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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출애굽 사건 그 첫번째 (출 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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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의인입니까, 아니면 죄인입니까” 이 질문에 대한 여러분의 답은 무엇인가 우리는 의인이라고 해도 맞고 죄인이라고 해도 맞는다. 하나님 시각에서 보면 의인이고, 현 주소를 보면 아직도 죄인이다. 의인으로 부름받은 죄인이다. 그래서 이것을 시제로 따질 때 세 가지를 말한다. “나는 구원 얻었다. 구원 얻고 있다. 그리고 구원 얻을 것이다.”
출애굽 사건은 출애굽 사건을 일으키는 것부터 시작하지 않고 모세를 부르는 것부터 시작한다. 출애굽 사건은 모세를 통한 사건이기는 했으나 모세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사건은 아니다. 성경에는 어떤 인물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이 비로소 되었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꼭 인물을 들어 쓰신다. 한 사건에 등장하는 인물은 그 사건 전체를 가장 잘 상징화하는 인물이다. 출애굽 사건에서 모세가 대표자로 인도함을 받는 가장 큰 이유는 모세라는 인물 자신이 출애굽 사건을 집약해서 산징화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 사람 자체가 메세지이다. 출애굽 사건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모세를 이해하여야 한다. 모세의 일생은 크게 셋으로 구분해서 나타난다. 40년 동안 바로궁에서의 생활, 40년의 광야생활, 백성의 지도자로서의 40년이다. 80의 나이에 하나님은 모세에게 가시 떨기나무 불꽃으로 나타나셨다. 이것이 모세에게 가장 큰 상징이다. 모세라는 이름은 물에서 건져 내었기에 주어진 이름이다. 모세라는 이름은 원래대로였다면 ‘물에서 건져냄을 받았다.’라는 뜻이어야 하는데 그게 아니라 ‘건져낼 자’라는 이름을 갖는다. 출애굽기 3,4장을 통해 모세는 하나님이 부르실 때에 얼마나 많은 변명들을 늘어 놓는지 모른다. 모세는 하나님께 항복할 수 없는 응어리를 가지고 있다. ‘모든 권세와 영화를 다 버리고 하나님 편에 섰던 40년 전에는 가만 계시다가 80노인이 된 지금 왜 나타나셨습니까’하는 것이다. 모세의 항변에 대한 답변으로 하나님은 떨기나무에 붙는 불꽃으로 서 계신다. 나무에 불이 붙었는데 나무가 타지 않았다. 하나님의 메세지는 이것이다. “모세야, 네가 스스로를 태워서 일으킬 수 있는 불꽃이란 하루 밖에 지탱하지 않는다. 이제 내가 너를 꺼지지 않는 불꽃으로 태우리라” 하나님의 불이 아닌 자기를 재료로, 자기가 근거로 되어서 하는 신앙은 금방 바닥을 드러내게 된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재고가 바닥이 나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24시간 밖에 땔감이 없다. 이 문제가 출애굽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이라는 것을 성경은 모세를 부르시는 사건에서 이미 완벽하게 상징화시켜 놓고 출발한다. 본문 8절 말씀을 보면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가나안 땅으로 가겠다.”고 하였다. 애굽에서 꺼내는 것은 가나안 땅에 보내기 위함이다. 하나님은 계획을 갖고 계시는 분이고, 그 계획을 이루어 내시고야마는 고집을 가지고 계신다. 그런데 들어가야 할 것과 들어가기 위해서 출발해야 될 것과의 사이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우리의 경험 속에서 가나안 입국의 경험을 가질 수도 있고 못 가질 수도 있는데, 출애굽의 경험은 누구나 가진다.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홍해를 건너 가나안에 들어간 사람이 여호수아와 갈렙 두사람 밖에 없었다.
오늘 우리가 출애굽 사건을 들어가면서 확인할 것은 모든 출애굽 사건은 ‘출애굽=가나안입국’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절대로 ‘출애굽-광야-가나안’으로 되어 있지 않다. 가나안은 천국이기도 하고 동시에 지금 우리가 들어가야 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의 생활이기도 하다. 우리가 예수를 믿자마자 사탄의 권세 아래서 놓여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는 일 이외에 아무 것도 없다는 출애굽=가나안이라는 상징을 하나 보여준다. 가나안은 우리가 ‘들어가 있는 곳’이며 동시에 ‘들어가기를 기다려야 하는 곳’이다. 그래서 우리는 늘 ‘의인’이라고 떳떳하게 고함지르고 늘 ‘죄인’이라고 머리 숙여 하나님께 매어달릴 수 밖에 없는 이상한 존재들이다.
십자가만큼 무서운 자리는 없다. 거기는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가 달려서 인간의 죄를대속한 장소이기도 하지만 그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 불신자들이 받게 될 하나님의 저주와 형벌을 그대로 드러낸 장소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죄를 절대 그냥 용서하시지 않는다. 죄가 무엇인지를 십자가만큼 상세하게 설명해 주


는 메세지도 없다. 예수님이 올라 갔어도 예외가 없었다.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하셨던 말씀이 불신자들이 하게 될 말이다. 출애굽 때 하나님은 유대인들에게 양을 잡아 문 인방과 설주에 바르도록 하셨다. 우습게 여기며 설마 했던 애굽인들의 장자는 다 죽었다. 사람 수마다 하나씩이면 유월절 기간에 그곳은 피비린내로 진동했을 것이다. 11절을 보면 “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지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고 했다. 유대인들은 원래 식사를 비스듬히 누워서 취침 스타일로 한다. 그런데 지금은 띠를 띠고, 신을 신고, 지팡이를 들고 서서 먹으라 하신다. 무엇을 상징하는 것인가 유월절은 ‘고울 인(결승점)’이 아니라 ‘스타트(출발점)’이라는 것이다. 예수 믿는 것은 시작이다. 성경에는 전도하라는 말씀이 강조하는 만큼 “네가 처음에 가졌던 복음을 놓치지 말아라, 인내하라, 주님이 곧 오신다.”등의 말씀이 강조되고 있다. 왜냐하면 시작해서 와성에 있지 않고 와성의 길을 향하여 지금 닦여가고 있는 과정을 사는 것이 신자들의 삶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최고의 사명은 내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내가 얼마나 닦여졌느냐 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신자들이 신앙생활을 헌금과 기도와 성경공부와 전도로 이해한다. 그러나 신자의 바른 신앙은 내가 부대끼고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존재하는 일이다. 가장 가까운 가족들에게 이것을 인정받지 못하면 교회와 그리스도가 욕을 먹는다.
유월절 사건이 출발로서 상징되어졌다면 그 다음에 구원에 관한 또 하나의 사건은 홍해이다. 홍해를 건넌 사람들은 여호수아와 갈렙만 남기고 모두 광야에서 죽었다. 애굽에서 홍해를 건너서 시나이 반도를 건너서 시내산에 내려 왔다가 가나안 정탐꾼 열두명을 보낼 때 가데스바네아에서 보낸다. 가데스바네아가 있고 사해와 갈릴리 바다가 있다. 갈릴리 호수와 사해 사이에 흐르는 강이 요단강이다. 원래 이스라엘 백성은 가데스바네아로 들어갈 예정이었다. 가데스바네아와 이스라엘 사이에는 요단강이 없다. 40년이 지나 그들은 요단강을 통해 가나안으로 들어간다. 요단강은 홍해의 재판이다. 이 사건이 상징하는 바는 무엇인가 홍해를 건넜음에도 불구하고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죽을 수도 있다는 뜻이 아니다. 그런 식으로 하면 모세도 구원을 받지 못하였다는 이야기가 된다. 오히려 홍해를 건넌 이상에는 중간지대 없이 가나안으로 연결될 수 밖에 없는 신자의 구원얻은 신분의 즉각성을 더 분명히 하려는 데 있다. 그런 의미로 요단강은 홍해와 마찬가지로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구원의 의미로는 죄인에서 의인으로 전환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초대받은 신자들의 신앙 생활에서 제일 곁길로 빠지는 자리가 어디인가 하면 애굽을 벗어나서 가나안에 안가고 중간에서 미아가 된다는 사실이다. ‘너희를 부른 것은 가나안에 두기 위함이요, 그리스도 안에서 살게 하기 위함이라.’고 했는데 실제로 우리는 광야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출애굽기 12:25 이하를 보면 하나님은 유월절 예식을 ‘가나안’에 가서 행하라 말씀하신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가나안을 향하여 가기보다는 과거를 그리워하며 불평하고 헤매이기만 하였다.
여러분 중에서도 이것을 경험하고 계신 분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아침에도 만나, 점심에도 만나, 저녁에도 만나, 드디어 화가 난 것이다. 애굽에 있을 때에는 그렇지 않았다. 신자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재미를 못 갖는 이유는 ‘이럴 바에야 뭣하러 출애굽을 했느냐’하는 비교 때문이다. ‘예수를 믿은 후에 뭐 나은 것이 있어야지 먹는 게 만나요, 보이는 건 사막이니 무슨 재미로 살겠는가’ 물론 구름기둥도 있고 불기둥도 있다. 죽지 않을 만큼 먹을 것도 있고, 발도 부르트지 않고 입을 옷도 있다. 그러나 애굽과 비교하면 무미건조하다고 생각했다. 사실 선지자가 매일 삶을 살아가면서 비교해야 핳 곳은 과거 불신앙 생활이 아니라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천국이다. 여러분은 가나안에 들어와 있는가 그곳을 바라보며가슴 설레이며 살아가고 있는가 가나안은 신자 누구나 들어가야 할 장소이다. 그러나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 당신의 현주소가 아닌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천국을 바라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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