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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참그리스도인과 참복음 (골 0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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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 산재한 종교들은 제각기 추구하는 가치들이 있습니다. 불교는 생노병사(生老病死)의 고뇌로부터 탈출을 추구하며, 유교는 인의예지(仁義禮智)를 추구하며, 이슬람교는 정복과 인간의 행복을 추구하는데,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을 추구하며, 또 희랍인들은 철학과 같은 지혜를 추구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영혼의 구원을 추구하며 그 실천적 덕목으로 믿음, 사랑, 소망을 중요시합니다. 이 세 가지 덕목은 어떠한 종교에서도 결코 찾아볼 수 없는 기독교 특유의 덕목입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1:3에서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에 대하여 감사하였던 바울은 골1:3에서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감사하노라’고 말하면서 골로새 교회가 믿음과 사랑과 소망을 가짐에 대하여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 감사는 바울에게서 기도를 수반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골로새 교회를 잘 알지도 못하고 또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그들을 위하는 마음으로 기도 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오늘날 기도 사역의 가치는 저하되고 있습니다. 기도는 설교나 전도나 선교처럼 눈에 드러나는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흔히 기도의 사역을 과소평가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기도는 겸손하고 은밀한 사역입니다. 그렇지만 가장 필요한 사역중의 하나입니다.
기도가 맺는 열매와 기도가 가져다 주는 승리는 얼마나 많겠습니까! 우리들에게 설사 다 알려지지 않았을 지 몰라도 기도의 결과로 성취되는 일들은 무수합니다. 물론 복음이 세상 끝까지 전파되는 것은 훌륭한 인물들의 메시지를 통해서입니다. 그러나 복음전파는 수없이 많은 겸비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올리는 기도의 덕분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골로새 교인들은 그들이 만나본 적이 없는 바울의 기도 사역에 빚을 진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면 왜 서로 얼굴을 대면하지도 않았는데 바울은 감사의 기도를 드렸을까요

첫째 믿음 때문입니다.

4절 말씀에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과’라고 했듯 그들의 믿음 때문에 감사를 드렸습니다.
믿음은 사랑과 소망을 위한 전제 조건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려해도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또 하늘에 대한 소망을 가짐도 믿음이 없이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소망은 본문에서 사랑과 믿음의 촉진제로 제시되어 있기도 합니다. 5절 말씀을 다른 번역서에서는 “여러분의 믿음과 사랑은 여러분을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두신 소망에 근거합니다. 이 소망은, 여러분이 진리의 말씀 곧 복음을 받아 들일 때에 이미 들은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소망은 논리적으로 보면 믿음의 결과이지만, 믿음은 또한 소망을 유지하고 새롭게 하며 더 굳게 붙잡아 주는 역활을 합니다. 그러니까 본문에서 말하는 소망은 그 자체가 결과라기 보다는 하나의 근원입니다.
골로새 교인들의 믿음은, 모든 참된 믿음처럼,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일정한 신조를 기계적으로 되풀이 하며 암송하는 것도 아니었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를 지적으로만 믿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우리들이 사랑을 느끼는 자에게 하듯이, 우리가 알고 생각하면서 사랑할 수 있는 어떤 존재에 대한 신앙도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이라고 말할 때에는 예수님을 향한 믿음에만 그치지 않고 예수님 안에서 사는 믿음까지 포함한 것입니다. 환언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움직이고, 발전하고 성장하는 산 믿음입니다.
오직 이같은 믿음만이 우리들을 교리나 실천 면에서 빚어지는 온갖 오류들로부터 보호해 줄 수 있습니다. 아무리 잘 만들어진 정통 신조나 신앙고백이더라도 그 자체만으로는 충분한 안전책이 될 수 없습니다.
비근한 예로써 사도신경을 예배 때마다 낭송하는 교회들은 많지만 복음과 완전히 일치된 이 신조를 그대로 믿거나 실천을 통해 그 진리를 드러내지 않는 경우가 빈번합니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사는 믿음, 곧 예수 그리스도와의 참된 교제를 통해서 지속되는 살아 있는믿음만이 이성주의의 침투를 막아내고 교회의 거룩성을 견지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이 골로새 교회의 존립 자체를 위협하는 불순한 이단을 이길 것이라는 확신으로 하나님께 감사를 올릴 수 있었습니다(계2:4,5)

둘째 사랑 때문입니다.

4절에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음이요’라고 했듯 사랑은 골로새 교인들의 생활 속에서 드러난 두 번째 은혜입니다.
사랑은 믿음을 보완하는 필수적이며 자연적인 요소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사랑으로 역사하는(표현되는) 믿음’(갈5:6)에 대해 언급하였습니다. 그것을 보아도 믿음과 사랑은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습니다.
본질상 살아 있어야 하는 참 믿음은 실천적 행위를 통해서도 그 생명이 발휘되어야 합니다.
야고보는 이렇게 지적하였습니다.
‘이와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이론적이거나 신비적이거나 혹은 추상적인 신앙에 머물 수 밖에 없습니다. 참믿음은 실제적인 방법으로 사랑 안에서 표현됩니다. 요즘 교회에서 믿음이 없는 사랑을 외치는 자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복음이 말하는 믿음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여기서 살펴보는 사랑은 하나님에게 원천을 둔 것입니다. 이 사랑은 믿음의 지혜에 의해 인도를 받고 믿음의 능력에 의해 새롭게 됩니다. 믿음이 없는 사랑은 인간적인 사랑에 속합니다. 인간적인 사랑은 대개 가리는 것이 많고 어떤 특정한 대상들만 좋아합니다. 이런 사랑은 식어질 수 있고 아예 죽어버리기까지 하며 실망이나 배반, 또는 새월의 변천을 잘 견디지 못합니다!
오직 자신이 곧 사랑이신(요일4:8) ‘하나님 안에 뿌리를 박은 사람만이 참 사랑의 특징들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참 사랑은 고린도전서에서 매우 아름답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이같은 사랑의 능력입니다. 박애는 반드시 사랑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오늘날 흔히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것들은 사실상 사랑의 부정과 사랑의 풍자인 경우가 허다합니다.
골로새 교인들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있는 산 믿음과 생명의 열매였습니다. 그 사랑은 그들 안에 내주하는 성령의 삶에 대한 표현이었습니다. 그 사랑은 그들 안에 내주하는 성령의 삶에 대한 표현이었습니다. ‘그는(에바브라)… 성령 안에서(의) 너희 사랑을 우리에게 고한 자니라(1:8).
그런데 교회를 공격하는 모든 시험들과 실망들을 극복하고 살아 남으려면 사랑에 복음의 세 번째 열매인 소망이 필요합니다.

세째 소망 때문입니다.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을 인함이니(1:5)” 사랑이 믿음에서 비롯되고 소망으로 지속되듯이, 사랑을 격려하고 새롭게 하며 소생시키고 또한 영원한 가치를 부여해 주는 것은 소망입니다.
사랑은 언제나 소망을 지니고 있습니다(고전13:7). 만일 소망이 없다면 사랑은 곧 증발되고 낙심케 됩니다. 소망은 믿음과 사랑이 지향하는 화살표이며 갱신의 활력소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가슴 속에 영원에 대한 사모심을 넣어 주셨습니다(전3:11). 무한하고 영원하며 절대적인 것에 대한 인간의 염원은 복음이 선포하는 소망에 의해서만 충족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소망이 없는 세상은 현대 무신론자들이 똑똑히 직시하듯이 의미도 목적도 없습니다. 소망이 없으면 만사가 붕괴되고 맙니다. 심지어 믿음과 사랑까지도 메말라 버리게 됩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니라’(고전15:19). 오로지 복음의 소망만이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지식과 순결과 능력과 완전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완전케 될 때까지 자기의 형제들을 사랑하는 일을 도와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만일 진리의 말씀인 복음이 전달되지 않았다면 골로새교인들이 어떻게 믿음과 사랑과 소망을 가질 수 있었겠습니까 이러한 은헤들은 모두 복음에 의해서 거두어지는 열매들입니다. 그래서 이제 바울은 우리들의 관심을 이 복음에다 돌리고 있습니다.

넷째 진리의 말씀인 복음 때문입니다.

‘소망을 인함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1:5,6). 바울은 이 말씀에서 복음 전파의 필요성을 지적할 뿐아니라 진리에 따라 복음이 선포되어야 한다는 점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복음은 ‘진리의 말씀’입니다. 골로새 교인들은 에바브라의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로 이 진리를 잘 터득하였습니다. 바울은 아마 복음을 진리의 말씀이라고 정의하므로써 처음에 골로새 교인들이 들었던 참 복음과 현재 그들이 거짓 교사들로부터 듣는 거짓된 가르침들을 대조시키고 있는지 모릅니다.
진리는 그 본질상 참되게 전파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복음은 정직하고 총체적으로 균형있게 전달되어야 합니다. 복음의 내용을 있는 그대로 제시하지 않고 삭감시키거나 각색을 하거나 우리들의 기호에 맞는 특정 부분만을 골라 내면 안 됩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은혜’를 알리는 좋은 소식입니다. 이 복음은 우리들의 구원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며 하나님에 의해서 온전히 이루어졌음을 말해 줍니다. 그래서 복음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들이 복음으로 간 것이 아니고 복음이 우리들에게로 왔습니다.
골로새 교인들에게 그들의 믿음과 사랑을 지치게 한 것도 이 복음이었습니다. 복음이 없으면 소망도 없습니다. 자연계로부터 우리들은 아무런 희망의 받침대를 구하지 못합니다. 자연의 질서가 주는 것은 죽음의 메시지뿐입니다. 오직 복음만이 시공(時空)을 초월하여 이 세상에 참되고 여일한 소망을 안겨 줄 수 있습니다.
‘이 복음이…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1:6). 복음은 모든 곳에서, 상이한 입장들을 초월하여 능력으로 전파되며 열매를 맺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복음의 적응력은 그 근원이 신령한 데서 나왔다는 힘 있는 증거의 하나입니다. 거짓 종교들은 대개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습니다. 그것들은 흔히 지리적이고 역사적인 특정 상황이나 사회적 배경의 특수성에 한정된 경우가 많지만 복음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문화인과 비문화인에게, 1세기 사람들에게나 20세기 현대인들에게 다같이 적용됩니다.
복음은 어디에서나 마치 건강한 나무처럼 ‘열매를 맺어 자라’나고 있습니다. 복음은 그 자체 내에 번식의 원리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1세기 때의 미비했던 선교의 여러 불리한 수단들에도 불구하고 그처럼 놀랄만한 경이적인 기독교의 전파가 가능했습니다. 복음은 가는 곳마다 믿음과 사랑과 소망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오늘날도 복음은 어디서나 인간의 구원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동일한 효과를 발휘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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