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길’(道)이라고 자주 언급합니다. 우리들이 진리의 길에서 멀어지면 “바른 길”(2:150에서 벗어나 그만큼 사악한 자극을 즐기게 되고 의의 길로 되돌아가기가 더욱 어려워집니다.
거짓 선생들은 “굳세지 못한 영혼들을 유혹”(2:14)합니다. 그들은 정복하는 만큼 더 차지하기를 원합니다. 굳세지 못한 사람들은 쉽사리 유혹에 넘어갑니다. 그래서 교회의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끊임없이 회중들에게 잘 가르치는 일을 첫째로 삼아야 합니다. 특히 초신자들에게 기독교의 기본 진리들을 철저히 습득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 지도자들이 이 일에 신경을 덜 쓰면, 믿음의 뿌리가 제대로 내려지지 않은 상태에 있는 초신자들은 큰 유혹과 갈등을 겪을 때에 시험에 빠지기 마련입니다. 성도들도 각자가 성경의 진리를 올바르게 터득하면서 성숙한 교인들로 자라도록 힘써야 합니다. 그래야만 악한 행실과 거짓된 가르침의 유혹이 와도 걸려 넘어지는 불상사가 생기지 않습니다. 알렉산더 니스벳(Alexander Nisbet)은 3백 년 전에 그의 주석에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분명한 가르침에 의한 성경 지식과 진리에 대한 정규적인 묵상과 은혜에 의해 심경이 강건해지는 일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자들은 쉽사리 영혼을 속이는 자들의 먹이가 될 것이다.”
거짓 선생들은 또한 탐욕의 많습니다. 탐욕은 20세기 후반의 가장 큰 질병 가운데 하나입니다. 사람들은 돈과 권력과 재산들을 더 가질수록 더 많은 것들을 원합니다. 제롬(Jerome)은 탐욕의 성격을 명확하게 지적하였습니다. “다른 악덕들은 사람이 늙어짐에 따라 함께 쇠퇴해 간다. 그러나 탐욕만은 더 젊어진다.” 베드로는 거짓 선생들이 “택하신 족속”(벧전2:9)이 아니라 “자주의 자식”들이라고 하였습니다.
끝으로 베드로는 민수기 22:24장의 실례를 듭니다. 발람은 자신이 이스라엘의 백성들에게 축복의 메시지를 전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던 선지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방의 모압 왕 발락이 주는 거듭된 요청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는 큰 돈을 약속 받고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시도하였습니다. 하지만 그가 입을 뗄 때마다 저주 대신 축복의 말이 나왔습니다. 한번은 발람이 발락 왕에게 가려고 나귀를 타고 길을 떠났습니다. 그랬더니 나귀가 입을 열어 그에게 가서는 안된다고 경고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이 사건을 놓고 발람이 사악한 길을 좋아했기 때문에 그의 나귀가 주인에게 창피를 주었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종들이라는 자들이 돈이나 명예에 눈이 어두워져서 진리에서 이탈되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인지 모릅니다. 목회자로 신령한 부름을 받은 자들이 성경의 진리를 부지런히 배우고 실천하면서 성도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기보다는 세속 사람들처럼 소유욕에 관심이 쏠려 더 큰 교회와 더 높은 보수와 더 많은 인기를 위해 동분서주하는 모습을 보는 것처럼 애통한 일도 없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역자들이 목회를 하나의 직업으로 여기고 주일을 적당히 대우면서 안일한 삶과 은퇴 후의 생활 보장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지 모릅니다. 발람의 탈선은 특정 인물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닙니다. 발락 왕의 유혹은 지금도 적지 않은 사역자들로 하여금 넘어지게 하고 진리의 길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적용
우리들은 날마다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면서 삽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활동들이 하나님 앞에서 행해진다는 사실을 얼마나 의식하고 있을까요 만일 우리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보다 깊이 의식한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겸손과 사랑의 자세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들은 낮과 밤을 어떻게 보내고 있습니까 혹시 무분별한 유흥이나 무익한 시간 낭비나 과도한 음주로 짐승처럼 처신하지는 않습니까
우리들이 욕정을 제어하면서 살고 있는지도 확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현대사회의 매스컴은 인간의 욕망과 욕정을 자극하는 갖가지 선정적인 프로그램과 선전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사단은 우리들의 약점을 이용하여 곁길로 빠지게 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들은 사악한 길을 따르기를 좋아하지는 않는지요 돈은 인간의 마음을 끄는 강력한 견인력을 갖고 있습니다. 바울의 경고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딤전6: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 돈 때문에 한때 굳건한 믿음 생활을 하던 교인들이 영적으로 하락해 버린 실례들은 우리 주변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인간이나 혹은 마귀의 속삭임을 주님의 분명한 분부보다 더 잘 경청하는 일이 미친 짓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습니까 주의 사자가 발람의 그릇된 길을 막기 위해 “좁은 곳에”(민22:26) 서 있었듯이, 예수님도 우리들에게 정로를 택하라고 권고하십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7:14).
우리들은 지금 혹시 넓은 길에 들어서 있지는 않은지 재삼 살펴보아야 합니다. 넓은 길은 결국 멸망으로 치닫습니다. 좁은 길은 비록 불편할지는 몰라도 영생에 이르는 정로입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