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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생의 위기를 만날 때 (사 3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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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역자 모임 때 전방에 땅굴을 보러 가면서 지뢰가 폭발하여 아까운 젊은이 몇명이 생명을 잃은 장소를 보았습니다. 안내하셨던 분에게서 지뢰 위험지역을 들어가지 못하도록 철조망 공사를 하다가 지뢰를 건드려서 폭발하였다고 하는 상황 설명을 들었습니다.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안타깝고 기가 막히는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누구도 예견 못한 너무나도 돌발적인 사건이 모두를 망연자실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들이 모두에게 가능하기 때문에 아무도 자신의 삶을 장담 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삶은 위기(危機)의 연속이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옳은 말입니다. 더우기 오늘과 같은 도시화가 되어버린 사회에서는 하루에도 얼마나 많은 사고와 사건이 일어나는지 모릅니다. 눈을 떠 조간신문을 펼쳐 보는 순간, 간밤에 일어난 범죄 사건과 '사람으로서 이럴 수가 있을까' 하리 만치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거의 불감증에 걸릴 만큼 둔감해진 교통사고는 이루 헤아릴 수 없으리만큼 매일 일어나는 사고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재난과 사고를 대할 때, 언제 어디서 그러한 일이 내게도 당할 수 있을 것인지 아무도 모르는 상태에서 살아갑니다.그러기에 우리의 삶의 밑바탕은 항상 위기 속에서 살아간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제까지 멀쩡하던 사람이 하룻밤 사이에 병원으로 실려 가고, 아침까지도 건강하게 출근했던 사람이 저녁에 시체로 돌아오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이 우리의 삶이란 말입니다. 이것은 비단 건강의 문제에서만이 아닙니다. 갑자기 닥친 경제적인 위기나, 직장을 잃어버리게 되는 경우나, 우리 젊은이들에게는 실연을 당하는 일 등등...참으로 우리의 삶은 온통 위기로 둘려 싸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영국의 시인 죤 키츠(John Keats)는 '현대는 비극과 함께 살기를 배워야 하는 시대'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가만히 음미해 보면 비극은 누구에게나 어떤 곳에서나 피할 수 없는 것이란 뜻일 것입니다. 인생의 어느 계층에 속하는 사람이거나, 어떤 종류의 직업을 가진 사람이거나, 생의 위기는 항상 따르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현대의 특징은 <불안>이라는 두 글자로 잘 나타낼 수 있다고 봅니다.
이렇게 예기치 않았던 생의 위기를 만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떻게 합니까 태산이 묻어지는 것 같다고 합니다. 눈앞이 캄캄해 지는 것 같다고 합니다. 즉 절망과 실의에 빠진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울고불고 야단법석을 피거나 아니면 술을 마시고 취해 버리려고 하거나, 아니면 자포자기로 자살을 기도하는 길을 택합니다.
만일 우리들이 생의 위기를 그런 식으로만 대한다면, 인생이 너무나 허무하고, 산다는 것이 너무나 싫어질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 주변을 가만히 살펴보면, 이렇게 삶의 위기 앞에서 좌절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도리어 그런 위기를 통하여 완전히 새로운 길을 발견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의 말씀 중 히스기야 왕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히스기야는 유다 왕이었습니다. 고대 시대의 왕이란 삼권을 혼자 장악하고 있는 절대 군주 였습니다. 왕의 말이 곧 법이었고, 왕은 하늘이 낸 사람이라고 그렇게 믿고 있던 시대 였습니다. 히스기야 왕은 유다의 많은 왕들 중에서도 가장 선량한 왕이었습니다. 그는 국방을 튼튼히 했고, 경제를 부흥시켜 국위를 높인 왕이었을 뿐 아니라, 널리 외교술에도 능하여 많은 이웃의 왕들에게 까지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더우기 그는 하나님께 대한 신실한 신앙심을 가진 왕으로서 당시의 잘못되어 가던 종교를 개혁하여 백성들로 올바른 예배를 드리도록 한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생의 위기가 닥쳤습니다.
그의 나이 38세 때,궁중에 예언자인 이사야가 그에게 찾아와 말하기를 "당신은 곧 죽게 될 터인즉 가족에게 유언하라"고 하는 청천 벽력같은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히스기야에게 죽음이라는 심각한 위기가 닥쳐왔습니다. 보통 왕 같았으면 자기에게 이렇게 예언하는 선지자를 잡아죽이거나, 옥에 처넣을 수 있었겠지만, 히스기야는 그 말을 그대로 받아 드렸습니다. 이것부터가 일반 왕들과 다른 면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도 인간인고로, 죽음이 예고되었을 때, 어찌 태연할 수만 있었겠습니까 성경에 기록을 보면,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주의 앞에서 진실과 전심으로 행하며 주의 목전에서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하고 심히 통곡하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히스기야의 이러한 기도를 들으시고 결국 그의 생을 15년간 더 연장시켜 주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히스기야왕을 통하여 생의 위기를 만날 때,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를 신앙적 차원에서 몇 가지 교훈을 찾게 됩니다.

1. 히스기야 왕처럼 우리도 위기 앞에서 좌절하거나, 낙심하거나, 자포자기하거나, 울분을 못 이겨 폭언과 자학의 행위를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향하여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왕의 신분이었지만,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했다거나, 주먹질했다거나, 다른 사람에게 행패를 부렸다거나, 하는 일이 전혀 없습니다. 그는 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하였다고 했습니다. 참으로 이점이 위대한 것입니다. 이점을 우리가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대부분의 경우에 보면, 하나님께 먼저 원망이 나갑니다. 어찌하여 내게 이런 시련과 이런 억울한 일을 주십니까 라고...히스기야 왕은 역대의 다른 왕들에 비하여 월등히 선한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그에게 죽음을 예고했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그래서 히스기야 자신도 "내가 주의 앞에서 진실과 전심으로 행하며 주의 목전에서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해 달라"고 한 것을 보면 그는 분명히 무슨 죄로 인한 죽음의 예고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인지라 죽음은 일단 공포의 대상입니다. 더더욱 그의 나이 38세라면 한창 살아서 활동할 수 있는 나이 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죽어야 한다니...얼마나 상심할 수 있는 일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스기야는 하나님께 향하여 원망하거나, 주먹질하지 아니하고, 기도하였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찾을 수 있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재난과 사고와 병은 잘못했어서만 당하는 것이 아니란 점입니다. 즉 죄의 값으로 당하는 일만이 아니란 것입니다. 흔히 우리들은 누가 재난을 당하거나, 사고를 당하는 것을 보면, 속으로 무슨 죗값으로 그런 일을 당하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고, 또 그렇게 입빠른 소리를 할 수 있는 경우들을 봅니다.
히스기야는 자신의 행위를 돌아볼 때, 하나님께 죽을 죄를 지은 것이 없다고 스스로 말하는 것을 볼 때, 그렇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진실히 행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전심으로 행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즉 부끄러운 일을 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왜 죽음이라는 위기 앞에 서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만이 아시는 일이지 사람이 이러쿵저러쿵 얘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2. 히스기야왕은 생의 위기를 만날 때, 그것을 하나님을 만나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귀감이 되는 교훈입니다. 그는 자신의 위기를 하나님과 함께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벽을 향하여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벽을 향하였다>는 것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오로지 하나님과만 해결하려는 결연한 의지를 말합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생의 위기를 만날 때, 사람 찾아 나서고, 돈줄 찾아 나서고, 권력 찾아 나섭니다. 빽 찾아 나선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무슨 힘이 있습니까 정작 죽음 앞에서 사람은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속수 무책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자기 목회 경험을 얘기하면서 했던 사건입니다.
의사도 병이 드니 동료 의사들이 그렇게 살려 보려고 했는데도 죽는 것을 보았습니다. 지금도 저의 목회 경험 속에 생생하게 떠오르는 것은 서울 대학을 졸업하고 그렇게 힘든 전문의를 따서 바로 방배동에 있는 모병원에 외과 과장으로 한창 일하던 의사인데 갑자기 백혈구가 없어지는 그런 병에 걸려 동료 의사들이 그렇게 노력했건만 죽었을 때, 어느 친구 의사가 그의 시체 앞에서 주먹을 치면서 울며 하던 말; "의사면 무얼 하냐 친구 하나도 살려내지 못하는 의사"라고 자책하면서 울던 그런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생의 위기 앞에, 인생은 너무나 무능한 존재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히스기야 처럼 사람 의지하려는 것보다, 하나님께 향하는 눈이 열려져야 하겠습니다. 생의 위기 중에 하나님을 만나는 기회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우리 중에 혹시 생의 위기를 만난 분들이 계십니까 그 위기가 건강이건, 경제적인 문제이건, 아니면 가정의 불화이건, 아니면 실직이거나, 아니면 실패이거나, 아니면 실연이거나, 아니면 배신이거나, 아니면 사별이거나, 그 어떤 것이라 해도, 하나님을 만나는 기회로 삼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사랑하는 자녀들을 그 환난 가운데서 만나기를 원하고 있는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시편 50:15절에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생의 위기와 환난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입니다.
역사의 수많은 인물들을 보면, 모두 자신의 생의 위기에서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맑은 하늘에만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비오고, 바람 불고,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그런 곳에서도 계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성공하고, 출세하고, 탄탄대로로 향하고 있을 때만 나와 함께 하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병상에서 나와 함께 하시고, 실패하고 눈물지을 때 더우기 가까이 계시고, 험산준령 속에서 방황할 때 나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입니다.

3. 히스기야왕은 구원을 받은 후 하나님 중심의 삶을 결단했습니다.
오늘 본문17절에 보면 "보옵소서 내게 큰 고통을 더하신 것은 내게 평안을 주려 하심이라 주께서 나의 영혼을 사랑 하사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셨고,나의 모든 죄는 주의 등뒤에 던지셨나이다"라고 감격해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러한 사랑을 깨달은 그는 "내가 종신토록 여호와의 전에서 수금으로 나의 노래를 노래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한 그는 자신의 남은 평생의 삶을 오직 하나님을 찬양하며 살겠다는 그런 뜻입니다. <종신토록 여호와의 전에서 수금으로 나의 노래를 노래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교회에서 죽도록 충성하겠다는 그런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배워야 할 또 다른 큰 교훈은 응답 받은 후 어떻게 살 것인가 를 명백히 해야 하겠다는 말입니다.
대부분 급할 때는 하나님 찾고, 문제가 해결되면 또 하나님을 멀리하는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병들었을 때는 병을 고쳐 달라고 매달리지만, 고쳐 주면 어떻게 하겠다는 목적이 없습니다. 경제적으로 실패했을 때 이번만 한번 보아주면, 내가 하나님 앞에 감사 생활하겠다고 해 놓고도 정작 돈벌게 되면 좀더 벌면 십일조도 하고, 교회 봉사도 하겠다고 그러는 것이 우리들이 아닌지 깊이 반성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이제 결론적으로 다시 생각해야 할 것은 우리에게 생의 위기는 언제나,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문제입니다. 그럴 때, 그런 생의 위기를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거기에 오늘도 살아 계신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과 함게 하는 영원한 사랑이 깃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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