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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출애굽 사건, 그 둘째 (고전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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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에 있어 출애굽과 가나안 입국 사이에 ‘광야’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적으로는 출애굽에서 가나안으로 직접 들어간 것이 아니라 ‘광야 40년’이 있었다.
모세의 오해는 무엇이었는가 그는 자신의 불길을 유지했던 사람이다. 그래서 다 타 없어져 더이상 불길을 연장시킬 수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모세의 생애의 상징성이다. 하나님의 불은 타 오르는데 꺼지지 않는다. 이 메세지야말로 출애굽 사건 전체의 상징이다. 이것은 출애굽을 해놓고 가나안에 입국하지 않고 사는 신자들을 향하여 들이대는 꾸짖음이 모세의 생애이고, 떨기나무 불꽃이고,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죽은 사건이다. 우리가 구원의 즉각성을 살피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출애굽은 곧 가나안 입국을 의도하신 것이었는가를 살펴보는 데서 들어가야 한다. 하나님은 ‘내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려 하노라(출 3:8)’하셨다. 하나님은 시작하신 것을 중간에 포기하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밖아 죽이는 희생과 댓가를 치루고라도 계획했던 일을 이루어 내시는 분이시다. 유월절은 그 출발에 해당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내 마음에 구주로 영접하는 것은 신앙의 출발이지 완성은 아니다. 부활까지 모두 이르러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광야에서 불신앙하므로 20세 이상의 모든 사람이 광야에서 죽고 그의 후손들만이 들어갔다. 홍해를 건넌 그들은 처음에는 가데스바네아로 진행하여 가나안에 들어가려 했으나 불신앙으로 실패했다. 40년 후에 그들은 요단강을 통해 가나안에 들어간다.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은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았다”고 했다. 홍해를 건넌 사건이 세례라고 성경은 풀이하고 있다. 세례는 일시적으로 죽음이다. 죽었으면 가나안이고 천국에서 살아야 한다.
민 20:7-12을 보면 모세가 반석을 쳐서 물이 나게 하는 사건이 나온다. 모세는 하나님이 반석을 명하여 물이 나게 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반석을 쳐서 물이 나게 했다. 그 일로 인하여 그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다. 성경은 우리가 단순하게 생각하는 것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고 , 큰 문제처럼 여겨지는 것은 이상하게 그냥 넘어간다. 이것은 인간이 알지 못하는 무너져서는 안되는 일관성을 가진 어떤 상징이 있기 때문이다. 출애굽 사건에서 가나안을 못들어가는 데는 단 하나의 이유 밖에 없다.홍해 사건이 무엇인지 모르면 못들어간다. 가나안은 따로 들어가느 자리가 아니라 애굽을 나오면 바로 들어가야 할 장소이다. 모세가 가나안에 못들어가는 것은 것은 그도 홍해를 건넌 것이 무엇인지 몰랐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은 한번 밖에 없다. 반석은 예수님이다. 하나님은 처음에는 반석을 치라 말씀하시고 두번째는 ‘명하라’ 하셨다. 그 이유는 처음 출애굽기 17장에서의 신광야 르비딤에서의 호렙산 반석을 지팡이로 친 것은 수난이고, 두번째는 그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온 모든 자에게 넘치도록 모든 것을 주시는 내주하심이다. 민 20장에서 모세는 백성의 패역을 인하여 반석을 쳐서 물이 솟게 한다. 수난은 한번으로 족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은 내주와 부활사건까지를 포함한 것이다. 두번째 반석을 친 사건으로 인하여 모세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한번 수난으로 인간의 완전한 대속의 길이 열렸음을 부정하는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인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사건은 언제나 죽음과 부활을 하나로 이야기할 때 수난이라고 한다. 수난 뒤에는 언제나 부활이 불어 나온다.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사건은 언제나 죽음과 부활을 하나로 이야기할 때 수난이라고 한다. 수난 뒤에는 언제나 부활이 붙어 나온다. 예수 그리스도는 제물인 동시에 제사장이다. 그가 열납된 것은 그가 살아나온 것으로 증명된다. 구약


의 속죄제에 있어 제사를 드리러 들어간 제사장이 죽어 나오면 제물을 하나님이 받지 않으셨다는 의미였다. 우리의 죄를 가지고 하나님께 들어가신 예수님이 삼일만에 부활하심으로 그가 드린 제사가 완벽했다는 것을 증명하셨다. 그는 한번 죽었는데 이제 남은 것은 그것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풍요로운 삶이다. 이것이 얼마나 취소될 수 없는 일인가 결코 취소될 수 없다. 애굽으로 돌아가 죽은 사람은 하나도 없다. 나오면 곧 가나안임을 확인시켜 주기 위하여 실수하는 그 배역을 모세를 시키신다. 모세는 120세였으나 그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다(신 34:7).“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네가 이 백성을 데리고 들어가라(수 1:2)”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해 죽어야 하는 사람이 모세였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를 죽이신다.
나오면 곧 가나안이다. 우리의 실수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 고전 10장에서 반석은 그리스도라 했다. 예수를 믿는 자는 누구나 성령의 전이다. 성령이 그 안에 와 있는 것이다(고전 6:19).
출 12:25에 하나님은 유월절을 가나안 땅에서 지키라고 명렬하셨다. “너희는 여호와께서 허락하신대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이를 때에 이 예식을 지킬 것이라” 유월절을 지키는 데는 양뿐만 아니라 무교병이 필요했다. 애굽에서 가지고 나온 것들은 일년 이상을 버틸 수 없다. 여호수아 5:10 이하에 이스라엘이 유월절을 지켰는데 가나안 땅의 소산으로 지켰다. 유월절을 여호수아 5장에서 지켰는데 그 곡식은 어디서 구했을까 아직 여리고성은 정복되지 않았고, 씨앗은 뿌리지 않았는데 성경은 그들이 가나안의 소산을 먹고 무교병을 먹으며, 유월절을 지켰다. 이것이 상징하는 바는 ‘가나안 땅에 오니까 있더라’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최고의 약점이 있다면 애굽에서 나온 것을 기뻐할 것이 아니라 가나안에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다. 여호수아 1장에서 ‘네가 발바닥으로 밟는 땅을 다 너희에게 준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삶이 얼마나 광야와 흡사한가 우리에겐 기억할 가나안은 없다. 그곳은 아직 ‘경험하지 못한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억되는 애굽은 많다. ‘우리가 거기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재미있는 것은 가나안이 아니라 애굽이다. 그래서 지금이 광야이다. 가나안에 들어온 사람만이 애굽이 가소롭다. 그렇지 않은 자들에게는 애굽은 추억의 대상이다. 거기는 어떻게 들어가는가 새삼스럽게 들어갈 필요가 없다. 당연히 그 안에서 살아야 할 우리임으로 하나님께 새삼스런 힘을 달라고 구해야 한다. 실제로 우리는 지금 가나안에 들어가기를 구하지 않는다. 우리늬 소원은 애굽으로는 돌아가지 않더라도 한달쯤 애굽에서 휴가를 즐기겠다는 생각 밖에 없다. 우리가 가나안 생활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 마음에 간절함이 없기 때문이다. 가나안에 들어온 이스라엘은 또 어떤가 광야에서 살 때는 자꾸만 애굽에서의 추억을 되씹더니 가나안에 들어오자 이제는 쫓아내야 할 민족과 함께 살기를 원한다. 사사기는 성경의 어떤 책보다도 가장 처참하고 가장 실패한 인간들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이있는 책이다. 신자가 자기 안에서 몰아내야 할 육체를 몰아내지 않고 육체와 더불어 살기를 좋아해서 ‘비빔밥’으로 살아가고 있는 신자의 생활을 그린 것이 사사기이다.
광야 생활은 피곤하다. 우리만큼 피곤에 대하여 절실한 사람은 없다. 이제 그만 집을 짓고 내 땅을 가지고 내 가정을 꾸리는 그리스도인만의 생활로 돌아올 때가 되었다. 주의 말씀에 따라 신실하게 간절하게 하나님께 구해야 할 우리 모두의 기도제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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