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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오순절 날 부흥 운동의 특징 (행 0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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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순절 날 성령이 강림한 사건은 하나님의 사역에 있어서 대단히 큰 의미가 있는 사건입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오늘의 교회가 탄생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성령 강림은 역사적으로 큰 획을 긋는 사건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가 새롭게 시작되는 날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제자들은 심각한 문제가 생겼습니다. 예수님이 정치적인 왕이 되어 이스라엘을 로마의 손에서 구원할 것이 라고 하는 기대를 갖고 있었는데 결국 그와 반대로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되었고 그 후 3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제자들에게 큰 희망을 주었지만 며칠이 못되어 승천하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실망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을 따라 모여서 열심히 기도하므로 열흘 만에 약속하신 성령을 보내 주셨던 것입니다.
그 성령이 강림하신 날이 바로 오순절입니다.
오순절이란 말은 헬라어 “펜테코스테”란 말인데 그 뜻은 부활 주일 후 50일째 되는 날이란 뜻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첫곡식을 거두는 날이라고 해서 ‘초실절’, ‘맥추절’이라고도 했고 ‘칠칠절’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신약 시대에 와서는 오순절 날 성령께서 강림하셨다고 하여 성령 강림절이라고 부르며 오늘날 모든 교회가 대축제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국가의 생일인 개천절이 있고, 학교의 생일인 개교기념일이 있듯이 성령께서 강림하심으로 주님의 몸된 교회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성령 강림절은 우리 교회의 생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어보면 각 시대마다 부흥 운동이 일어나서 병든 사회를 고치기도 하고 나태해진 신앙을 열심을 내는 신앙으로 변화시키기도 하여 그 당시 하나님의 백성들의 본분을 다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사무엘 선지자에 의하여 일어난 ‘미스바 부흥 운동’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과 점점 멀어지고 우상을 섬기는 백성으로 전락해 버릴 때 하나님의 진노가 두려워진 사무엘은 기도하며 생각다 못하여 미스바 광장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으게 하고 민족적인 집회를 열어 한달 동안이나 부흥 성회를 열었습니다. 이 때 지도자로부터 모든 백성들이 금식을 하면서 통회자 복을 하면서 기도할 때 민족의 각성 운동이 일어나고 아스다롯 신상을 버리고 하나님 앞에 두 손 들고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또 하나는 엘리야 선지자를 통해서 일어난 ‘갈멜 산 부흥 운동’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등지고 영안이 흐려져 하나님이 참 신인지 바알이 참 신인지 분간하지 못할 때 엘리야를 통하여 갈멜 산 제단에 성령의 불을 내려주심으로 3년 6개월 만에 하늘이 열리고 비가 내려 하나님의 신이 참 신인 것을 보여주어 바알 신을 승리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기록된 대로 오순절 날 일어났던 부흥 운동 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사도들과 120여명의 성도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앉아 약속하신 성령을 받겠다고 “주여 믿습니다. 성령을 보내주실 줄 믿습니다.” 열심으로 기도할 때에 약속하신 대로 성령의 불이 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순절 날의 부흥 운동은 몇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1.먼저, 바람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본문 2절에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같은 소리가 있어”했습니다.
이 말씀은 바람 같은 성령이 임했다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성령의 바람이 무더운 여름철 같은 답답한 우리 가정에 불어와야 훈훈한 사회, 살 맛 나는 사회가 될 수 있고, 냉랭한 우리 교회에 불어와야 서로 사랑하는 교회, 부흥 성장하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을 향하여 갈 때 엄청난 시련이 닥쳐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 앞에 이르게 되자 바로 왕은 애굽 군대를 동원시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추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혀 있고 뒤에는 무장을 한 애굽 군대가 병거를 타고 쫓아옵니다. 이러한 절망 속에서 어찌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진퇴양난의 위기에서 모세는 하나님께 부르짖고 기도할 때 손에 있는 지팡이를 들어 홍해를 가르라 하므로 그대로 했더니 그 큰 바다가 쫘악 갈라진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모세가 기도하고 지팡이를 바닷물에 대었더니 어디에서 일어난 줄도 모르는 난데없는 동풍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강한 동풍이 불더니 홍해가 양쪽으로 갈라지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런 능력의 바람이 오늘 우리에게도 불어야 될 줄 믿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무사히 건너 광야에서 살 때, 고기가 먹고 싶다고 아우성을 치며 하나님을 원망하고 애굽을 그리워할 때, 모세는 하나님께 “하나님이시여 어찌하시렵니까” 하면서 기도 했더니 그때에도 바람이 갑자기 불더니만 그 바람과 함께 메추라기 떼를 보내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고기를 실컷 먹이셨습니다. 이러한 축복의 메추라기 떼들이 성령 강림절을 맞이하여 성령의 바람을 타고 우리 교회뿐만 아니라 광야 같은 세상을 살고 있는 우리 가정에도 날아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얼마전 어느 일간지에, 어느 지방에서 춤바람 때문에 무단 가출한 가정주부들이 점점 증가하여 사회적인 문제로 지적이 되고 있다는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가정을 지켜야 할 가정주부들이 가정을 지키지 못하고 집을 뛰쳐나왔다는 소식을 들을 때 얼마나 부끄럽고 한심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바람 중에는 이렇게 가정을 파탄하는 춤바람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나쁜 바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 시간 우리들은 성령의 훈훈한 봄바람을 일으켜야 하겠습니다. 성령의 바람은 좋은 바람이요, 성령의 바람은 교회나 나 자신이나 우리 가정이 축복을 받을 바람입니다.
우리에게 성령의 바람이 급하고 강하게 불어올 때 우리 교만도 넘어질 것이요, 막혔던 것도 뚫어지게 되고, 기도의 문도 열리고, 얼어붙었던 것도 녹아지고, 생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바람이 불어오면 우리의 가치관이 변화되어 주님의 일을 절대로 등한시 할 수 없습니다. 성령의 바람이 불어오면 교회에서 받은 직분이나 맡겨진 사명을 감당하는 것을 우습게 여기고 귀찮게 여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바람을 우리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강한 바람이 불어오면 나무가 흔들리고 뿌리째 뽑힐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가진 것 같이 성령도 우리 육신의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이처럼 우리 믿는 성도들을 향해 바람 같은 큰 힘으로 역사한 것입니다. 태풍이 얼마나 큰힘을 소유하고 있습니까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은 성령의 바람을 일으키는 운동을 펼쳐 나감으로 우리 앞에 쌓여 있는 산적한 모든 문제를 하나하나 해결해 나가는 위대한 하나님의 일군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오순절 날 부흥 운동은 불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3절을 보세요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들 위에 임하여 있더니”
여기 불의 혀는 성령의 임재를 묘사한 말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불이 타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말입니다.
커다란 불덩어리 같은 것이 불의 혀같이 나타나서 각 사람들의 머리 위에 임했습니다. 이것은 약속된 주의 성령이 각 사람 위에 임했다는 사실로 요엘 선지자의 예언과 예수님의 약속이 구체적으로 성취되었음을 보여준 것입니다.
열심히 기도하고 있던 성도들에게 성령의 불이 떨어지게 되니까 모든 사람의 악한 성품과 교만하던 마음과 의심하던 불신앙까지도 전부 녹여 버리고 담대한 새로운 사람이 되어졌습니다. 이렇게 성령의 불이 떨어지게 되면 악한 사람이 악한 성품을 그대로 가지고 있을 수 없습니다. 악한 성품이 변하여 부드럽고 온유한 성품으로 변화합니다. 교만하던 성품이 겸손한 성품으로 변화되고 의심하던 성품이 확신에 찬 믿음으로 변합니다.
아직까지 우리들 가운데 신앙생활을 오랫동안 했는데도 악한 성품이 그대로 있다면 그것은 성령의 불을 받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아직까지도 교만한 마음, 의심스런 마음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면 성령의 불을 받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성령 강림절을 맞이하여 성령의 뜨거운 불을 받고 악한 성품이 변하여 부드러운 성품, 온유하고 겸손한 성품으로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 한국 교회 부흥사 가운데 김익두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이 분은 황해도 안악이란 곳에서 태어나 젊었을 때는 예수님도 믿지않고, 시골 장날이 돌아오면 술을 먹고 아무런 잘못도 없는 사람들을 붙잡고, 돈을 뜯어내고, 때리고, 폭력을 하는 깡패 두목이었다고 합니다. 그 당시 경찰들까지도 김익두 하면 혀를 내두를 정도로 싫어하는 사람, 문제의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소안론 선교사에게 전도를 받고 설교 말씀을 듣는 중에 그의 마음이 변화되어 하나님의 말씀에 굴복을 하고 엎드려 회개를 하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세례를 받고 전도인이 되고 신학교를 들어가 공부를 하여 평양 신학교 제 3회 졸업생이 되고 목사가 되어 장로회 제 9회 총회장이 되기도 했고 가는 곳마다 부흥회를 인도하여 28만명에게 전도를 하고 150개 교회를 세웠다고 합니다.
안악산골의 깡패 김익두가 어떻게 이러한 위대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의 마음이 변회를 받아 하나님 말씀에 굴복하고 엎드려 회개하고 새사람으로 변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오순절 날 120여명의 성도들이 받은 성령의 뜨거운 불을 받았기 때문에, 과거에 저지른 모든 죄악의 생활을 청산하고 악한 성품, 나쁜 습관을 성령의 뜨거운 불로 녹여버렸기 때문에 이렇게 하나님의 교회를 위하여 위대한 사역을 감당했을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는 과거가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과거를 물을 필요도 없습니다. 또한 세상의 어떤 위대한 업적을 남기고 과거에 수많은 학문을 배웠다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성령의 불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뜨거운 불을 받아야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고 성령의 뜨거운 불을 받아야 능력 있는 주의 종이 될 수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일찍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선지자였지만 입술이 깨끗지 못했으며 부정한 입술을 가지고 하나님의 소명의 길에서 피하려고 했던 무능한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부족한 사람입니다. 나는 재능도 없고, 학식도 없고, 권력도 없고, 말재간도 없는데 나 같은 것이 감히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사야는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성전에 올라가 열심으로 기도하다가 예수님의 불을 체험한 후에 부정한 입술이 깨끗하게 되었으며 무능한 사람이 능력 있는 사람으로 변화되어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명자가 되어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면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한 위대한 선지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3년씩이나 따라다녔던 제자들이었지만 막상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게 된 엄청난 시련을 이기지 못하여 모두가 도망을 가고 심지어 수제자 베드로는 닭 울기 전에 세 번씩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까지 했습니다. 그러기에 베드로는 마음을 돌이킨 후에 전설에 의하면 일생 동안 닭우는 소리만 들리면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번씩이나 부인한 베드로이지만 오순절 날 뜨거운 성령의 불을 받고 나더니 담대한 하나님의 종이 되었고 가는 곳마다 열심을 내어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는 종이 되었던 것입니다. 성령의 뜨거운 불을 받은 후에는 3천여명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여 그들을 일시에 회개하게 했습니다. 결국 베드로는 일평생 주의 말씀을 전하다가 거꾸로 십자가에 달려 순교까지 했던 것입니다. 신앙의 위대한 선조들은 성령의 뜨거운 불을 받은 결과로 이렇게 새사람으로 태어나 완전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추운 겨울철에 방을 따뜻하게 하는 연탄불도 어설프게 핀 연탄불이 사람들을 연탄 중독에 들게 하는 것입니다. 완전하게 훨훨 잘핀 연탄불은 사고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성령의 불을 받아도 설 받은 사람이 교만해지고 말을 많이 하고 교회의 가시 노릇을 하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성령의 불을 설 받았기 때문에 이러쿵저러쿵 하면서 시어머니 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생선을 구워도 그렇습니다. 한쪽은 익지 않으면 설익은 곳은 비린내가 나서 먹을 수가 없는 것같이 오늘날 어떤 신자는 이렇게 설익은 신자가 많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초대 교회 성도들과 같이 성령의 뜨거운 불을 받아 이왕 신앙생활을 할 바에는 뜨겁게 화끈하게 멋있는 신앙생활을 합시다.
화끈까지도 않고 차갑지도 않고 뜨뜻미지근하게 신앙생활을 하면 어떻게 되는 줄 아시지요 요한계시록 3:15-16을 보세요.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면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미지근하면 토해 버린다고 했습니다. 설익은 신앙생활을 해서는 안됩니다. 완숙한 생활을 해야지 어설픈 신앙을 소유하면 결국 주님께로부터 버림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제철 공장에는 커다란 용광로가 있습니다. 보통 쇠를 녹이는 그 용광로의 온도가 2800℃라고 합니다. 얼마나 놀라운 화력입니까 그래서 용광로 속으로 들어간 것은 금덩어리든 쇠붙이든 들어간 대로 뜨거운 물에 얼음을 녹듯 사르르 녹아 버립니다. 그런데 그 용광로 속으로 들어간 것을 하나하나 분석해 보면 온갖 망가진 쇳덩어리들이 다 들어갑니다.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것이지만 용광로 속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그냥 스스로 녹아져서 새로운 물건으로 만들어져서 완전히 옛모습을 찾아볼 수도 없고 새롭게 제품이 생산이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옛날 어떤 교회에 목사님이 새로 부임하여 오셨습니다. 그런데 이삿짐을 꾸려 오다가 놋으로 만든 귀한 놋요강이 깨어져 사용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삿짐을 다 정리한 후 깨어진 놋요강을 고물 장사에게 팔아 버릴 생각으로 마루 밑에 두었습니다. 며칠 후 그 교회 집사님이 사택을 방문하셨습니다. 이른 아침인지라 아침에 떠오르는 찬란한 햇살에 놋요강이 눈부실 정도로 반짝거리고 있었습니다.
“아니 목사님! 왜 이렇게 좋은 놋요강을 마루 구석에 두었습니까” 직공을 데리고 놋그릇을 만드시는 그 집사님은 놋요강을 눈여겨보고 목사님께 물었더니 목사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사를 오다가 깨어져 사용할 수 없어 고물 장사에게 팔아 버리려고 그곳에 두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그 집사님은 목사님에게 허락을 받고 깨어진 놋요강을 가지고 가서 공장에 가서 번쩍거리는 놋그릇 한 벌을 만들어 가지고 와서 “목사님! 밥그릇 하십시오.” 하고 선물을 했습니다. 목사님은 너무 좋아가지고 “어디서 이렇게 좋은 밥그릇을 가지고 오셨습니까” 그랬더니 그 집사님의 대답은 “며칠 전에 목사님 집 마루 밑에서 가지고 간 놋요강으로 만든 그릇입니다.”
이렇게 대답을 하더랍니다.
깨어지고 냄새나고 쭈그러지고 더러운 것이지만 이렇게 용광로 속에서 들어가기만 하면 새로운 그릇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저 어떤 쇠붙이가 되었던지 그 용광로 속으로만 들어가면 완전히 예모습은 찾아볼 수 없고 새롭게 변화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와 같이 오늘 우리들도 과거에 더럽고, 때묻고, 냄새나고, 추한 죄악을 마치 물을 마시듯 하면서 살아왔지만 성령의 뜨거운 불을 받고 성령의 용광로 속으로 한번 들어갔다가 나오기만 하면 완전히 우리들의 옛모습은 녹아져서 새로운 사람, 새로운 인격자, 완전히 변화된 거룩한 성도가 될 줄 믿습니다.
이 시간 과거에 저질렀던 음란한 죄, 도적질한 죄, 남을 멸시하고 시기한 죄, 그 밖에 말로 할 수 없는 죄가 있을지라도 하나님 앞에 깨끗이 회개하고 성령의 뜨거운 불을 받아 성령의 용광로 속으로 들어가 새롭게 변화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3.끝으로 오순절 날 부흥은 새술에 취한 역사가 있었습니다.
본문 13절을 보세요.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가로되 저희가 새술에 취하였다 하더라”
예수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을 옛사람이라고 한다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새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옛사람은 술을 먹고 살지만 새사람은 새술을 먹고 산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 새술이란 포도에서 자연히 흘러나온 즙이 발효된 것을 가리키는데 그 속에 취하게 하는 알코올 성분이 들어 있다고 합니다. 그 당시 예루살렘에 있던 사람들 가운데는 세상 술에 취하여 이성을 잃고 온갖 행동을 저질렀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성령을 받은 성도들을 새술에 취하였다고 비난을 하고 조롱을 하였던 것입니다.
우리 믿는 성도들은 옛사람처럼 술을 마시고 사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라고 하는 새술을 마시면서 그 누구도 부럽지 않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사람은 성령의 새술을 마시지 않고는 하루도 살아갈 수 없습니다. 오순절의 역사는 120성도들이 전부 성령의 새술에 취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성령의 새술에 취하지도 못하고 너무 말똥말똥하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너무나 좋은 말씀을 들었기 때문에 이제는 감각이 없습니다. 웬만한 말씀 가지고는 듣는 둥 마는 둥하고 있습니다. 너무나 많은 설교를 들었기 때문에 어떤 뜨거움이나 화끈함이 없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뜨겁게 임하고 있어도 정신이 말짱하고 있으니 취하지 않는 것이 병입니다. 아무런 감각이 없고 와 닿는 것이 없으니 병입니다. 그렇게 많은 성령의 새술을 먹었으면 성령에 취해 있는 것이 너무도 당연합니다.
소주나 양주 같은 술을 먹고는 잘 취하면서 성령의 새술에 취하지 못하고 말똥말똥하고 있는 것이 큰 병이란 말씀입니다. 요즘 세상 돌아가는 것을 한번 보세요. 춤을 추는 것이나 쇼를 하는 것이나 노래를 하는 것만 보아도 모두가 썩은 춤을 추고 썩은 노래를 부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들은 오순절과 같이 성령을 받아 성령의 새술에 취하여 신앙생활을 하여도 좀 취해서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정신이 말똥말똥하면 신앙생활을 바르게 할 수 없습니다.
때로는 술에 취한 사람처럼, 때로는 부족한 사람처럼, 때로는 미친 사람처럼, 온갖 열심을 내어 성령의 술에 흠뻑 취한 사람처럼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한나가 성전에 들어가 기도할 때에 엘리 제사장이 술에 취한 것으로 오해했던 것처럼 초대 교회 성도들은 성령의 새술에 흠뻑 취해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흠뻑 취해 있었습니다.
이런저런 체면을 차리다 보면 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찬송을 한 장 불러도 성령의 새술에 취하여 부를 때 역사가 일어나고 은혜가 됩니다. 기도할 때도 성령의 새술에 취하여 미친 사람처럼 온갖 정력을 다하면서 기도할 때 힘이 솟아나고 은혜가 넘친 기도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전도할 때도 성령의 새술에 취하여 전도 할 때 담대한 마음이 생겨서 복음을 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은 무엇인가에 취하고 싶은 충동을 가지고 있습니다. 술에 취하고 향락에 취하고 마약에 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에 취하면 결국 망하고 맙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5장 8절에 “술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세상술에 취하지 말고 성령의 새술에 취하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성령받은 초대 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에게 흠뻑 취해 버린 사람들입니다. 취할 바에는 성령의 새술을 마시고 흠뻑 취하여 은혜에 미치고, 말씀에 미치고, 교회에 미치고, 주님에게 미쳐서 살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성령의 새술을 마시고 취하여 살면 참된 평강을 얻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 성도님들은 성령 강림절을 맞이하여 오순절적인 교회 부흥의 역사를 계속 일으켜 여기에서 성령의 뜨거운 불로 녹아지고, 강한 성령의 바람을 일으킴으로 새힘을 얻고, 성령의 새술에 취하여 피곤함이나 곤비한 일이 없이 우리 생명 다할 때까지 힘차게 달려가는 신앙의 승리자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994년 5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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